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용책(中庸策)
왕은 묻는다.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은 글이다. 여러 성인이 서로 이어온 심법(心法)으로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갖춰져 있는데, 그 정미(精微)한 것들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은 대답합니다.
신은 일찍이, 《중용》은 사실 《논어》의 향당(鄕黨)편과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고 여겨왔습니다. 왜냐하면 향당편은 성인의 문장文章 (위의威儀와 문사文辭 등을 말함)이 외부에 드러난 것을 들어 말하였고, 《중용》은 성인의 도덕이 내부에 충만한 것을 들어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인의 내부에 쌓인 것을 알려고 하는 자가 이 글을 버리고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저 그 당시 문인(門人)들이 보았던 것은 성인의 위의(威儀)와 동작(動作) 사이에 불과하였지만, 자사는 가정의 학문을 근본하였고 적전(嫡傳)의 학통을 이었으니, 그 아는 바가 정수(精髓)와 온오(蘊奧) 그것이었습니다. 자공(子貢)의 ‘부자(夫子)의 문장은 볼 수 있으나 부자의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한 말씀은 들을 수 없다.’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배우는 이들이 과연 향당편을 읽고서 그 표현된 문장을 체득하고 《중용》을 읽고서 그 함축된 도덕을 발휘한다면 공자를 배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 구절은 삭제한다.
‘하늘이 명(命)한 것이 성(性)’이란 것이 책 머리의 첫째 뜻인데, 인(人)ㆍ물(物) 오상(五常)의 동이(同異)가 큰 의문점이고 ‘계신(戒愼)과 공구(恐懼)’란 것이 학문의 큰 핵심인데, 동(動)ㆍ정(靜) 관통(貫通)의 여부가 하나의 논쟁이 되어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성(性)ㆍ도(道)ㆍ교(敎)는 곧 세 가지 강령(綱領)인데, 두 번째 구절에서 도(道) 자 만을 말하였고,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ㆍ애(愛)ㆍ오(惡)ㆍ욕(欲)은 곧 일곱 가지 정(情)인데, 네 번째 구절에서 희ㆍ노ㆍ애ㆍ락 네 가지만을 거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미발(未發)은 곧 성(性), 이발(已發)은 곧 정(情)으로 이를 통괄하는 것은 심(心)이고, 중(中)은 대본(大本), 화(和)는 달도(達道)로 이를 발현시키는 것은 기(氣)인데, 경문(經文)에서 심(心)을 말하지 않고 기(氣)를 거론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은 대답합니다.
인ㆍ물 오상의 동이(同異)에 대하여는, 신이 생각하건대 하늘이 명한 성(性)은 만물도 다같이 받았으나 여기에서의 성은 인성(人性)만을 말한 것입니다. 인성인 뒤에야 오상을 갖출 수 있으므로, 물성(物性)과 혼합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계신과 공구의 동ㆍ정의 관통 여부에 대하여는, 신이 생각하건대 생각하고 헤아리는 사이에 신(神)의 눈으로 밝히는 바 아님이 없으며, 다급하고 험난한 때에도 더욱 이 마음을 잡아 경계해야 하므로 의당 동과 정이 관통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구절에서 도(道)자만을 말한 데 대하여는, 신이 생각하건대 이 한 도(道)자는 위로 성(性)자를 이어받고 아래로 교(敎)와 연결된 것으로서 바로 성기(成己)ㆍ성물(成物)의 주축이 되므로, 의당 그 실마리를 통괄하여 강령이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구절에서 네 가지 정(情)만을 거론한 데 대하여는, 신이 생각하건대 칠정(七情)에 대한 설(說)이 예운(禮運 《예기(禮記)》의 편명)에서 시작된 것으로 거론할 수 있는 정이 일곱 가지뿐이 아닙니다. 즉 부끄러워하는 것[愧]ㆍ뉘우치는 것[悔]ㆍ탐내는 것[忮]ㆍ한(恨)하는 것들에 대해 분명히 다르게 발로되고 있을 터인데도 어디에 귀속되는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칠정이 꼭 사람의 정(情)을 통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의 네 가지 정만을 든 것을 굳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경문에서 심(心)을 말하지 않고 기(氣)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하나의 인성(人性)에 대해 부여받은 것을 들어 말하면 성(性)이라 이르고 운용(運用)하는 것을 들어 말하면 심(心)이라 이르는데, 이 편은 천명(天命)을 근본으로 하였으므로 부여받은 것만을 들어 말한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또한 하나의 인성(人性)에 대해 의리(義理)로써 말하면 이발(理發)이라 이르고 형기(形氣)로써 말하면 기발(氣發)이라 이르는데 이 편은 천리를 근본하였으므로 중화(中和)을 들어 말한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중(中)을 이루고 화(和)를 이루는 것은 공부요,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잘 육성되는 것은 공효(功効)인데, 자기의 한 몸과 한 마음이 어떻게 천지 만물과 관계되기에 그 서로 연관되는 기미(幾微)의 묘(妙)가 이와 같단 말인가. 순(舜) 임금은 집중(執中)만을 말하고 용(庸)을 말하지 않았으며,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을 말하고 화(和)를 말하지 않았는데, 자사가 합하여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군자도 오히려 시중(時中)을 필요로 했으므로 가장 어려운 것이 시(時) 자란 말인가. 소인도 스스로 중용을 한다고 여길 것이므로 굳이 반(反) 자를 보충할 필요가 없었단 말인가. 중(中)의 뜻은 장(章)마다 발휘되었으나 용(庸)의 뜻은 용덕(庸德 《중용》제13장의 말)ㆍ용언(庸言 《중용》제13장의 말) 외에는 보이는 곳이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달도(達道)는 구절마다 거론되었으나 대본(大本)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두 군데 밖에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온갖 조화와 서로 연관되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성인이 중화(中和)의 공부를 다하여 천도(天道)와 서로 합치되면 하늘과 사람 사이에 서로 감응되어 바야흐로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位]하고 만물이 잘 육성[育]되는 공효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위(位)와 육(育)은 비록 조화의 재제(宰制)하는 힘이지만, 중화의 공부가 이것을 이룩하는 것이므로 비록 ‘성인의 극치’라 말하여도 옳을 것입니다. 자사의 의논이 순 임금과 공자에 다름이 있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절충[執]에는 수지(守持)의 뜻이 있으니, 순 임금에 대한 말에 이미 용(庸) 자가 언급된 것이며 ‘화하면서도 유탕하지 않는다.[和而不流 《중용》 제10장의 말]’는 것과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다.[中立而不倚 《중용》 제10장의 말]’는 것은 공자의 말로 자사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군자의 중용이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사물의 당연한 법칙은 때에 따라 각기 달라, 마치 저울에 물건을 올려 놓으면 물건의 무게에 따라 각각 추가 멈추는 것과 같으므로, 중용을 능하기 어려운 까닭도 때에 맞게[時中] 함에 불과합니다. 소인(小人)이 중용과 반대되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왕숙(王肅)의 본(本)이 어디에 근거하여 반(反) 자를 보충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소인의 방자한 행실이 으레 의리에 의거하여 구실을 삼으므로 반 자를 보충하지 않더라도 일찍이 불통(不通)하지는 않습니다. 용(庸) 자의 뜻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용은 상(常) 자와 구(久) 자의 뜻입니다. 즉 ‘도(道)는 잠시라도 여의어서는 안된다.’는 말과 《중용》의 ‘백성이 능히 할 자 드문 지 오래다.[民鮮能久矣 《중용》 제3장의 말]’는 말과 ‘능히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不能期月守 《중용》 제7장의 말]’는 말은 모두 용 자의 뜻들을 풀이한 것입니다. 대본(大本)을 두 군데밖에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대본은 별다른 것이 아니고 다만 중(中) 자의 미칭(美稱)이므로 중 자를 중복해서 말한 것은 바로 대본(大本)에 대한 풀이입니다.
중용은 스스로 가장 좋은 도리(道理)이므로, 가릴 것이 없을 듯한데 ‘중용을 가린다.[擇乎中庸 《중용》 제8장의 말]’ 하였고, 중(中)의 체(體)는 본래 일정한 방향이 없어서 의지할 데가 있는 것이 아닌데 ‘중용을 의지한다.[依乎中庸 《중용》 제11장의 말]’하였으며, 지(知)와 우(愚)는 지(知)에 속하고 현(賢)과 불초(不肖)는 행(行)에 속하는데, 여기에서 모두 반대로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ㆍ인ㆍ용은 능할 수 있으나 중용은 불가능하다.[知仁勇可能中庸不可能 《중용》 제9장의 말]’하고서 대순(大舜)의 지(知)는 중(中)을 사용하는 데 있고 안연(顔淵)의 인(仁)은 중(中)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것으로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費)와 은(隱)은 이(理)이고 소리개가 나는 것과 물고기가 뛰는 것[鳶飛魚躍 《중용》 제12장의 말]은 기(氣)인데, 기를 들어 이를 비유한 것은 모순(矛盾)이 없겠는가. 귀신(鬼神)은 기(氣)이고 덕(德 귀신의 정상(情狀)과 공효(功效)를 말함)이라 함은 이(理)인데, 귀신의 ‘덕이 됨이[爲德]’ 한 두 글자는 너무 한 덩어리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관(一貫 《논어》 이인편(里仁篇)의 말)이 바로 충서(忠恕)인데 ‘충서가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忠恕違道不遠 《중용》 제13장의 말]는 것은 초학자를 위해 말하였고 오륜(五倫)이 애당초 높거나 먼 것이 아닌데,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여 부부(夫婦 《중용》 제15장의 말)와 형제(兄弟)를 들어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증자(曾子)의 《대학(大學)》과 서로 안과 밖이 되는데 성신(誠身)과 성의(誠意)가 같지 않고, 구경(九經) 한 장(章)은 《가어(家語)》에 실려 있는데 문체(文體)의 번다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으니, 이런 것들은 어찌 모두 의심쩍지 않겠는가.
‘중용을 가려야 한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이는 중용 안에서 가려 취하고 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이 살피건대 ‘성한 자는 힘쓰지 않고도 중에 맞으나 성하려 하는 자는 선을 가려 굳게 행해야 한다.[誠者不勉而中誠之者擇善而固執 《중용》 제20장의 말]’ 하였으니, 가린다는 것은 배워 알고 힘써 행하는 유(類)이므로 안자(顔子)는 배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자가 선을 가린다[擇善]고 허여(許與)했던 것입니다. 만일 성인이라면 자연히 중용으로써 용(用)을 삼아 가릴 필요가 없으니, 순 임금의 ‘그 중(中)을 사용한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중(中)의 체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중의 체가 비록 일정한 방향이 없으나 매사에는 반드시 최상의 의리가 있는데 성인의 눈에는 조목과 노선이 환히 드러나, 마치 장인(匠人)이 먹줄과 자[尺]를 가지고 물건의 너비와 길이를 재어 그 물건의 중심을 정하고 이에 의하여 일을 해감으로써 치우치거나 굽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知)ㆍ현(賢)과 행(行)ㆍ명(明)이 서로 바뀐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도(道)가 밝지 못한 까닭에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므로 행해지지 못하는 책임은 자연 지자(知者)의 지나친 데에 귀결되고, 도가 행해지지 못한 까닭에 밝지 못한 것이므로 밝지 못하는 책임은 자연 현자(賢者)의 지나친 데에 귀결되는 것이니, 이는 지(知)와 행(行)이 겸하여 진보한다는 뜻입니다.
순 임금의 지(知)나 안자의 인(仁)이 중용에 해당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지ㆍ인ㆍ용은 천하의 달덕(達德)이므로, 이미 여기에 능하다면 중용에도 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제9장의 세 구절은 본래 세 가지 덕[三德 지ㆍ인ㆍ용을 말함]에 대한 해석이 아니며 ‘작록도 사양할 수 있다.[爵祿可辭 《중용》 제9장의 말]’는 한 구절은 꼭 인(仁)이 아니라고 봅니다. 솔개와 물고기는 기(氣)로써 이(理)를 비유했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군자의 도는 크게는 온갖 가지가 되고 작게는 은밀한 데 감춰지므로 우매한 부부(夫婦)로도 알 수도 행할 수도 있는 것은 비(費)에 속하고, 성인으로서도 알지도 능하지도 못하는 것은 은(隱)에 속합니다. 그럼 솔개와 고기의 비유는 바로 은(隱) 자를 영탄(詠歎)한 것으로, 그 높고 묘하고 깊고 은미한 형상을 극도로 말한 것이요, 굳이 이기(理氣)로써 말할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이(理)로써 기(氣)를 논했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귀신은 형체가 없는 것이어서 그 본체가 조그마한 형체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기(氣)에 소속시킬 수 없으며 ‘덕이 됨이[爲德]’ 한 두 글자도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충(忠)과 서(恕)가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일관(一貫)이 바로 충서이므로 서(恕)를 힘써 인(仁)을 구하는 것은 배우는 자가 힘써야 할 바입니다. 이를 힘쓰는 데에 어찌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한 일관설은 너무 광대하고 현묘(玄妙)하므로 신은 감히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륜이 애당초 높거나 먼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부부와 형제는 낮고 가까운 것이요, 은미하면서 드러나는 귀신은 높고 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이어 바로 귀신을 말한 것입니다. 성신(誠身)과 성의(誠意)가 《대학》과 같지 않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대학》에서는 성(誠)을 공부할 곳을 가져 말한 것이요, 《중용》에서는 성을 자신에 되돌리는 것을 가져 말한 때문에 서로 동일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경(九經)장이 《가어(家語)》와 동일하지 않은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가어》는 왕숙(王肅)이 보충하여 만든 것입니다. 즉 애공문(哀公問) 한 장은 몇 구절에 불과한 것인데, 《가어》에서는 아래 대문까지를 아울러 문답한 글로 만들었으니, 믿을 만한 글이 될 수 없습니다.
‘자성명(自誠明 《중용》 제21장의 말)’의 성(性)이 ‘천명(天命)’의 성과 같은가, 다른가. ‘자명성(自明誠 《중용》 제21장의 말)’의 교(敎)가 수도(修道)의 교와 한 가지인가, 두 가지인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어찌 뒤섞어서 말했으며, 무식(無息)과 불식(不息 《중용》 제26장의 말)을 어찌 바꿔서 말하였는가. 박후(博厚 《중용》 제26장의 말)와 고명(高明 《중용》 제26장의 말)은 하늘과 땅을 함께 말한 것인데, 그 끝에 천명(天命)만을 말하였고, 삼천(三千)과 삼백(三百)은 지극히 소소한 것을 말한 것인데, 그 첫머리에 먼저 ‘크다[大哉 《중용》 제27장의 말]’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존덕성(尊德性)ㆍ도문학(道問學)’은 행(行)이 지(知) 이전에 들었고 ‘극고명(極高明)ㆍ도중용(道中庸 《중용》 제27장의 말)’은 책 이름인 《중용》이 이 조목에 끼었으니, 이 뜻을 모두 지적할 수 있겠는가. ‘조술(祖述)ㆍ헌장(憲章)’은 공자의 도통(道統)이요 ‘상률(上律 《중용》 제30장의 말)ㆍ하습(下襲 《중용》 제30장의 말)’은 공자의 덕행인데, 여기에서 공자를 전적으로 찬미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소덕(小德)’과 ‘대덕(大德)’은 무슨 명목이며, ‘지성(至誠)’과 ‘지성(至聖)’은 어떤 분별이 있는가. 1부(部)의 《중용》에서 ‘중니(仲尼)’를 두 번 칭하였고, 《시경》을 인용하는 데 시운(詩云)과 시왈(詩曰)을 섞어서 사용한 것도 모두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1부의 《중용》은 혹은 6대절(大節)로, 혹은 4대절로 보았으나, 《독법(讀法)》과 《장구(章句)》에 있어 어느 것을 따라야 하며, 내부의 것부터 말하여 외부로 나오고 외부의 것부터 말하여 내부로 들어갔으니, 머리 장(章)과 끝 장 중에 어느 것이 더 긴밀한가. 불현(不顯)을 그윽하고 심오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니 굳이 《시경》의 뜻과 같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성취(聲臭)로써 사도(斯道)의 묘(妙)를 표현하였으니, 무극(無極)이 사실 여기에서 연유된 것인가. 이하 한 대문은 빠졌다.
…… 두 대문은 삭제되었다 ……
하늘과 땅을 아울러 말하였다가 천명(天命)만을 말한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고명배천(高明配天 《중용》 제26장의 말)의 천(天)은 저 푸르고 푸르러 형체 있는 하늘을 말하고 유천오목(維天於穆 《중용》 제26장의 말)의 천은 영명(靈名)하여 주재(主宰)하는 하늘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대(廣大)한 천지(天地)ㆍ산천(山川)을 차례로 열거하여 그 공화(功化)를 저 주재하는 하늘에 돌렸으니, 이는 교사(郊社 하늘과 땅제사)의 예(禮)에서 후토(后土 땅을 맡은 귀신)를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상고 시대에 땅을 섬기는 예가 따로 있지 않은 때문입니다.
…… 두 대문은 삭제되었다 ……
《중용》이 조목에 섞여 들어간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이 대문의 열 조목에서 이 한 구절은 마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황극(皇極)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위 네 조목은 ‘발육만물 준극우천(發育萬物峻極于天)’의 일이요, 아래 네 조목은 ‘위의 삼천(威儀三千)’과 ‘대기인이행(待其人而行)’의 일이요, 이 한 구절은 《중용》전편의 관건이 되니, 조목으로 볼 수 없습니다.
…… 일곱 대문은 삭제되었다 ……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무극(無極)과 같다는 것은, 신이 생각하건대 소리도 냄새도 없다는 것은, 저 하늘의 말도, 움직임도 없는 공화(功化)를 표현한 것이요, 무극과 태극(太極)은 한 덩어리의 원기(元氣)가 아무 물건도 없는 가운데서 형성된 것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의 보잘것없는 학문으로는 참으로 대조할 수 없습니다. 아래 한 대문은 삭제되었다.
어찌해서인지 세상의 격(格)이 점점 낮아지고 학술이 밝지 못하여, 색은 행괴(索隱行怪)하는 자도 있고, 같이 휩쓸려 더러운 짓을 하는 자도 있으며,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을 행하기도 하고 호광(胡廣)의 중용(中庸)을 행하기도 하여, 선성(先聖)의 대본(大本)과 달도(達道)에 비하면 영(郢) 땅의 글을 연(燕) 나라에서 풀이하던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단(異端)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학문에 종사하는 선비로서 자사(子思)의 말을 외면서도 자사의 가르침과는 위배되어,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근원에 대해서는 비록 하늘에서 쏟아지는 천화(天花)처럼 찬란하지만, 그 행동을 살펴보면 책 속의 의리와는 거의 서로 합치되는 것이 없다. 사물(事物)을 정하기 전에는 존양(存養) 공부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윽한 곳에 혼자 있을 적에는 성찰(省察) 공부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고요히 있을 때에는 혼매하여 마치 깰 수 없는 딱딱한 돌의 모양과 같고, 동(動)할 적에는 방종하여 마치 고삐 풀린 사나운 말의 형세와 같아서, 천리(天理)는 날로 없어지고 인욕(人欲)은 날로 불어나 대본이 서지 못하고 달도가 행해지지 못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기탄없는 소인이 되기까지 하니, 지금 옛 습관을 완전히 제거하고 참된 마음으로 책을 읽어서, 마침내 선(善)을 가려 굳게 행하고 덕(德)을 닦아 도가 응결되기에 이름으로써, 전후 성인들이 후학을 위한 고심(苦心)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그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찌해서인지 후세의 학자들이 지(知)만을 서두르고 행(行)은 힘쓰지 않으며, 그 형적(形迹)만을 찾고 그 마음은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대월(對越 상제(上帝)를 가까이 대하듯 공경한다는 뜻) 공부는 마음을 받들어 상제(上帝)를 위한 것이고, 이른바 성의(誠意) 공부는 군자를 만나면 불선(不善)을 감추는 것을 위함인데,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월(越) 나라로 가려 하고 영(郢) 땅의 글을 연(燕) 나라에서 풀이하듯 하는 것은 끝내 그 공부가 성취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용》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낱낱이 들 수는 없으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추기(樞機)를 집어낸다면 바로 성(誠) 자 하나뿐이며, 성 자의 공부는 또 계신 공구(戒愼恐懼)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여기에 힘을 쏟으면 중용의 도가 이에 회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서로 도와 살면서 서로 해치려 들지 않는 것은, 그 임금이 잘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이렇지 않으면 버젓이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고 공공연히 훔치거나 약탈하여, 천하의 혼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에 감춰진 나쁜 마음과 그윽한 곳에서의 음험한 일은 아무리 밝은 임금도 미처 살피지 못하고 현명한 통치자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며, 형법으로도 징계하지 못하고 비방으로도 공격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리하여 남모르게 자라고 은근히 싹터서 은밀히 퍼지고 야무지게 결속되어서는 아무도 금지할 수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사람 마음이 어리석고 완악하여 능히 천지 사이에 모든 이치를 꿰뚫는 능력이 없다고 여기므로 마음껏 방자하여 기탄이 없고 겉으로 선한 체하면서 안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계신(戒愼)하고 실심(實心)으로 공구(恐懼)하여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근원을 추구하고 성현의 대월(對越) 공부를 따름으로써 부지런하고 두렵게 여겨 조금도 안일하거나 방사함이 없다면, 고요할 때 완악한 돌처럼 혼매함이 없고 동(動)해서는 사나운 말처럼 조급함이 없어져, 인욕의 사(私)를 막고 천리의 공(公)을 보존하여 중용의 대본과 달도가 거의 만회되고 이어질 것이니, 이 어찌 사문(斯文)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계신ㆍ공구하는 마음은 텅 빈 공중이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명(命)을 받아서 발출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격물(格物)ㆍ궁리(窮理)를 먼저하고 체험을 다음으로 하며, 물건의 이치를 살펴 그 근본을 연구하고 문학(問學)을 말미암아 그 근원을 소급하여 곧바로 그 밑바닥까지 궁리하는 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는다면 선과 악의 구분이 눈과 마음에 환해지고 재앙과 상서의 연유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조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계신해지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구해져서, 자연히 천리가 유행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은 삼가 대답합니다.
[주1] 성(性)ㆍ도(道)ㆍ교(敎)는 …… 말하였고, : 이는 《중용》 첫장 두 번째 대문에, “도는 잠시도 여읠 수 없다. 만약 여읜다면 도가 아니다.” 하여, 성(性)과 교(敎)를 말하지 않은 것을 이른다.
[주2] 순舜 임금은 집중(執中)만을 : 《중용》제6장에, “순 임금은 중론(衆論)을 절충하여 중도(中道)를 백성에게 시행했다.” 하였다.
[주3] 반反 자를 보충할 : 《중용》 제2장에, 왕숙(王肅)의 본(本)에, ‘小人之反中庸’이 아닌 ‘小人之中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주4]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을 : 자막은 노(魯) 나라의 현자(賢者)로, 양자(楊子)의 위아설(爲我說)과 묵자(墨子)의 겸애설(兼愛說)이 중도를 잃었다 하고는, 그 중간을 잡아 ‘중도’라 지칭하였으나 맹자(孟子)는, 이것을 시중(時中)이 없는 고집된 중(中)이라고 논파하였다. 《孟子 盡心上》
[주5] 호광(胡廣)의 중용(中庸)을 : 호광은 후한 때 사람으로, 일의 출처를 환히 알고 조정의 의궤(儀軌)에 밝았으므로 경사(京師)에서 “모든 일에 해결되지 않은 것은 백시(伯始 호광의 자)에게 물어라. 천하의 중용은 호공에게 있다.” 하였다. 그러나 질제(質帝)가 양기(梁冀)에게 시해당한 뒤에 다음 천자를 옹립하려 할 때 양기의 위세에 눌려 덕망 있는 산(蒜)을 세우지 못하고 말았으므로 이 같은 사람을 ‘중용’이라 칭한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後漢書》
[주6] 영(郢) 땅의 …… 풀이하던 것과 : 《한비자(韓非子)》외저설(外儲說)에, “영(郢) 땅 사람이 연(燕) 나라 상국(相國)에게 편지를 쓸 때 촛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촛불을 들어라[擧燭]’ 하면서 무의식중에 이 두 글자를 편지에 써넣고 말았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은 연 나라 상국은 ‘거촉(擧燭)은 밝음을 숭상하라는 뜻이요, 밝음을 숭상하는 것은 어진이를 등용하라는 뜻이다.’ 하고는, 임금에게 아뢰어 이를 실천하였으므로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그러나 글의 본뜻은 아니었다.” 하였다.
中庸策
王若曰中庸。子思之書也。千聖相傳之心法而全體大用備矣。其精微蘊奧。可得而聞歟。
臣對曰。臣竊嘗以爲中庸一書。與鄕黨篇實相表裏。何者。鄕黨。就聖人文章之著於外者而言之。中庸就聖人道德之充乎內者而言之。欲知聖人之內蘊者。舍是書何以哉。蓋門人之所得而見者。不過威儀動作之間。若子思則本之家庭之學。接乎宗嫡之統。其所得而知之者。乃其精髓蘊奧之祕。子貢所謂夫子之文章。可得而見。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者此也。苟使學者。讀鄕黨之篇而得其文章之表。讀中庸之書而發其道德之蘊。何患乎學孔子也。第二節刪。
天命之性。開卷第一義。而人物之五常同異。爲大疑案。戒愼恐懼。爲學大頭腦。而動靜之通貫與否。作一爭端何歟。性也道也敎也卽三綱。而第二節獨言道字。喜怒哀樂愛惡주-D001卽七情。而第四節只擧四者何歟。未發則性。已發則情。統之者心。中者大本。和者達道。發之者氣。而經文不言心不論氣何歟。
臣對曰。人物之五常同異者。臣以爲天命之性。物雖各得。此之言性。只是人性。人性而後。方具五常。不當以物性混之也。戒懼之通貫動靜者。臣以爲思想揣摩之間。罔非神目之所燭。造次顚沛之時。尤當此心之提警。宜乎其通貫動靜也。第二節之獨言道字者。臣以爲道一字。上承乎性。下接乎敎。卽成己成物之樞紐。則宜其抽縷而立綱也。第四節之只擧四情者。臣以爲七情之說。昉於禮運。而情之可擧者。不止於七。如愧悔忮恨。明有異發。而無所歸屬。則七情未必統括人情。而此之四情。不必疑也。經文之不言心不論氣者。臣以爲一個人性。以稟賦則謂之性。以運用則謂之心。此篇本之天命。則只以稟賦而言之者固宜也。一個人性。以理義則謂之理發。以形氣則謂之氣發。此篇本之天理。則只擧中和而言之者固宜也。致中致和。工夫也。位焉育焉。功效也。自家之一身一心。何與於天地萬物。而其幾微相關之妙。乃如是歟。舜言執中而不言庸。孔稱中庸而不言和。子思合言何歟。君子猶有待於時中。最難者時字歟。小人亦自以爲中庸。不必補反字歟。中之義。章章發揮。庸之義。庸德庸言之外。無所槪見何歟。達道則節節必擧。大本則獨於天下之大本再言之何歟。自家身心之與萬化相關者。臣以爲聖人極中和之工。與天道相合。則天人之際。交相感格。方成位育之功。位也育也。雖是造化宰制之力。而中和之工。有以格之。則雖謂聖人之極致亦可也。子思之論。與舜孔有異者。臣以爲執有持守之意。則舜之說固已及庸字。而和而不流。中立而不倚。則孔子之訓。與子思亦未嘗不同矣。君子之中庸者。臣以爲事物當然之則。隨時各異。如衡載物。隨物輕重。各有安錘之處。則中庸之 所以難能。卽不過時中也。小人之反中庸者。臣以爲王肅之本。未知何據。而小人之恣行。罔不依據乎一部義理。以爲口實。則不補反字。固未嘗不通矣。庸字之義。不少槪見者。臣以爲庸者。常也久也。道不可須臾離。民鮮能久矣。不能期月守。皆庸字之演義也。大本之止於再言者。臣以爲大本也非別件。只是中字之美名。則中字之重言複說。便是大本之解也。中庸自是恰好底道理。似無所擇。而謂之擇乎。中體本無一定之方向。非可倚著。而謂之依乎。智愚屬知。賢不肖屬行。而今皆相反者。何故歟。知仁勇可能。中庸不可能。而大舜之知。在於用中。顏淵之仁。在於擇中者何說歟。費隱是理。而鳶魚飛躍是氣。則以氣喩理。得無齟齬。鬼神是氣。而德之爲言是理。則爲德二字。能不囫圇歟。一貫卽是忠恕。則違道不遠。却從學者事言之。五倫初非高遠。則登高自卑。惟以夫婦兄弟言之何歟。曾氏大學。與相表裏。而誠身誠意不同。其九經一章。載在家語。而文體繁簡不類。
此皆不足疑歟。中庸之謂之擇乎者。臣以爲此非謂中庸之內。揀擇而去取也。臣按誠者不勉而中。誠之者擇善而執。蓋擇者。學而知勉而行之類也。故顏子學焉者也。故孔子許之以擇善。若聖人則自然以中庸爲用。不待乎擇。大舜之用其中是也。中體之不可依著者。臣以爲中體雖無一定。每事必有上等義理。在聖人眼中。條路分明。如匠人本具繩尺。隨物廣長。卽定其物之中。依此而行。不至偏曲是也。智賢行明之互換者。臣以爲不明故不行。則不行之責。自歸於智者之過。不行故不明。則不明之責。自歸於賢者之過。此知行兼進之意也。舜顏知仁之在於中庸者。臣以爲知仁勇天下之達德。旣能乎是。則中庸亦可能也。然臣謂第九章三句。本非三德之解。蓋辭爵祿一句。不必爲仁也。鳶魚之以氣喩理者。臣以爲君子之道。大之則散爲萬殊。小之則斂藏於密。夫婦之與知能行屬費。聖人之不知不能屬隱。鳶魚之喩。是隱字之詠歎。而極言其高妙淵微之象。不必以理氣言也。鬼神之以理論氣者。臣以爲鬼神是無形之品。其本體不帶著一些形質。則不可屬之於氣。爲德二字。恐無可疑者也。忠恕之違道不遠者。臣以爲一貫卽忠恕。強恕以求仁。學者之所勉。勉此豈高遠難行之事乎。先儒談一貫。太宏闊太玄妙。臣未敢悅服也。五倫之初非高遠者。臣以爲夫婦兄弟。卑邇者也。鬼神微顯。高遠者也。故此段之下。卽以鬼神承之也。誠身之與大學不同者。臣以爲大學從誠之下手處說。此篇從誠之反己處說。所以不同也。九經之與家語不同者。臣以爲家語者。王肅之所補足也。哀公問一章。不過數節。而家語竝取下節。以作問答之語。不可爲信文也。自誠明之性。與天命之性。同歟異歟。自明誠之敎。與修道之敎。一歟二歟。王道人道。何爲錯綜言之。無息不息。何爲互換說去。博厚高明。竝言天地。而末獨言天命。三千三百。極於至小。而首先稱大哉何歟。尊德性道問學。踐履在窮格之先。極高明道中庸。篇名入條目之列。皆可指其旨歟。祖述 憲章。夫子之道統也。上律下襲。夫子之德行也。至此而專贊夫子。抑何以歟。小德大德。是甚名目。至誠至聖。有甚分別。一篇之中。兩稱仲尼。引詩之際。錯言云曰。亦皆有意歟。或作六大節。或作四大節。讀法與章句。當何適從。自裏說出外。自外說入裏。末章與首章。孰爲最密歟。不顯作幽深之解。則詩義不須苟同。聲臭形斯道之妙。則無極實由此道歟。以下一段缺。二節刪〇竝言天地而獨言天命者。臣以爲高明配天之天。是蒼蒼有形之天。維天於穆之天。是靈明主宰之天。是故列序天地山水之廣大。而贊歎功化於主宰之天。猶郊社之不言后土。寔以上古無事地之禮也。二節刪〇中庸之混入條目者。臣以爲此段十條。惟此一句。如九疇之皇極。上四段是發育萬物。峻極于天之事也。下四段是威儀三千。待人而行之事也。乃此一句。爲一篇之關鍵。不當以條目言之也。七節刪〇無聲無臭之同於無極者。臣以爲無聲無臭。是形容上天不 言不動之功化也。無極太極。不過以一團元氣。從無物中凝成之謂也。以臣溲學。誠無以勘合也。〇以下一段刪。奈何世級漸降。學術不明。索隱行怪者有之。同流合汚者有之。爲子莫之執中。爲胡廣之中庸。視先聖大本達道。不翅若郢書之燕說。異端固不足道。而吾儒之從事斯學者。誦孔思之言。反孔思之訓。天人性命之原。雖說得天花亂墜。夷考其所爲。與夫卷中義理。無幾相合。事物未來之時。不知存養爲何物。隱微幽獨之地。不知省察爲何事。靜而昏昧。有頑石不劈之狀。動而放縱。有悍馬不羈之勢。天理日消。人欲日滋。大本不立。達道不行。甚至爲小人之無忌憚。今欲痛去舊習。實心看讀。終底於擇善固執。修德凝道。用不負前聖後聖爲人之苦心。則其道何由。
奈之何後之學者。急其知而不勉其行。尋其迹而不求其心。其所謂對越之工則奉其心而爲上帝。其所謂誠意之工則見君子而掩不善。宜其北轅而求越。郢書而喩燕。卒無以成其功也。夫中庸之全體大用。不可枚擧。而就其中拈出其樞紐機括之會。則誠一字是已。而誠字之用工。又不外乎戒愼恐懼四字。用力乎此則中庸之道。斯可復矣。何者。民之所以胥匡以生。不相殘害者。以其君牧者理之耳。不如是。顯相仇滅。公肆攘奪。天下之亂。無日矣。然其心內之隱疣。幽處之暗慝。明君之所未及察。良牧之所未能燭。刑法之所未懲。毀謗之所不攻。潛滋暗萌。密布緊束者。人莫之禁遏焉。此曷故焉。人心愚頑。以爲天地之間。竝無燭理之能。所以放恣無憚。陽善而陰惡也。誠使學者。眞心戒愼。實心恐懼。窺天人性命之原。追聖賢對越之工。孜孜惴惴。罔或逸肆。則靜而無頑石之昏。動而無悍馬之躁。有以遏人慾之私。存天理之公。而中庸之大本達道。庶可以迴旣倒而續旣絶矣。不亦爲斯文之大幸乎。雖然戒懼之心。亦未必懸空注白。聽命而發。必也先之以窮格。次之以體驗。覽物理而究其本。道問學而溯其原。直窮到底。無遺餘力。則淑慝之分。皦列心目。祥殃之招。瞭如指掌。莫之惴而戒愼。莫之讋而恐懼。自底乎天理流行之域。豈不誠休哉。臣謹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