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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룡을 만난 건 2008년 제12회 부천국제 판타스틱영화제 때인 7월 19일이다. 메가토크 때 초청스타로 왕호 배우와 함께 나왔다. 그로선 1981년 이후 27년만의 대중 회견이었다. 그동안 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우연히 연락이 닿아 초청스타로 초청된 것이다. 나도 그를 추적했지만 미국에 산다는 것 밖엔 알 수가 없었다. 메가토크후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고 이후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나이는 그가 연상이지만 친구가 좋겠는다는 그의 제안 때문이었다. 나 또한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2nd브루스리가 친구하자는데 누군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호적상 1957년 6월 5일생이지만 1953년생 뱀띠라고 했다. 당시 호적신고가 늦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의 정확한 나이는 가족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1953년생이라고 굳게 믿고 계신 분도 있다. 그와는 7월부터 8월까지 시간날 때마다 만났다. 그가 묶던 오피스텔과 인근 지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와 이야기 했고 그것은 본 카페를 통해 지상 연재되었다. 그리고 8월 19일 그의 이름을 딴 당룡 카페를 네이버에 만들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매니져로 임명(?)했다. 매니져로서 별로 한 일도 없던 차에 이번 장례식 때 그간 안했던 일들을 몰아서 했다. 그동안 당룡 카페를 통해 그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여성 두 분이 계셨다. 그러나 무슨 운명인지 그녀들은 그와 변변히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다시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그는 역시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가 그동안 미국에 가있었다지만 한국에도 자주 왔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안양에 13살 아래인 남동생 김태영 씨가 살고 있었고 누이동생 세 명도 평택 등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국 체류 스토리는 눈물과 고독의 이야기이다.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 팀과 함께 미국 땅을 처음 밟았고 이후에 <사망탑>의 오사원 감독과의 인연으로 미국으로 가서 쟝 클로드 반담의 데뷔작 <특명 어벤져>에 특별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L.A를 거쳐 하와이에서 5년을 거주하고 텍사스를 거쳐 다시 하와이로 와서 사망 전까지 호널룰루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사이 벌써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는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5개국어를 구사한다. 이 5개국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직접 내가 밝히기에는 너무나 어두운 사적인 이야기이다. 그가 그 만큼 고단한 세월을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는 눈물로 점철된 세월의 스토리이다. 돈 한 푼 없이 찾아간 타지에서 그가 겪었을 이야기들은 읽는 이들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스토리들이다. 그는 독신을 고수하며 농부의 마음으로 살았다. 호널룰루 농장에서 100여 년전 우리의 선조들이 이민가서 그러했듯이 사탕수수밭에서 억샌 사탕수수를 베는 심정으로 살았다. 두 번의 자살시도는 그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나를 웅변한다. 너무도 이른 나이에 세기의 스타인 이소룡의 분신이 되어 살아야 했던 그이다. 너무 쉽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난 이후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의 공허한 가슴을 채울 수 없는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사망지로>혹은 <Way of Death> 혹은 <YAKUZA>란 제목의 영화 때문이다. 원안이 쓰여진지 20년이 넘었고 단 한 편의 자기 평생의 영화로 만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한 바로 그 영화이다. 영화작업이란 쉽게도 될 수 있지만 20여 년을 끌고 올 정도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영화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갔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사망유희>에 출연하며 알려진 명성으로 중국인들의 다툼을 해결해주는 일을 하게되며 본의 아니게 해결사 일을 하게 되었다. 홍콩에서 부터 미국에 가서도 그 일을 하며 그가 5개국어를 조금씩 할 수 있다는 것도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영화를 잊지 않았다. <야쿠자>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후원자들을 물색하였고 규모를 줄여서라도 국내에서 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 해서 <야쿠자> 제작은 물거품이 되었다. 내게 기획서를 보여주며 금방이라도 제작에 착수할 듯 했지만 그의 희망은 결코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하와이에 거주하며 한국 방문은 일 년에 두 세 번씩 있었다. 그때마다 만나서 술마시고 노래방엘 갔다. 그의 노래 실력은 그가 가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인 명창이었다. 그는 끼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점 모두 이소룡과 닮았다. 상황에 따라 재담으로 좌중을 웃기고 이소룡 식 무술을 시연하며 모임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항상 즐거웠다. 그는 단 한번도 취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항시 긴장한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술이 쎄긴 쎄구나 했지만 그가 결코 건강해 보이진 않았다. 피부에 검은 반점들이 보였고 음주중 식사를 하지 않던 그의 건강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으니 스스로의 건강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인천방송에서 취재한다고 해서 그를 좋아하는 팬들의 번개모임도 있었다. 또 이소룡기념사업회를 발족하며 시작된 세미나 첫회 때 초청스타도 그였다. 그날 조선일보에는 그의 기사가 무려 세 면에 걸쳐 실렸다. 또 무술의 고수 다큐에서도 그를 취재했다. 그러나 그 촬영분을 소개되지 않았다. 이런 모든 일들이 겨우 삼 년 사이의 일이다. 누구보다도 많이 어울렸고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오래된 것만 같지만 겨우 삼 년 사이의 일이다. 그를 여러 팬들과 만나게 했고 그로 하여금 과거의 영광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는 이제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소룡이 그러했듯이 그도 이제 전설이 될 것이다. 전 세계를 통해 이소룡의 대역으로 선발된 그로서는 1977년부터 영화계를 은퇴하기 전까지 이소룡의 그림자로 살았다. 이소룡으로 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익혀 이소룡화되었지만 결국 그는 이소룡의 그림자로서 옴씩달싹 못하는 이소룡의 망령에 사로잡혀 스스로 절박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스스로 빠져버린 이소룡의 악몽이라고 하겠다. 그가 사망 몇달 전에 방문했을 때 새로운 사업 구상을 이야기 했다. 가능한 것도 있었고 불가능한 것도 있었는데 그만큼 새로운 의욕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위독하다는 소식을 2011년 7월 27일, 제10회 이소룡기념사업회 정기 세미나 도중에 알게 되었다. 일주일 전에 귀국하여 연락도 없이 있다가 느닷없이 안산 고려대 병원에 입원하였고 입원후 23시간만에 사망하였다. 이제 그를 떠나 보내며 그를 잊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팬들에게 한없는 그리움을 남기고 이소룡처럼 우리 곁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2008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의 당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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