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엿바위복음전도관(규암성결교회)
충청지역 성결구령활동 전초기지이며 거점지와 확산지
한국성결교회는 김상준과 정빈이 1907년 5월 30일
동양선교회 1901년 일본인 나카다 목사와 미국인 카우만 목사가
일본 동경 간다 신보정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하여
동경성서학원 개원과 동시에 동경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하는 전도인을 양성하여
일본인 미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4년 동안 그렇게 운영해 왔는데
1905년 동양 몇 나라 학생들이 입학하자
동양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동양선교회라는 명칭과 조직을 하였다.
그해(1905년) 4월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한 김상준과 6월에 입학한 정빈이
1907년 전도인 양성과정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염동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한 성결교회이다.
동양선교회가 세내어준 염동의 한 건물에서
김상준과 정빈이 황토현에서 매일밤 노방전도를 하였다.
두 전도인의 성결구령열정은 경성 주민들은 물론이고 교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독특한 전도방식인
매일저녁 황토현 노방전도와
주일에는 성결의 은혜가 실제로 체험되는 집회를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한 언론매체로부터는 격한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전도인은
사방으로 우겨쌈과 답답함을 당하고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받아도 변함없이
전도인의 사명 곧 노방전도와 성결집회를 계속하였다(고후 4 : 8 ~ 10 참조).
이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연이어 귀국하는 성결 전도인들의 증원되자
이북 지역인 진남포 1주년 기념교회와 성결교회
설립 2주년 기념교회의 의미가 있는 개성(송도)복음전도관을 신설하고
성결운동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설립 초기 구령사역은 나름대로 감당하였으나
정착을 하지 못하고 성결역사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한 때 초대감독인 토마스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1911년에는 경성성서학원이 개원되어 전도인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성결교회로는 세 번째로 설립된 교회가
충청도 부여 규암에 세워진 규암복음전도관(현 규암성결교회)이다.
1. 설립인: 규암복음전도관의 설립인은 청주 출신 박제원이다.
그는 고향에서 상경하여 연동장로교회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김상준과 정빈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자
복음전도관으 전적하고
개원되지 한 달만인 1911년 4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전도인으로 양성 받고 있던 1912년 7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강경까지, 강경에서 배를 타고 부여 규암에 내려갔다.
이를 규암성결교회 연대기를 기록한
‘규암성결교회역사’(이후 역사(歷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2년(명치 45년) 7월분에 본회 성서학원 생도 박제원이 하기 휴학시기를 이용하여 전도차 부여 규암 석촌 김성기씨 집에 도래하다. 본월 26일 토요일에 김성기 가정에서 기도회(祈禱會)로 모였는데 출석인은 부인 3명인데 2인은(김씨 큰방, 유옥경)은 신자요, 1인(노양운 부인)은 처음 출석자라.
28일 주일 아침 예배시 부인 6인 출석, 31일 수요기도회에 남자 4인 여자 6인 출석 이때로 위시하여 매일 신자에게 마태복음을 강의하고 개인전도와 노방 설교하여 회집 예배 인수가 십인이고 예배처소는 권설우(權設于) 김성기씨 집으로 하다.
歷史 기록은
설립인과 설립일 그리고 최초예배 장소와 최초 교인 명단
그리고 설립기 모임내용을 담고 있다.
곧 설립인은 경성성서학원 수양생(현 신학생)인 박제원이며,
설립일은 1912년 7월 26일이고,
설립장소와 최초 예배장소는 김성기 씨 집이었다.
그리고 최초 교인은 김성기씨 아내와 유옥경과 노양운 부인이었다.
규암복음전도관의 설립 초기 예배모임은
예배와 성경공부였는데
첫째, 1912년 7월 26일 설립예배(토요일이라 하였으나 금요일이다),
둘째, 동년월 28일 첫주일예배,
셋째, 동년월 31일 수요일저녁기도회,
넷째, 매일 성경공부(마태복음 강해)였다.
그리고 노방전도와 개인전도였다.
그러므로 규암복음전도관은
설립기부터 예배와 성경공부 그리고 전도가 동시에 전개된 교회였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기초인 예배와 가르침을 받고 가르칠 수 있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신앙이 자라가며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영혼 사랑하는 열정이 있는 교회로 정착되어갔다.
그러므로 규암성결교회 시역사 정리는 이렇다.
부여군의 규암나루에 복음을 든 한 젊은이가 배에서 내렸다.
그의 심중은 ‘오직 전도’ 곧, 미신자들에게 전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오직 전도’를 시작하였고 교회가 세워졌다.
그가 경성성서학원 수양생인 박제원이었다.
그는 성결교단(당시 명칭 ⌜동양선교회⌟)으로부터 이곳에 파송된 교역자도 아니었다.
교단 역시 부여 규암을 선교대상 지역으로 선정하지도 않았으며,
선교활동 전개 계획도 없던 지역이었다.
다만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전도 일념의 구령열에 사로잡힌
성결교회 수양생(신학생)이 오직 전도하고자 규암에 내려왔다.
그리고 오직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가 규암성결교회이다.
규암성결교회는 그렇게 세워졌다.
2. 교역자들과 구령 사역현황 :
박제원 수양생은 방학이 마치자 경성성서학원으로 복귀하였다.
이제 교회는 본부에 전임교역자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 청원을 받고
초대 감독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통역인 이장하와 최홍은 전도부인을 대동하고
규암에 내려와서 이틀 동안 시찰하며 전도하고 귀경하였다.
이를 규암교회 歷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1월 본회 신자들이 전도사 청구서를 선교회로 수송함으로 선교회에서 토마스 목사 부부와 이장하씨와 최홍은씨가 시찰차 도착하여 2일간 머물며 구령회와 전도지 배포하다. 그러나 장애물로 인하여 교회를 설립치 못하다.
본부에서 내려온 토마스 감독 일행 4명은 전도지를 배포하며 전도하였고
저녁 구령회를 인도하면서 이곳에 복음전도관을 설립할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였다.
그런데 장애물로 인하여 설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후 알려진 사실은
당시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있던 곳이 김성기 씨 집이었다.
그런데 김성기 씨는 첩을 두었다.
그러한 권징 대상이 되는 이의 집을 교회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박제원이 활동하고 있던 1912년 8월과 9월에는
근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감리교회와 복음적 나눔을 하였다.
그래서 공주 계룡 경천리 출신인
김병제(이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와 감리사를 역임) 전도인과 함께 전도를 하였고,
또 그를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한 월리엄스(F.E.C. Williams) 우리암 선교사
***그 선교사 아들 조지(우광복; 대한민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뜻)는
해군 군의관으로 6.25참전 때
하지 중장의 통역관으로 활동.
하지가 한국을 이끌 인재 50명을 추천하라고 할 때
48명의 기독교인들을 추천하여 한국정부 수립에 활동하게 하였다.
선교사가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인도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교회 약사에는
8월 24일 토요일에 공주전도인 김병제씨가 와서 하루 숙박하며 전도에 조우助佑함.
9월 15일 주일 우이암(禹伊岩)이 도착하여 신자들을 권면하고 바로 돌아가다.
16일 화요일에 박제원은 신자 목양사를 감리회 전도인에게 위탁하고 본교회 학원으로 회정하다.
규암교회를 설립하였으나
곧 귀원해야 하기에 감리회에서 이들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교회에서 본부에 성결인 교역자 파송을 요청한 것인즉
규암교회는 설립기부터 성결 정체성이 분명했던 교회였다.
그러나 1913년 7월 5일(토) 박제원이 다시 내려오기까지 교역자를 파송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인 8월 8일에 본부 길보륜(吉宝崙) 감독으로부터
박 수양생에게 급거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10일 주일예배 후 상경하였다.
상경한지 두 달 후인 10월 12일
길보륜 감독이 통역 이장하와 김상준 그리고 박제원 전도사를 대동하고 규암에 내려왔다.
곧 교역자 파송식과 부임환영예배와 같은 주일예배를 드리고
다음날 길 감독과 이장하는 상경하고
이곳을 책임질 주임 교역자 김상준과 부임 교역자 박제원 전도사가
박기래 씨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정하고
성결구령사역을 구체화 하였다.
10여일 후에 전세를 낸 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교회 歷史는 이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1913.10) 22일 수요일에 예배소를 (외리) 검복리 3-1호로 전세 이전하다.
이렇게 규암교회는
정식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성결역사의 산 증인인 김상준 전도사의 영력있는 말씀으로의 양육과
열정적인 박제원 전도사의 구령전도활동으로 강화된 성결사역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규암교회는 한강 이남지역에 첫 번째로 설립된 성결교회이며
충청지역 성결운동의 확산을 위한 거점교회로 정착하였다.
초대 김상준 전도사와
부임교역자 박제원 전도사와 함께 최재은 전도부인이 구령활동하였으며
김상준 전도사가 1914년 3월에 상경하자
규암교회 歷史 p2에는
(1914) 3월 26일 목요일 김상준씨가 성서학원에 교수하라는 길보륜씨의 서신을 접견하고 경성으로 출발하다.
박제원 전도사가 제2대 교역자가 되었으며,
제3대 교역자는 한 달 전에 첫 번째 목사안수를 받은 5인중 한 사람인 이명직 목사가
1914년 5월에 부임하여 사역하며 예배당을 이전하고
첫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은산과 홍산 그리고 금천리복음전도관이 설립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4대 교역자는 김석준 전도사였으나 4년 사역하고 1920년 현직 담임교역자로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역사책 p52. 종무차도(終無差道)하다가 영원불귀(永遠不歸)의 여행을 떠나니 1월 24일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세 명이 헌신하여 경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전도사역을 하였다.
소아부흥회와 순회윤차집회와 연합집회와 부인 사경회(강사:최홍은 전도부인)를 실시함으로
지역 성결공동체 형성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손은숙.김성업.손경애 전도부인들과 김창희 전도사와 동역하였다.
또 제5대 강태즙전도사와 제6대 배선표 전도사가 이어서 사역하였다.
배 전도사 사역 때 실시한 침례식을 당시 교회 歷史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22) 10월 7일 토요일 밤부터 대전 교회의 충남지방회를 개최하고 10일에 폐회하였고, 22일 주일에 지일 목사가 백마강에서 박상규•방윤모•석형•손동길•장사라•권명심 제씨의 세례식을 행하다.
이 예식은 이후 1923년 1.2월호 OMS기관지에 아래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리고 1915년부터 실시해온 음력 신년부흥회도 1928년까지 계속하면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지조있는 성경적인 신앙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또 신년직원 교육을 통하여 4중복음을 전수했으며
성결의 기수로써 성결한 삶을 살며 미신자들에게 복음전도를 하는 일꾼을 세워갔다.
한편 김석준 전도사 사역때
만주로 이주한 박기래 집사가
경주출신 박정환과
평안도 출신 한치국 세 사람에 의해 용정성결교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후 박효신 전도부인
유택윤 목사와
제8대 손양원 목사의 동생인 손문준 전도사와
손택구 목사 선친인 손갑종 목사
제10대 강호석 전도사,
제11대 김종률 전도사가 마지막으로 사역하고
1943년 12월 29일부로 교단해산과 교회 폐쇄를 당하였다.
해방 후 재흥된 총회와 교회 재건기가 되어
제12대 김의용 목사,
박종만 목사 때 세 번째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이성봉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도 하였다.
제14대 김용련 목사 때 장로장립과 예배당 헌당식을 하였으며
당시 교단이 분립될 때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원래적 명칭을 이어가는 예성의 깃발을 옮기지 않고 사역한 후 떠나자
제15대 박상규 목사가 부임하여
규암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영향력 있는 지역교회로 부상하였으며
이후 총회적으로도 합당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다.
32년간의 성결구령사역을 전개해온 박상규 목사의 후임으로
박상덕 목사 2002년 부임하여
안정적인 목회사역을 전개하며 2012년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
이후로도 교회는 여전히 지역을 품고
세계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능히 일하는 일군을 세우는 사역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도 규암성결교회는 아래와 같은 신앙생활의 표준에 의해
변함없이 성결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설정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거룩한 뜻을 따라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뜻과 섭리에 따라 순종하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헌신하며 맡은 분야에서 신앙 성장과 영적 건강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