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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에 All Saints' Day라는 날이 있다. 구어로는 Hallowma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었다. 직역하면 모든 성인(聖人)의 날, 대축일을 말한다. 과거엔 제성 첨례(諸聖瞻禮):이라 하고 저성첨례라고도 하였다. 이날은 11월 1일, 천상의 여러 성인과 순교자의 축일이다. 매년 이달이 오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벽이다. 이벽은 학문연구에 열의가 강한 사람으로 열정적으로 천주교를 철저히 분석, 연구한 후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 들인 사람이다. 이 배경엔 명나라 사람 이지조가 엮은 천학 초함(天學初函)에 들어 있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極), 직방외기(職方外紀) 등 대부분 서양선교사 마태오 릿지의 한문 번역서가 있다. 같은 한자 문화를 공유했던 조선의 지식인였기에 적응이 빨랐던 것이다. 이벽에게는 5대 조부 이경상이 있었다. 병자호란 후 중국 심양으로 청국의 불모가 된 소현세자를 따라 가 세자를 늘 동행했던 인물이다. 소현세자는 당시 아담 샬이란 서양선교사를 만나 두 달 동안 서양문물과 천주교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귀국할 때도 아담샬이 준비해 준 예수 성상 등 성물과 종교서적을 갖고 들어 왔다. 이경상 또한 이런 것들을 갖고 와 이를 통해 이벽은 일찍 천주교에 눈이 뜰 수 있었고 스승인 성호 이익을 통해 습득하게 된 학풍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조선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서양문물이 조선에 전해진 것은 1603(선조 36)을 비롯하여 광해군 때 였다. 이 당시 이광정을 비롯하여 권희, 허균, 이수광 등 수많은 사신이나 동지사 자격으로 중국을 다녀왔지만 학문적 소견에서 벗어나 종교로 받아들인 사람은 허균정도였으나 허균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다 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또 전교의 사실이 없어 종교가 요구하는 충족의 단서가 미약하다. 이에 반해 이벽은 학문적 도반 정약용 기록에 의해 자세히 언급 된다. 중국을 다녀온 적도 없는데 서책으로 읽고 학문적 고찰 후 종교로 받아들이고 전교에 힘쓴 사람은 이벽 혼자다. 강학으로 자신의 뜻을 전한 이벽은 자신이 지닌 천주와 관련된 지식의 부족함을 느끼고 4년여를 고심하며 지내게 된다.
이때 만천 이승훈 ( 蔓川 李承薰)이 부친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북경으로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난 북당으로 가 서양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전례를 익히고 여러 가지 성물과 종교서적 등을 갖고 들어오라 부탁을 한다. 당시 두 사람의 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 글이 있어 올려 보면 아래와 같다.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하늘이 우리 들에게 성교(聖敎)의 참된 뜻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천년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좋은 기회이다. 이 교리만이 성현의 도(道)이며, 만물(萬物)을 만들어낸 주인인, 오직 하나뿐이고 모든 일 을 다 할 수 있는 천주에게 봉사하는 참된 교(敎)이므로 구라파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높이 받든다. 이것을 빼놓으면 우리들은 아무 힘도 없어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음을 가다듬 을 수도 없고, 만물(萬物)을 연구하고 알아낼 수도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긴한 깨우침(要諦), 세상 살아가는 표준(標準), 천지의 만들어냄과, 그 처음과 끝, 천체(天體)의 움직이는 법칙, 옳고 그 르고, 착하고 나쁨의 판단, 정신과 신체의 융합(融合), (인간의) 죄를 구하고자 천주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탁신(託身)의 뜻, (죽은 후) 천당에 있어서의 영광과 행복, 그리고 지옥에 있어서의 징계(懲戒)의 형벌 등 모든 것이 이것으로써 정(定)하여진다. 이번 자네가 북경으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천주께서 우리의 이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섭리이다
이를 충족하고 귀국한 이승훈은 즉시 이벽을 만나 상의하고 관련서적 등을 넘겨 이벽은 외딴집을 구해 연구에 들어갔다. 이후 이벽은 발 빠르게 움직인다. 이승훈을 통해 교우들이 세례를 받도록 하고 그 대상을 양반에서 중인신분까지 확대하여 김범우까지 끌어들여 그가 제공한 명례방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게 된다. 1785년(정조 9) 비밀 종교집회는 형조(刑曹)에 적발되어 참석자 전원이 끌려가지만 신분이 남달랐던 ,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형제들은 풀려 나고 중인 신분 김범우만 옥에 갇히고 밀양 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선종한다. 이 사건이 바로 세상을 흔든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주 이 씨 종친들은 이벽의 부친 이부만을 불러 거세게 몰아친다. 심지어 족보에서 파가라는 말까지 듣고 돌아와 이벽을 엄히 꾸짖고 배교하라 이르지만 아들이 응하지 않자, 부친께서는 이벽을 집에 감금한다. 그리고 이부만은 목을 매어 죽겠다고 아들에게 최후통첩의 강수를 두자 그제야 배교를 승낙했다는 이야기를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천주교사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조선시대에 효(孝)를 爲人子者 曷不爲孝 (사람의 자식 된 자로써 어찌 효도를 다 하지 않으리오.)는 삶의 근본으로 여기고 살던 동양적 사고의 유추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런 결과가 결국 이벽을 배교자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세상에서 떠도는 풍문을 듣거나 잘못 알고 있는 교우들의 이야기만 듣고 다블뤼 주교나 달레 신부가 배교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은 오류라는 심증이 간다. 부친이 집 안에 감금한 지 15일 1785년 음력 6월 14일 이벽은 숨을 거둔다. 그리고 가족들은 죽음을 흑사병이라 알려 외부인들 접근을 막으려는 듯하다. 당시 시대 기록물에 한양에 흑사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전무하고 경주이 씨 가문의 어떤 기록에도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가톨릭에서 누군가를 성인(聖人)으로 인정해 달라고 교황청 시성성에 청원하는 동안 후보자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른다. 시성성에서 이를 접수하면 교황의 권한으로 해당 후보자에게 '가경자'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가경자가 시복심사에서 통과하면 교황의 허락 아래 시복식을 거행해 복자가 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여 "시복 되었다", 혹은 "복자품에 올랐다"고도 말한다. 여기서 한 계단 더 오르면 성인이 된다. 성인품을 받으면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공경받을 수 있지만 복자품을 받으면 특정 지역에서만 공식적으로 공경받을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특별히 허락받지 않는 한 금지된다. 여성형은 복녀(福女)라고 한다.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시성'된다고 하듯이 복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시복'되었다고 한다. 성인(聖人)이라 부르려면은 교회가 정한 일정한 교회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대우를 받아도 충분한 이벽은 늘 배교의 이유로 제외되어 왔다. 이러한 아쉬움이 매년 11월 1일 대하는 전례력을 볼 적마다 불현듯 이벽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벽에 대한 아쉬움은 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벽이 지었다는 성교요지에 대한 저술이 허위라는 의심을 받는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1967년 8월 27일 자 가톨릭시보 제582호 기사를 통해 알려진 개신교 목사 김양선에 의하여 수집되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된 만천유고(蔓川 遺稿)란 책에 실린 성교요지를 비롯한 천주교 관련자료자료 들은 당시 천주교 교회사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반응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보도 후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두하며 학문적으로 많이 고찰되었는데 수원교구소속 윤민구 신부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일정을 앞두고 위작설을 제기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정민교수등 다수인들이 위작설에 동의하게 된다. 만천유고는 이승훈의 유고집으로 만천 잡고, 만천 시고, 만천초고로 나누어지는데. 만천 잡고에는 농부사, 전추실의 발이 실려있고, 만천 잡고에 이어서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경세가, 천주가사 3편이 실렸고 이벽이 지었다는 성교요지도 실려 있다. 이들의 주장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수의록 아래에 만천초고라 적어 이승훈이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글로 간단하게 적어 둔 것처럼 되어 있다. 이곳에는 이승훈의 글은 한편도 없고 이런저런 책에서 참고할만한 수준의 글을 모아둔 글이다. 조선왕계 년대를 정리서 본초년기, 한양에서 북경까지 노정을 소개한 자아동비북경정도 (自我東鄙北京程度) 등이다. 결국 이승훈의 문집이라 할 수 있는 만천유고에는 제2부 만천 시고 뿐인데 이곳에 이승훈의 나이 25세(1780)부터 27세 (1782) 사이 시을 모았다 하지만. 첫 째 시로 경자춘(庚子春) 간지가 보인 후 신축입춘(辛丑立春)과 임인년(壬寅年) 표시가 나오므로 이승훈이 북경으로 가기 전 4년 전부터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았다는 것인데 막상 살펴보면 이승훈의 지은 시는 전혀 찾을 수없다. 25세에 지었다는 선유대(仙遊臺) 시의 내용을 보면 세상에서 떠나 온 뒤 호연이 여기 와서 몸과 마음을 기르려고 이 누대에 올랐다네 라는 시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치열하게 책을 붙잡고 씨름하던 시기와 맞지 않고 27세에 지었다는 난화십절(蘭花十絶)의 시 첫 구절 40년 동안이나 집에 심고 있었지만 그저 잎만 보았지 꽃은 보지 못했네라고 하여 이승훈의 연령때와 전혀 맞지를 않는다. 이뿐 아니다. 수록된 작품 절반이 다른 사람의 시집에서 절취해 왔다. 「등문장대(登文壯臺)」와 「경복궁구호(景福宮口呼)」 2수, 3수는 홍석기(洪錫箕, 1606~1680)의 「만주유집(晩洲遺集)」에 수록된 남의 작품이다. 「등문장대」는 홍석기의 아시작(兒時作)으로 문집에 특별하게 수록된 것을 이승훈의 27세 작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또한 양헌수의 시를 도용한 것 같은데 양헌수는 이승훈이 죽은 뒤 15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며 양헌수의 문집 하서집은 1893년에 정리하여 간행된 책이므로 이승훈의 만천유고를 조작한 인물은 당연히 20세기 인물이 된다. 그리고 만천 시고 뒤에 수록한 계상독좌(溪 上 獨 坐)부터 마지막 양협노중(楊峽路中)까지 의 26수는 양헌수의 하거집 순서까지 베껴 올렸으며 만천 시고 수록된 71수 시중에 29수의 시가 홍석기 양헌수 문집에서 베껴 올린 것이다. 또한 나머지 시들도 마찬가지다. 만천유고 중 만천 시고 속에 들어 있는 71수의 시는 광주(廣州) , 용인(龍仁)에 살던 문인의 시라는 사실이 시 내용에 가득 들어 있으며 이승훈보다 100여 년 앞서 살다 간 홍석기의 시 3수와 이승훈이 죽은 후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시 28수를 짜깁기하여 얽어 놓은 가짜 시집을 만들어 놓았고 이승훈의 시집처럼 보이려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이벽으로 고쳐놓기도 한 가짜 시집이다.
그리고 책 말미에 발문이 있는데 발문의 작성자는 무극관인(無極觀人)이다.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다. 이벽이 저술한 천주교 관련 연구자들은 무극관인을 정약용으로 지목했었다. 그러나 발문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정약용의 삶과 발문이 불일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생 감옥에 갇혔다가 죽음을 면하고 세상에 나온 지 30여 성상이 되었다. 강산은 의구하고 푸른 허공과 흰 구름은 그림자가 변하지 않았건만, 선현(先賢)과 지구(知舊)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목석같은 신세를 붙이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며 엎어져 지내는 중이다. 아! 뜻하지 않게 세상이 바뀌어 만천공의 행적과 여문(儷文)이 적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불에 타 없어져서 원고 하나도 볼 수가 없었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와 잡록과 조각 글이 남아 있었으므로 못 쓰는 글씨로 베껴 적고 「만천유고」라 하였다. 봄바람에 언 땅이 녹고 고목이 봄을 만나 새잎이 소생한 격이니, 이 또한 상주(上主)의 광대무변한 섭리일 것이다. 우주의 진리는 이와 같아서 태극이면서 무극이니, 깨어 깨달은 자는 주님의 뜻을 접할지어다. - 무극관인 -
이 글을 정말로 정약용이 썼다면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양헌수 장군의 시를, 그의 문집이 정리되기 70년 전에 정약용이 미리 보고 이승훈의 시로 알아 편집한 뒤 이 글을 썼다는 뜻이니 애초에 따지고 말고 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다산은 ‘평생’ 감옥에 갇힌 일도 없었고, 설령 귀양지에 있었던 기간을 감옥이라 표현했다 하더라도, 해배된 뒤 18년 뒤에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나온 지 30여 성상이란 말은 가당치 않다. 무엇보다 한문 문장의 수준이 명백하게 20세기 이후 사람이 한글 문장을 한문으로 얼기설기 옮겨놓은 실로 형편없는 하수(下手)의 조악한 수준이다. 도처에 비문(非文)에다 억지로 얽은 글이어서, 앞선 연구자들이 이를 다산의 글로 본 것은 실로 아연할 노릇이다.
필사본 「만천 시고」에는 이승훈의 시가 한 편도 없으며 「만천유고」 전체를 보아도 그렇다. 「만천유고」는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놓은 짜깁기한 가짜 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작품 속 이름을 바꿔치기하거나, 글쓴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발문을 적어 놓은 수준의 책에 지나지 않다.
이상은 만천유고가 허위라 주장하는 이유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름대로 견해를 정리할 목적으로 허위와 관련 글이나 발표된 논문과 인사들의 면모를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황당무계한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2019년 5월, 김현우, 김석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발표한 「소위 이벽의 「성교요지」로 잘못 알려진 W.A.P. Martin(丁良)의 「The Analytical Reader(認字新法 常字雙千)」에 대한 연구 서설」이란 논문을 읽게 된 것이다. 아래의 논문이 바로 그 논문이다. 이 논문을 읽으며 학계나 종교계 안에서 심각한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을 경험하며 나름 동안 자신의 조사 자료를 토대로 소견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할 무렵, 몇 년 전에 선종하신 친구 아버님이신 고 이원순 교수님이 떠 올랐다,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내셨으며 ‘조선 서학사’ 연구의 개척자이자 최고 권위자일 뿐 아니라 1948년 서울 성신대학교 부속 중학교(소신학교) 교사로 교회와 인연을 맺은 후 1990년까지 42년간 서울ㆍ광주ㆍ수원 대신학교에서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양성에 직접으로 참여했고,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학문적 토대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셨다. 고인은 특히 6ㆍ25 전쟁 당시 260명의 소신학생을 피난시켰을 뿐 아니라 밀양에 소신학교를 설립해 사제 양성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고 최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몬시뇰을 조언해 1964년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하도록 했고,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이사, 고문으로 활동해 왔었다.
고인의 학문적 명성은 일본ㆍ중국 역사학계에도 널리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그의 저서 「조선 서학사 연구」를 중국어로 번역해 대학 교재로 사용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한ㆍ일 역사 문제와 관련, 100여 차례나 초청해 강의를 개최하는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권위 있는 역사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2004년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대십자 훈장’과 ‘기사단장’ 작위를 받았고, 한국가톨릭학술상 공로상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생전에 계셨다면 고언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인데 참 아쉬워할 무렵 제자이신 대구교구 이성배 신부님의 논문을 접할 기회가 찾아왔다. 논문의 제목은 聖敎要旨 연구에 관한 小考 였기에 꼭 읽어야 할 자료였다. 비로소 나의 소견이 들어차게 된 것이다.
서양 명사 및 인물 지명 표기에서 잡힌 발목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벽(李檗, 1754~ 1785)의 저술로 알려져 왔다. 초기 교회사의 어떤 기록에도 없던 이 책은 1967년 김양선 목사가 공개한 「만천유고」 속에 섞인 필사본으로 처음 알려졌다. 이벽이 세상을 뜬 지 무려 182년 뒤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본 대로 「성교요지」가 수록된 「만천유고」는 이 책 저 책을 베껴 짜깁기한 조잡한 서적이었다. 다만 「성교요지」마저 가짜라고 단정할 근거가 명확지 않았다. 내용 또한 4언체의 한시 형식이어서 수준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윤민구 신부는 「성교요지」 속의 성경 용어나 인물 및 지명 표기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성경의 표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에 의심을 품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국학자료원, 2014)에서 「성교요지」가 개신교 쪽에서 지은 책이 분명하여 이벽의 저술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성교요지」를 천주교 주요 문헌으로 믿어온 측의 큰 반발을 불러, 명백하고 타당한 논의였음에도 이후 끝없는 비방과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예를 들어 「성교요지」 제4장의 주석 중에 “위 단락은 아래의 글을 총괄하는 이 장의 강령이다. 피득(彼得) 후서(後書)에 나온다.(右節總冒下文, 此章之綱領也. 見彼得後書)”라 한 대목이 있다. 여기 나오는 피득 후서는 신약성경 중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백다록(伯多祿)으로 적지, 피득이라고는 표기하지 않는다. 피독은 베드로를 영어식으로 ‘피터’라 읽을 때 적을 수 있는 표기다.
실제로 오늘날 중국에서 통용되는 성경에서 베드로의 첫째, 둘째 서간은 가톨릭 성경에서 지금도 ‘백다록 전후서’로 되어 있고, 개신교 성경에는 여전히 ‘피득(彼得) 전후서’로 나온다. 이것은 바오로를 ‘폴’이라 하고, 안드레아를 ‘앤드류’, 마태오를 ‘매튜’로 읽는 차이가 중국어 표기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성경 편명으로 영어식 표기를 딴 ‘피득 후서’로 적는 것은 천주교에서는 결코 쓸 수 없는 표기다. 더구나 제대로 된 번역 성경을 본 적도 없는 이벽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윌리엄 마틴 목사의 「상자쌍천」과 「성교요지」
정작 「성교요지」가 이벽의 저작이 아니라는 결정적 한 방은 개신교 쪽에서 터져 나왔다. 2019년 5월, 김현우, 김석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발표한 「소위 이벽의 「성교요지」로 잘못 알려진 W.A.P. Martin(丁良)의 「The Analytical Reader(認字新法 常字雙千)」에 대한 연구 서설」이란 논문이 그것이다.
두 사람은 이 글에서 「성교요지」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1827∼1916) 목사가 1863년 중국 선교사들에게 효율적 한자 교육을 위한 교재로 개발하여 간행한 「인자신법(認字新法) 상자쌍천(常字雙千)」이란 책을 주석까지 통째로 그대로 베낀 것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책 제목은, 상용한자 2천 자를 가지고 쓴 한자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뜻이다.
마틴 목사는 1854년, 개신교 선교사의 저작 중 가장 많은 독자와 만났던 「천도소원(天道溯源)」을 저술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1862년 상하이에서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중국어 교육에 관심을 가져, 1863년에 이 책을 출간했다. 그는 중국어 단어의 사용 빈도를 꼼꼼히 계산해서 뽑은 윌리엄 갬블의 6000자의 상용한자 중에서 특별히 사용 빈도가 더 높은 2,016자를 뽑아, 4언체의 천자문 양식을 빌어 한 글자도 중복하지 않고 운자로 배열한 2 천자문을 최종 완성했다. 당시 그는 남경의 학사(學士) 하사맹(何師孟)이란 중국인을 고용해 그의 도움을 받아 본문을 완성했다.(이에 관한 논의는 계명대 황재범 교수가 쓴 ‘「성교요지」의 원본 마틴 선교사의 「쌍천자문」 연구’(「신학사상」 190집(2020 가을)에 자세하다.)
본문은 4언체 한시가 소제목 아래 단락별로 나오고, 옆면에 영문 대역(對譯)을 실었다. 그런데 2천 자를 단 한 번의 중복을 허용하지 않은 채 엮다 보니, 구문이 비틀리고 억지로 채워 넣은 글자가 적지 않다. 중간중간 주석을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오독과 무지
「성교요지」는 「만천유고」 본과 「당시초선」이란 표제로 된 책자에 필사된 「당시초선」 본, 이와 별도로 한글본 「성교요지」 세 가지가 전한다. 모두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하성래와 김동원의 번역은 마틴 목사의 영어 번역을 못 본 체 한문본만 보고 번역한 결과 숱한 오역이 발생하였다.
지면 관계상, 한두 가지 예만 들어본다. 제3장 「강구(降救)」 중에 “냉가성읍(冷迦城邑), 파미도로(巴米道路). 유태국야(猶太國也), 서내산호(西乃山乎)”의 대목이 있다. 한글본은 이 대목을 “냉가국 성읍과 파미로 가는 길이 이르면 유태국이라 하나니, 셔내산이라 이르나니”로 풀었고, 하성래는 “냉가성읍과 파미 도로와 유태국과 시내산에서”로, 또 김동원은 “예루살렘 성읍에서, 파미도로 거쳐 가니, 온 유대를 다니시며, 시나이산 이르렀네”로 옮겼다. 영어 번역은 “Jerusalem and Capernaum, a city and town, To Babylon and Media were ways and roads, Judea was a kingdom, Sinai a mountain”이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도시인 예루살렘과 시골 카파르나움엔, 바빌론과 메디아로 가는 길과 도로 있었네. 유다는 왕국이었고, 시나이는 산이었지.” 결국 원문의 ‘냉(冷)’은 예루살렘, ‘가(迦)’는 카파르나움을 가리키고, ‘파(巴)’는 바빌론(Babylon)을, ‘미(米)’는 메디아(Media: 옛 성서에서는 메대)를 나타내는 약호였다. 유태(猶太)는 유다 지방을 가리키는 개신교의 표기이고, 천주교 문헌과 안정복의 「천학문답」에는 여덕아(如德亞)로 나온다. 시나이 산은 시내(西乃)로 적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냉가와 파미가 각각 고대 도시 지명을 한 글자만 따서 축약한 것인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또 제10장 「시훈(施訓)」 조의 “학별 파지(學別派支) 애전허치(埃田許置)”의 ‘애전(埃田)’은 번역본들이 풀이한 속세나 세상의 뜻이 아니라, 에덴의 음차이다. 「성경직해」에서는 에덴을 그냥 낙원으로 옮겼다. 고유 명사나 특수 용어를 일반적 사전 의미로 풀이한 데서 발생한 오역이다. 이밖에 세부적으로 원서의 영어 번역문과 대비해 보면, 현재 통용 번역에는 맥락을 놓친 오역이 상당히 많다.
표기법만 두고 볼 때, 예루살렘을 야로살냉(耶路撒冷), 카파르나움을 가백농(迦百農), 바빌론은 파비륜(巴比倫), 메대는 미태(米太), 유대를 유태(猶太), 시내를 서내(西乃), 에덴을 애전(埃田), 아벨을 아백(亞伯)이라고 동시에 표기한 것은 1854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개신교의 이른바 위판역본(委辦譯本) 성경이 유일하다. 1635년에 알레니(艾儒略)가 펴낸 「천주강생언행기략(天主降生言行紀略)」이 예루살렘을 협로살릉(協露撒)으로, 카파르나움을 갈발옹(葛發翁)으로 적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벽이 예루살렘과 카파르나움의 약호를 썼다면 ‘냉가(冷迦)’가 아닌 ‘릉갈(葛)’이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위판역본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포교 활동이 공식 허용되기에 앞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집체 작업으로 함께 번역한 것이다. 이후 개신교의 성경 속 명사 표기는 이 책의 표기로 통일되었다. 1863년에 「상자쌍천」을 펴낸 윌리엄 마틴 목사가 이 성경의 명사 표기를 따른 것은 당연하다. 「성교요지」 속 모든 고유명사 표기는 전적으로 1854년 위판역본, 즉 개신교 성경번역위원회가 마련한 번역본과 일치한다. 그러니 전체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의 온전한 번역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에 살았던 이벽이, 그가 사망한 지 78년 뒤에 간행된 위판역본 성경의 표기체계를 그대로 받아 모든 명사 표기를 여기에 일치시킨다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은 이렇다. 「만천유고」에 수록된 「성교요지」는 절대로 이벽의 저작일 수 없다. 사실 이 점은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시성시복 자료집에서조차 「성교요지」 관련 사실을 뺀 것이 그 분명한 증거다. 이 책은 1863년 윌리엄 마틴 목사가 쓴 「인자신법 상자쌍천」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황재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마저도 1863년 초판본이 아닌 1897년 재판본을 베꼈다. 나란히 실린 「만천 시고」가 1893년에 나온 양헌수의 「하거집」의 시 23수를 베낀 것으로 보아, 이 책 전체는 20세기 이후에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로 베껴 쓴 것이 명백하고 확실하다.
이렇게 「성교요지」가 마틴 목사의 책으로 밝혀지자 최근 일각에서 다시 해괴한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초선」 본 「성교요지」에 손을 다쳐 왼손으로 이 글을 필사했다고 적혀 있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중국 강남에 들어갈 때 이벽의 책을 베껴 가져갔고, 이것이 유통되다 마틴 목사에게 채집되어 「상자쌍천」이 되었다는 희한하고 놀라운 논리다. 기존의 잘못을 더 큰 거짓으로 덮으려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논리요 행동이다. 모르고 한 잘못은 인정하면 그뿐인데, 가짜 책 「성교요지」를 지키겠다고 진짜 저자인 윌리암 마틴 목사까지 도둑으로 내몰려한다. 언어도단이다. 이는 천주교계를 위해서도 이벽을 위해서도 결코 득 될 일이 아니다.
「성교요지」는 이벽의 저술이 아니다. 차고 넘치는 증거를 외면하고, 독선의 외고집을 부리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상적 흐름을 저해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벽의 위상은 가짜 책 「성교요지」가 아니래도 우뚝하다. 이 책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이 재연되는 것을 교회가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최근 교구의 인준을 받아 간행된 김동원 신부의 「한국의 천학과 영성」이란 책자에서 「성교요지」가 변함없이 한국 천학 영성 자료의 첫머리에 놓인 것을 보고 나는 실로 경악했다.
聖敎要旨 연구에 관한 小考
이성배.
머리말
1. <유교와 그리스도교> 논문을 쓰게 된 배경
2. 1970년대 초 “성교요지”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
3.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의 내용에 대한 평가
4.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의 박사학위 논문
5. 프랑스와 한국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 논문의 출판과 보급
6. 결론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이벽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성 교요 지는 국내외에서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고 김양선 목사의 수집품으로 만천유고 안에 수록된 성교요지는 제목 아래에 이벽이 짓고 주석을 달았 다는 말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벽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문학과 역사학, 신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연구가 있어왔던 것이다.
이미 성교 요지가 처음 소개될 때부터 작품의 진위성 문제가 제기된었지만 나름대로 연구와 토론을 거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뒤로 큰 문제가 제기되 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124위 순교자 시복 식을 앞두고 윤민구 신부의 성교요지에 대한 용어 분석과 해석으로 성교 요지가 위작일 뿐만 아니라 사기라는 심한 말까지 서슴없이 제기되었다
1) * 대구대교구 원로신부,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및 종교학과 교수. 1) 윤민구,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성교요지, 십계명가, 만천유고, 이벽 전, 유한당 언행실록을 사기다), 국한자료원, 2014. 186 이성배
시기적으로 왜 그때, 그런 식으로 성교요지를 매도하는 책과 신문기사를 내야 했는지 정확하게 그 의도를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용어나 번역, 편집, 출판, 전승 등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교요지 그 자체의 가치를 함부 로 손상시킬 수는 없다. 그 내용 자체가 그 가치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으로 인해 이벽 광암의 인격과 업적이 손상될 수는 없는 것이다. 본인이 가짜 책을 만들어 보급시킨 것이 아니라 후대의 누군 가가 이벽의 이름으로 책을 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벽의 이름이 지니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벽의 품위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역사학적 검증과정을 거쳐서 성교요지의 저자에 대한 진위성 문제 가 결정적으로 밝혀질 때까지는 기존 자료에 의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긍정해야만 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성교요지가 이 벽이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 훌륭한 책을 썼다 면 그 책 자체의 내용과 가치를 알아보고 제대로 평가하면서 그 용어나 번역, 편집, 출판, 전승과정 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30여 년 전에 역사학이나 문헌 고증학이 아니라 기초 신학적인 측면에서 성교요지를 연구하며 <유교와 그리스도교>2)라는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사료된다.
한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점들이 완전 히 해소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때와 장소에서 주어진 자료를 검 토하며, 추구하는 학문을 향해 정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 다. 따라서 이 글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논증하는 논문이 아니라 기존의 논문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서 어느 정도 간접적인 증거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1)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논 문을 쓰게 된 배경, 2) 1970년대 초 “성교요지”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 3)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의 내용에 대한 평가, 4)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의 聖敎要旨 연구에 관한 小考 187 박사학위 논문, 5) 프랑스와 한국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 논문의 출판과 보급 등을 이야기하며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각종 역사적 문헌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폭넓게 개방되고, 연구되며, 진정한 하느님의 공동체를 만들 고 인류구원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2)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이벽의 한국적 신학원리), 분도 출판사, 1979.
1. <유교와 그리스도교> 논문을 쓰게 된 배경
신학은 인간적인 학문 특히 철학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체계적이 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가톨릭교 회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그리스 로마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성 토마 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정점을 이루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양 철학을 중심으로 신학적인 사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서구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와 학문의 가 치 있는 요소들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특히 유 교 불교 도교 무속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제가 되어 2년간의 본당 사목 경험을 하고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에 유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게 되었을 때, 한국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인 유교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물론 한국에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무속, 기타 다양한 문화적 학문적 전통이 있겠지 만 가장 큰 무게와 영향을 지니고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 삶의 바탕을 이 루는 것이 유교이기 때문에 우선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적으로 대신학교의 철학과 신학 과목들 이외에 성균관 대학교의 유승국 교 수와 전남 대학교의 이을호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 영향을 받은 것도 무 시할 수 없을 것이다.
188 이성배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미 이러한 연구가 선행되어 있었는지 조사하는 것이었다. 감리교의 윤성범 목사가 “誠의 神學”3)이라는 토착 신학의 시도를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한국에 그리스도 교가 처음 도입되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토착 신학의 첫 시도이자 가장 큰 결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된 진리와 올바른 삶의 길을 찾으면 스스로 받아들인 신앙의 내용이 바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최초의 신학적 사색이고 실천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한 국 신학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당연하고 교회사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인 것이었다. 70년대 초 당시 교회사는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가 가장 널리 알려졌었고 내용도 상당히 풍부하여 당시 사람들은 성경과 성인전 그리고 유홍 렬의 한국 천주 교회사를 신앙생활의 바탕으로 삼을 정도였다. 여기서는 이벽이 이승훈을 설득시키면서 했던 말로 이벽이 이해한 천주교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하늘이 우리 들에게 성교(聖敎)의 참된 뜻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천년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좋은 기회이다. 이 교리만이 성현의 도(道)이며, 만물(萬物)을 만들어낸 주인인, 오직 하나뿐이고 모든 일 을 다 할 수 있는 천주에게 봉사하는 참된 교(敎)이므로 구라파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높이 받든다. 이것을 빼놓으면 우리들은 아무 힘도 없어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음을 가다듬 을 수도 없고, 만물(萬物)을 연구하고 알아낼 수도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긴한 깨우침(要諦), 세상 살아가는 표준(標準), 천지의 만들어냄과, 그 처음과 끝, 천체(天體)의 움직이는 법칙, 옳고 그 르고, 착하고 나쁨의 판단, 정신과 신체의 융합(融合), (인간의) 죄를 구하고자 천주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탁신(託身)의 뜻, (죽은 후) 천당에 있어서의 영광과 행복, 그리고 지옥에 있어서의 징계(懲戒)의 형벌 등 모든 것이 이것으로써 정(定)하여진다. 이번 자네가 북경으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천주께서 우리의 이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섭리이다…(4.
여기서 우리는 이벽이 자신의 기준으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받아 들 이는 내용을 조금은 알 수 있지만 너무나 부족하다.
황사영 백서나 상제상서, 주교요지 등 한국 초대 신자들의 글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가르침 이후에 쓰인 글로서 어느 정도 참고는 될 수 있지만 한국인의 문화와 사고 방식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동기를 알기는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전망>에 하성래의 천주공경가에 대한 소개와 해설이 나왔다.5) 간단하면서도 대단히 아름다운 천주공경가의 내용은 유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생활의 지혜를 전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연결하고 있다. 이렇게 교회사의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기초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을 때 주재용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옹위>6)라는 책에서 이벽의 성교요지라는 책이 있다고 하는데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 지만 위작일 가능성이 많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이때는 필자가 프랑스에 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자료들을 쉽게 찾아보기 어 려운 상황이라서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제석봉을 통하여 성교요지의 사본을 얻게 되었다. 비록 위작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이벽의 <성교요지>라는 작품이 있다면 유교를 바탕으로 천주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학문적인 근거가 나타 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제는 자연히 성교요지에 대한 해석과 진위성 문제에 대한 해결이 필수적이었다
3) 윤성범, 誠의 神學, 서울, 1972.
4)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상, 가톨릭출판사, 1962 1975, 82. 당시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있는 내용이고 유교와 그리스도교에서도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있지만 70년대 초에 일반 신자들이 많이 접촉한 책이 유홍렬의 천주교회사이기 때문에 여기서 직접 인용했다.
5) 하성래, 정약전의 십계명가(十誡命歌)와 이벽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신학전망 21(73` 여름), 136-154 및 신학전망 23(73` 겨울), 156-170.
6) 주재용, 한국천주교회사 옹위, 서울, 1958, 51-53 참조.
. 2. 1970년대 초 “성교요지”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
조선시대 실학사상의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던 김양선 목사가 숭실 대학에 기증한 만천유고에 수록된 성교요지는 처음부터 위작이 아니냐는 의혹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성래의 문학적인 접 근, 김옥희 수녀의 역사학적인 연구, 이성배의 기초신학적인 분석 등 국내외의 관심 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최초의 의문을 제기했던 주재용 신부 의 인정을 받아냈다고 했다 .7)
“‘<蔓川遺稿>에는 朱神父님 자신이 애써 찾으셨고, 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달레나 柳洪烈교수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다만 어 느 山寺에 모여 천주 교리를 강학했다고만 알려진 天眞庵.走魚寺 의 이름이 뚜렷이 밝혀져 있으니,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만천 유고>가 위본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이상과 같은 필자의 주장이 있은 후 朱 神父님은 다시 다음과 같은 편지 (1973.1.4. 일자)를 보내왔었다. ‘금반 김 옥희 수녀님의 논문에서 李壁선생의 <聖敎要旨> 역시 <만천유고>에 실렸음을 비로소 알 게 된 저로서 그 내용에 아니 놀랄 수 없고, 따라서 <만천유고>의 진가에 대해서 졸저 <한국 가톨릭史의 옹위> (p.52)에 ‘실물을 보지 못하여 자세히 비판할 수 없으나’ 2가지 점 때문에 의혹이 남았다 하였고, 거년 선생님께서도 그 편집인인 ‘무극관인’이 누 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 아직은 확언하기 어렵다 하여 종래의 비견인 두 가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는다고 한 바 있는 데, 이제 선생님의 옥고와 김 수녀님의 논문에 인용된 그 내용을 알게 되었으므로 거기 실린 두 가지 명칭은 하여간에 그 <만천유 7) 하성래 이성배 공역, 聖敎要旨, 가톨릭 출판사, 1976, 9-10 참조. 聖敎要旨 연구에 관한 小考 191 고> 자체의 사실이 위작이 아님을 선생님과 함께 승복합니다. 따 라서, 여기서 또 한 번 선생님의 비판력과 그 관찰력에 머리 숙 여 감복합니다.’8)
사실 요즈음 같으면 좀 더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서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 기록한 만천유고의 내용인지, 그리고 거기에 수록된 이승훈의 글들이나 이벽, 정약전 등의 글들이 확실한 것인지 좀 더 밝힐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 그런 조사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와 일반 대 중들이 그 책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방면의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이후에 성교요지에 수록된 용어들이 당시 천주교회에서 쓰지 않던 용어라는 이유로 성교요지 자체의 진위성을 의심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사기라고까지 말하는 상황은 우리나라 사학계와 교회사 관계자들, 신학자들, 사목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사실 이벽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구 분조차 할 수 없는 시기였고 이벽이 읽고 참고한 책들이 천주교 책인지 개신교 책인지 과학 서적인지 기타 잡서인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또 이벽이 쓴 글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정다산 전 서의 곳곳에 “이것은 광암의 말이다”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임에서 나눈 대화나 단편적인 글들이 정약용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억에 떠오르고 그것을 엮어 책으로 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상 황인지는 모르지만 성교요지의 과학적인 연구, 서지학적이고 언어분석학적인 연구의 부족으로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히지 못함은 참으로 안 타까운 일이다.
8) 上同.
한편 성교요지의 진위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교요지의 내용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한글 번역과 불어 번역이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거나 교민으로 생활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파리 7 대학의 한국학과 교수인 이옥 교수와 이계선 신부 9), 그리고 소르본 대학 교수인 프란치스 황 신부의 관심이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중국인인 황 신 부는 성교요지를 읽고 대단히 훌륭한 한문학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필자가 번역 작업을 끝냈을 때의 감동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황사영 백서나 상재상서, 주교요지 등의 내용을 높이 평가하며 한국 천주교회사의 자랑으로 삼을 때 성교요지의 내용은 그것들을 훨씬 능가하여, 성경과 유 교경전 및 대자연의 신비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구원의 신비를 노래하는 대단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료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 내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시라는 특성과 주석이라는 표현 방법이 다르고 분량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글로 된 천주가사인 “천주공경가”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큰 것 같았다.
이 단계에서 성교요지가 어떻게 기록되고 전승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안 지만 적어도 한국 사람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고 일단은 이 광암의 작품이고 주석이라는 글 10)이 있는 만큼 역사학자들의 좀 더 깊은 연구 결과로 확실한 판단이 내릴 때까지는 이벽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 로 이를 바탕으로 유교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교의 이해로 나아가는 기초 신학의 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사실 어떤 텍스트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사 색을 할 때에 누가 언제 기록한 텍스트인가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에 대전제가 되고 있는 위 디오니시오의 중 세기 저서가 대전제를 이루었던 것처럼 텍스트 자체의 내용이 얼마나 가 치 있고 유용한 것인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9) 1946년 명동 보좌신부 겸 청년 연합회 지도신부, 1948년 이천 본당 주임신부, 계성 중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1954년 로마에 유학했으며 그 뒤 공부를 마치 고 파리로 와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소르본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10) 讀天學初函李曠庵作註記之 라고 세로로 써진 聖敎要旨의 제목 밑에 조금 작은 글 씨로 적혀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글씨 크기와 내용, 필체, 출처 등의 차이를 검토하며 성교요지 본문과 주석을 다른 사람의 글로 보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저 자 문제가 밝혀질 때까지는 이 광암을 본문과 주석의 저자로 모아야 할 것이다.
3.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의 내용에 대한 평가
한국 사람들이 천주공경가를 대할 때 상당히 매끄럽고 아름다운 내용이 라고는 생각하기 쉽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생활의 지혜를 통하여 하느님 공경을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큰 감동을 일으키지는 안 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프랑스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프랑스 신학생들에게 이 글을 소개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당장 9월 순교자 성월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그 “천주공경가”를 제1독서에서 성경 대신으로 읽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래서 실제로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허락을 받아 미사 중에 제1독서 대신으로 낭독하고 강론 중에 그와 관련된 간단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천주공경가의 내용을 일 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만 현재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동을 선사하는 가치 있는 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미 달레 천주교회사의 자료를 인용한 유홍렬의 천주교회사에서 나타나듯이 유교의 생활배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이 자연스럽게 천주공경가에서도 나타난다. 천주, 영혼, 불멸, 죄, 지옥, 천당 등의 말이 집안, 나라, 내 몸, 하늘, 효도, 충성, 삼강오륜 등 인간실존과 윤리 도덕의 기본적인 가르침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런 내용만으로도 유교와 그리스도교가 접목되는 기본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좀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한국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적 지 않은 무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유교의 사서삼경 중에 하나인 시경과 같은 四言絶句의 한시로써 하느님과 인간구원의 신비를 밝히고 자 연 만물을 통해 하느님과 교회의 신비를 밝히는 聖敎要旨를 통하여 그리 스도의 가르침을 증명할 수 있는 호교론적인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할 것이다.
성교요지는 한시로 되어있고 주석을 통해 보충 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한시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서 많은 해석의 차 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미 역사학자인 김옥희 수녀의 성교요지 해석 11)과 신학자인 이성배 신부의 해석 12)과 이해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후대의 김동원 신부도 <영성의 길>13)에서 약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더구나 한시를 국제사회에서 논하려면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 여러 나라의 해석이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성래와 이성배 공역으로 1976년 12월에 성교요지가 출판되었지만 사실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한시를 해석한 한글 텍스트로서 한국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하나의 자료가 될 수는 있었다. “세상 사람 나기 전 이미 상제 계시니(未生民來 前有上帝)”로 시작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상제를 섬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始盡心以昭事上 帝哉)”로 끝나는 성교요지의 내용은 상당히 많은 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다. 더욱이 전체적인 내용이 성서적인 내용과 유교 경전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내용, 그리고 자연 만물의 신비와 의미에 대한 사색을 통 해 하느님을 노래하는 내용이라면 대단히 뛰어난 호교론 즉 기초 신학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두 49 단락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할 수 있는 각 단락의 제목들을 소개함으로써 성교요지의 내 용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우며 의미심장한 것인지, 왜 사람들이 성교요지에 대하여 그렇게 열광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릭출판사, 1979.
12)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1979.
13) 김동원 편저, 광암 이벽의 성교요지에 따른 영성의 길, 유림문화사, 2007. 聖敎要旨 연구에 관한 小考 195
우선 첫째 성서적인 부분에서 1. 창조주 하느님 2. 인간성: 카인과 노아 3. 구세주 예수 4. 구속자 예수 5. 예수의 가족 6. 예수의 주위 상황 7. 예수의 영세 8. 예수의 시험 9. 예수의 선교 10. 예수의 가르침 11. 예수의 업 적 12. 예언의 성취 13. 사랑의 희생제사: 종말의 준비 14. 예수 일생의 끝 15. 예수의 심판, 그리고 둘째 유학 경전과 관련된 내용으로 16. 수신(修 身) 17. 어린애 18. 청년 19. 선비(士) 20. 농부(農) 21. 공장인(工) 22. 상인 (商) 23. 제가(齊家) 24. 치국(治國) 25. 평천하(平天下) 26. 성(誠) 27. 원수 28. 그리스도교인의 생활 29. 그리스도를 본받음 30. 선교사, 마지막으로 자연 만물의 각종 주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과 교회의 신비를 노래하는 내 용으로 31. 자연의 호교론 32. 하늘(하느님의 위대함) 33. 땅(하느님의 넓으 심) 34. 시간(하느님의 영원성) 35. 산천(하느님의 아름다움) 36. 인간(하느님의 섭리) 37. 집(영혼의 순결) 38. 옷(영혼의 빛남) 39. 도구(덕행의 실천) 40. 보물(진리) 41. 음악(교회) 42. 꽃과 나무(인간의 내세) 43. 채소(가톨릭 교리) 44. 새와 짐승(하느님의 자비) 45. 물고기와 조개(영혼의 가치) 46. 벌레와 곤충(인간의 새 생명) 47. 죽음(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권면) 48. 하 느님(신앙생활의 실천) 49. 하느님의 나라(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희망)가 있다. 14) 이렇게 훌륭한 내용을 지닌 성교요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위성에 대 한 문제가 있었음에도 꾸준한 연구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만천유고와 당시초선의 한문본 성교요지의 상관관계, 한글 번역본 문제, 본문과 주석에 관한 문제, 사용된 용어의 출처, 저자 문제, 편집자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교요지 자체의 가치를 손상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성 교요지가 이 광암 벽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렇게 훌륭한 글을 지어서 이벽의 이름을 저자로 올렸다면
14)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59-60 참조.
그 사실 자체로 이벽의 훌륭한 인품을 증명하는 것이며(그 이름을 빌려서 자기 작품의 가치를 높이려 했다는 점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위 디오니 시오나 다른 중세의 많은 작품들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자신의 작품에 떠 떠 하게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판본이 있다는 것 자체도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고 본 다. 언제 어디서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관심을 끌었다 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사실 한문본 성교요지와 한글본 성교요지는 내용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같은 저자가 썼다고 보기는 어 렵고, 어쩌면 구전이나 단편으로 전해지던 자료를 누군가 뛰어난 학자가 한문으로 정리하여 소개했을 수도 있고 같은 내용을 학문적인 소양이 별로 없는 일반 백성들 가운데 누군가가 한글로 소개하여 전했을 수도 있으 리라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교요지에서 사용되는 갖가지 용어에 관계되는 문제들은 당시의 글을 쓰는 관행이나 언어 사용의 습관에 비추어 별로 의미 없는 것이라고 본다. 서양 말을 한자로 발음함에 따라서 복잡하게 기록하고 그중에 한두 글자로 표현할 때도 있고 의미에 따라서 표현하기 도 했다. 15) 사람의 정신적인 실체를 표현하는데 “영혼”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때로는 아니마(anima)라는 라틴어의 발음에 따라서 그대로 쓴 경우 도 있다. 또한 기독(基督)이라는 말도 그리스도(基利斯督)라는 말에서 나왔 다는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16) 사실 한문 글자의 한 자 한 자가 때로는 무궁무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텍스트에 다른 글자가 쓰였다고 하여 너무 기계적으로 논할 수는 없고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聖敎要旨 연구에 관한 小考 197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天 仁 誠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성교요지를 이해할 때 한국의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접 합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15) 한국교회사 논문집 Ⅱ,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5. 이 논문집에서 閔畿는 韓, 中.日 가톨릭 어휘사를 소개하며 얼마나 다양하게 가톨릭 어휘들이 표현되는지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도 이벽 시대의 어휘들은 자료의 부족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다.
16) “그리스도가 契利斯督 - 基利斯督 - 基督으로 단축하는 경향…” 민기, 한중일 가 톨릭 어휘사, 한국교회사 논문집 Ⅱ, 604-605.
4.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학의 박사학위 논문
동양의 정통사상인 유교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려는 기초신학 의 관점에서 성교요지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무조건 서양의 철학과 신 학을 받아들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사상과 정서에 맞는 동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교 계시를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로 한국 초대 교회사에서 그 기원과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적인 기초신학의 정립을 위한 논문을 준비하 게 된다. 우선 이러한 신학이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 회의 정신과 신학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서론을 시작한다. 이어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유교적인 한국 사회에 유학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수용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되어 발전해 온 사실을 밝히고 그 주역이 되는 인물들인 이벽, 정약용, 이승훈 등의 인물들과 학문적인 배경 및 주 변 상황을 밝힌다(1장). 그리고 이어서 이벽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천주공 경가>와 <성교요지>의 텍스트를 소개하고 그 번역과 해석이 따른다(2장). 논문이 쓰이는 무대가 프랑스의 파리인만큼 외국인들에게 유교를 이해하 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3장). 다음에는 유교의 근본 사상인 天의 다양한 의미와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대한 비판 및 그 외 여러 가지 선교사들의 교리 내용이 비판되면서 중세 서양 철학의 기본 개념과 유교 성리학의 근본 개념들에 대한 비교를 거쳐 성교 요지에 나타나는 하느님 이해의 바탕을 보게 된다(4장). 이어서 하늘의 뜻 198 이성배 을 받들어야 하는 인간의 실존 문제로서 윤리 도덕의 근본이 되는 仁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완전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의 의미를 밝힌다(5장). 이렇게 天과 仁의 의미를 그리스도교 교리와 관련시켜 검토 한 다음 그리스도 구원관의 가장 핵심이 되는 誠의 의미를 분석한다. 말씀 이 사람이 된 그리스도의 강생신비를 드러내는 인류 구원의 의미가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이 결합된 誠의 사상과 연결되어 가장 깊은 동양철학 의 완전한 인간(聖人=誠人), 구세주의 모습을 드러낸다(6장). 이러한 天仁 誠의 심오한 의미는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하느님의 계시로서 인간 현실의 신학”을 사색하게 한다(7장). 이렇게 구성된 “유교와 그리스도교” 논문은 전체적인 내용을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가 요약한다고 볼 수도 있고, 1968년 한국 순교 복자 24위 시복식 때에 하신 교황 바오로 6세의 말 씀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가서 윤리생활의 태도에 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이것은 머나먼 외국문화에서 수입된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거의 의도적으로 자신의 천부적 자질을 계발하 고 가장 뛰어난 개인 능력을 일깨우는데 미리 연구하고 노력해서 자기에게 알맞게 이해된 메시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17)
비록 동서양의 방대한 사상체계를 검토하며 간략하게 정리되어 아직도 많은 사색과 보충이 요구되는 내용이지만 적어도 우리의 인간적인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 성실하게 살아가는 신앙의 학문에 첫발을 내밀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17) La documentation catholique, 20 Oct. 1968, p.1766.
5. 프랑스와 한국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 논문의 출판과 보급
혹자는 유교에 관한 논문을 왜 프랑스에서 썼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유교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동양의 지혜가 그리스 도교의 계시와 만나면서 좀 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보편적 진리의 길잡 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랜 가톨릭 교회의 신학에서 중심 자 리를 차지하고 한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수로 있었던 그리스도교 신 학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의 가톨릭 대학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접목을 시도하여 참된 진리는 동서양을 넘어서서 서로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논문이지만 일단 마무리를 지었을 때는 참으로 뿌듯했고 평가도 무척 좋았다
(Docteur en theologie, mention: tres honorable). 이러한 마음은 당시 가장 유명한 신학자로 알려진 노 사제 Henry de Lubac, S.J와 Yves Congar 두 분을 찾아가서 논문을 보 여주고 평가를 받고자 하게 했다. 두 신학자가 노령임에도 기꺼이 읽어주 고 평가했었지만 예수회원과 도미니꼬 회원의 관점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 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논문 발표가 끝나고 파리의 Beauchesnes 출판사에 간행을 맡겼을 때 처 음에는 동서학문의 교류라는 주제의 논문들이 너무 많다고 출판에 부정적이었지만 3개월 후 담당자가 논문을 읽어 본 다음 너무나 흥미진진한 내 용이라며 기꺼이 출판 약속을 받았으며, 출판 후에는 관행에 따라 로마 교 황청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이름으로 인증하는 증명서까지 받았다. 또한 스위스의 선교 잡지에 책에 대한 기사까지 났었고 유럽에 유학하던 많은 한국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국의 노트르담 대학에서 이 논문에 대한 번역 의도를 가지고 당시 한국 교회사 연구소의 최석우 신부에게 문의했지만 나는 잘 모른다는 답변을 하여 더 이상 진전 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필자가 귀국할 때 우연히 얻게 된 성인전으로 성년광익의 원본에 해당하는 책 18)을 최석우 신부에게 기증할 때에 들은 이야기이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기 자랑을 하는 부끄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여 聖敎要旨의 내용과 가치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단순한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교요지의 가 치를 훼손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프랑스 생활이 끝나고 한국에 귀국했을 때 대학에 자리를 잡고 계속 연 구를 했으면 좀 더 발전적인 한국신학의 계기를 마련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제로서 교구장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학구적인 생활은 일단 중지되었다. 다만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한글로 다시 써서 출판하고 소신학교 은사인 이원순 교수 19)의 추천사와 함께 가톨릭 신문에 소개했다. 그리고 학술 논문으로 쓴 책치고는 상당히 많은 부수의 판매가 이루어져 지금까지 4판 증보판 정도가 나왔다. 일찍이 판권을 분도 출판사에 넘겼기 때문에 자세한 판매 실적은 모르지만 나름대로 무가치한 책은 아 이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성교요지는 서지학적인 진위성 문제나 사용된 용어의 문제로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통하여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신학적인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불변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18) CROISET,Jean, Les vies des saints pour tous les jours de l’annee, 2vol., 3e ed. Lyon, 1742
결론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논문을 마무리 지으면서 결론으로 “천주공경가”를 그대로 언급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지도 교수는 그것도 멋진 생 각이지만 조금은 아쉽다는 말을 하였다. 사실 이벽이 이승훈을 설득하여 북경에 보내면서 한 말의 내용이나 천주공경가의 내용 그리고 성교요지의 내용은 깊은 유대관계가 있다고 사료된다. 끊임없이 밝고 참된 삶의 길을 찾아 궁극적인 구원의 진리를 실천하려는 한국인들의 심성과 사고방식, 삶 의 자세가 나름대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너무나 부족하고 어려운 한문 문화권의 역사적 자료와 연구의 부실함 때문에 한국의 토착신학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다방면의 조사와 연구 및 사색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민구 신부의 성교요지에 대 한 용어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그 책 내용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 대부분 이 이벽의 시대와는 다른 후대의 자료들로서 개신교의 용어가 성교요지에 들어 있다는 것을 내세우며 신랄한 비판을 한다. 열심히 연구한 성의는 인정하지만 정작 성교요지의 작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미 받아들여 온 저자를 인정하면서 계속 연구하는 것이 바람 직할 것 같다. 설사 성교요지가 완전히 이벽과 관계없는 책이라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나오더라도 작자 미상의 훌륭한 책으로서 한국 선조들의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접목관계를 엿볼 수 있는 가치는 언제나 충분하다. 하나의 역사적인 문헌이 발견되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자료를 혼자서만 움켜쥐고 언젠가 자신의 힘만으로 해석하고 발표하여 유명세를 타려는 현상도 우리 사회에 많이 있지만 그 결과가 어떠한 오해와 불신을 쉽게 불러오는지도 종종 본다. 일반적인 역사서들이나 학술서, 시문집은 물론이고 교회사의 자료들도 이렇게 음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파리 외 방선교회 본부의 자료들이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소의 자료들, 그리고 김양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개인의 자료들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우리 는 한국 교회의 각종 역사적 문헌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폭넓게 개방되고, 연구되며, 진정한 하느님의 공동체를 만들고 인류구원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온 국민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통하여 참된 진리를 얻고 구원의 길을 향해 나아가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19) 서울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에서 1960년대 초에 역사를 가르치다가 서울대학 역 사학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천주교회사>를 비롯한 여러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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