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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종 이야기
작은 종은 황동 물을 거푸집에 부어 굳혀 만들었다. 작업실에는 똑같은 종들이 많았는데 작가는 유독 그 종에 눈길이 갔다. 그 속에 작은 새 비슷한 혼이 깃든 것처럼 자꾸 말을 건넸다. 예민한 작가의 상상이었다.
그는 작은 종을 따로 챙겼다. 종의 아래쪽에 전각을 넣었다. 귀모양이 튀어나와있는 부엉이 그림 안에 샘물체로 소만,이라고 적었다.
24절기의 하나인 소만(小滿)은 양력으로 5월 21일이다. 이 무렵은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성장하여 가득 찼다. 보리가 익어가며 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어대는 시기이다. 좋은 때였다.
손 놓고 간간히 옛날을 회상하는 노작가는 지금도 보리누름적에 고향 풍경이 선했다. 종걸이까지 신경을 써 같은 양각을 새겨 넣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해 종 전면에 바람 부는 보리밭을 넣었다. 기억 속 풍경이 그의 손끝에서 살아났다. 그는 보리이삭 사이에 그때의 바람을 집어넣었다. 바람소리를 새기는 일은 쉽지 않아 오래 끌었다.
그 작업이 끝나자 진고동색으로 칠하고 군데군데 덧칠하여 닦아내었다. 이제 그의 오랜 향수와 그로인한 결핍의 향기가 보리밭 바람소리를 타고 종소리에 실릴 것이다.
그는 작은 종을 가게 앞에 걸어두고 간간이 바라보았다. 주름진 그의 얼굴에 어렴풋이 소년의 미소가 비쳤다. 바람 불 때는 눈이 자주 갔다. 고개 숙인 보리이삭이 연신 출렁거렸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댕대앵, 하는 가운데 섞여 들리는 듯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돌개바람이 일었다. 한 번씩 작은 종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내곤 했다. 괜찮나, 싶어 내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즐거워보였다.
산골 분교의 소사라는 남자가 왔다. 분교에 걸어놓을 종을 사러왔다고 했다. 초로의 남자는 진열된 종을 꼼꼼히 살피고 다녔다. 둘러보던 중 돌개바람이 한 번씩 몰아쳤다. 그때마다 가게 앞에 걸린 작은 종이 애원하듯 댕댕거렸다. 마치 나 좀 봐달라고 부르는 듯했다.
그 소리에 끌렸는지 소사가 작은 종 앞으로 갔다. 센바람에 댕댕거리는데도 추를 흔들어 땡땡 쳤다. 그는 작은 종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여기 글자는 무슨 뜻이래요?” “아, 그거요. 이 종이 소만 일에 태어났거든요. 제 호도 되지요”
“5월 21일, 맞지라?”
“네. 맞아요. 농사짓나 봐요?”
“평생 혀 온 일이지라. 그란디, 이 종이 맘에 쏙 드는디라.”
“그건 안 돼요. 다른 걸 골라보세요.”
“아들 녀석 생일이 5월 21일이어라. 이름이 소만,이고요.”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어라. 뭐 할라고 없는 말을 하겄소.”
작가란 원래 제 작품이 진정 원하는 사람을 만나 쓸모 있길 바란다. 그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살만큼 살아서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귀히 여겼다. 숫되게 보이는 소사에게 호감이 가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 싶었다.
작은 종을 싸들고 가면서 소사는 들뜬 기분에 모르는 사람을 보고도 괜히 웃어주었다. 아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어 서둘렀다. 시외버스를 타고 읍에서 내려 하루에 두 번밖에 안 다니는 군내버스를 탔다.
집에 와서 작은 종을 풀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만하면 쓸 만한데 생콩을 갈고 들기름을 섞어 무명천에 담았다. 도배장판을 콩댐하듯이 공들여 닦고 닦았다. 반질반질해지자 그는 또 추 끝에 줄을 매달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이학년인 아들 소만을 데리고 학교로 갔다.
작은 학교는 연파란 지붕이 산뜻한 단층교사였다. 교실은 두 칸이었다. 교실 한 칸에서 6학년 다섯 명, 사학년 네 명, 삼학년 네 명 그리고 소만을 비롯한 이학년생 세 명이 다 같이 공부를 했다. 나머지 한 칸은 도서실 겸 실험실, 미술실, 음악실 등 다용도로 사용했다.
두 칸 교실 사이에 출입문이 있는데 그 출입문 왼편 처마 밑에 종걸이를 고정시키고 작은 종을 걸었다. 종은 소만이만 한 애도 까치발을 하면 줄을 잡고 칠 수 있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에서 창문을 열고 칠 수도 있었다.
“여기 뭐라고 쓰였는지 읽어봐라?”
“소만, 내 이름이잖아.”
“맞아야. 기특허게 니랑 생일도 같아야. 이 종을 만든 작가 선생님이 니 선물로 싸게 주는 거라 했은께 니 종처럼 잘 보살펴야 쓴다.”
그리고 소사는 아들의 손을 이끌어 종을 치게 했다. 땡땡땡, 땡땡땡…. 어서와, 어서와, 하는 소리가 산골 마을에 퍼져나갔다. 단층교사 앞에 줄지어 선 스트로브잣나무 다섯 그루가 신나는지 반짝반짝했다. 금싸라기 같은 아침 햇살에 어깨를 쫙 펴고 바늘잎을 가다듬었다.
아이들은 천천히 걸어오다 말고 귀를 기울이더니 이내 달렸다. 그 동안 선생님이 수업 끝, 하거나 이제 수업 시작하자, 해서 시시했다. 종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달려와, 달려와, 하며 구석구석을 날아갔다. 집에서 꿈지럭거리던 순이도 얼른 학교에 가고 싶어 서둘렀다. 오늘 땡땡이를 칠까, 딴 궁리를 하던 혁이도 종소리에 홀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달렸다.
작은 종은 신이 나 열심히 땡땡거렸다. 학교 뒷산에 새들도 종소리를 흉내 내어 지저귀며 운동장으로 날아들었다. 산짐승들도 처음 듣는 소리가 좋아 갑자기 뛰거나 종소리를 따라 고개를 빼고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작은 종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작은 종이 온 해에 입학생이 없던 분교는 점점 학생 수가 줄어들어 구 년 뒤에 폐교를 했다. 중학생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난 소만은 객지 생활에 지쳐가면서 작은 종을 잊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단층교사처럼 작은 종도 세월의 그을음이 내려앉았다. 폐교엔 풀이 무성하고 새들이 날아들고 산짐승들이 몰래 내려와 어슬렁거렸다. 아무도 작은 종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새들이 작은 종 어깨에 앉았다 가기도 했지만 구린 똥만 갈기고 갔다. 바람이 불면 한 번씩 댕댕거렸지만 그 뿐, 누구도 줄을 당겨 신나게 종을 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저녁 무렵 한 남자가 폐교에 몰래 들어왔다. 며칠 전 폐교를 둘러보고 간 남자였다. 미리 봐두었는지 재빨리 작은 종을 떼었다. 밤손님에 놀랐는지 나무에 앉아있던 직박구리 한 쌍이 푸드덕거렸다. 연장을 챙겨 종걸이를 떼어내려고 하는데 언제 왔는지 전나무 아래 시커멓게 보이는 들개가 몹시 짖었다. 겁에 질린 남자가 작은 종을 들고 서둘러 달아났다.
고물 수집상은 시골을 다니며 값을 치르고 물건을 사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 빈집에 침입해 훔쳤다. 방치된 집이니 그 곳에 물건은 슬쩍 해도 된다고 편리하게 생각했다.
작은 종을 실은 트럭은 휘뚤휘뚤한 시골길을 달리고 달렸다. 저를 여태 길들였던 산골의 소리나 냄새가 사라지는 걸 알고 작은 종은 점점 두려웠다. 큰 도로를 지나 두 시간쯤 달렸을까? 도시의 불빛이 눈을 찌르듯 달려들었다. 자동차 소리가 전쟁터를 지난 것처럼 요란했다.
작은 종은 트럭에 같이 있었던 놋쇠 세숫대야나 무쇠다리미, 맷돌 등과 함께 고물 창고에 처박혔다. 처지가 비슷한 물건들이라 다들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서 툭 하면 서로 시비였다. 작은 종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큰 변화가 닥친 모양이었다. 그의 시절은 끝난 것 같았다. 너무 슬퍼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간간이 소만이 생각났다. 저를 닦아주며 아껴주지 않았는가? 어른이 되어서 가정을 꾸렸을 지도 모른다.
그 창고에서 오래있지는 않았다. 다른 장물들과 함께 장물업자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얼마 뒤 중고물품 가게에 진열되었다. 거기에서 유치원 원장의 눈에 띄어 변두리 작은 유치원 문 앞에 매달렸다.
별나라유치원에는 차임벨이 있었다. 작은 종은 장식용으로 매달려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작은 종은 누군가 줄을 당겨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유치원 수업이 시작되거나 끝날 때면 언제나 귓가에 맴돌지 않고 바로 흘러가버리는 차임벨 소리가 났다.
유치원 길 건너에는 오래된 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에는 작은 종보다 수십 배 커 보이는 종이 성당의 참 주인인 듯 높다랗게 매달려있었다. 작은 종이 올려다보고는 놀라서 입을 닫지 못하고 한참을 쳐다보았으니까.
사각형의 기다란 종루는 성당 건물에 바싹 붙어있었다. 사각뿔의 종각 위에는 금빛 십자가가 빛나고 있었다. 성당 종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즐비한 느티나무 가로수와 무딘 아파트, 상가 건물들에 막혀 유치원은 바람이 잘 들지 않았다. 종 줄을 당기는 사람이 없는데다 바람까지 드물어 작은 종은 종일 심심했다. 그건 매일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 큰 종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두 종은 이미 낡은 유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갔다.
몇 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종소리는 나지 않았다. 작은 종은 큰 종에게 말을 걸려고 애썼다.
“성당 종 아저씨! 큰 종 아저씨! 내 말 들리나? 참말로 안 들리나?”
그러나 높아서 잘 보이지 않는 큰 종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나 싶어 작은 종은 점차 기분이 상했다. 유치원은 길가에 있어 저녁에도 찻소리가 났고 가로등 빛이 환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별도 잘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아, 낮에 자지 말고 밤에 자면 안 돼? 너 땜에 잘 수가 없어.”
“촌뜨기라 뭘 모르나 본데 우린 밤에만 일해. 넌 밤낮으로 자는 것 같더라.”
“그냥 눈 감고 있을 뿐이야. 할 일이 없다는 건 죽음이지. 넌 그 심정 모를 걸. 밤마다 사방을 살피느라 올빼미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잖아.”
“사람들이 어둠을 무서워하잖니? 알고 보면 어둠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어둠을 악용하는 사는 사람이 무서울 뿐이지. 넌 어때? 너도 어둠이 무섭니?”
“아니야. 난 늘 먹물 같은 산골 어둠이 그립단다. 어두워지면 하늘에 뭇별이 다 나랑 놀아줬지. 산골 별들은 늘 정다워서 혼자서도 외롭지 않았단다.”
“그럼 여기서는 외롭다는 말이니? 난 하늘의 별 같은 건 쳐다보지 않아. 우리 가로등이야말로 거리의 별 아니겠어. 사람들은 밤이면 종종걸음을 치면서 다들 우리를 쳐다본단다. 하늘의 별 따윈 쳐다보지 않아.”
가로등이 더욱 반짝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가로등아! 네 말을 들으니 왠지 슬퍼. 아무리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나에게 넌 별이 아니야. 아! 한번만이라도 산골 별들을 만날 수 있다면. 달빛 아래 부엉이아저씨도…….” 말을 하면서 작은 종은 성당 위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 어, 잠깐 저기 저 성당 종 아저씨 위에 달이 섰네. 성당 종 아저씨는 종각 아래 있어서 모르겠지. 가르쳐주고 싶은데. 넌 나보다 더 오래 여기 있어서 알겠구나. 저 위에 성당 종 아저씬 죽었다니? 아님 귀먹었다니? 벙어리다니?”
그 동안 성당 종 때문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작은 종이 빈정대듯 투덜거렸다.
“글쎄, 그건 나도 몰라. 나도 성당 종소리를 들은 적이 없거든. 저리 큰 종이 멀쩡히 매달려서 죽진 않았을 거야. 저 아저씬 깊은 잠에 빠진 거야. 무슨 사연이 있겠지.”
가로등이 잘난 체 하며 단정 지어 말을 하는데 그때 놀랄 일이 일어났다.
“작은 종아!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분명 성당 종의 목소리였다. 오래 입을 열지 않아 목이 쉰 것처럼 들렸지만 영민한 작은 종은 투박하지만 그윽한 울림이 있는 종족의 말을 대번 알아들었다.
“아저씨 내 목소리 들려? 아이 신나. 난 아저씨가 죽었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니까. 여태 뭐하느라 대꾸를 안 했어?”
“오래 전에 난 이 도시 먼데까지 종소리를 실어 보냈단다. 근데 이젠 모든 게 까마득해. 그 동안 아무도 날 불러주지 않아서 니 소리를 흘려들었어. 새벽이 되니까 간신히 구분할 수 있게 된 거야. 그 동안 계속 날 찾았던 거야?”
어느 덧 달빛이 종각을 지나 가로등 위에 떠있었다. 그러자 종각 아래 가려있던 성당종의 모습이 환히 드러났다. 달빛이 그 위를 흘러내리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 동안 고인 눈물이 차란차란 넘쳐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작은 종은 왠지 모르게 슬퍼서 제 콧등 아래로 흐르는 달빛을 괜히 한번 들이마셨다.
그 뒤 적막한 새벽이면 작은 종과 큰 종은 가로등이 비아냥거리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동안 쟁여났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주로 오래 살아 이야깃거리가 많은 성당 종이 이야기를 했다. 성당 종은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작은 종이 기특했다. 성당 종은 자기 종소리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지친 사람들을 달래주며 생활의 이정표 역할을 한 종소리를 소음 취급하며 구청에 민원을 낸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큰 종은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있어서 백 년 가까이 매달려있었다. 종을 치지 못한 뒤로 시간을 세지 않아 정확한 햇수는 알 수 없었다. 종을 치지 못하게 된 뒤로 시간은 무의미했다.
그건 작은 종도 마찬가지였다. 더러 개구쟁이 아이들이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줄을 잡아당기지만 드문 일이었다. 작은 종은 기특하여 그 아이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종을 금세 잊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작은 종은 더께먼지가 쌓여갔다. 처마 아래 바싹 붙어있어도 거리의 먼지는 찾아들었다. 점점 추레해졌다. 꼬질꼬질해진 자신이 싫을 때마다 작은 종은 절 닦아주던 소만이 떠올랐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에 작은 사고가 생겼다. 말썽꾸러기 하나가 폴짝 뛰어 장난스럽게 종을 쳤다. 왼손에 빨간색 장난감자동차를 흔들며 동무들을 불렀다.
“애들아! 일등으로 종치면 이 벤틀리 줄게.”
막 신발을 신고 유치원 문을 나서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종 줄을 먼저 잡겠다고 밀치며 팔짝팔짝 뛰다 함께 넘어져 다쳤다.
그 일로 학부모들의 항의가 들어왔다. 쓸모도 없는 종을 왜 달아놓아서 사고를 내냐며 없애라고 야단이었다. 그날 밤 작은 종은 가로등 때문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사실은 자길 바라보던 어머니들의 차가운 시선이 생각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큰 종의 위로도 별 도움이 되진 못했다.
그 일로 작은 종은 유치원 창고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거긴 창문이 없어서 온종일 깜깜했다. 간혹 누군가 들어와 불을 켤 때가 있었다. 작은 종은 눈이 부시어 뜰 수가 없었다. 그래봤자 뭔가 뒤적거리다 금방 나갈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절망한 작은 종은 울다가 지쳐 선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산골 분교 운동장 위에 떴던 별들이 바람을 먹은 풍선처럼 점점 커져 작은 종소리가 만든 길을 따라 날아들었다. 그 끝에 작은 종을 거뜬히 매달고 날아갔다. 밤하늘을 쳐다보는 산 위를 날면서 작은 종은 땡땡땡 땡땡땡 종을 쳤다. 산에 사는 짐승들이 모두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바라보았다. 작은 종은 너무 신났다.
꿈에서 깼을 때 작은 종은 창고 천장에 떠있는 별이 보였다. 그 별은 금세 사라졌지만 제 마음에 박힌 것을 알았다. 힘드니까 마음에 별이 들었다. 작은 종이 처음으로 가진 별이었다. 작은 종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다. 작은 종은 무기력해져 누가 문을 열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렇게 수백 년을 갇혀있기도 한다는 얘기를 성당 종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유치원 앞에 하릴없이 걸렸던 지난 시절조차 사무치게 그리울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봄이었다. 원장이 바뀌고 유치원 대청소를 하게 되었다. 새로 온 원장은 창고 안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작은 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장은 선생님들과 의논 끝에 작은 종을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 올리기로 했다. 휴대폰으로 작은 종의 이모저모를 찍어 올렸다.
그 후 한 달쯤 지나서 작은 종은 택배 박스에 넣어져 포장이 되었다. 택배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어느 아파트에서 멈췄다. 배달원은 작은 수레에 작은 종이 담긴 박스를 비롯해 다른 박스들을 층층이 실었다. 수레가 딸깍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거의 왔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택배원이 황급히 달려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잡았는데 수레에 쌓여있던 짐이 와르르 무너졌다. 맨 위에 있던 작은 종이 든 박스의 소리가 제일 요란했다. 오래 창고에 박혀있어 현기증에 시달렸던 작은 종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작은 종이 정신이 들었다면 매우 감격스런 시간을 가졌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 했다. 작은 종은 한동안 의식이 없어서 그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작은 종은 땡땡땡, 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분명 제 소리였다. 누군가 제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니 놀랍게도 분교에 달린 제 종걸이에 걸려있었다. 작은 종을 쳐다보는 젊은 부부가 웃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작은 종이 무척 맘에 드는 눈치였다.
부부는 예술가였다. 남자는 자연이나 동물을 소재로 하여 동화를 쓰고 여자는 그 삽화를 그렸다. 가난한 그들에게 산골 분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아침으로 양동이를 쳐서 새나 근처의 동물들을 불러들였다. 먹이가 부족한 철엔 그들에게 먹이를 나눠주기도 하고 너른 운동장에서 뛰어놀게 했다. 부부는 찌그러진 양동이 대신 작은 종을 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안목이 높은 그들 눈에 작은 종은 예사 종이 아니었다.
작은 종은 돌아올 수 있어 기뻤고 무엇보다 종소리를 낼 수 있어 기뻤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아니지만 온갖 새나 짐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여길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 좀 봐. 소만이래. 종 이름일까?”
여자의 그 말에 작은 종은 제 풀에 종소리를 낼 뻔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종을 만든 작가의 호나 이름이겠지.”
“그런가? 근데 종을 주고 간 남자 이름이 박소만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 남잔 공무원이라고 했잖아. 작가가 아니라는 건데.”
“아무려면 어때. 난 이 종이 너무 맘에 들어.”
“나도. 새들이나 짐승들이 종소리를 기억하나? 종소리를 듣고 애들이 많이 오잖아. 다들 종을 좋아했나봐.”
작은 종은 괜히 으쓱해서 곁을 스치는 바람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랑하고 싶었다. 덕분에 댕대앵, 하는 작은 종소리가 났다. 작은 종은 저를 챙겨서 이곳으로 데려다 준 사람이 소만인 걸 알고 짐작이 맞다며 봄바람처럼 들썩거렸다. 그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댕대앵, 하는 소리가 양에 안 찼던지 부부가 같이 줄을 잡아 당겨 힘차게 종을 치는데 작은 종은 눈시울이 시큰했다. 하루하루가 감사했다.
작은 종은 힘들게 지냈던 시절들은 벌써 잊고 돌아온 산골 생활이 무척 맘에 들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아무 때나 날아와 앉았다 가곤 하는 곤줄박이에게도 다정했다. 전처럼 똥을 갈긴다고 타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달빛이 휘영청 흐르는 새벽이면 성당 종과 가로등이 보고 싶었다. ‘성당 종 아저씨는 너무 커서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없어 죽은 듯이 매달려 있겠지.’ 성당 종은 작은 종을 부러워했다. 미풍에도 곧잘 흔들려 간혹 작은 소리라도 내는 일을 말이다. ‘가로등은 여전히 거만하면서도 피곤한 나날을 보내겠지.’ 소사 아저씨는 세상을 떴나, 아무리 기다려도 보러와 주지 않았다. 그리고 꼭 만나고 싶은 한 사람이 있었다.
나날이 작은 종의 얼굴에 그간의 힘든 삶을 다독이는 그리움이 쌓여갔다. 작은 종에게 말을 건넸던 이들의 모습이 세월의 때로 흐릿하게 새겨져갔다. 누구보다 작은 종을 잘 아는 소만이 온다면 그간 힘들게 살아 깊어진 종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분간해 낼 것이다.
작은 종은 날마다 운동장 너머 길을 내다보며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게 습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