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31
열전27을 되짚어본다.『권석우(權錫友) 義士는 산남의진에 종군하여 전사하고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거성동민이 매년 음력 2월 11일에 제사를 거행하고, 위토(位土) 밭 7두락(斗落)을 동중(洞中)이 관리하다.』『김준화(金俊和) 義士는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활약하다가 후에 보현산 아랫마을 탑정동에 은신하였다. 그가 서거한 뒤에 탑정동중(洞中)이 그의 제사를 부담하고 묘에 표석까지 이룩하였다.』
내 조상 모시기도 꺼려하는 이 시대가 되다보니 공허한 이야기지만 예전에 우리 어른들은 나라를 위해 애쓴 분들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 것 같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인 줄 알았던 것이다. 개인의 행복이 결코 그냥 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세월이 너무 오래가고 있다. 긴 세월 우리 민족을 괴롭혀온 일본이 하는 짓도 심상치 않다. 기우(杞憂)일까?
조성목(趙性穆) 義士
자는 덕수(德叟), 호는 매하(梅下)이며, 관향은 함안(咸安)이다. 청송서 흥해로 우거(寓居)하였다. 당시 학자로 유명하였고 후진의 교육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산남의진이 일어나서 경상도 각 군에 주동 인물을 배정할 때, 공은 최세한, 정래의, 김창수 등과 더불어 흥해지방을 부담하여 군인 징발과 물품 수집을 하여 진후보급을 충분히 하고 연해(沿海)방면 정세를 잘 정탐하여 진중에 전달하고 기모양책(奇謀良策)을 다하였다. 의진이 흩어진 후 은신하였다가 약 20년 후인 병인(丙寅:1926)년 봄에 정순기, 정래의 등과 더불어 산남의진 순국선열을 추모하기 위하여 참동계(參同契)를 조직하고 계원을 모집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왜적에게 붙잡혔다. 포항, 경주 등지의 적의 옥에서 고초를 당하고 돌아왔으나 광복을 못보고 서거(逝去)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8><山南倡義誌 卷下 P80>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박한종(朴漢宗) 義士
자는 치만(致滿), 관향은 밀양(密陽), 밀양 출신이다. 성품이 활달하고 문학이 풍부하여 당대의 저명인사다. 을미의병(乙未: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 일어난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지를 찾아 고향을 떠나와서 영천시 자양면 도일리에 머무르며 청년들을 교육시키면서 때를 기다렸다. 산남의진이 일어나자 권대진 등과 더불어 밀양, 영산, 청도 등지를 책임지고 소모하고 군수품을 수집하여 진후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의진이 무너지매 은거하였다가 계유(癸酉1933)년에 광복을 못보고 81세를 일기로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9><山南倡義誌 卷下 P81>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원세은(元世殷) 義士
자는 사문(士文), 관향은 원주(原州). 무신(戊申:1908)년 정월 3일 광천전(廣川戰)에서 이규환(李圭桓)이 중상을 입고 동지들이 원조하여 공의 집에 들였다. 주민들이 적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지라, 공은 주효(酒肴)를 준비하여 동민을 대접하고 이규환을 자기의 처제(妻弟)되는 양으로 선전시키고 수개월간 치료를 하여 보냈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1><山南倡義誌 卷下 P77>
서인찬(徐仁瓚) 義士
일명 준성(俊成), 호는 죽하(竹下), 관향은 달성(達城). 역리(易理)를 잘 이해하였기로 주역(周易)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나이가 많아 종군은 못하고 진후(陣後)에서 여러 번 기묘한 책략을 냈다. 청송동부진을 후원하고 진후를 추종하다가 안동지구에서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1><山南倡義誌 卷下 P77>
서중표(徐中杓) 義士
자는 극언(極彦), 관향은 달성(達城). 서인찬의 족질(族姪)이다. 만부(萬夫)를 상대할 만한 용맹이 있어 서장군이라 하였다. 의진 초기에 경주지방을 책임지고 소모(召募)함에 험난함을 피하지 않고 활약하더니 행군(行軍)시에는 병을 얻어 종군하지 못하고 한을 머금은 채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1><山南倡義誌 卷下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