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약자를 구해주는 ①정의로운 야성과 ②행동하는 지성을 가져야 하며 ③돈과 이익만 쫓는 탐욕한 인간이 되면 안된다.
2023. 3. 12일 이경용 씀.
★. 정의로운 야성과 행동하는 지성으로 살아야 한다.
길거리에서 약자를 사정없이 패거나 군대에서 졸병들에게 함부로 구타해도 모른척 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었다.
육군 상병일 때 고참 병장을 사정없이 패버려서 2일 동안 영창대기도 하였다.
20대, 30대의 젊은 날에 이경용은 “약자를 괴롭히는 폭력 행위”를 그냥 모른척 하지 않았고 “① 정의로운 야성을 발휘”하여 폭력의 가해자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초등학교만 정상 졸업한 “고졸 검정고시 출신”으로 스스로 공부하여 “지성”을 갖춘 뒤에는 무지하고 못 배운 약자를 위하여 민원, 내용증명, 고소장, 소송 글 등을 작성해주면서 “②행동하는 지성”으로 수많은 도움을 주며 살아왔다.
★. 당장, 수중에 돈이 없어도 정의로운 야성과 행동하는 지성이 있으면 큰돈을 마련하여 “가난한 약자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①. 빚 독촉에 시달리는 외사촌 누님이 도움을 청하여 빚을 갚아주었다. 수중에 돈이 없어서 3개월 뒤에 찾게 되는 “3년 만기 재형저축을 찾아서 1986. 12. 25일에 250만원을 계좌 송금”해주었다.
청량리 역에서 누나를 만난 뒤에, 길거리에서 공중 전화로 경남의 울산 상호신용협동조합의 조종혁 과장에게 “저는 성북세무서 소득세과에 근무 중인 이경용”입니다.
지금 수중에 돈이 없으나 3개월 뒤인 “1986.12월에 3년 만기의 재형저축 250만원을 찾아서 계좌 송금해줄테니 외사촌 누나에게 빚 독촉을 하지말라고 하였다. 공무원의 신분을 걸고 꼭 약속을 지키겠다하니 빚독촉을 안하겠다고 하였다.
3개월 뒤에 연체이자까지 합친 250만원을 계좌 송금해주었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부자가 아니어도 약자를 도와주려는 마음과 지성이 있으면 도와주는 것이다.
그 먼 곳, 울산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사촌 남동생을 찾아온 누님에게 빚독촉을 안받게 해주고, 빚도 갚아준다하니 누님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었다.
참말로 잘한 일이라 생각하니 그저 기분이 좋았다. 이경용이처럼 수중에 돈도 없으면서 3년 동안(1983년~1986년) 매월 5만원씩 적금한 돈을 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하위직 공무원으로 수중에 돈도 없는 자가 빚 독촉에 시달리는 외사촌 누님!같은 약자를 위해 도와주는 마음(정의로운 야성과 행동하는 지성)씀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며,
이런 일을 벌이는 이경용이를 책망하지 않고, 잘했다고 하는 아내가 있어 너무 행복하였다. 다른 아내 같으면 부부 싸움이 크게 났을 것이다.
부부 맞벌이 할때로 아내는 외환은행 여직원이었다.
”3년 적금 부은 돈“을 사촌 누나한테 준다고 하면 ”당신 미쳤어! 공무원 월급도 적고,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사람“이 분수를 모른다고 부부 싸움이 크게 벌어져서 돈을 주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②. 둘째 형이 도움을 요청하여, 수중에 돈이 없어서 아파트 분양 신청할 ”주택청약예금 400만원을 1988년에 해약“하여, 형에게 주어버렸다.
해약으로 인하여 아파트 청약 자격을 상실하여 후에 엄청난 손해를 당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③. 재형저축 3년 만기의 돈을 찾아서 Ⓐ외사촌 누님의 빚을 갚아주고, Ⓑ주택청약예금 400만원을 찾아서 Ⓒ둘째형에게 도와주게끔 흔쾌히 동의해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다.
★ 캄캄한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가난한 경용이에게 1991년도에 1억이 넘는 큰돈이 들어와서, 큰형에게 집을 사주고 부모님의 과거 빚을 갚는 행운이 찾아왔다.
경용이가 상계동 보람아파트에서 전세를 살면서도, ”큰형의 아파트 분양대금을 계좌송금“해준 경용이의 아내였다.
다른 아내 같았으면, ”남의 집에서 전세 사는 주제“에 큰형한테 ”아파트 분양대금을 공짜로 그냥 주냐“고 부부 싸움이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큰형은 집안의 마지막 재산인 ”과수원을 1973. 5월에 팔아먹어 탕진“하고 있어서 ”1974년도의 아버지 장례식“에도 불참했던 불효막심한 자였으나,
경용이는 그런 큰형을 ”용서(개과천선하라고)해주는 마음“으로 평촌 신도시의 아파트 32평을 그냥 사주었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큰 아들은 자식이 아니다“고 했던 ”큰형에게 집을 사주는 동생은 대한민국 땅에서 거의 없을 것“이다.
①. 을지로 세무서와 성북세무서에서 공직자의 본분을 행사할 뿐이었는데 은행에서 3천만원(조흥은행 2천만원+하나은행 1천만원:내용 생략)을 그냥 대출해주었다.
그 3천만원으로 1987년에 안산 택지 82평을 평당 36만원(2950만원/82평)에 매수하여 4년 뒤인 1991년도에 5배의 가격인”평당 180만원“에 팔아서
1억이 넘는 매매 수익을 올렸는데 그 당시에,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1990~1991년도에 신도시 분당아파트 32평의 분양가격이 5800만원으로 아파트 2채를 매수할 큰돈이었다.
②. 이경용이는 조흥은행의 1985년도 법인세 신고서를 서면 검토해보니, 방위세를 25%만 납부하면 되는데 잘못하여 37.5%로 과다납부하였기에 직권으로 세금환급 통지를 해버렸다.
세금을 과다 납부한 은행 본점 앞으로 사전 연락도 없이 5400만원을 즉시 환급해주었더니, 조흥은행 본점 과장이 을지로 세무서에 찾아와서, 은행 내부(대형 회계법인과 경리부서의 책임 발생)에서 야단이 났다는 것이다.
은행 본점의 전무이사가 은행에서 해줄 것은 없고 혹시 대출이 필요하면 해주겠다고 해서 2천만원을 그냥 대출받아서 큰 수익을 올리는 종자돈으로 사용하였다.
다른 공직자 같으면 환급에 대하여 미리 전화해주고 상담하고 했을 것이나, 이경용이는 서류만 검토하고서 즉시 환급조치해버린 것이었다. 재수가 너무 좋았다.
③. 장인 어른의 집을 담보로 6천만원 대출을 받아 ”1989년도에 안산에 상가를 지어서 1990년도에 팔아서 큰수익“을 올렸다.
토요일, 일요일마다 안산을 수없이 다니면서 ”엄청난 노력과 투자 분석(현재와 미래 시세 가치 산정), 부동산 연구 등“으로 일궈낸 경제적 성과였다.
★Ⅰ.이경용이는 만13세부터 20세까지 7년 동안을 잡초같이 밑바닥의 험한 인생을 살면서 야성이 생겼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정미소 공장, 큰 기와집, 과수원”을 가진 부자소릴 들으면서 순하게 자랐으나, 집이 망하여 채권자들에게 공장과 기와집을 뺏겨버린 뒤에는 정든 고향 나주를 떠나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의 어린나이에 중고등학교를 못다니고 식당, 공장, 짐자전거 배달의 7년 동안을 밑바닥의 험한 일을 하다보니 저절로 야성이 생겨났다.
수도가 없는 주막 식당에서 쓸 물을 멀리 밖에서 물통(바께스)으로 나르고 무거운 막걸리 통을 3년 동안 나르다보니 팔뚝의 힘이 세져서, 팔씨름을 하면 친구들의 팔목(두원 친구 등)을 잡아주고도 이겼다.
★Ⅱ. 무식한 노동자로만 살 수가 없어서 스스로 공부를 하여 지성을 좀 갖추게 되었다. 지성을 갖춘 이력들을 싣는다.
※. 학교 경력
①1969.2월 ~ 1971.5월: 영산포 초등학교 졸업후 2년 넘게 학교를 못다님
② 1971.9월: 세광고등공민학교 2학년 편입(중학교 1학년 과정을 건너뜀)
③ 1973.5월: 세광 야간 전수학교 편입함, 1975년도에 고졸 검정고시 합격
1. 초등 졸업후 학교를 못다니던 경용에게 귀인의 도움으로 동광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중도 편입하였으나 3달 뒤에 폐교되어버렸다.
① 어떤 사람이 주막식당에 일하던 16살의 경용이를 보더니 아버지에게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돈도 안들어가는 동광고등공민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하여,
1971.5월에 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으나, 3달 뒤인 8월에 폐교되어 학교가 없어져 버렸다.
②. 2학년 전체 인원이 약 20명으로 스레트 지붕의 초라한 학교마저 없어져 버려 식당 일을 하면서 배울 희망을 가졌는데 한없이 슬프고 괴로웠다.
2. 세광 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달 뒤의 중간고사에서 1등을 하였으나, 중졸 검정고시 시험에 낙방하였다.
※. 고등공민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중졸 자격이 인정되는 비인가 중학교 과정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나이였던 1971.9월에 세광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고 1달 뒤인 10월의 중간고사 시험에서 국어만 빼고 전부 100점을 받아서 평균 97점으로 1등을 하였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건너뛰어 2학년에 편입하여 1등(2학년 3개반 약 120명)을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지만 공부를 못하게 하는 아버지 때문에 중졸 검정고시 시험에 낙방하였다. 합격 평균 점수 60점에서 1점이 모자란 59점이었다.
이놈아 공부하면 당장에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시는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떨어질 실력이 아니었건만 공부에 손을 놓고 식당일만 하여야 하였다.
손님이 없는 늦은 밤에 하는 공부도 못하게 하여 그때는 아버지가 미웠으나 찢어지는 가난 속(사채의 비싼 일수 돈까지 쓰는 빚에 시달림)에서
셋째형의 전남 ①광주의 학비와 하숙비, ②초등 다니는 어린 동생 3명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해도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안되어 검정고시에 떨어지나 합격하여도 별 소용이 없었다.
중졸 검정고시에 떨어져서 창피도 하였지만,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려하니 앞날이 캄캄하여 너무 슬프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였다.
찢어지는 가난때문에 17살의 경용이에게 중졸 검정고시 시험 공부도 못하게 하셨던 아버지는 몇 달 뒤에 큰 병이 생겨서 2년 뒤에 세상을 뜨셨다. 큰부자라고 했는데 찢어지는 가난에 빠진 주막식당 안에서 마음의 병이 드신 아버지였다.
3. 주막식당의 영업이 안되어서 “막걸리 배달하면서 그 많은 가족”을 먹여살리고 있었던 넷째 아들 “경용(만17세의 미성년자임)이에게 유언을 하신 아버님”이다.
경용아 “아버지가 5.6일(1974년도)에 죽는다”고 넷째 아들 경용이한테만 죽는 날을 여러번에 걸쳐서 알려주셨다. 집에 돈이 없으니 공동 묘지에 묻더라도 나무 말뚝을 깊게 박아야 묘지를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경용이에게 신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 경용이에게 저 어린 자식 3명(경용 밑의 동생들)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경용이 위로 형 3명이 있었건만 돈을 벌어서 갖다주는 “만17세의 넷째 아들 경용이에게만 직접 유언”을 하셨다.
경용이가 막걸리 배달하여 “매일마다 받는 현금 일당과 배달 월급”을 아버님께 갖다 주었던, “대가족을 먹여살리는 실질적인 가장”이었으며 제일 믿을만한 자식으로 여기셨던 아버님이셨다.
죽는다는 그날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50세의 어머니는 62세의 아버님 시신을 붙잡고 “이 많은 자식을 놔두고 나혼자 어떻게 살라고”하는 어머니의 슬픈 통곡 소리가 초라한 주막 식당을 울렸다.
비석을 살 돈이 없어서, 버리는 사과 박스의 나무 판때기로 틀을 만들어 시멘트를 부어 만든 시멘트 비석으로 뒷면에 7남 2녀의 자식이름을 써 넣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려고 경용이가 앞장 서서, 초라한 시멘트 비석을 ①고급 돌비석으로 교체했으며, ②99세의 어머님 묘지도 아버님 묘지 부근에 미리 구입(2004년)해놨습니다.
4. 막걸리 자전거 배달을 하면서 야학(세광 야간 전수학교에 편입함)을 다녀야 하였다.
※. 전수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고졸 자격이 인정되는 비인가 고등학교 과정
아버지가 공부를 못하게 하신 뒤로 몇 개월 뒤인 1973년 봄에 가난을 벗어나려고 짐배달 자전거의 중노동 일에 나섰던 경용이었다.
막걸리 배달 3년 동안에 약 200만원을 벌었는데 이 돈은 상계동의 단독주택 3채를 살 수 있는 아주 큰돈이었다.
※. 1달 배달 수입 54,000원(하루 100통Ⅹ1통 배달비18원Ⅹ30일)으로 1년 수입 65만원이고 3년 수입은 약200만원으로 그 당시 상계동의 단독주택 매매시세는 약70만원이었다. 신축한 이화주택의 분양가격이 65만원이었다.
막걸리 배달의 큰 수입으로 셋째형과 어린 동생 3명이 정식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경용이 한명이 형과 동생들 총 4명이 정식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큰 보람으로 생각하며 무거운 노동일을 3년이나 할 수 있었다.
5.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①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②국세청 공무원 등의 경력으로 지성을 좀 갖추게 되었다.
※. 초등학교 졸업 후에 지성을 갖춘 이력들이다.
①5천자 한문 마스터 ②고졸 검정고시 합격 ③국세청 공무원 시험 합격
④국세청 전국 전화 세무상담관 역임 ⑤공인중개사 시험 합격
⑥건축 기능사(도장 부문)자격증 시험 합격
⑦토지 개발, 재개발, 재건축, 건축(주택.상가.창고 등)사업의 이력
※. 부동산과 자서전 등의 책을 만들어 놓음.
식당에서 일하면서도 한가한 시간에 하루에 200자씩 ①5천자의 한문을 25일만에 마스터하였고, 자전거배달하면서 야학을 하여, ②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였고,
무식한 노동자로 살 수가 없어서 만20살인 1976.9월에 짐 배달 자전거를 그만두고 죽기살기로 독서실에서 1달간 공부하여 ③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법인세 전문 세무상담관이 되어 ④국세청 전국 전화 세무상담도 하였다.
42살이던 1997년도에 2달 공부하여 ⑤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여 중개사 사무실도 하였고, ⑥부동산 투자 및 사업(주택, 상가, 창고 등의 건축 등)을 벌였다.
⑥건축 기능사(도장 부문)자격증도 땄다.
==============================
★Ⅲ. 정의로운 야성으로 약자를 구해주었던 사건 들...
①. 식당에서 식칼 행패를 부리던 29살의 청년을 사정없이 패버렸다.
21살 때인, 1976년 봄에, 식당 안에서 부엌의 식칼을 들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니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부엌의 도마 위에 손을 얹어놓고서 손등에 칼날이 왔다갔다 하니,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경용이는 참고 있다가 다가가서 29살의 청년을 사정없이 패버렸다. 지금 68세의 나이에 그 과거를 돌이켜보면 잘 한일이라 생각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칼 행패에 겁이 나서 수수방관하였을 것이다.
②. 경용이의 나이 21살이던 1976년도에, 친구 영주를 폭행했던 건달을 잡아서 경찰서에 넘긴 사건
캄캄한 밤에 길을 가던 영주 친구한테 담배를 달라하여 안주자, 건달 3명이 영주 친구를 사정없이 구타하여 “Ⓐ이빨 여러 개가 손상”당하였고, 눈이 안보일 정도로 “Ⓑ눈덩이가 시커멓게 밤탱이가 되도록 만들었던 폭행 범죄자” 였던
동네 건달을 잡아서 태능경찰서에 넘긴 사건으로 이런 게 진짜 우정이고 정의로운 야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영주친구가 상계역 자리의 다리 옆에서 저놈이다고 확인을 해주자마자, 대낮에 길거리에서 폭력 건달의 허리 혁대를 붙잡아 경용이와 큰 다툼이 벌어져서
주위에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폭력 건달을 편드는 넝마주이가 시비”를 걸었다. 경용이는 폭력 건달을 태능경찰서에 넘긴 뒤에 다음날 새벽까지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에 상계동 집에 귀가하였다.
영주 친구를 위한 열정이 있었기에 폭력 건달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패기를 가졌으며 그 다음날 새벽까지 경찰서 조사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사정없이 구타한 “폭력 건달을 잡으러 친구 영주와 같이 다녀서 찾아 낸뒤에 힘으로 제압”하여 경찰서에 넘기는 “이경용 같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훗날 이런 이경용이가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니는 서모친구에 동조”하면서 배신하듯이 실망을 주면 안된다.
영주 친구에게 행당동 아파트와 관련하여 경용이가 집 마련의 큰 도움까지 주었건만............... 그저 실망할뿐이다.
③. 군대 상병때, 폭행을 하던 최병장(평상시, 졸병들에게 손찌검을 잘함)을 사정없이 패버려서 2일간 영창대기한 사건
1979년도에 육군 수송부 이경용 상병에게 배차문제로 시비를 걸더니 갑자기 뺨을 때린 최덕근 병장을 주먹과 발로 사정없이 패버려서 바닥에 쓰러진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던 작전참모(임모 소령)가 “상병이 병장을 팬다”고 당장에 영창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곧바로 2일 간 영창대기를 하였는데 때마침 육군본부 수송부 검열이 나올 시기와 겹쳐서, 수송관 이진우 대위가 포병 단장에게 “수송부 배차계 이경용 상병이 없으면 육본 검열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고 보고를 하여, 영창이 취소가 되었다.
배동식 친구가 상계동에서 스마일 부동산 사무실을 할때인 2005년경에, 최덕근 병장의 입대 동기인 홍영선 병장이 아내와 같이 25평 아파트를 매수하러 왔다가, 얼굴을 알아본 경용이가 홍영선 병장! 나 이경용이야!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경용이가 소변보러 화장실을 다녀올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건만 도망치듯이 사라져 버린 홍병장이었다. 과거 동기생인 최덕근 병장을 패버린 사건 때문에 26년이 지나도 경용이가 그렇게 무서운가? 참말로 못나고 바보스러운 홍병장이었다.
그 당시에 최병장 폭행 사건으로 군생활이 좀 편해진 이경용 상병이었다.
④. 1983년도에 28살의 공무원일 때, 키가 작은 경용(170)이를 만만하게 보고 먼저 주먹을 날린 30살의 동료(키 183센티)와 맞짱을 뜬 사건
예비군복과 워카를 신고 직장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군대 자랑을 심하게 하던 김모씨에게 방위 근무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밖으로 나오라 하더니
기관장 사무실 앞의 복도에서 갑자기 돌아서더니 뒤따라 오던 경용이의 얼굴에 주먹을 사정없이 날려서 “별이 번쩍하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주 비겁한 놈이네 “당장에 밖에 나가서 정정 당당하게 싸우자” 하였고, 동네 넓은 골목에서 맞짱이 붙어서 발이 빠른 경용이한테
①허벅지를 워카에 얻어맞고 ②주먹으로 얼굴을 가격 당하고 ③밑에서 위로 헤딩을 해버리자 도저히 맞짱 싸움에서 지게 되니
갑자기 도망을 치더니 갑자기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소주 큰병(2리터)을 들고 쫓아오기에 경용이는 얼른 피했다가 길가에 버려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쫒아가니 도망친 김모씨였다.
고교 때는 한 주먹을 했으며,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을 크게 한 대 맞으면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데, 자기가 졌다 한다. 정말 철없이 싸운 일로 우스울 뿐이다.
힘이 없는 사람인 경우에는 폭행을 저지른 김모씨를 상대로 당장에 ①형사고소를 진행시키고, 공무원이기에 ②징계처분을 받게 만들어야 한다.
형사고소(정신적 피해 보상 등 병행)와 징계처분을 받지 않기 위해서 ③싹싹 빌고 봐달라고 애원할 것이며, 주먹 자랑 때문에 ④엄청난 고통을 당할 것이다.
⑤. 1986년도의 31살 나이에, 중앙극장 맞은 편 도로가에서 아가씨의 배위에 올라앉아 폭행을 저지른 20대 초반인 젊은이의 뒷덜미 옷을 잡고 멀리 던져 버린 사건
을지로 세무서 근무당시에, 을지로 3가에서 을지로 세무서쪽으로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아가씨한테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 아가씨가 길가의 택시로 넘어지고
앞으로 고꾸라 쓰러진 아가씨의 배위에 올라 앉아 패던 20대 초반인 청년의 윗옷 목덜미를 잡고서 던져버렸다.
키가 경용이보다 훨씬 컸으며, “야 니가 뭔데 남의 일에 간섭이야 이새끼야” 하며 발길질과 주먹을 날렸으나 피해버리면서,
주먹을 날리려는 그때에 때마침 경찰 2명이 나타나서 그 남녀를 연행해갔으며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했는데, 경용이를 지칭하면서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해주니, 경찰이 그냥 가라하였다.
함께 출장을 갔던 직원 최희식씨는 그런 길거리 폭행사건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이경용 혼자서 폭행 가해자에게 야성을 발휘할 뿐이었다. 무심한 세상 인심인걸!
⑥. 주먹 세계에서 힘 좀 쓴다는 43살의 김모 친구가 28살의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너 같은 놈은 깊이 잠이 들었을 때에 아내가 니 고추를 꺼내서 가위로 자른 뒤에 내다 버려야 한다”고 경용이가 김모 친구와
28살의 이쁜 애인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주었던 1998년도의 일이었다.
아내를 놔두고 너무 바람을 많이 피워서 “경고 및 개망신”을 주었더니 그 20대의 여자 애인을 경용이 앞에 다시는 자랑삼아 데리고 오지 않았다.
⑦. 배드민턴 경기장에서 힘이 없고 무지한 약자를 폭행한 가해자를 만나서 엄중 경고(형사 처벌 및 고액의 합의금 지불)하여 사과했고 다시는 안하겠다함.
경용이가 40대 후반일 때, 체격이 좋은 A가 키가 작고 힘이 없는 무지한 약자 B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망신적인 폭행 사건”으로 위세를 드러낸 이야기를 들은 후에 가해자를 만나서
“명예훼손과 폭행죄로 형사고소”를 당하면 그 죄가 커서 형사처벌과 더불어 고액의 합의금을 줘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위세를 떨치고 개망신을 준 폭행죄 및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당하고 싶냐고 했더니 잘못을 사과했고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하였다.
힘이 없고, 돈이 없고, 배움이 없는 무지한 약자를 괴롭히는 폭행 가해자를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수수방관만 한다. 무심한 세상 인심이었다.
★Ⅳ. 행동하는 지성으로 피해자를 구해주었던 사건 들...
①. 24년 전인 1999년경에 경매로 집을 넘기고 맨 몸으로 쫓겨날 집 주인에게 “2천만원”의 돈을 마련해준 사건이다.
부동산 중개 사무실을 하던 때였다. 창동의 33평 동아청솔아파트가 경매에 넘겨져서 집주인이 돈 한푼을 못 건지고 쫓겨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은행 대출 빚, 여러 건의 고액 가압류 등으로 경매가 완료되면 집주인 앞 배당액이 전혀 없었다.
경매 낙찰가보다 2천만원 이상 비싸게 매매를 시켜서 경매 예상가격으로 배분해주는 조건으로 가압류권자들을 설득시켰고, 이행각서(50평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경용이 책임 진다는 내용) 교부, 가압류 해제 등의 복잡한 서류를 미리 전부 받아서
매매를 성사시킨 후에 경매를 곧바로 취소시켰고 2천만원이 넘는 돈을 집 주인에게 주었더니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였다.
글을 쓰면 너무 복잡해진다. 상당한 지성(지식+지혜)을 갖추지 못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소액의 중개수수료만 받고서 무료 봉사하듯이 해준 일이었다.
가난에 빠질 ①약자를 구해주고 도와주려는 정의로운 야성과 ②행동하는 지성(지식+지혜)이 없으면 절대로 이런 복잡하고 돈이 안되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
경매로 집을 순순히 넘겨주면 경락을 받은 사람이 집주인에게 200만원 또는 300만원을 줄때였으며 2천만원을 마련해서 주니 너무나 고마워 하였다.
집 없이 쫒겨날 설움을 “경용이는 가난을 뼈저리게” 겪어봐서 알기 때문이다.
②. 서민 운동인 배드민턴 전용 경기장이 없어질 처지에 있을 때, 이명박 서울시장 앞으로 민원을 제출하여 32억의 공사비가 들어간 멋진 배드민턴 전용 경기장 12코트를 만들어준 사건이다.
2005년도인 50살 일때에, 서울시(26억 공사비 투입)와 도봉구청(6억 공사비 투입)의 공사비 협조를 받을 수 있는 “단체 민원 문서 작성과 동호인 430명의 서명”을 받아서 이루어낸 경기장 건립 사건이었다.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경용의 행동하는 지성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③. 2005년도에 상가분양 피해를 당한 배드민턴 친목 모임의 이재형씨를 위하여 “형사고소장, 내용증명”을 써주었고
가해자 앞의 상가1층 4개에 대하여 “1억500만원의 가압류 결정”을 받은 뒤에 “피해보상을 크게 받게 해준 사건”이었다.
④. 2008년도에 남양주의 상가 건물을 하자없이 잘 지어준 건축업자 김수원씨에게 “공사 사례비로 2천만원을 더 지급”해준 이경용이다.
공사 과정을 지켜보니 열성을 다하는 김수원(이경용과 창동 배드민턴 친목 모임회원임)씨의 모습을 보았으며 하자 없는 상가건물을 지어주어 너무 고마웠다.
돈 안들이고 약자(피해자)를 도와주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의롭고 베푸는 마음을 가진 지성이 있는 사람은 2천만원의 공사 사례비를 더 줄 수 있는 것이다.
Ⓐ. 이익만 쫓는 사람은 2천만원의 큰돈을 공사사례비로 절대로 그냥 주지 않으며
Ⓑ. ”아주 탐욕한 사람은 공사비를 반대로 더 깎으려 할 것”이다.
2008년도에 2천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30년 넘게 건축공사를 해왔지만 이경용이처럼 공사계약한 금액보다 돈을 더 주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고 하였다.
절대로 2천만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으나 경용이가 강권하여 받게 하였다. 2천만원을 안주어도 그만이지만 냉정히 판단하여 2천만원의 사례비(다른 공사와 비교시 잘 지어줌)를 주는것이 맞다고 생각되어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지급해주었다.
⑤. 경기도 하남시 대명아파트의 무주택 서민조합원들의 빠른 입주와 막대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하남 대명아파트 이야기 2권”을 쓸 정도로 열정을 바친 사건이었다.(2006년~2012년)
무주택 조합원들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하여 경찰서, 대검찰청, 청와대에 고발장, 민원, 진정 등을 접수하였고, 하남 경찰서, 강남 경찰서,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여 조사까지 받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은 사건이었다.
확실한 증거들을 확보하여 증거로 제시하였건만 썩어빠진 검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경용은 수없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고, 거짓이거나 잘못된 글이면 이경용을 형사고소하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형사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 서면 모든 사실(책2권 등의 모든 서류)이 제대로 밝혀져서, 피해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 큰 성과는 있었지만...
⑥. 하남시 남원골 추어탕집 정여사가 소송(부당이득금 4천만원)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여 변호사 없이 경용이가 써준 소송글(2012년)로 승소하여 “5천만원의 이익이 생겨서 크게 기뻐한 사건”이었다.
이경용 부부와 10년 넘게 친하게 지내던 정여사를 위하여, 밤잠을 수없이 못자고 눈에 실핏줄이 터지도록 온 정성을 들여 소송 글을 썼더니, 상대방이 소송을 취하하여 승소한 사건이었다.
약 5천만원(원금4천만원+가산이자)의 이득이 생기게 되자, 정여사의 내연남인 공모씨는 이경용에게 돈을 찾으면 사례를 하겠다하였고, 경용이가 안줘도 된다고 했더니, “변호사 없이 승소하였는데 사례를 안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5천만원을 몰래 찾게 되자, 2017년 초에 이경용의 전화와 문자도 안받으면서 10년 넘은 인간관계를 끊어버렸다. 평시에는 그렇게 다정하게 굴더니 돈5천만원이 생기자 “양의 탈을 쓴 늑대 인간”으로 변해버린 악마같은 내연 부부였다.
정여사와 공모씨럼 “돈과 이익만 쫓는 탐욕한 인간”이 되면 안된다.
⑦. 남양주 상가 인근의 “주유소 사장님. 구덕영 친구. 이경용의 친형 등”을 위하여 소송 글을 써주어서 만족한 소송결과를 얻어 너무나 고맙다하였고, 그것으로 만족한 경용이었다.
⑧. 아주 친한 사람과, 이웃들의 어려움과 피해에 대한 “민원[도시계획 민원(자연녹지→주거지역, 완충녹지 해제 등), 일반민원: 썩은 하천 등], 내용증명(전세보증금 반환, 상가 분양 피해 등), 형사 고소장 등”을 수없이 작성해주었다.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 봉사해준 일이었다.
⑨. 남양주 상가 건축 허가 내용과 설계도면을 보고서
Ⓐ휀스 철망의 담장을 없애고, Ⓑ4m 도로에 편입되는 땅 25평을 환수하고, Ⓒ썩은 악취의 도랑을 시청에서 무료로 하수관 복개 공사를 해주는 건축사업 실적은 전문가도 힘든 일로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하는 지성(지식+지혜)이 있어야 가능하다.
남양주의 논, 밭에 세워진 창고 건물에는 휀스 철망의 담장들이 많이 있다.
이경용의 남양주 상가건물도 논(답) 위에 설계된 휀스철망을 없애고서 간단한 시멘트 경계석으로 대체처리하였다.
법을 찾아보고서 옆의 경계 농지를 침범하지 않는 시설을 돈이 많이 들어가는 휀스로 안하고 간단한 경계석으로 하겠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켜 휀스 비용만큼 돈을 벌었다. 법문을 보고서 상식과 지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며, 고지식하면 안된다.
- 4m 도로에 편입되는 땅 25평을 환수하여 2008년도에 1억 넘는 땅값 손실을 벌었고 썩은 악취의 도랑을 무상으로 “하수관 복개 공사”하여 수천만원의 공사비를 아낀 내용은 생략하겠다.
-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하는 지성(지식+지혜)만이 가능하다. 건축업자 김수원씨가 말하길 이경용씨는 안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⑩. 정의로운 야성과 행동하는 지성으로 가난한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서평원 친구같이 서로 도와주려는 진정한 친구도 있지만
“친구 5명(장씨, 배씨, 서씨, 박씨, 김씨)”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잘 살게 해주고 사업자금 3억을 빌려주었더니
은혜를 웬수로 갚는 행위를 저질러 “배신감, 실망감”을 당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으며 그런 친구인 줄 모르고 도와준 것이 죄인 것이다.
⑪. 정의롭게 공정하게 행동하는 지성으로 근무했던 “1991년도에 청량리 세무서 부가세과에서 있었던 일”들은 “이경용의 공직자 자세”를 보여준다.
Ⓐ정의롭지 못한 세금 체납자에 대해서는 일체의 양보없이 전액 추징하였다.
재산이 없는 바지 사장 앞의 고액 체납세금”에 대하여 재산이 없어서 결손처분하려다가, 내용을 확인해보니 장안동에서 대형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세금을 고의적으로 안내기 위하여 재산이 없는 “바지 사장 앞으로 1년 정도 영업을 하다가 위장 폐업”하는 아주 지능적인 탈세수법이었다.
즉시 자진신고 납부하지 않으면 정밀 세무조사에 착수하여 처벌하겠다고 하니, 좀 봐달라면서 만나서 상의(뻔함: 뇌물 공세할 것임)하자하여 만날 필요가 없으며 빨리 자진신고 납부하라고 통지하여 고액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공정하지 못한 억울한 세무조사 대상임을 파악하고서 즉시 조사대상에서 제외하고 세금 탈루 혐의가 큰 사업자를 조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회사 여직원은 특별세무조사의 내용을 듣더니 펑펑 울었다. 사장님은 중곡동 반지하에서 월세를 사시는데, 백화점 등에 그릇을 납품하며 사업이 너무 어려운데 하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
서울지방국세청에 보고해야 하는 특별세무조사 대상이었다. 장안동 경남 호텔 뒤에 있던 사업장(주택 반지하)으로 어려운 사업자를 조사에서 빼주고 이경용의 담당 구역에 있던 사업자를 이경용이가 직접 선정하여 고액의 세금을 추징하였다.
이경용은 담당 구역에서 신세지거나 잘 알고 지내는 사업자가 거의 없었기에 가능하였다.
조사 대상을 제외시키고 조사 대상을 새로이 선정하려면 “상급 기관인 서울지방국세청의 승인”까지 받아야 하였다. 이경용이처럼 이렇게 업무처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별세무조사를 받으면 고통이 따르기에 함부로 선정하면 안된다.
Ⓒ성인 오락실(폭력 조직이 개입됨) 개인 업체를 특별 조사하여 그당시(1991년도)에 1억이 넘는 고액의 세금을 부과시켜서 결재자로부터 이렇게 세금을 많이 추징해도 되냐 해서, 자진납부할 것이라고 하였다.
Ⓓ 이경용의 바로 위 결재자였던 청량리 부가세과의 안세문 선배님 등은 “상기와 같은 이경용의 근무자세, 성품 등”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다른 직원들이 선호하는 부서를 거의 가지를 않았고, 교육원 성적(94점)이 우수하고 이상하게 어려운 전화 상담이 여러번 오더니 국세청 전국 세무 상담의 무지하게 힘든 자리에 뽑혀 가게 되었다.
아침부터 퇴근때까지 쉴틈이 없이 하루 종일, 전화 상담으로 1년을 시달렸고 세무사 시험공부와 병행을 하다보니 “머리 아픈 병과 다리 병까지 와버려서 세무사 시험을 포기”해야 하였다.
⑫.머리 아픈 병과 다리 마비 증세로 “서울대 병원에서 MRI 정밀 진단”치료를 받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던 “환자 이경용이는 일을 잘한 것도 죄”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의 썩은 검찰은 무죄를 유죄로 만들었다.
훗날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상급 기관인 서울지방국세청에서 정밀 세무조사를 끝낸 뒤에는 조사결과의 과세자료(부과 및 환급)를 일선 하급 기관인 관할세무서에 통보하면 “지역 담당자가 세금 과세업무를 집행”해야 한다.
일선 종로세무서 7급 공무원 이경용은 세무경력이 짧은 “지역 담당자 8급 김현수의 업무”를 도와주라는 직장 상급자인 임영병 계장의 업무 협조에 대하여
“상급기관에서 조사하달한 지시공문”대로 1996. 3. 18~19일경의 2일 만에 세금 환급(5억)과 세금부과(8억)를 집행(이경용과 김현수의 도장을 함께 날인)해야 했으며, “세무조사 재량권”이 없는, “청탁 이권”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단순 업무였다.
이런 업무에 서울지검의 특수부 홍검사는 청탁 범죄를 뒤집어씌웠다.
머리와 다리에 침을 맞으러 다녔던 이경용이는 “몇 달간 일처리를 못하고 있던 김현수의 업무”를 도와주라는 상급자의 부탁을 강력하게 2번을 거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도와주었더니 “청탁에 의하여 세금을 환급을 해준 것으로 누명을 뒤집어씌워” 직장을 떠나게 되어, 피눈물을 쏟아야 하였다.
법인세 “5억600만원의 세금환급”과 3억을 더 부과한 소득세 “8억5150만원 세금부과” 업무를 집행하여, 업무가 완료될 때까지 회사 대표 곽사장은 미국에 출장 중이었고, 환급세액은 이미 법인계좌로 입금된 이후에 국내로 귀국하였으며,
1995. 10월 ~ 12월경에, 상급기관인 서울지방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직접 받았던, 회사 대표 곽사장은 일선 세무서로부터 환급과 세금부과될 내용을 미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곽사장이 이경용한테 청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청량리 세무서 부가가치세과에서 보여준 Ⓐ이경용의 공직자 자세와 국세청 Ⓑ전국 법인세 세무상담관으로 엄청난 고생을 한 이후에 근무했던 종로세무서 법인세과에서 Ⓒ남의 업무를 대신 처리해주고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여야 하였다.
좋은 일(세금 3억을 더 부과)을 해주고도 범죄 날벼락을 맞아버린 꼴이었다.
파란만장한 운명인가? 팔자인가? 싶었다.
청탁범죄의 누명을 씌운 악인(서울지검 특수부 홍검사)에 대한 증오, 미움을 가지고 살면 이경용의 삶이 행복해질 수가 없어서 증오와 미움의 집착을 버려야 하였다.
공무원 신분인 홍검사가 출세하기 위하여 허위 수사실적을 올렸던 "무죄를 유죄로 만들어 누명을 씌우는 극악한 범죄(사형에 처하여 재발을 막아야 함)"는
Ⓐ살아서도 언젠가는 꼭 천벌을 받을 것이며,
Ⓑ죽어서도 그 "영혼에 극악한 악업의 딱지가 붙어서 천벌을 받을 것"이다.
참회와 반성은커녕 지금까지 진정한 사죄조차 하지 않는, 인간쓰레기이기에
그 "더럽고 추악한 이름(특수부 홍검사 이름: 오랜 세월 너무 많이 글을 올려서)"을 이글에 올리고 싶지 않다.
⑬. 나쁜 사람으로 매도된 “허위 보도와 헛소문”에 대하여 시정하기 위하여 이글을 쓰는 한가지 이유이다.
국가를 위하여 세금 3억을 더 부과하고, 친구를 위하여 수많은 도움을 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여도 ①비리를 저지른 공직자라고 허위 보도를 내보냈고, ②친구들한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헛소문을 내버리니
이경용은 20대의 젊은날부터 지금까지 ①정의로운 야성과 ②행동하는 지성으로 살아온 이력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1996년도에 “3억을 더 추징”한 경용(41살)에게 누명을 씌워 직장을 잃어버렸고, 20년 근무한 공무원 연금도 박탈 당하였다.
상급기관의 지시공문내용대로 업무를 집행하여 죄가 될 수 없었으며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도 소용없었고 조사 및 수사도 안하고 공람 종결시켜버렸다.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청와대, 대검찰청, 법무부, 권익위원회, 국회 등”에 수많은 진정, 민원 글을 접수하였고,
“전국의 대학교수님(5,500분), 국회의원님(250분), 법무법인 변호사님(3,500분)의 이메일”로 많은 글을 보내 “서울지검 특수부 홍검사의 범죄조작”을 널리 알렸다.
이경용이를 깔보고 개무시한 대가로 “홍검사의 파렴치하고 더러운 범죄조작의 고문 수사 내용”은 “대검찰청, 법무부 홈페이지와 이메일(교수, 국회의원, 변호사 등)”을 통하여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봐서 홍검사는 개망신을 당하였다.
훗날, 책 등으로 기록 전파되어 ”홍검사는 죽은 뒤에도 반인륜의 고문수사 범죄자로 영원히 낙인“이 찍힐 것이다. 홍검사는 집안 망신이고 자식들은 아버지 때문에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도 큰 벌이고 더 큰 천벌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라서 구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개망신을 주어도 소용없었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고 해도 홍검사는 묵무부답이었다. 안되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포기해야 하였다.
이런 “추악한 검사 악인”을 만나서 “공무원을 퇴직한 후에 부동산 분야의 길”을 걷게 되었고 명예회복의 글을 쓰다 보니, “부동산 책 2권, 자서전 3권 등을 쓰게 되는 성과”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 성공을 이루어 형제, 친구 등에게 집 마련 등의 도움을 주면서 “많은 업적을 이루게 된 반전의 인생”을 살게 되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국세청 전국 세무상담관 등의 지식 이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를 위하여 수없이 행사하였던 일들을 상기와 같이 실었다.
⑭. 이경용이는 부동산 사업 등으로 큰돈을 벌어서 혼자만 부자되기가 싫었고
“Ⓐ 못배우고 가난하고 똑똑하지 못한 형제와 누나”,
“Ⓑ가난한 친구 등”을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하는 따뜻한 지성을 펼칠 수 있게끔 적극 지지해준 아내 덕분”이었다.
경용이는 아내와 카페에서 지난 날에 돈을 벌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다가 그때 그때 벌었던 돈을 누구에게 주지 않고 적립해서 투자금으로 계속 사용했다면 강남에 빌딩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경용부부는 그런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친척 중에 엄청나게 큰 부자(미국 맨해튼에 빌딩, 서울 강남에 빌딩 소유자)가 있어도 “가난한 형제와 여동생을 도와주지 않는 것”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갔다.
★Ⅴ. 이글을 쓰는 목적이 약자를 도와주는 ①정의로운 야성과 ②행동하는 지성을 가져야 하며 ③돈과 이익만 쫓는 탐욕한 인간이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깨달아야 할 인생 철칙이 있다.
문(배움의 지식)은 무(주먹)보다 강하다. 스스로 좀 배워야 한다.
주먹으로 흥한자, 주먹으로 망한다. 깡패, 건달, 조직 폭력 생활을 하면 안된다.
도박으로 흥한자, 도박으로 망한다. 공짜로 돈을 버는 도박을 하지 마라.
지혜 없는 자가 무식하면서 용감하면 큰 사고를 치고 큰 재앙을 가져온다.
돈과 이익만 쫓는 탐욕한 인간은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탐욕한 인간은 낯짝이 두껍고 창피도 모르기에 계속 돈과 이익만 쫓는다.
좋은 일을 하거나 베풀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지게 되어 있다.
약자를 도와주는 ①정의로운 야성(때 묻지 않은 야생의 자연 성품)과 ②행동하는 지성을 갖춰야 한다.
============================
★Ⅵ. 인간쓰레기의 악인(특수부 홍검사)에게 당했던 과거(1996년)의 불행은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즐겁게 살고자 한다.
1. 죄가 없던 이경용에게 ①변기통 물고문 수사, ②온갖 쌍욕, ③폭행을 하였고 죄 없음을 입증할 ④경위서 증거(홈검사가 법정에 제출하여 무죄 받게 해준다 했음)까지 없애버린 ⑤사기꾼 홍검사였다.
2. 특수부 홍검사가 범죄를 만들기 위해 온갖 나쁜짓(고문, 폭행, 쌍욕, 허위증언자 내세움, 거짓말 등)을 저지르기에 특수부 검사들이 욕을 처먹는 것이다.
특수부 검사들 중에 홍검사 1명만이 이런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쓰레기이며 개, 돼지만도 못한 인간 말종이었다.
3. 홍검사가 부장검사로 있던 서울지검 특수3부는 이경용이 제출한 “죄없음을 밝혀줄 명백한 증거를 조사 및 수사도 안하고 공람종결”시켜 버렸다.
4. 홍검사는 특수부에서 이런 인간쓰레기 짓을 하고도 검사장(대검 기획조정부장)까지 출세하였고, 변호사 개업하여 “1년에 100억씩 몇백억”을 벌면서 범죄를 저질러 2년의 감옥을 살았다.
5. 이런 인간쓰레기 홍검사를 만난게 이경용의 불행이었다. 오래된 과거의 불행은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즐겁게 살고자 한다.
----------------------------
★Ⅻ. 대학을 포기하고, 큰돈을 벌어서 형제, 누나, 외사촌 누나에게 수없이 그냥 주는 것은 가난한 약자(형, 동생, 누나)를 도와주려는
정의로운 마음(야성: 타고난 성품)이 있어야 하고 행동하는 깨달음(지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혹독한 가난에 빠진, 슬픔에 빠진 Ⓐ외할머니, Ⓑ어머니를 돕고 잘 모셔주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경용이의 일신의 출세(대학 간판, 부자 등)는 뒷전이었다.
훗날, Ⓐ외할머니는 경용이 집에서 90세로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99세로 경용이 부부가 32년을 모시며 살고 있다.
①. 가난에 빠진 딸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셨던 외할머님!
1969년도에 주막식당을 개업하였고, 1년 뒤인 1970년도에 시골 과수원에 있던 “외할머니, 둘째형, 동생 3명”이 주막식당 집에 합류하였다.
경용이와 함께 잠을 잤던 초라한 주막식당 안의 2평도 안되는 방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시던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68세의 경용이는 눈물이 난다.
15살(1970년도)의 경용이가 “할머니! 어제 밤에 우셨어요?”하자 아니야! 하신다. 베개에 마른 눈물 자국이 있는데요? 어젯 밤에 Ⓐ아들(경용이 외삼촌)을 꿈에서 만나 울었다 하신다.
그 뒤에 또 베개에 눈물 자국이 있어서 또 물어보니 “Ⓑ남편(경용이 외할아버지)”을 꿈에서 만나 울었다 하신다.
1년 전만 해도, 정미소 쌀 공장과 큰 기와집을 가지고 살던 Ⓒ딸(경용이 엄마)이 초라한 월세의 주막식당에서 밥, 술, 안주를 팔고 있으니 그 딸이 너무 불쌍하여
2평도 안되는 작은 방에 주무시면서 죄없는 베개에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리셨던 외할머니 때문에 어린 15살의 경용이로 돌아가니 슬프기 그지없어 눈물이 흘러내린다.
옆 집인 경기쌀상회의 아줌마가 먹다가 남은 식은 흰 쌀밥을 주막 식당에 갖다줄때마다 경용이의 어머니는 고맙다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먹였다.
배고픔을 모르면 식은 밥을 줘도 고마운 줄 모른다. 외할머니는 딸(경용이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팠을 것이다.
외할머님이 90세(1987년)로 돌아가실때까지 경용이는 매달 공무원이 받는 월급날마다 용돈을 드렸고 가끔씩 좋아하시는 소고기 육회를 사다 드렸다. 현재 99세의 어머님도 육회를 좋아하셔서 매주 2번씩 육회를 해드리는 경용이의 아내이다.
외손주 9명을 돌봐주시고, 정미소 안에서 고추방아를 찧고, 과수원에 계시면서 매년마다 호미 1개가 닳아 없어지게
“꼬부랑 허리가 되도록 7년(1963년~1970년) 동안 밭일”을 하셨던 “외할머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매달 용돈과 육회 대접”이었다.
박봉의 공무원 월급에서 매달, 외할머님께 용돈을 드리다보니, 수중에 돈이 없을때는 “경용이와 동생들은 외할머님께 돈을 수시로 빌리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돈을 빌려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어 경용이 또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외할머님이시다. 함께 살았던 경용이의 아내인 넷째 손부를 너무 좋아하셨다.
경용이한테 말씀하시길.. 손부 중에서 최고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②. 가난한 형, 동생, 누나를 도우려고 경용이는 대학을 포기하고 부자되기도 포기하였다.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거의 꼴등하여 중학교를 억지로 졸업한 여섯째 동생과 누나를 보면 항상 불쌍하였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막노동일로 살아가는 둘째형(속도 많이 썩힘)과 가난하게 살아가는 외사촌 누나도 마음에 걸렸다.
외삼촌이 6.25때에 세상을 떠나버려, 외사촌의 정임이 누나는 10살 때에 친할머니(경용이 외할머니) 손을 잡고 경용이 집에서 12년(1956~1968년)을 살면서 사촌 동생 9명을 돌봐주고 키워주고 밥해주고 빨래를 해주신 정말, 고마우신 누님이다.
외사촌 누나의 은공을 알기에 경용이는 친누나보다 더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경용이가 노모 한사람만을 모시고 살아가는 외아들이라면 무조건 대학에 갈 것이며 혼자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외할머님, 어머님, 동생 3명을 내팽개치고 혼자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 부자 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이기적이고 탐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해야 하였다.
1976.10월의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성적 우수자인 1차 발령자(응시 접수자: 75,000명, 합격자: 1500명, 1차 발령자: 200명) 200명 안에 들어
대전 교육원에서 합숙 교육을 받았는데 명문고등학교(덕수 상고, 서울공고, 용산고, 광주일고 등)출신들이 많았다. 경용이 혼자만 검정고시 출신이었다.
국세청에 근무할 때, 옆 동료들이 야간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면, 그 초라한 검정고시 간판을 없애버릴 야간대학을 너무나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③. 경용이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셋째형은 “야간 대학교 졸업자로,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 졸업 간판을 달고서 고위 공직자”로 출세하였으나
“노모(요양원만 보내려함)모시기를 아주 싫어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누나 2명을 전혀 돕지도 않는다. 가난한 약자(형제, 누나 등)를 도와주려는 야성과 지성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식들한테는 집도 사주고 50평이 넘는 큰 아파트에 잘 살고 있는데 그런 삶도 존중해주면 그만이다.
경용이도 대학에 다니게 도와주기는커녕 대학을 가지말고 돈이나 벌라하였다.
셋째형이 중고등학교에 다니게끔 “5년 동안을 식당, 공장, 짐 배달하면서 뒷바라지 해준 동생 경용이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인간이다.
셋째 형 부부를 안보고 사는 것이 경용이 부부의 행복이다. 경용이 부부는 과거 점을 보러 가면 법 없이도 살아갈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경용부부에게 너무나 큰 상처와 고통을 준 셋째형 부부이다. 운명인 걸 어쩌겠나?
④. 부동산 투자, 부동산 건축 사업 등으로 수익금의 큰돈이 1990년부터 들어오면,
Ⓐ. 1969년도에 정든 고향을 떠나게 한 부모님의 “시골 빚(정미소 부도)을 이자를 붙여서 1992년도에 거의 갚아”주었고,
마지막 한사람을 2007년도에 찾아내어 원금 2만원에다가 38년이 지난 이자를 많이 붙여서 원금의 50배인 100만원을 갚았다.
Ⓑ. 형, 동생, 누나, 외사촌 누나 등의 집마련 대금 및 생활비로 1990년부터 “수백만원, 수천만원, 1억이 넘는 돈”을 수없이 그냥 도와주었고
Ⓒ. 집이 없고 가난한 친구들에게 1993년부터 “수백만원, 수천만원을 이자를 안 받고” 수없이 그냥 빌려주었다. 친구들이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 이경용이가 베풀었던 1980년대, 1990년대의 수백만원, 수천만원의 돈은 현재 2023년도의 돈가치와 비교가 안된다.
1990년도에 경기도 분당 아파트 32평의 분양가격이 5800만원이었다.
★Ⅷ. 초등학교만 졸업시키고 일만 시켰던 ①부모님을 탓하지 않았고, 동생 경용이만 돈을 벌게 만들었던 ②형 3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위로 형 3명이 있건만,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에 7년간을 식당, 공장, 배달 등의 험한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게 만들면 “부모와 형”을 탓하고 원망할 것이다.
학교를 제대로 안보냈어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자질과 능력을 감사히 생각하고 경용이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 생각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6년 동안의 담임 이름,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2학년:문민자, 3학년:박병업, 4학년:신중근, 5학년:선준규, 6학년:임영규선생님
초등학교 6년 동안, 이야기 책1권을 읽은 적이 없었다. 편지 1장을 쓴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후, 고졸 검정고시 합격하고 국세청 시험에 합격할때까지 7년간을 식당, 공장, 짐 배달에 매달려서 소설 책 등을 읽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무식한 사람으로 살 수가 없음을 깨닫고, 후에 지성을 깨우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결과 글도 꽤 잘 쓰게 되었다.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
★Ⅸ. 외할머니 살아생전에 잘 해드린 것이 지금도 “큰 기쁨이고 좋은 추억”이다.
1. 외할머니는 외손자 7명 중에 경용이가 최고로 이뻤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①말 잘듣고 심부름 잘하지, 커서는 90세로 돌아가실때까지 ②모셔주지, ③매달 용돈을 주지, ④고급 담배를 사주지 좋아하는 ⑤육회를 사주는 손자는 경용이뿐이었다.
2. 외할머니한테 용돈은커녕 자신을 낳아준 노모를 모시고 병원(경용이가 10년 넘게. 아산병원 다님)가는 것도 아주 싫어하고,
한의원 침 맞으러 가는 것도 너무 싫어서 동생 경용이한테 전화로 심하게 화풀이하는 불효자식이 무슨 놈의 형제우애가 단 한푼이라도 있겠는가?
노모 사후에야 불효자는 웁니다. 형제우애하자는 꼴볼견이 없었으면 한다.
모두 생전의 악업!인걸 왜 모르나?
3. 외할머니가 최고로 사랑하는 아들이 사망한 후에 “홀로 남겨진 외동딸인 그 친손녀 정임이”를 외할머니가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실까?를 잘 아는 경용이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친손녀인 외사촌 정임이 누나가 “아파트를 마련”한 뒤에 경용이가 빚(1992년경)을 물어보고나서 “집에 있는 빚을 전부 갚아주었던 것입니다”
4. 외사촌 누나의 남편(매형: 박정봉)께서는 그 전에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극구 사양하며 절대로 안 받겠다고 하였으나, 누나에게 수중에 돈이 있어서 드린다고 강권하여 빚을 전부 갚아드렸다.
매형께서는 2018년에 세상을 뜨셨으며, 시신을 의료기관에 미리 기증(사후 2년 뒤에 화장된 유골을 인계받음)하셨던 분이며, 인품과 성품이 너무 좋아서 경용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셨다.
사촌 매형께서 경용이한테 고마움을 표시한 것을 “큰 기쁨과 좋은 추억”으로 여깁니다. 가진 자(동생 경용)가 가난한 자(외사촌 누나 댁)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5. 외사촌 누나가 딸을 시집 보낼 돈이 없어서 29년 전(1994년)에 결혼 혼수비 350만원을 도와주었다. 경용이의 아내는 이런 도움을 주는 것을 너무 좋아하였다.
6. 외사촌 누나의 딸이 낳은 아들이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현재(2023년), 미국의 “명문 스텐포드 대학교(서울대 국비 지원 박사과정)에 유학” 중이다.
경용이가 무지하게 좋아했던 “외할머니의 친손녀의 외손자”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보내주는 국비 지원”으로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교에 박사 유학”을 공짜로 갔으니, 경용이 부부는 너무나 기뻐했고 많이 많이 축하해주었다.
====================
★Ⅹ. 막걸리 배달의 막노동자가 갑자기 5개월 후에 “국세청이 공무원이 되자”, 대접이 달라졌다.
1976.9월에 막걸리 배달을 그만두고 1달간 독서실에서 공부한날로부터 4개월 뒤인 1997.2월에 국세청 공무원이 되어 청량리 세무서에 발령을 받았다.
공무원이 되어 막걸리 배달 사무실을 찾아가니 “사장님, 사무장님, 배달 형님들”이 크게 환대 및 축하해주었다. 그렇게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지난날과 너무 다르게 대접해주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왠지 모를 과거의 푸대접과 어우러져 마음이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였다.
상계 시장의 오두막같은 약3평의 주막식당 주변의 시장 상인들께서 정말 기뻐하시며 진실되게 축하해주어 고마웠다. 막걸리 배달하던 사람이 갑자기 국세청 공무원이 된 것에 대하여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시장 안팎의 정식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자식들(정육점. 참기름 집. 고추집. 포목집. 사과가게. 생선 가게. 야채가게. 떡가게. 쌀가게 등)이 공부를 잘했고 취직을 잘했다는 소식을 거의 듣지를 못하였는데 오두막같은 주막식당 집의 아들 경용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냐고..크게 웃으며 축하해주어 너무 고마웠다.
상계시장 안에서 완장 차고 시장 임대료를 걷어가시던 키가 작고 당차게 생기신 경비 반장님도 축하해주시었다.
상계시장은 주식회사여서 대표이사의 부인이신 사모님과 경리 여직원도 반갑게 대해주셨다. 도봉세무서 법인세과에서 상계시장의 경리 여직원을 만나면 서로 인사하며 반갑게 지내게 되었다.
지난날 기와공장 사장님이 경용이를 만나서 자기 소유의 “4층 건물에 데려가더니, 1층에서 큰 슈퍼를 하는 딸을 소개해주고서는 사귀어 보라”하였다. 경용이가 사윗감으로 괜찮아 보였던 모양이다. 건물 4층을 보고서 딸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경용이는 퇴근하면 상계시장의 초라한 3평의 식당에 꼭 들러서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57세(1981년도)일 때 12년간의 주막식당을 못하게, 경용이 집에서 외할머님과 편하게 사시게 해드렸다.
경용이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기인 7년(1969~1976년) 중에 4년간을 식당에서 밤 10시 넘도록 일을 하였고, 식당이 장사가 안되면 기와 공장에 다녀서 데모드(기술자 보조)일과 기와 지붕을 이러 다녔다.
3년간을 새벽에 일어나 하루도 쉬지 않고 막걸리 배달을 하다보니 수학여행 한번 가지를 못하였고,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그 “7년 동안 집에 TV가 없는 생활”을 해야 하였다.
남들처럼 문화생활은커녕 소설책을 읽을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 7년 동안에 경용이 또래의 친구들이 아는 노래도 거의 불러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였다.
경용이는 아내와 함께 승용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모르는 노래와 모르는 가수”가 많아서 그 시절을 되짚어보니 “노래와 문화”가 없는 암흑기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경용이는 그래도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똑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못 배운 무지, 무식으로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크게 행운을 잡은 것이라 생각된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능력과 자질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
★Ⅺ. 68세의 이경용은 정의로운 야성과 행동하는 지성(지식+지혜)으로 상기와 같이 수많은 일들을 해 온
지난날에 대하여 조금의 위안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부모 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14살부터 21살까지 7년 동안을 식당, 공장, 배달 노동자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가장이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하였다.
이경용의 아버지는 19살이던 1931년도에 일본에 혼자 건너가서 고무신 공장(짚신 신던 시절)을 하실 정도로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신 분이고, 바로 위의 7대 할아버지는 호조판서(경제 장관 격임)를 지낸 집안이었지만,
상계동 주막 식당집 부근의 채소. 과일. 생선. 쌀 가게 등의 가난한 자식들도 다니는 중고등학교도 전혀 다니지 못하고 밑바닥의 험한 일을 할 때는 “천민의 자식, 종의 자식”만도 못하다는 생각에 슬프고 괴로운 어린 날의 아픔이 있었다.
명문대학 4년을 나와도 할 수 없는 “가난한 대가족을 부양”하면서도 ①정의로운 야성과 ②행동하는 지성으로 “약자와 피해자들을 도와주는 수많은 일”을 하여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경용의 인생 철학은 혼자만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형제, 친구,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잘 살기를 바라고, 잘되기를 바라고, 도움을 주면 기분이 좋았다.
탐욕한 사람은 상대적 “부자임에도 술값, 밥값 조차 잘 내지를 않는다”. 자기보다 형편이 안좋은 사람(친구 등)이 돈을 내면, 기분이 좋을까? 싶다. 탐욕하면 부모에게 용돈조차 인색하고 가난한 형제들에게도 잘 도와주지를 않는다.
경용의 막내 동생은 형제들을 많이 도와준 “형님을 정말, 존경한다고 울먹인 적”이 있었다.
경용의 아들은 올해(2023년) 인사 문자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아버지의 배려심 넘치고 후한 마음이 지금 모두를 복스럽고 건강하고 복 많은 가족이 되게끔 한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번 주에 뵙고 술 한잔 해유.”하였다.
아빠와 술을 함께 하기를 좋아하는, 아빠 엄마와 함께 여행가기를 좋아하는 아들이 있어서 너무나 좋다.
99세의 노모를 32년간 모셔주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행복하게 즐겁게 노년을 보내고 싶다.
2023. 3. 12일 이경용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