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2/161023]애일지성(愛日之誠)과 구경재(久敬齋)
최근 고명한 원로 한문학자 선생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사무실 바로 내 옆자리에 계시는 자문선생님(1936년생)인데, 평생 한문공부에 진력한 분이라 서예솜씨도 남다르다고 들은 터여서, 어느날 문득 선생님의 선비체 글씨를 받고 싶었다. 사실은 크게 실례되는 일인 줄 알지만, 부모님을 위하는 마음이 급하여서 부탁을 드린 것이다. 그것도 내용을 꼭 집어 두 개를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애일당(愛日堂)’과 ‘구경재(久敬齋)’가 그것. 그런데, 붓을 놓은 지도 오래되었고, 편액으로는 선비체가 적당하지 않다며 ‘좀 기다려보라’는 것이었다. 당신의 애제자 중 유명한 서예가가 있는데, 당신이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열흘쯤 후에 가져다주신 글씨는 정말로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글을 써주신 분의 함자나 얼굴도 모르는 처지에 이렇게 고마울 손이 어디 있겠는가. 그분은 오로지 당신이 존경하는 스승님의 청이라 써주신 것일 터. 황감하여 받아들기도 민망하였다. 게다가 2009년 예술의전당에서 개최한 개인전 도록까지 보내주셨다.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마음 속으로 ‘앗싸-’가 절로 나왔다. 진심으로 선생님의 후의(厚意)에 몸둘 바를 몰랐다.
자, 이제 왜 그런 내용의 글씨를 부탁드렸는지 사연을 얘기하자. 1, 2년내 귀향을 꿈꾸고 있는데, 내가 태어난 집을 리모델링하거나 새로 지어서 안방의 당호를 ‘애일당’으로, 서재의 당호를 ‘구경재’라 하여 편액을 걸어놓으리라, 작정한 지 오래되었다. 애일당은 무슨 뜻인가?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지년(父母之年)은 불가부지야(不可不知也)니 일즉이희(一則以喜)하고 일즉이구(一則以懼)니라” 무슨 뜻인가? 부모의 연세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부모의 연세를 알게 되면 한편으로는 (장수하시는 것이) 기쁘지만, 또 한편으로는 (노쇠해지시는 것이) 두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하루하루 날짜 가는 것을 아껴가며 부모를 봉양하는 정성’인 ‘애일지성(愛日之誠)’을 얘기했다. 이때의 ‘애(愛)’자는 ‘사랑하다’의 뜻이 아니고 ‘아끼다’의 뜻이다. ‘상지부모지년 즉기희기수우구기쇠 이어애일지성 자유불능이자(常知父母之年 則旣喜其壽又懼其衰 而於愛日之誠 自有不能已者). 뒷 문장은 ‘날이 가는 것을 아끼며 효도하는 정성을 저절로 멈출 수 없게 된다’는 뜻이지 않는가.
조선조 연산군과 중종대 문신이자 학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당호(堂號)를 ‘애일당’이라 하고 칠순의 나이에도 구순 부모를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애일효자(愛日孝子)’라 불렸다 한다. 어디 그뿐인가. 부친을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위하여 명절이나 생신 때 잔치를 베풀어 ‘구로회(九老會)잔치’라 불렸는데, 이 잔치를 그린 그림이 <애일당 구경첩(愛日堂 具慶帖)>에 실려 전하고 있음에야. 오죽했으면 당대의 명현 47명이 축하시를 보내왔겠는가. 이 소문을 들은 선조 임금은 ‘적선(積善)’이라는 대형 친필을 써내려 보냈는데, 지금껏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적선’은 <주역>의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에서 따온 것임은 불문가지. ‘효행(孝行)’이라는 단어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인 ‘효’를 ‘실천’한다는 뜻이리라. ‘귀머거리 바위’ 농암이야말로 참으로 하늘이 낸 효자였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구경재’는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의 ‘자왈(子曰) 안평중(晏平仲)은 선여인교(善與人交)로다 구이경지(久而敬之)온여’에 출처를 둔다. 공자가 제나라 대부인 안평중이 여러 사람을 사귀기 좋아하면서도 (우정이) 오래 된 친구들을 처음처럼 공경하는 것을 보고 칭찬한 말이다. 이 말은 무릇 세상사람들이 가벼이 사귀고 쉽게 (관계를) 끊지만, 친한 친구일수록 예절을 지키며 서로 공경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바로 이것일 것. 자칫하면 친하다고 서로 예의를 잃기도 하고 우정을 빌미로 사기 등 악용하는 경박한 풍토가 퍼져 있지 않은가. ‘포도주와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서양 속담에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겠다. 이 구절은 나로서도 많은 친구를 잘 사귀면서도 이런 처음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터인지라, 진즉부터 마음에 서재의 당호로 점찍어놓은 것이었다.
아무튼, 생각지도 않게 고명한 서예가님으로부터 두 개의 글씨를 받고 보니, 내 마음이 아주 부자가 된 듯 행복했다. 이제는 이 훌륭한 글씨를 나무에 각자(刻字)를 해야 할 터인데,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전각을 잘 하시는 분들에게 맡겼다가는 부르는 게 값일뿐더러 기백만원을 호가할 터인데,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고민이 시작됐다. 전각은 당당한 예술이 아니던가. 그런데 또 ‘구원자’가 나타났다. 평소에도 늘 나를 여러 가지로 감탄하게 만드는 고등학교 후배와 점심을 먹다 우연히 글씨얘기가 나와 고민을 털어놓으니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레이저로 쏘고 비용도 얼마 안된다며 즉석에서 사진으로 한글날 행사떼 레이저를 쏘아 만든 편액을 실례(實例)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나무값까지 해도 1개에 기십만원이면 될 거라는 것이다. 그 친구의 얘기는 전각과 레이저의 장단점, 국산과 러시아산 목재의 장단점 등으로 줄줄줄 이어졌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즉석에서 글씨 2개를 맡기며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원본은 원본대로 남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 그러고나니 머리가 다 개운해졌다. 2, 3년내 고향마을 우리집에 걸릴 안방과 서재 앞의 편액 상상만 해도 마음이 가볍고 즐거워졌다. 역시 사람을 잘 사귀고 볼 일이고(善與人交), 사귐이 오래되어도 처음처럼 한결같이 공경하고 존중하면(久而敬之) 이런 홍복(弘福)이 굴러오는 게 아니겠는가.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께 할 최소한의 애일지성(愛日之誠)만 남았다. 나의 청으로 애제자에게까지 부담을 주신 자문선생님, 스승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신 서예가 선생님, 선배의 고민을 담박에 해결해 준 후배님,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이 가을 평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