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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이킹 / 고명재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뒷목을 핥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교회 십자가가 네 귀에 걸려 찢어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빨갛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해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1987년생
▲영남대 국문학 박사 수료
[심사평]이번에 본심 심사 대상이 된 시의 경우, 소통하기 어려운 시가 많았다. 인간의 삶은 존재하지 않고 언어만 존재해서 그 언어의 유기적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의 그릇에 제각기 놓인 추상적 관념적 언어를 통해 언어의 난무(亂舞)를 보았다. 삶의 내용이 내포되지 않은 시의 언어는 그 의미를 잃는다. 의미를 잃고 형식만 남음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시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 한국 시의 위기다. 그러나 당선작 '바이킹'은 한 남녀가 놀이기구 바이킹을 타면서 한순간 겪게 되는 고통과 공포를 통해 우리 삶의 절망과 희망이 교직되는 순간순간을 절실하게 잘 드러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재적 삶이 바이킹을 타는 행위로도 재해석되었다.(문정희. 정호승 시인)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세잔과 용석 /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1992년, 창원 출생
[심사평] 박지일님의 응모작들은 무엇보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을 유지한 채 여간해선 서두르지 않았다. 따뜻하고 유려하다가도 일순간 차가워질 줄 알았다. 사유가 과장 없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사람을 호명하며 이룩하고 있는 당선작의 기체(氣滯)적인 시 세계는 정물적으로 보이면서도 또한 움직였다. 기록하면서도 함부로 기록하지 않고자 했다.(신용목·김행숙·김현 시인)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도서관의 도서관 / 임효빈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한마디 못했고 소리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는다
도서관의 책상은 오래된 시계를 풀고 있다
▲1966년 충남 부여 출생
[심사평] ‘도서관의 도서관’은 사회적 소통이 단절된 당대 문제를 내밀한 정서 의식으로 예각화하면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자유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시인은 더욱 분발하여 한국 시단의 별이 되기를 바란다.(김경복·조말선 시인)
■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심사평] 함께 보내온 시편들이 일정하게 고른 높이를 보여주었고, 또 시 창작의 연륜이 느껴졌다. 시 ‘폐사지에서’는 허공에서 독경의 소리를 살려내고, 떨어진 낙엽에서 풍경의 소리를 복원하면서 절이 사라진 공간에 다시 절을 짓는, 멋진 정신의 노동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또한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라고 말해 모든 생명 존재 그 자체에 법성이 깃들어져 있다고 바라보는 대목과 있고 없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담대한 상상력은 당선작으로서의 풍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불교시의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문태준 시인)
■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 찾기 / 김지오(김임선)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혹시, 당신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세요? 어머,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도둑 아니고 강도 아니에요 당신의 왼쪽 바지 주머니라 해도 상관은 없어요 당신의 왼쪽 심장이라 해도 상관없지요
혹시, 사탕 있으면 한 개 주실래요? 에이, 거짓말! 나는 당신의 주머니를 잘 알아요 한 번 만져 볼까요? 꽃뱀 아니구요 사기꾼 아니에요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그럼 당신 손으로 당신 주머니에 손 한 번 넣어 보세요 어머, 그것 보세요 사탕이 남아 있다니 당신에게 애인이 없다는 증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는지 당신은 모를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주머니에 사탕 한 개씩은 들어 있어요 사랑 말이에요 세균처럼 바이러스처럼 그 사탕 나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요 유난히,
망설이지 마세요 그 사탕 내게 주면 당신 주머니에는 또 다른 사탕 생길 거예요 사랑처럼 말이에요 경험해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 맞아요
사탕 대신 꽃은 어때요?
어머, 꽃 피우는 당신 마법사였군요
꽃을 나눠 가진 우리
이제 달콤해집니다
▲김지오(김임선)
▲1962년 경북 경산출생 .1993년 문예중앙 신인상 중편소설 ‘그네’ 당선
■ 한경 신춘문예 시 당선작
릴케의 전집 / 김건홍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자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김건홍
▲1992년 경북 상주 출생,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 / 정희안
우선 헐거워진 안구부터 조여야겠어 의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네모난 메모는 너무 반듯했어 느슨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떨림이잖아 사랑은 사탕 같은 것 길이와 깊이 중 어느 쪽이 좋을까 잠들지 않고 꿈을 꿀 순 없잖아 달리자는 남자와 달라지는 남자 수순은 잘못되었지만 수준은 비슷해 일용직 알바생의 심정을 너는 몰라 너는 내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해 우리 모두 갑질 아래 새로 태어나곤 하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간을 정리해버렸어 미움은 미움에서 출발해 머리는 항상 미리를 준비했어 망설임은 사치야 네가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처럼, 취업은 걱정 중 제일 으뜸이지 숲이 술을 대신할 순 없잖아 기능도 못 하면서 가능을 얘기했어 조직은 때로 조작도 해 유인하려면 유연해야 해 정말이지 절망스러웠어 그러니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밀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빌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진절머리와 전갈머리는 무슨 관계인지 거울 속에 겨울이 있잖아 말 많은 세상 발밑을 조심해 그럼, 이제부터 그림 공부나 해볼까
▲정희안
▲1968년 부산 출생 제 7회 부산국제 차어울림문화재 차시 공모전 대상 수상.
■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머지 인간 / 김범남
허름한 옷 입고 재즈만 듣는다. 사랑의 원가에 애착의 비용을 들인다. 가끔 일상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든다. 거리와 집착의 변수에 비례해 만각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으로 허덕거린다.
나머지도 인간이다.
이틀간 잠만 잔다. 수면 부족과 의욕상실증이 만든 침착함이다. 잉여가 없는 느린 속도를 즐긴다. 기억은 꿈을 만들고, 우연은 희망이 된다. 액세서리 지식을 걸치고 동굴로 들어간다. 틈을 타고 빛이 침투한다.
방관자도 나머지 일부다.
역방향과 정방향, 선택을 종용한다. 기울어진 생각으로 방향을 찾는다. 모순이다. 모서리와 모퉁이도 나머지다. 일부가 모여 전부가 된다. 구석을 찾을수록 신경은 예민해진다. 평면의 날카로움이 보인다.
남는 인간이 나머지다.
남은 인간도
나머지다.
▲김범남
▲1973년 광주 출생
■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순환선 / 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이도훈(본명 이양훈)
▲한국방송통신대
■ 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양파꽃 지폐 / 이선주
무안군 성동리 170번지 임금례 할머니 집에 불이 났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양파밭일 온품 반품 바꾸어 모은 팔십오만 원 빳빳한 저고리 은빛 테두리 두른 단아한 신사임당 한 장씩 장판 밑에 깔아 놓고 늘어진 난닝구 고부라진 등골 부리고 누워도 손주들 학원비도 대주고 용돈도 쥐어 주며 율곡선생을 빌어주는 순간은 알싸한 파스 몇 장이면 무릎뼈 엉치뼈까지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내일 또 어느 밭으로 갈까 노곤달근한 꿈이 깡그리 타버렸다
아침에 나가면서 끓여 먹었던 누룽지 양은냄비 불 끄는 걸 깜빡 잊어버렸던 탓이었다
흙 속에 거꾸로 머릴 박고 살아도 하늘 딛고 땅 속으로 알알차게 살찌우던 양파돈 생각에 연기 자욱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장판 먼저 걷어보고 까맣게 타버린 지폐를 발견하고는 기가 막히게 서럽고 허전하던 밤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동네 노인들 하나씩 하나씩 찾아와 성님 잊어부러야제 어쩌겠소 하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양파 냄새나는 사임당 몇 잎씩 꺼내 쥐어 주고는 엉거주춤 펴지지도 않는 다릴 끌고 흰 달빛 속을 걸어 돌아가더라는 밤새 그러고선 다음날 또 새벽같이 날품 가는 경운기에 동글동글 모여 앉았더라는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 하얀 양파꽃도 무리무리 환하게 피었더라는
■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남쪽의 집수리 / 최선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
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
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
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
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
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
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
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
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
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
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
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
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
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
중부지방의 방식으로 남쪽의 집 수리를 부탁하고 보니.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아니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서 계약이 성립된다.
산수유 꽃나무가 화르르
허물어지고 있을 것이다.
▲최선(본명 최란주)
▲전남대 법과대학 졸업, 현재 서울행정법원 근무
■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객공 / 한영미
재봉틀 소리가 창신동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담장이 막다른 대문을 맞춰 다리면
원단 묶음 실은 오토바이가 주름을 잡았다
스팀다리미 수증기 속으로
희망도 샘플이 되던 겨울
어린 객공은 노루발을 구르다 손끝에 한 점
핏방울을 틔우곤 했다 짧은 비명이
짓무른 패턴에 스미면,
엉킨 실은 부풀어 오른 손가락 감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었다
이제 그 슬픔도 완제품이다
붕대처럼 동여맨 구름
자수의 밤하늘은 그녀의 눈물을 진열한 쇼핑센터가 아닐까
화려하게 화려하게
너무나 눈이 부셔서
쪽가위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이따금 실밥처럼 잘려나가는 유성을 보았다
▲한영미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침투 / 차유오
물속에 잠겨 있을 때는 숨만 생각한다
커다란 바위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바닥으로 물이 들어온다
나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물의 모양을
떠올리고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을 잡게 된다
물결은 아이의 울음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가지 못한 곳까지 흘러가면서
하얀 파동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나는 떠오르는 기포가 되어
물 위로 올라간다
숨을 버리고 나면
가빠지는 호흡이 생겨난다
무거워진 공기는 온몸에 달라붙다가
흩어져버린다
물속은 울어도 들키지 않는 곳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지워준다
계속해서 투명해지는 기억들
이곳에는 내가 잠길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있다
버린 숨이 입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 1997년 경기 남양주 출생.
▲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3학년 재학 중.
[심사평] 문정희시인 / 김기택시인
■ 내면 탐색 능력 뛰어나 앞으로 큰 작품 쓰리라 기대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작은 고르고 안정된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눈에 띄는 한 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 '자백'은 높은 완성도와 주제에 대한 집중력이, '침투'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신선함이 눈길을 끌었다. 숙고를 거듭한 끝에 '침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자백'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 혼자인데도 제 안에서 나오려는 원시적이고 무의식적인 발화를 억누르고 스스로 제 말을 검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실한 발화가 무엇인지 묻는 문제의식이 강렬하다. 삶을 화석화시키는 일상적 발화와 형태도 체계도 없는 무의식적인 발화 사이에 끼어 있는 극적인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에 긴장감을 끌어올린 점도 음미할 만하다. 그러나 관념을 작위적으로 드러낸 은유가 단점으로 지적됐다.
당선작 '침투'는 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자의 내면과 물속이라는 공간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섬세한 묘사가 돋보였다. 이 시는 빈약한 숨통에 존재의 모든 것을 기대야 하는 물속의 상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몸으로 '침투'하는 물의 압력과 숨 막힘,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이라도 잡아야 하는 치명적인 막막함을 냉정하게 관찰하는데, 그 시선에서 일상적 자아와는 다른 존재를 발견하고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친숙한 물 밖의 세계와 다른 시공간인 물속은 화자를 저항할 수 없는 숨 막힘으로 압박하는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동시에 울어도 들키지 않고 슬픔조차 무화되는 완전한 고독이 있는 매혹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익사할 것 같은 공포와 숨을 버려서 완전하게 혼자가 되는 자유가 교차하는 심리의 이중성이 시에 독특한 에너지를 부여한다.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물 밖에서 밀실이라고 할 수 있는 물속 이미지와 움직임을 통해 내면을 탐색하는 탁월한 능력은 앞으로 더 큰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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