유서깊은 용정
룡정은 해란강하류충적평원 세전벌에 위치하였다.해란강이 시내 서남쪽에서 륙도하와 합수하면서 세전벌에 흘러든다.
"압록아, 두만강을 넘어오니 간도성 룡정이로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에 층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울뚝불뚝 북망산 공동묘지는 외국사람 모여사는 영국더기라 울울창창 우거지 진학공원은 각색화초 만발한 호랑세계라 양포 많고 면포 많은 십자거리는 각종 물화 사고파는 큰 장거리라
중앙해서 일광동아 작은 학교는 학문교육 전수하는 소학교되고 룡고은진 광명녀고 크나큰 집은 중등인물 키워내는 요람잉로다 장하도다 멀리 뵈는 저 대포산은 가작없는 장한 기세 자랑하고요 북쪽켠에 우뚝 솟은 저 모아산은 주야장철 우리 룡정 굽어보누나 왜놈들이 꾸려놓은 이 령사관은 무고한 우리인민 탄압하누나"
《룡정경치가》
용드레촌
1870년대까지만 하여도 룡정은 황량한 무인지대였다. 당시 해란강과 륙도하 량안에는 버들과 갈대가 꽉 들어찼으며 해란강과 륙도하합수목부근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풍경이 몹시 아름다왔다. 그래서 이곳으 태성루(泰成楼)라고 하였다.
당시 만족으로 조직된 채집자들만 들어와서 진주를 채집하던 이곳에 제일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한족농민4세대였다. 이들은 륙도하남안인 토성포(土城堡,지금의 공농촌)에 자리잡고 륙도하기슭에서 밭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이곳을 륙도구(六道沟)라고도 하였다.
1881년에 청정부에서 안팎의 사정이 어렵게 되여 봉금령(封禁令)을 페지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게 되고 1883년에 리조정부도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게 되자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북간도에 들어와 황량한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1881년에 봉금령이 페지된후 삼합지방에서 살던 회령리재민들인 장인석,박인언,김언삼 등 14세대가 오랑캐령을 넘어 륙도구에 들어왔다. 그들은 륙도구의 한족농민에게 의지하여 살면서 해란강변의 비옥한 토지를 재간하였다. 그러던 1886년 봄 어느날 해란강 동쪽,지금의 룡문교 동쪽(옛 교회당 남쪽)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돌각담밑에 파묻힌,옛 녀진인들이 쓰다버린 우물을 발견하였다.
우물은 오래동안 쓰지 않아 돌벽이 무너졌고 이끼 낀 돌우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있었다. 농민들은 무너진 돌벽을 다시 쌓고 우물안을 가셔냈다.물을 마셔보니 맛 좋고 이발이 얼어드는듯 찼다. 그래서 우물곁에 초가집을 짓고 살게 되였다.
륙도구는 조선사람들이 회령과 무산으로부터 연길,왕청,훈춘 일대로 들어오는 교통요지였다.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계사처(삼합)에 와서 다시 오랑캐령을 넘어 달라자(지신),명동을 지나 륙도구로 들어오는 로정은 60킬로메터,짧으면45킬로메터가 되는데 청장년의 걸음이면 하루길이요,부녀자를 거느리면 하루반 길이였다. 그래서 길손들은 륙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너 비암산너머 평강벌로 가지 않으면 모아산을 넘어 연길벌로 가게 되였는데 이곳에서 하루밤을 묵어가거나 점심을 먹기 마련이였다.
길손들은 우물이 있는 이 한촌에 들러 보짐을 풀어놓고 쉬면서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팔다리를 씻고 푹 쉬였다. 처음에는 드레박을 마을지비에서 빌어 썼으나 그것도 한두번이면 몰라도 쉴새없이 오가는 손님들이 빌게 되여 여간 시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 이사온 성이 충(忠)가라는 한족젊은이가 아예 우물곁에 박은 말뚝에다 용드레를 단단히 동여배놓고 용드레끝에다 드레박을 달아매놓았다. 그리하여 길손들은 이 마을을《용드레촌》이라 부르게 되였다. 그후 학식있는 장인석과 박인언은 용드레의 용자를 떼내여 룡(龙)자로 고치고 우물 정(井)자를 붙여 룡정이라 불렀다.
룡정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전설도 없지 않은데 우물에서 룡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하여 룡정이라 불렀다고 전하고있다.
1934년에 룡정촌 주민들은 룡정지명의 기원과 전설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회령사람 리기섭의 창의하에 이 우물을 다시 수선하고 우물가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이라 새긴2메터 높이의 화강암비석을 세웠다.
용드레촌이 일떠선후 조선이주민들이 모여들어 해란강 량안의 비옥한 토지를 일구고 살림을 꾸렸다. 원래 이곳을 나드는 길손이 많은지라 마을에는 숙박집도 생기고 음식점과 점포들도 생겨났다. 그러나1907년까지만 하여도 룡정촌의 인구는 조선인96세대,한족5세대에 도합 40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1907년8월에 일본침략자들이《간도소속문제미해결》이니《조선인보호요》하면서 연변지방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게 되자 이 자그마한 마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해 8월에 일제는 군경을 룡정촌에 파견하여《조선통감부파출소》를 설치하고 중국내정을 간섭하던중1909년9월에 청정부를 핍박하여《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길회철도부설권과 조선인에 대한 령사재판권을 얻었고 청정부는 룡정,국자가,훈춘,배초구,투도구 등 다석개 곳을 일본의 통상지로 개방하였고 통상지에 일본령사관과 사분관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룡정의 동산으로부터 천주교회당과 보통학교뒤를 거쳐 해란강연안에 이르는 곳을 북쪽계선으로 하고 해란강연안을 따라 륙도하의 합수목에 이르는 선을 서족계선으로,그곳에서 화룡으로 가는 길을 꺽어들어 동산에 닿는 지점을 남쪽계선으로 하는 부지면적437,217평을 청정부로부터 넘겨받았으며 간도일본총령사관을 설치하고 통상구역을 확정한 뒤 일본세력을 확대하고 강화하기에 광분하였다.
이렇게 되자 청정부도 룡정을 관할하고 저 이곳에다 상부국,상부국순경국,해관과 세연국을 설치하고 일제세력에 대처하는 동시에 한족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급격히 증가되기 시작하였고 이로하여 자그마한 마을이 몇년 안도여 소도시의 꼴을 잡게 되였다.
1911년5월에 룡정에는 큰 화제가 들어 거리가 태반이나 불타버렸다. 이 틈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명의로 2만5천원의 자금을 내여 룡정에다《구제회》를 설립하고 부동산을 담보로 대부금을 내주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장사치들이 거리에 집을 짓고 점방을 꾸렸는데 남북으로 뻗은 중국인거리와 련계된 조선인거리에 새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였고 잡화점,려관,국수집,료리집들이 들어앉게 되였다. 일본상부지에는 일본양행조선은행출장소,구제회,각종회사 등 건축물이 들어앉았다. 거리가 번창함에 따라 이사군이 많아지니 골목이 늘어났다. 큰 골목이 작은 골목을 낳고 작은 골목이 또 새끼를 치니 가로세로 뻗은 골목들이 마치 거미줄과 같아 지난날 사람들은 룡정의 골목을《아흔아홉골목》이라고 하였다. 룡정에는 또 평양시장,새시장,세관촌시장,49금시장이 있었는데 이 다섯개 시장에서 각각 매달 장을 보았다.
1906년 여름에 룡정촌은 또 다른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해 리상설,리동녕,정순만,황달영,김우용,홍창섭,려준,박정서 등 반일민족운동가들이 국권회복과 반일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룡정에 왔다.
1906년8월에 이들은 룡정의 기독교의 인사 최병하의 집(지금의 룡정실험소학교자리)을 사서 서전서숙을 세우고 조선인의 자녀를 받아들여 근대적과학문화지식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설립은 북간도지방의 반일운동의 발단으로 되였다. 서전서숙의 설립을 발단으로 하여 각지에서는 사립학교설립운동이 전개되였다.1914년6월3일에 영국 기독교선교사 박걸이 룡정에 명신녀자학교를 세웠고 1917년7월8일에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스코트와 부트가 은진중학교를 세웠다. 명동,창동,길동,정동 등 사립학교들도 바로 이 시기에 설립된것이였다.
이렇듯 1910년대에 북간도지방에서는 룡정촌을 중심으로 하여 사립학교교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는데 화룡현 호천포의 사립청파학교,지신사 영암촌의 사립덕흥학교,덕신사 장동촌의 사립장동학교 등은 모두 이 시기에 잇달아 줄줄이 세워진 반일사립학교들이였다.
이와 같이 룡정을 비롯하여 조선인거주지역에서 설립된 사립학교들에서는 학생들에게 근대적과학문화지식을 가르치는 동시에 철저한 반일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반일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에 전력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이런 사립학교들을 학생운동,농민운동,로동운동의 책원지로 하여 반일운동을 기세드높이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3월1일,조선국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폭발하자 북간도에서는 3월13일,룡정에서 교원과 학생,군중이 참가한 반일대시위가 단행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