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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邊司의 外交政策 議定硏究
〈目次〉
Ⅰ. 머리말
Ⅱ. 외교정책 議啓과정과 範圍
1. 외교정책 議啓과정
2. 의계사안 範圍
Ⅲ. 對淸외교 議定事案
1. 支勅사안
2. 燕行사안
3. 互市사안
Ⅳ. 對日외교 의정사안
1. 書契사안
2. 萊館(倭館)사안
3. 換貿사안
Ⅴ. 軍國機務의정사안
1. 邊禁(犯越)사안
2. 問情(漂海人)사안
Ⅵ. 맺음말
Ⅰ. 머리말
이 논문은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備邊司의 외교정책 議定내용을 해명하려는 연구이다. 조선시대 비변사는 1510년(중종 5)에 남북 변경문제를 대비하려는 邊事籌劃의 權設衙門으로 창설되어 중종~명종년간에 추자도 왜변과 을묘왜변 등을 대처하는데 초창기부터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비변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전란을 거치면서 軍國機務를 總領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정치적 기능이 강화된 이래 1865년(고종2) 혁파될 때까지 조선후기 360여 년간 전기간에 의정부의 직권을 압도하면서 국정전반을 總掌한 최고 政廳이면서 權府로서의 기능을 행사한 막강한 정치기구이었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은 그 동안 필자가 집중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오면서 이미 비변사의 치폐과정을 필두로 하여 비변사의 시기구분, 조직체계, 직무범위, 회의운영, 변사 국방대책, 재정정책의 議定, 정치적 위상, 江都보장책 등 10여 편의 논고를 통해 상당히 해명한 바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비변사의 연구일환으로서 그 동안 미진하였던 외교정책의 議定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피어 이를 해명하고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외교정책의 실상을 추구해 보려는 것이다. 비변사가 군국기무의 총령이라는 임무와 관련하여 중요기능의 하나인 외교정책의 결정사항 등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비변사의 외교정책 議啓안건에는 조선후기 對淸, 對倭交易부분에서 당시 정책적 방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사안이 망라되어 있으며 17세기 胡亂이후 대외 화평시기 交隣대책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을 뿐만 아니라 漂來人問情등을 통하여 대외정보 인지와 대외인식의 정도를 살필 수 있는 사항이 많다. 따라서 이의 실증적 해명이 필요한 것인데, 이 글에서는 이상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비변사의 외교사안 의계안건을 분석하여 그 정책방향을 살피려 한 것이며 시기적으로는 17~18세기를 위주로 할 것이다.
본래 事大交隣정책은 그 掌政부서가 禮曹이며 議政大臣에게 품의하여 국왕의 재가로 결정된 것이지만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이러한 제도가 비변사의 군국기무총령이라는 직무와 나아가 국정을 總掌한 관행때문에 외교전담 부서이었던 예조의 직무가 사실상 비변사에 의해 무위화된 형편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변사에서 주도하여 교린관계 事目을 제정하고 각종 書契의 작성에 관여하며 燕行互市萊館漂海人등의 사안을 직접관장하고 있었던 것에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교린사안의 의계항목을 집중적으로 摘示분석하게 될 것인데 자료로는 비변사등록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비변사등록의 逸失記事는『謄錄類抄』 의 交隣篇을 주로 이용하게 될 것이다.
Ⅱ. 외교정책 議啓과정과 範圍
1. 외교정책 議啓과정
비변사의 외교정책 의계과정과 범위를4) 살펴보는 것은 조선시대의 외교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을 함께 고찰할 수 있다. 交隣事案은 邊事, 軍政사안과 함께 中外軍國機務에 관한 비변사의 핵심 所掌사안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備邊司謄錄』에 등재된 이 분야의 기사도 輻輳하여 개개사실을 일일이 구분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사대교린 사안의 처리는 절차상 禮曹啓辭나 外方狀啓등을 비변사에서 回啓, 覆啓하여 議定하는 것이지만 중요사안의 경우 국왕의 지시가 독촉되는 사례도 허다하다. 현전 비변사등록의 冒頭에 실린 胡女巨芻里의 安置事를 볼 때 국왕으로부터 비변사의「議處」가 傳敎되었고 이어 奴酋문제에 대한 방략도「豫講」토록 분부되었으며 倭使橘智正의 접대 및 倭書契회답사안에 대해서도 비변사로 하여금「急速議處」하도록 전교하고 있는데 預講이나 急速議處등의 용어에서 보듯이 교린정책 상에서 비변사의 위치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광해조의 일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그러한 양상이었을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데 이는 비변사가 혁파될 때까지 거의 보편화된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비변사의 외교정책 議定사례는 항을 달리하여 다음에 상술하겠지만 우선 여기에서는 인조~숙종년간에 비변사에서 의계 처리한 중요사안을 먼저 摘示하여 그 내용과 과정을 一瞥하여 보기로 한다.
인조대 병자호란 후의 경우 倭情의 咨報및 向化漢人이나 我國走回人의 刷還사안이9) 議啓되고 陳奏謝恩문서 및 사신칭호 문제 라던가 淸人接待節目의 마련 그리고 使臣帶去員役및 軍物諸具別單과 迎勅절차 등이 마련되었으며 倭使接待時能文人을 帶去하는 조치라던가 淸國回咨의 撰出回送문제, 賓坐時사신차출 문제 등이 議啓되었다. 孝~顯宗년간에는 倭館出入의 통제 및 대마도에 譯官을 別遣하는 사안 그리고 羅禪赴征軍兵抄送節目別單書契와 羅禪征兵得捷回還事 등이 비변사에 의해 議處入啓되었는데 이러한 사안들은 당시 對倭對淸 외교상에서 중대한 사안이었다. 淸日과의 교린이 빈번해진 孝宗朝의 경우, 비변사가 冬至使狀啓를 卽接하여 처리하고 勅使가 灣上에 이르기 전에 館伴의 차출을 조치한다거나 渡日通信使의 中路馳啓를 卽接처리하며 역관 洪喜男, 金謹行, 洪文雨등이 대마도에서 貿來한 石硫黃, 倭長銃, 倭劒등을 각처에 分給하고 그 銀價를 該衙門에 備給토록 한 것, 그리고 東萊府使狀啓및 公木書契등의 사안을 稟處, 대마도 島主病劇時醫官의 급구에 따른 회답書契의 草를 승문원으로 하여금 속히 撰出下送토록 한 조치 등이 있었다.
또한 冬至使尹絳등의 狀啓로 보고된 淸의 鳥銃요구 문제를 강구하였고 回還冬至使가 齎來한 禮部咨文중 蔘貨等物에 관한 교역사안의 조치라던가 接伴使別差문제를 비변사가 迎接都監의 草記에 의해 稟處하는 등 효종 7~9년 사이만 해도 對淸, 對日의 중대한 교린사안에 비변사의 議啓조치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청의 조총요구 문제와 소위 羅禪征伐이라고 일컬어진 만주 寧古塔派兵대책은 당시 조정의 중대사이었다. 특히 효종은 청의 조총요구 문제에 있어 이에 대한 備局의 대책을 苦待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備局會議를 종일 罷하지 말고 策應할 것이며 鳥銃의 可得方案을料理하지 못하면 歸家하지 말라” 고 할 정도로 비국 의지도가 높았다. 이에 비변사는 같은 날 조총의 구득방안을 入啓하고 계속하여 부족한 조총수량의 造給計劃이라던가, 本國銃과 倭鳥銃의 慕華館試放사용문제, 新造未放銃및 鄕銃의 看審精擇사안, 그리고 大通官(淸使臣)의 鳥銃持去문제 등을 연일 入啓할 정도이었다.
이와 같은 국왕의 비국 신뢰는 상대적으로 비국의 樞機결정에 대한권위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2차에 걸친 나선정벌 파병계획인「寧古塔入送節目」의 마련에서 그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었다. 孝宗~肅宗년간의 대표적 교린관계 節目제정의 경우를 보면, 邊汲과 申瀏의 羅禪征伐에 관한 咸境北道砲手寧古塔入送節目이 두 차례에 걸쳐 마련되고, 萊館事目의 제정 그리고 臺灣鄭錦舍의 情報와 관련된 漂漢人問情別單 및 이 내용과 연결된 濟州漂漢人問情別單 그리고 濟州漂人載來漢人問情別單등이 연속 마련되고 있었다. 특히 대일 대청무역과 관련하여 비변사에서 제정하였던 앞의「萊館事目」 및「東萊商賈定額節目」과「倭館看檢節目」 등은 萊館貿易즉 대일 무역분야에 중요한 내용이며, 대청무역과 관련하여「中江及海運米穀開市節目」및「中江及彌串鎭開市時戶部侍郞接待節目」 그리고 이와연관된「海運開市及侍郞接待節目」등을 연속적으로 마련한 사실은 국경 開市무역이나 支勅등에 있어서 비변사의 기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외교문서 작성 상 필요시에는, 知製敎가 아니면서도 詩文에 능한 사람의 抄出을 비변사에서 抄啓하였는데 「製述人員抄啓別單」의 마련이 그 예라 할 것이다.
본래 事大交隣정책은 그 掌政部署가 禮曹이며 議政大臣에게 稟議하여 정책을 수립, 시행한 것이지만 壬亂이후부터는 이러한 사안이 대부분 비변사가 주동이 되는 籌坐(비변사회의)나 賓坐(賓廳회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이었기 때문에 該曹판서나 의정대신의 견해는 결국 備局籌劃의 방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이었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비변사가 교린사안 節目을 제정한다는 것은 교린정책의 기조를 비변사가 주도했다는 것을 뜻하며 각종 외교사안의 無漏議啓또한 비변사의 所掌이 광범했음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따라서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이 뚜렷이 강화되었던 임란이후부터는 교린사안의 의계권도 장악하여 외교정책의 결정을 비변사가 주도한 형세에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외교정책의 수립결정은 제도적으로 예조-의정부-국왕의 재가로 이루어 진 것이지만 이러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비변사가 그 중심에 있어서 당해 掌政부서인 禮曹가 소외되었던 것이다. 물론 예조판서는 비변사의 例兼堂上으로 비변사의 중요한 구성원이었으므로48) 당해부서의 의견을 籌坐에서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마련되기는 하였다.
2. 의계사안 範圍
비변사의 외교사안 議啓항목의 범위는 사대교린에 관한한 범정부적 사안을 처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왜관 및 개시무역의 통제조정 내용은 비변사의 교린관계 所掌에 있어 단지 몇 가지 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핀 내용과 함께 일정기간의 議啓항목을 모두 정리하여 이를 도표화하여 보면 구체적인 議啓事案의 내용과 그 推移를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의계항목의 사례에서 詳論될『備邊司의 交隣政策議啓事例項目表』는 숙종 19년부터 동왕 29년까지의 10년간의 경우이지만, 그 내용을 一瞥하여 보면 政府六曹所管을 거의 망라하여 비변사에서 관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禮, 戶, 吏, 兵曹의 순서로 의계항목의 빈도가 드러나 있고 그 의계항목 또한 미치지 않은 바가 없을 정도인데 17세기~18세기초의 경우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燕行, 互市, 萊館, 支勅, 書契, 漂海人, 邊事, 金銀등의 사안이었다. 이러한 사안이 빈도 높게 議處되었다는 것은 비변사의 第3期에 접어든 시대적 상황 즉 17세기 이후 대외화평 교역시대를 맞이하여 비변사의 교린외교정책의 역할과 그 向方을 알게 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변사의 교린정책 즉 외교정책의 議啓사항은 邊事사안 등과 함께 비변사의 고유기능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사항이 많아 구체적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그 사안들이 軍國機務의 핵심 내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邊事, 軍政, 財政등의 國政의 모든 분야와 서로 관련되지 않음이 없다.
앞에서 살펴본 교린사안의 議啓내용에서 비변사의 외교정책의 대체를 알 수 있으나, 다음의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정기간을 한정하더라도 그 의계항목이 무수하고 관련내용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항목을 개별로 분류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본 외교정책의 議啓項目설명은 다음의 外交政策議啓事例項目表의 一瞥로서 代置하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서도 그 외교정책의 대체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다음의 표는 비변사의 제 3기 즉 外交․財政掌握期에 접어든 숙종 19년(1693)부터 동왕 29년(1703)까지의 10여년 간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인데, 이 기간의 내용이 비변사의 교린 議處사항에 있어 포괄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10여년 간 비변사에서 議啓하였던 외교관계 사안을 빠짐없이 拔萃하여 이를 본래의 법전적 소관(吏曹戶曹禮曹兵曹刑曹工曹)으로 분류하고, 다시 연대별로 정리하여 일람하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표에서「議啓項目」의 설정은 가장 대표적인 내용을 추출하여 設項한 것이며 또「關聯事項」을 부기한 것은 중심사안과 부수 내용과의 관련성을 표시하기 위함인데 이것은 두 가지 이상의 의계내용이 있을 경우 경중을 고려하여 그 하나를 선정한 것이다. 특히 다음의 표에서 各曹別로 본래의 소관을 구분한 것은 비변사의 의계내용 실상 및 그 議啓權의 집중을 사례별로 실증하기 위함이며, 또 항목을 일일이 나열한 것은 이 시기의 외교양상 및 議啓의 빈도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 시기의 항목정리에 있어 현전 비변사등록에 빠져있는 부분이 많아 이 逸失부분은 앞서 언급한『謄錄類抄』에서 塡充할 수 있어서, 다음의 표에 현전 비변사등록의 관련기사를 보완하는 측면도 함께 있다. 우선 그 내용을 一見하기로 한다.
그 대상 시기가 비록 17세기말 18세기 초엽 숙종조의 10여 년간이지만, 여기에서 나타난 비변사의 외교관계 議啓事案은 본래 掌政부서(六曹)에서 소관한 것을 거의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면적으로 볼 때 각 조의 본래 소관으로 분류한 의계항목은 <표-2>禮曹의 해당부분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표-3> 戶曹의 관련 사안이며 이어 <표-1> 吏曹, 그리고 <표-4> 兵曹, 刑曹, 工曹의 순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물론 사대교린의 掌政部署여부에 관계되기 때문이지만 어떻든 외교의 주관부서인 예조 및 재정의 주관관아인 호조 등의 본래소관 사안이 비변사에 거의 이관된 듯한 현상은 비변사의 외교․재정권의 장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시기의 정치적 관심의 대상을 알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 준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이상에 적시한 의계항목 가운데 燕行을 위시하여 互市萊館支勅書契漂海人金銀商賈潛商邊禁등의 사안이 그 빈도수나 내용면에서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사회변동 및 상품경제 유통과 함께 당시 대외무역 즉 對淸對日貿易에 있어서 비변사의 역할이 집중적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Ⅲ. 對淸외교 議定事案
1. 支勅사안
비변사의 勅使관계 사안의 의정내용을 17세기 중엽(현종 2)부터 18세기 초엽(숙종 29)까지 약 반세기동안의 내용을 摘示하여 그 추이를 먼저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현종조 事案의 경우 현종 즉위년의 청나라 세조의 弔訃사안을50)필두로 하여 이 弔訃칙사의 陳慰方物사안과 이어 칙사예단(동왕2;2,2) 그리고 원접사 鄭致和, 金壽恒의 칙사 陳懇주선(동왕2;2, 26) 및 원접사 尹絳차출(동왕2;4, 28), 勅行사은예물(동왕2;5, 28) 등이 의정되고 그후 통상적인 接伴使擇送이라던가 迎慰使處별정금군 하송, 灣上迎勅時用藥 등의 사안 등이 처리되었다. 숙종조 사안으로는 평안감사 申晸및 원접사 金宇亨從重推考사안을 비롯하여 鳥銃入給,) 왕비冊禮誥命親傳事(동왕8;7, 4), 칙사 査問時入參인원(동왕11;11, 23), 후주첨사 勘罪改定(동왕11;12, 19) 등의 사안이 의정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사례 가운데 청세조의 弔訃사안의 경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661년(현종 2) 1월에 淸나라 황제 世祖가 죽고 그 부음을 알리는 칙사가 오게되자 이의 조치는 당시 외교사안에서 매우 중한 일이었다. 비변사에서는 예조의 啓辭에 따라 五禮儀와 癸未年謄錄을 取考하여 百官과 遠接使의 弔訃服色을 정하고 그 支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본래 弔訃나 복색 등의 사안처리는 그 掌政부서가 예조이며 의정부 大臣들의 議政을 거쳐 국왕의 재가로 시행되는 것인데, 이 황제부음 칙사를 맞이하는 절차를 비변사에서 예조의 啓辭를 取考하여 그 내용을 조정하고 왕에게 啓聞하여 시행하고 있는 사례이다.
이 때의 결정내용은 五禮儀所載에 의거 擧哀服色을 백관은 白團領에 烏紗帽黑角帶로 하고 郊迎원접사 역시 같게 하여 行禮하도록 한 것이며 부음이 당도한 날에 거애함이 일반적인 예이지만 이 떄의 경우는 칙사가 義州에 도착하여 傳訃를 받은 날에 擧哀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支勅사안으로는 효종 8년의 경우 호조계사를 인용한 備邊司單啓目에서 支勅上出站의 폐단시정을 조치하였으며 이어 迎慰使李挺漢이 身病때문에 칙사가 渡江한 날에 당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이의 대비책으로 품계가 높은 지방수령을 대행하는 조치를 강구하였다. 또한 勅行留館時所用燒木逐日進排事(효종8;12, 25)와 勅書出來時接伴使차출 및 칙서출래시 迎接都監의 接待所별설 폐단시정(上同日)그리고 접대소 구관당상 2원차출(상동일), 칙사의 便殿접견 등의 절차(상동일)가 연속 조치되었다.
이와같이 칙사 출래시에는 비변사에서 그 受勅절차의 마련을 주도하였는데 왕이 仁政殿에서 受勅한 후에 편전으로 돌아가 접대소 당상이 다례를 설행하는 것도 계문하여 처리하고 이어 大通官의 便殿招見時절차라던가 御床및 禮單등도 廟堂으로 하여금 급속 議處토록하였으며(상동일) 그 당시의 칙행이 差官(李譯)으로서 정식 勅使와 달랐기 때문에 홍제원 영위사의 접대절차를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도 政院의 계문을 이용하여 조치하였다. 또한 接待所계문에 따라 칙사 入京時그 환영의식에서 정식 칙사가 아니기 때문에 六角및 羅將軍牢그리고 旗鼓官등의 숫자를 반감하는 조치와 숭례문도착시 放砲등의 규정을 마련하고(상동일) 호조의 계문에는 갑오년 韓譯출래시에 편전에서 예단을 입급하였으나 받지 않고 다만 物目所錄만 가지고 갔다는 예를 들어 예단을 마련하지 말자고 하였으나 비변사에서는 만약 예단이 없으면 落莫한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예단을 마련하도록 조치하였다.
한편 숙종대의 지칙사례이지만 칙사영접담당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로는 다음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즉 비변사의 직접 계문에 “칙사가 先後로 왕래할 때에 道內에 서로 상치되어 군색하고 妨碍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이러한 경우 평안도는 평안병사로 하여금 칙사를 수행토록 하고 평안감사는 돌와와 灣上으로 나아가 迎勅하며 海西도 역시 이와 같이 하며 경기는 개성유수가 대행하는 것이 이미 전례이었으니 지금 또한 이에 의거하여 양서 경기 개성부에 분부하도록하여 그 허락을 받았다.” 라고 한 바와 같이 비변사에서 칙사의 중복왕래시 지방의 감, 병사의 영칙한계를 규정하여 칙사영접을 차질없도록 강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칙사영접과 사신반송에 있어 평안 감병영과 의주부(부윤)의 소임이 막중하였고 경상 감영과 동래부(부사)는 대일본의 중요 창구이었음도 물론이다. 지칙에 있어 또 하나의 사례는 청나라의 칙사가 조선의 詩筆을 요구한 내용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철저히 준비하여 그 요구를 응했었는데, 이와 같은 詩書요구는 조선의 문물이 중국에 유입되는 경우이어서, 조선시대의 문물수입은 중국을 통해서라는 일반적인 관례와 인식에서 벗어난 사례이다. 이와같은 경우는 우리의 문물이 거꾸로 중국으로 역류한 것으로 문화의 일방적 파급이 아닌 문화의 상호교류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중국측에서는 조선의 학문과 예술 등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외정보 인지차원의 정치성을 띈 외교행위라고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숙종 29년 6월 5일 政院은 청나라의 칙사가 비단병풍(綃屛) 2座를 요구하면서 재상급이 지은 贊文과 함께 古詩詩筆을 書給하도록 요구한 사실을 계문하였다. 일반적으로 求詩때에는 대재학이 能詩14인과 能書4인을 抄啓하여 撰書하여 주거나 대재학이 館閣당상과 상의하여 撰出하여 주거나, 朝士가운데 명필의 詩書로 그 요구에 응하였으나 이때의 경우는 位高宰相의 作詩贊揚을 요구하고 있어 이의 처리를 廟堂이 稟處하게된 것이다. 칙사가 요구한 詩文製述과 書寫人을 廟堂으로 하여금 抄啓토록 하는 조치가 결정되었으나 당시로서는 主文(대제학)하는 사람이 없고 館閣당상 역시 회피하는 일이며 宰臣중 일없는 자가 극히 적기 때문에 단지 6인으로 書入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결정되어 졌다. 이 때의 ‘製述宰臣’은 李濡, 李益壽, 嚴緝, 金昌集, 趙泰采, 李光迪이었으며 ‘書寫宰臣’으로는 吳泰周, 趙相愚, 柳之發, 李宇恒, 李震休, 李德成등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숙종29년 6월 12일) 政院에서는 칙사가 요구한 병풍 題詩를 속히 처리하도록 계문을 올리자 비변사에서는 “朝士중 無故재직자가 적고 그 가운데 詩로 유명한 자도 더욱 보기 드문 형편이며 다만 知製敎로서 뽑힌 자를 초계문신으로 삼으려 하면 그 수가 10여인에 불과하여 매우 어려울 것임으로 비단 지제교가 아니라 할지라도 세칭 能詩者를 아울러 抄出해야한다”고 계문하여 이 대책이 허락되기에 이르렀다. 이 비변사의 임시 변통적인 조치에 따라 뽑힌「製述人員抄啓別單」은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이 칙사의 詩書요구에 따른 초계문신의 선발은 당시 비변사에서 외교사안의 처리에 입각한 임시적 조치이었으나 이 명단에 오른 인물들은 숙종조 당시에 유명한 문신으로 구성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숙종 29년 8월) 들어온 청 나라 칙사는 황제(淸聖祖康熙皇帝)의 筆帖을 가지고 와서 봉람시키었는데 이와 같은 황제 手筆本을 가져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에 政院에서는 황제필첩에 대한 致謝를 啓稟하게 되고 당시 숙종이 그 필첩을 愛玩한 바 있다.
2. 燕行사안
연행은 정기 및 부정기, 임시사행으로 조선시대 對明, 對淸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赴燕使行이다. 여기에서는 17세기 중엽이후 약 50여 년을 한정하여 몇 가지 燕行사례를 통해 비변사에서 계문한 연행사안의 議定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17세기 중엽의 한중일 외교관계는 화평시대의 계속으로 각기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상호 교류가 많았고 이에 따른 교역이 활발한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은 조선측의 경우 사신수행원인 譯官의 관여가 커서 이를 소위 역관무역이라고도 하거니와 이 때의 蔘貨는 교역상에서 매우 중요한 결제수단이었으며 따라서 이 삼화의 운용은 당시로서는 국제통화나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현종 8년 2월 비변사의 계문을 보면 冬至使回還時에 청나라 禮部咨文에서 交易蔘貨等物을 그 총 수량을 명백히 하고 기타 雜物도 아울러 列書하여 移咨하라는 요청이 있자 이는 잘못하면 辱國으로 외교문제화 될 수 있음을 고려하여 使行의 參貨雜物의 소지를 명백히 하는 조치와 渡江時이의 搜檢을 강화한 조치 등 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使行의 교역에서 灣上도강시 銀貨는 搜檢하지 않기 때문에 은화가 중국에 많이 유출된다는 지적이(효종조 호조판서 鄭維城) 있자 의주부윤으로 하여금 이러한 은화의 수검을 강화하여 使行이 이를 마음대로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 사신의 赴京文書(사대문서)는 반드시 예문관에서 分排하여 제술한 다음에 승문원에서 草出하는 것이 규례인데 효종10년의 경우는 예문관 대제학(李一相)이 유고로 도승지(柳淰)가 예문관 직제학을 겸하고 있어 이들 중에서 謝恩文書를 주관해야 할 것이나 모두 行公할 수 없어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謝恩使의 출발시기가 급박하자 이 사은문서 작성의 처리를 승문원 副提調로 하여금 專掌하여 처리토록하는 조치를 강구하여 이의 허락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우는 사대문서의 전담관원이 유고가 생길 때 비변사가 權道로 외교문서의 작성사안까지 계문하여 議定한 사례이다. 赴京使行에는 灣上軍官을 해당지역의 義州人으로 삼아 대동하여 邊民의 慰悅을 겸하게 되어 있으나 이 만상군관을 京中시정배가 가로챈 폐단이 많아 이를 현종 7년부터는 만상군관은 반드시 의주인으로 삼을 것을 규정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사행의 正官은 30員을 넘지 못하게 하고 別使시의 畵員은 줄이고 譯官및 만상군관도 전체적으로 30員을 넘지 못하게 하여 불필요한 사행인원의 제한이 있었다. 또한 사행員役에게 私持馬를 例給하는데 이를 벗어나 別私持馬를 商賈와 許賣하여 率去하는 폐단이 잦자 이 별사지마를 금단하였으나(현종9;3, 8) 사행의 편의를 위하여 당상역관에게는 별사지마 1필을 허급하는것이 보완 조치되었다. 한편 부연사행이 잦음에 따라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각종 사행을 일일이 赴京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兼帶시킨 조치, 즉 謝恩兼陳奏使라던가 陳慰兼進香使등과 같이 두 가지 임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조치도 이루어 졌으며 이에 따라 사신차출도 宗班과 더불어 朝臣을 함께 擬望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숙종조에 들어와서는 사행이 각 아문의 貨物을 貸得하여 赴京하는 폐단을 제한하였으며 사신이 帶去한 員役을 임의 私囑하여 숫자를 증가시키는 것도 일체 減除시키었다.(숙종16;2, 17) 사행시의 刷馬는 刷銀價에 准數하므로 京外의 有馬者가 다투어 願立하게되자 이의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사행시의 쇄마가는 1/3은 임시분급하여 治裝에 쓰고 나머지 2/3는 만상군관에게 분부하여 繼粮으로 삼도록 하였다. 부연사신의 路費는 외방각도에 求請하며 사신이 私的으로 發簡하여 군관으로 하여금 修答한 것이지만 비변사에서 각도감사에 行關, 각읍에 분부하여 備送하도록 하였다. 또한 赴燕員役이 가지고 가는 銀貨, 八包는 堂上은 3천냥으로 堂下는 2천냥으로 제한하여 정식으로 삼고 商賈는 일체 금단한다는 것이 규정되기도 하였다.(숙종24;7, 1‘類’) 한편 사행 원역이 연경체류시에 運餉을 文書購得에 사용한 경우 의주부윤에 이를 會減토록 하는 조치는 조선후기 對淸貿書의 제도적 사항이라 할 것이다.
3. 互市사안
互市는 朝淸국경무역으로 양국의 상품경제 발달과 연계되어 매우 중요한 무역현장이었다. 이는 양국공인의 開市와 밀무형태의 後市로 나뉘며 이러한 국경무역의 형태는 胡亂이 끝나고 양국의 화평시대의 개막과 관련하여 인조년간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비변사에서 교린대책과 관련하여 이 호시문제의 처리는 대단히 많은 편이다. 여기에는 국경지대의 군사적인 문제도 연관되어 변사대책과 함께 외교재정의 대책도 함께 고려된 것이어서 이방면의 議啓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開市는 임란이후 1603년(선조 36)부터 中江開市가 열린 바 있고 중간에 정지되었다가 1628년(인조 6)에 다시 열리는 등 기복이 많았고 1645년(인조 23)에는 會寧, 慶源開市가 열렸다. 현종 즉위년(1659)의 경우 함경감사 趙啓遠의 장계에 의하면 만주 寧古塔과 두만강 유역의 慶源, 會寧양처의 開市가 정지된 사건을 撰出하여 咨文으로 역관에게 장차 보내려 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에 관한 대책으로는 北路의 형세가 절박하고 그 당시 告訃사행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칙사 또한 오지 않을 때에 먼저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개시정지를 이와 같이 移咨하면 비단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일 개시를 하지 않으면 더욱 손해를 볼 것이므로 이를 통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치였다. 따라서 該曹(호조)로 하여금 별도로 開市接應策을 강구하도록 하고 함경도에 분부하여 변민의 보존책으로 삼아 의외의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의 開市發賣物은 소, 소금, 보습, 솟 등이었다.(상동일) 이러한 開市陳弊문제와 관련하여 비변사에서는 歲幣黃金을 許貿한 咨文을 撰出하게 하여 청나라 측의 트집을 없애는 조치를 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호시는 대국에 이익이 돌아가고 폐는 소국에 미치는 소위 “自古互市例多利歸於大國弊及於小國” 것이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조치가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시의 운영과 관련하여 비변사에서는 평안도의 함종, 중화, 양덕 등 3읍과 황해도의 장연, 송화, 재령, 안악, 곡산, 신계, 옹진 등 7읍이 物貨가 麤劣할뿐만 아니라 소정의 商賈역시 자격이 미달하여 그들이 私的으로 代送하는 폐단이 허다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발생시킨 상기 10읍의 수령을 문책하고 각읍의 鄕所色吏도 엄형을 가하도록 하며 私自代送한 商賈도 重治하도록 조치하였다.
개시에서의 農牛는 매매비중이 매우 큰 것인데 간혹 牛疫으로 치폐가 많아 이의 해결책으로 번식될 때까지 매매를 제한하기도 하였으며(숙종8;11, 6) 牛畜의 번식시기에는 停市토록하여(동왕11;8, 18) 개시 운영의 원활함을 기하였다. 한편 숙종년 간에 비변사에서 의정한 호시에 관한 사안은 그 빈도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성을 띈 내용이 많다.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므로 각 사안마다 그 요지만을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북도 開市시 淸使臣의 持路문제의 조정(동왕21;12, 10)이라던가 청사신 출래시 需用물품에 관한 규정(동왕21;12, 10), 中江과 柵門등의 互市에 왕래불편 문제의 조치 및 개시에서의 貿米문제 그리고 貿米의 의주유치분을 긴급 補賑用으로 사용할 사안과 賚咨官入送시기 등의 사안이 의정되었다. 한편 개시시에 商賈로 하여금 米穀을 많이 賣買하게 하여 이를 賑救用으로 사용할 대책이 강구되었으며 개시에서의 鹽商還賣사안 등이 의정되었는데(숙종23;12, 28‘類’) 이와 같은 구체적인 조치들은「中江及海運米穀開市節目」의 마련과(숙종24;1, 8‘類’) 「中江及彌串鎭開市時戶部侍郞吏部侍郞接待節目」의 마련으로(숙종24;1, 8‘類’) 이 부분의 정책방향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절목 가운데 前者는 淸의 戶部侍郞米2萬石이 中江開市에 陸路로 督運되고 또 吏部侍郞米2萬石이 추가로 船運하게 되어있어, 이 水陸米總4萬石(我國斗量으로는 6~8萬石에 해당)을 貿取하는 제반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이어서 開市에서의 抑賣폐단이 많은 南草, 紙地, 鹽石및 기타 魚藿雜物외에 牛隻은 農事때문에 擧論하지 말 것과 京江船隻에 의한 京中運米의 상황, 船運價의 문제, 開市看檢문제, 賑救飢民을 위한 京外分給문제, 戶部侍郞接待事등이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後者의 내용도 전자와 대동소이하다.
이상의 두 가지 절목은 장문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어 비변사에서 의정한 互市정책의 대표적인 내용일 뿐만 아니라 당시 국경무역의 실상을 파악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이어 거의 같은 시기에 開市米價의 결정90) 및 開市請停事(숙종24;5, 12‘類’), 私商許貿事와 譯官檢勅事(동왕24;5, 23‘類’), 해운미 운래시 지휘사(동왕24;5, 24‘類’), 私商米價각아문銀貨수습하송사(동왕24;6, 6‘類’), 개시시 看檢事(동왕24;12, 1‘類’), 개시시 出來人馬증가대책사(동왕24;12, 22‘類’), 後市불허事, 義州後市事 등 호시에서의 상황별 대책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숙종년간의 국경무역의 중요성과 함께 그 전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Ⅳ. 對日외교 의정사안
1. 書契사안
조선시대 사대교린 정책에 있어 그 외교문서를 對中國의 경우는 事大文書라 하고 對日本의 경우는 書契라고 한다. 모두가 외교문서의 전담기관인 承文院에서 製撰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외교관계의 중대성 때문에 관계사안 별로 該曹(예조)가 啓稟하고 廟堂의 議政을 거쳐 국왕의 裁可로 결정된 것이다. 조선후기 廟堂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국정최고 기관인 의정부를 지칭한 것이지만 양란이후 비변사가 군국기무를 총령하고 나아가 국정전반의 의정권을 장악하게 됨에 이르러서는 이 묘당은 실제에 있어서는 비변사를 지칭한 셈이 되었다. 비변사의 기능강화와 권한 집중으로 의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허구화된 상황에서 군국기무의 핵심사안인 외교문서 내용의 조정과 확정은 비변사가 주도한 賓座에서 이루어진 것이 상례이었기 때문이다. 빈좌는 비변사의 최고회의체로서 대궐에서 행해진 議政會議體이다. 비변사에서 議定한 외교관계 사안은 군국기무의 총령이라는 고유기능과 관련하여 邊政, 邊禁사안 그리고 漂海人問情등의 사안처리와 胡亂이후 대외화평시대를 맞이하면서부터는 주로 대청, 대일 무역에 관한 사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對日本의 경우 通信使의 문제라던가 換貿와 관련한 書契가 주류를 점하였다. 외교문서의 내용은 사소한 문구라도 혹 관례을 벗어나면 자칫 중대한 외교문제로 비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외교사안의 議啓는 전담부서인 예조의 관할로 처리하여 왔지만 조선후기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면서부터는 예조의 의계기능 위에 비변사의 조정이 가해진 것이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비변사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처리한 것이며 이러한 議政형태는 조선후기 정치운영의 한 특징이었다. 이상과 같은 비변사의 조정기능은 효종조의 한 예 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즉 효종 7년 4월 13일 비변사의 계문에 “書契事는 동문서답하는 경우가 있어 그 불찰이 막심합니다. 당해 유사당상을 추고하고 동래부사가 아직 회답하지 않고 있으니 엄사로서 독촉해야 합니다.” 라고 하는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때의 서계 내용은 일본과의 公木(포목) 換貿사항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역관 洪喜男이 일본에 가져간 문서를 비변사에서 계문하면서 “지금 홍희남의 말을 듣건데 문서에 貴州二字는 반드시 한 칸 위로 쓰는 것이 상규인데 지금 榮位榮還等字를 귀주의 위에 可字하여 이것이 도착한 후에 말썽의 폐단이 생길까 걱정되니 원컨데 이를 改書하여 보내야하고 이를 該院에 분부하여야 합니다.” 라는 내용과 같이 서계 字行의 高低문제까지 改書하는 사례도 들 수 있다.
효종조 이래 비변사에서 처리한 서계사안은 17세기 중엽이후의 대일본 換貿외교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 무역이 활발할 때인 효종 7년의 경우, 得接譯官洪喜男金謹行洪文雨등의 手本에 의하면 그 들이 渡海시에 朝家의 분부가 있어 대마도주에게 石硫黃1만5천근을 定價하여 載船할 것을 약속하였고 이 물품을 出來할 때에 1만근은 島主 의 유치분으로 한다는 것이며 이외의 倭長劍40柄과 中劍60병을 또 貿來하였다고 하였다. 硫黃은 우리나라에 없는 물품이므로 각 아문이 부득이 貿得한 것이며 1백 근의 값은 많게는 60여 냥인데 지금 이후에는 銀22냥으로 稱價하여 계산하고 이전에 비하면 무역한 것이 2/3에 간신히 해당한 것이다. 대마도에 유치분이 들어오면 각처에 분급하고 그 價銀은 역시 또한 당해 아문에서 備給하며 왜검 1백병은 호조로 이송하여 客使의 需用으로 삼고 이전의 역관에게 論賞하며 금번의 역관도 무역품이 도착한 이후에 전례에 의하여 논상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동래부사의 장계에 따라 公木書契等事가 의정되었고 信使회 환후에 硫黃致謝書契가 撰出하송되었으며(동왕7;4, 21) 대마도의 長老顯吉이 상규에 벗어난 글을 동래부에 보내와 이의 수응을 동래부사가 館守倭에게 書示할 것을 지시하였으며(동왕8;6, 29) 이때의 서계는 승문원에서 찬출한 것을 보냈다. 현종조에 들어와서는 역관(金謹行)의 私書문제를 의계하였으며 숙종 때에는 倭書가 違格일 때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를 불가불 一本을 謄出하여 임금에게 보이는데 그 내용이 邊情에 관계될 때는 더욱 그러하였으며 狀啓및 謄本이 同封된 것이 승문원에 도착하면 政院에서는 이를 비변사에 보내어 비변사의 계문자료로 삼아 처리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서계의 격식문제는 한일 양국간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숙종조에 더욱 많이 일어났다. 이와 관련하여 비변사 당상인 병조판서 徐文重은 “사대교린이 重事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문서는 심히 소루합니다.
금번 倭書詰問시 이 문제에 관한 문헌이 없어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별도로 자료를 모아 成冊하여 이와 같은 폐단을 없게 해야합니다.” 라고 大臣備局堂上引見時(賓座)에서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어 差倭가 동래부에 보낸 圖書통행문제의 의정이 있었고(숙종21;8, 20) 漂人領來差倭의 서계 개정요구사를 稟處하였으며 계속하여 서계 改送事의 의정(동왕24;3, 16‘類’) 등이 있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特送船의 처리와 이에 관한 서계문제(동왕24;4, 6‘類’), 소위 六成銀양국통행 문제(동왕 24;6, 7‘類’), 동래부사 新銀通行事奉行서계(동왕24;6, 24‘類’) 등과 17세기말 18세기 초엽 일본 江戶지방에서 크게 유행하던 沙器燔造및 許貿事에 관한 사안 등이 의정되었다.
2. 萊館(倭館)사안
萊館즉 東萊府는 부산의 倭館과 함께 대일 외교와 朝淸日3국의 중계무역 중심이었다. 양란이 끝나고 대외화평시대가 개막된 17세기이래 朝淸국경관문인 의주부와 朝日海關인 동래부에 관련된 비변사의 議啓는 외교사안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래관 사안에서의 주도인물은 東萊府使이었다. 일본과의 일차적 외교창구는 동래부사가 對馬島主와 행한 書契移書이며 양국 사신의 출입국 접대초치 및 중계무역인의 처리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渡日通信使수발 등이 동래부사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안에 관련된 동래부사의 狀啓는 수없이 많고 연일 啓稟될 정도로 그 비중이 크다. 현종조에 들어와서 대마도의 화재발생으로 인한 도민의 賜米存活策으로 동래부사는 미곡 1백석을 계청하였으나 비변상당상 인견시에서 당시 영의정 鄭太和는 3백석으로 늘려 보내되 먼저 경상감사처에 분부하여 요리하게 하고 그 문서는 예조에 분부하여 찬출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釜山倭館의 船倉修築공사가 지연되어 왜인의 불만이 있자 경상감사가 瓜滿되었어도 이의 완료를 위해 후임차출을 연기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왜관은 임난 이후 1607년(선조 40)에 새로 지어진 이래 조일무역의 거점이었으나 1667년(현종 8)에 失火로 전소된 일이 있다. 이에 왜관 移設논의가 있다가 1673년(현종 14) 草梁에 이설할 것이 결정되고 1678년(숙종 4)에 초량왜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숙종대 왜관을 이설 신축하려할 때 이일과 관련하여 萊館에서는 首譯을 차송하고 新館의 基址를 講定하는 사안이 의정되었으며 이 왜관신축 때 倭人木手의 工錢을 戶曹稅銀과 嶺南民結에서 辦出한다는 결정이 있었다.(동왕4;8, 15) 이때 비변사에서는 倭館移設7條約束을 강정하여 왜관에서의 왜인 행동반경 제한과, 潛商제한 등의 준수사항이 명시 계품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앞서 동래부사 李馥의 장계에, 왜관을 옮기는 첫머리에 7개항의 약속을 渡海譯官이 내려갈 때에 결정하려 하였습니다. 역관 金謹行등은 지금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이른바 7개항의 약속은 대단한 변통에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1조에 말한바 왜인의 출입에 엄격히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곧 講和후 전해 내려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특히 館에 머무는 왜인이 삼가 따라서 행하지 않음으로써 점점 허물어지고 있으니 지금 마땅히 그 약속을 다시 다져야 합니다. 新館근처의 지명은 구관의 경우와 다릅니다. 前面으로는 海港을 넘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서쪽으로는 宴享廳을 지나지 못하게 하며 동쪽으로는 客舍를 지나지 못하는 일을 모두 장계에 의하여 한계를 정하는 것이 의당합니다. 제2조에서 말한 한계를 정한 뒤에 이를 범한 자의 처벌문제는 위 한계를 규정한 조항과 같은 것이므로 따로 한 조항을 설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3조에서 말한 비밀거래하다가 발각이 된 경우에 주고받은 자는 같은 죄로 다스리는문제를 엄격히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가지 외에 제4조는 開市때에 大廳에 앉고 各房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요 제5조는 魚菜의 매매를 문 밖에서 하는 문제요 제6조는 使者를 보냄에 있어 倭의 품계에 따라 숫자를 정하는 문제요 제7조는 5일 잡물을 들여줄 때에 色吏庫子를 구타할 수 없다는 등 항목은 모두 館守가 잘 준수할 일이고, 부사가 제재할 일이니, 본부에서 관수를 설득하여 피차의 위반자를 상호 엄중히 단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 자질구레한 항목은 굳이 조정에서 지휘할 것이 없고 또 굳이 島主에게 말 할 필요도 없이 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뜻을 도해역관에게 분부하는 한편 래부사에게 통보할 것을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이어 동래부 米商潛市의 금지사안이 의정되고 경상감사가 올린 倭館責應비용의 과다폐단을 변통하였는데 이 때 12斗의 公木代폐단이 무궁하다고 지적되었다(숙종13;8, 28). 또한 裁判倭의 留館기한을 定式으로 확정하여(동왕13;8, 28) 왜관에서의 왜인 불법체류를 규제하였다.
그러나 왜인이 약조를 어기고 잠입하여 變詐한 행위가 계속되자 訓導와 別差로 하여금 開諭하게 하는 조치와(동왕 16;6, 23) 路浮稅潛商을 각별히 重究하는 규제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萊館관련 사안은 숙종 중엽에 집중적으로 처리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조일 양국간의 교섭과 교역이 활발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對馬島主慰問譯官定送事가 의정되며 差倭출래시 진상품인 別幅과 宴席禮單의 처리(숙종21;7, 4), 備局回啓公事의 처리지연으로 동래부사 등의 推考결정,114) 동래부사가 올린 公木作米加限事의 의정(숙종23;1, 26,동년 4, 14‘類’), 대마도 特送使서계 회답 및 예물마련 (숙종23;9, 14‘類’), 왜관 留館작폐자 송환(숙종24;2, 8‘類’), 蔘貨潛商범죄인 처리(숙종24;6, 24‘類’)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동래부의 訓導와 別差로 하여금 館門禁斷의 사안을 拿問하게 하되 부사와의 임무괴리가 없게 할 것을 품정하고(숙종24;8, 6‘類’) 新銀 통용사안에 대해 동래부사가 대마도주로부터 서계를 받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대일교섭이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이 전례를 참고하기 어려워 이의 대안을 마련하였는 바, 당시 동래부사 정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정유년 강화약조의 내용을 물었으나 비변사나 예조에도 그 내용이 없고 다만 비변사에서만 동래사례 일책이 남아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실록에서 관련사실을 발췌하여 교린 접응책으로 삼도록 하였고 대마도 漂到人領來문제(숙종 25;7, 15), 倭館公作米事(동왕25;9, 1), 倭館改修事(동왕26;3, 22) 등도 거의 같은 시기에 처리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 발단은 물론 동래부사의 계문에 따라 비변사에서 의처한 것이다. 倭館에서의 朝市는 逐日로 열리며 채소나 잡물정도가 매매되었으나 錢幣가 유통되면서부터는 피아상인이 모두 전폐로 교역하므로 이의 부족이 염려된 폐단이 나타났다. 이에 慶尙前兵使柳漢明재임시에 이 전폐교역을 금하였는데 이유는 동전의 자료가 倭銅으로 이의 부족을 염려한 것이었다. 당시 동래부사 鄭德基의 계문에 따라 朝市에서 전폐 사용자는 潛商律로 論斷하고 동래부의 훈도 별차 등으로 하여금 각별히 금단하도록 하였다. 한편 숙종 27년에 비변사에서는 왜관 改造후「倭館看檢節目」을 마련하였다. 이 절목은 왜관의 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비변사등록에 없고『謄錄類抄』交隣四에 남아 있는 자료이다. 이 절목은 동래부사 鄭德基가 작성하여 비변사에 傳報한 것인데 당시 비변사에서는 매우 자세하여 별로 빠진 것이 없다고 보았으나 교린에 관계된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廟堂에서 다시 刪定을 가하여 別單으로 啓稟확정한 내용이다.
이「倭館看檢節目」은 12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즉 館宇一事는 訓導와 別差로 하여금 전과같이 專管토록한다는 내용을 冒頭로 하여 부산진이 왜관을 주관하고 왜관의 검칙, 수리시 간검, 왜인 偸毁處의 검칙, 九送倭來留時검찰, 훈별 및 釜山監色의 교체시 관우상태 看審告知, 훈별과 감색의 검칙구분 등의 내용이 명기된 것이었다. 이 절목은 倭館周察에 관한 세칙이 규정된 것으로 당시 왜관 사정 및 왜관무역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절목이 시행된 1년 만에 또 다시 譯官輩의 倭館修理와 관련된 부정을 重治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당시 참찬관 金鎭圭가 왜관수리시 역관의 大罪유형을 보고함으로써 발단된 조치였다. 즉 10여년간에 3번이나 왜관을 수리한 것은 왜인이 役價를 취하기 위함인데 이때마다 역관이 왜관의 허물어짐을 허위로 보고하여 수리를 요청한 것과 修理物力을 허위로 보고한 것 그리고 수리기간을 연장하여 비용을 허비시킨 것 등을 大罪세가지라고 하였다. 이러한 역관의 부정을 엄히 다스리도록 하면서 숙종은 “근래 왜인의 欺詐가 극심하고 徵求가 많은 것은 譯舌輩의 居間을 빙자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래관에서의 역관의 교역활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개입이 많았다.
3. 換貿사안
환무는 朝日貿易으로 萊館과 왜관에서 주도하였다. 우리측에서 필요한 물건을 求貿할 때의 절차는 일차적으로 래관에서 왜관으로 求貿하되 왜관에 비축분이 없을 경우에는 역관으로 하여금 館守倭에게 알리고 관수 왜는 이를 대마도에 통보하여 교역하며 일본측에서는 差倭가 필요한 물품의 許貿를 요청하여 이에 수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私商의 潛商은 이 公的인 환무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효종 8년에 差倭가 虎皮를 求貿하였을 때 이 요구를 오래도록 분부함이 없자 이러한 내용의 예조 啓辭를 비변사에서 처리한 바가 있는데 그 내용은 전부터 왜인이 요구한 물품은 해조가 참작하여 覆啓하되 이때 허락 여부 및 삭감 등을 규정에 따라 결정하고 이 虎皮求貿의 경우 비록 그 수량을 충족할 수 없으나 해조와 본도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현종조에 들어와서 비변사에서 의정한 환무사안은 戶曹行關都監에서 사용할 朱紅을 왜관에 구무하는 사안을 처리하였고 대마도주가 헌상한 銀子의 回賜禮單事,122) 倭人所給公貿木換米事(현종7;7, 14‘類’), 公作米폐단사(동왕7;9, 12‘類’) 등의 내용이었다. 특히 숙종 17년에 비변사의 계문에서, 왜관의 금령을 다시 밝히면서 마련한「東萊商賈定額節目」은 萊商의 환무에 중요한 기준을 정한 것이었다. 13개 항으로 열거된 이 절목의 내용을 略記하면 다음과 같다. 「東萊商賈定額節目」․倭館商人은 무오년의 예에 따라 그 수를 정하되 동래부에서 자격있는 자를 가려서 호조에 보고하면 호조에서는 差帖을 발급하고 지금의 경우는 30명으로 액수를 정한다.
상인의 정액은 路浮稅와 潛商의 폐단을 시정한데 있으므로 30명 상인가운데 반드시 통솔 단속하는 行首6명을 선정하여 각각4인을 거느려 단속하게 한다. ․行首는 거느리는 자가 죄를 범하면 곧 고발, 처단하고 그 재화는 고발자에게 지급한다. ․범인을 외부사람이 고발할 경우에는 범인의 재화를 전액 지급하고 다같이 논상한다. ․蔘貨엄금 후 밀매의 폐단이 심하니 이를 고발할 경우 범인의 재화 전액을 지급하고 公私賤은 특별히 免賤하며 良人은 加資한다. 기왕의 상인 외에 모리배가 각 아문에 부탁하여 별장의 차첩을 받아 왜관에 출입하는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앞으로는 각 아문에 비록 물화가 있으나 어쩔 수 없이 典當잡힐 일이 있으면 差人을 정하지 말고 동래부로 내려보내어 본부에서 편의에 따라 매매하도록 한다. 물화의 신구품, 전당잡힌 숫자, 왜인에게 收捧치 못한 숫자를 자세히 조사하여 일일이 장부를 작성하여 1부는 備局으로 올려보내고 1건은 본부에 보관한다. 大廳開市의 법을 각별히 신칙하되 앞으로 各房으로 나누어 들어가는 폐단이 있는 경우에는 訓導와 別差가 각별히 금지할 것이며 상인들이 준수하지 않을 경우는 본부에 보고하여 행수상인을 경중에 따라 죄를 묻고 훈도 별차 등도 금지시키지 못할 경우 아울러 죄를 묻는다.
․訓導와 別差는 朝家에서 차출해 보낸 사람이니 접대 및 상거래를 모두 관리해야 하며 상인단속을 제대로 못할 경우 죄를 면하기 어렵고 상인호령에 있어 체모를 유지하여야 한다. 상인을 선정한 뒤 옛 상인 가운데 참여치 못한 사람 및 물화를 이미 전당잡히고 미처 그 값을 받아 내지 못한 것을 본도에서 일일이 置簿하고, 銀貨가 나올 때 새 상인 담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나눠 지급하게 하며, 전당잡힌 물건값을 전액 추심한 뒤에 장부를 일일이 지워서 난잡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폐단이 없게한다. 이 절목은 비변사의 倭館무역에 관한 중요 교린정책의 표현이었다. 여기에서 倭館商賈의 定額이 戊午年(숙종 4년)에 20명으로 규정된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 때(숙종 17년)에는 30명으로 증액시켰음을 확인 할수 있다. 증액이유는 路浮稅와 潛商의 폐단을 防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 밖의 주요 내용은 行首를 통한 濫雜의 糾察이라던가 所犯者의 科罪, 潛商發告人의 論賞, 各衙門의 別將差帖弊端防止, 物貨詳査후 成冊하여 비변사에 上送하는 일, 對淸開市法의 申嚴, 訓導別差운영등의 내용으로 주로 東萊商賈의 濫雜, 潛商등을 통제하고 방지하는데 있었다.
Ⅴ. 軍國機務의정사안
1. 邊禁(犯越)사안
비변사의 邊禁(犯越)사안 처리는 국경지대에서 발생한 피아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청일 양국과의 대외교섭에 해당된다. 이와같은 사안은 군국기무에 해당되기 때문에 비변사의 邊事籌劃이라는 기본임무에 짝하여 항시적으로 처리되었다. 조선후기 비변사의 군국기무 의정사안으로 중대한 내용 중의 하나는 소위 효종조 나선정벌로 일컬어지는 [咸慶北道砲手寧古塔入送節目]의 마련이었다. 효종 5년과 동왕 9년의 2차에 걸친 파병과 관련하여 그 원정작전 계획이라 할 수 있는 입송절목을 모두 마련한 것이다. 이「咸境北道砲手寧古塔入送節目」은 두 가지 절목이 있다. 그 첫째 것은 현전 비변사등록에 登載되어 있고 두 번째의 것은 현전 비변사등록에 빠져있지만『謄錄類抄』에 남아 있어 2차 羅禪征伐의 실상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1차 및 2차 정벌시의 절목은 각각 15개조와 39개조로 되어있는데 2차시의 내용이 훨씬 치밀하다. 효종 5년 1차 정벌시의 절목에는 파병의 규모(砲手100명, 鳥銃兵20명)및 지휘체계, 題給할 資裝木匹數, 군량조달, 파병가족 護恤, 師期(전쟁기간)등이 간단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동왕 9년 2차 정벌시의 절목에는 領兵將申瀏의 差定에서부터 砲手200명의 선발세칙, 鳥銃兵20명의 配屬方法, 지휘계통의 증설, 鳥銃精好者및 藥丸의 給送, 領兵將과 哨官등의 所騎馬및 軍需載持馬의 규정, 資裝木題給및 移送, 조청양국의 군량부담 한계, 人馬米太의 出用處(會寧)와 一日支給규정, 運餉人馬의 途程과 雇立價, 卜馬및 刷馬의 責出폐단으로 六鎭所在常平廳3分耗穀의 특별사용문제, 軍兵整頓및 軍糧調達의 責應, 淸將의 相接備給, 軍兵家屬의 蠲除, 淸나라 大通官李夢先등의 接引事, 日運餉馬의 載送限界, 勅書및 諮問의 奉審, 本道監兵水使의 料理, 領兵將의 軍需雜物등이 세밀히 계획되고 있어서 1차시의 내용보다는 매우 구체성을 띄고 있었다. 또한 派送이후에도 비변사에서 조치해야 할 繼餉문제라던가 人馬雇價의 難辦을 심지어 密貿로서 해결하려는 치밀한 대책 등이 강구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효종 때의 北伐즉 羅禪征伐이 비변사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 나선정벌 사건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군국기무 사항이지만 이에 앞서 이미 조선초기부터 북변 국경지대의 야인 출몰과 남방 연해지방의 왜 寧古塔은 현재 중국 흑룡강성 寧安지방이다. 효종조 나선정벌시 청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함경도 포수로 구성된 조총병이 혜산진을 출발하여 두만강-연길-왕청을 경유 영고탑에 도착하여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고 다시 북상, 佳木斯를 경유하여 그 동북쪽인 富錦-同江부근까지 진출하고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한 강 유역에서 러시아 동진군의 전함을 화포 등으로 격퇴하였다.1차와 2차 정벌시의 전황이 차이가 있지만 장장 1천km의 원정경로이었다. 지난해(‘98) 여름 필자는 이 원정코스를 柳承宙敎授와 함께 답사하여 여러 가지를 현장에서 살피었는데 중세 도보원정군이 험준한 산하 협곡을 넘고 대평원을 가로질러 어떻게 그 먼길을 왕복하고 또 전투에 임했을까 하는 상념에 젖은 적이 있다.
구 내습은 영일이 없을 정도이었다. 대마도정벌과 여진정벌에 이어 을묘, 임진왜란을 겪고 정묘, 병자호란의 수모를 당한 것은 이를 증거한 것이다. 그러나 왜호 양란이 종식되고 대외 화평기가 도래한 17세기 이후에는 前期보다 국경지대의 事端이 많이 줄었지만 私的인 犯越者와 偵探 및 海島표류인의 처리 등은 자칫 외교문제화 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의 처리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군국기무의 총령이라는 비변사의 법제적 임무아래에서는 이러한 변금 등의 사안의 처리가 비변사의 기능에 귀착됨은 당연한 것이다. 시기를 한정하여 숙종조의 邊禁및 犯越사안을 보면, 숙종 1년 5월 함경병사는 淸人5명이 도보로 회령을 넘어와 粮米를 애걸한 사건을 보고한 적이 있다. 이때 비변사의 계문은 恤隣의 뜻과 다시 넘어오지 못하도록 그 요구를 들어주도록 조치하면서 이를 長慮之道라고 하였는데 사소한 사건처리인 것 같지만 이는 국경의 釁端을 예방하려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비변사에서는 犯越胡人을 통해 정보를 파악하는 探問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北兵使(柳斐然)의 장계를 받고 이를 조치한 과정에서 보인 내용이다. 그 경위는 “한 胡人이 高嶺鎭에 넘어왔는데 그를 돌려보내려 하자죽기를 한정하고 돌아가려 하지 않고 그 행동이 수상하였으며 그 언어는 漢音즉 중국어를 쓰며 胡語(여진어)를 쓰지 않으므로 고령진에 있는 通事輩가 들을 수가 없어 이를 회령부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漢人康世爵으로 하여금 問情하게 하였다” 보고하자 비변사에서는 이를 司啓辭로 “그 探問狀啓를 기다린 후에 稟處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계문하고 이를 허락받은 내용이다. 숙종 7년에는 청나라 勅使가 평안도 연해의 요해처인 椵島를 가서 보고 또 이를 模寫하려고 조정에 畵手를 요구한 사건이 있었는데 비변사에서는 거기에 의도가 숨어 있다고 판단하고 도내(평안도)에는 본래 화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가도의 모사를 저지하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犯越人대처는 西北江邊각처를 상시에 把守, 點考하는 규정이 있으나 때에 따라 禁令이 해이되어 문제를 발생시키므로 備局에서는 함경 평안의 監兵使로 하여금 軍官을 發遣하여 압록 두만강의 연변에 불시 摘奸하도록 계품하고 만약에 범금사건이 발생하면 그 당시의 감병사를 논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때 감병사는 朔末에 摘奸사실을 보고하게 되었으며 특히 六鎭지방은 민간이 가지고 있는 鳥銃을 官家에 거두어 藏置하였으나 三甲지방은 이러한 규정이 없어 종종 국경지대의 문제가 발생되니 이후부터는 국경 沿邊의 軍器는 아울러 모두 거두어 관가에 보관하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범월인 문제는 숙종년간에 많이 발생하여 비변사에서 司啓辭로 조치한 내용이 많다. 즉 서북 범월인의 체포자가 연속 발생하여 邊民이 놀라 소동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 진정시키는 방안을 강구하였으며 이러한 범월인을 서울로 압송하여 推覈처리하고 또 이들을 搜捕하기 위해 別定禁軍을 급히 發馬하는 조치를 강구하였고 이러한 범월인의 처리는 물론 비변사의 有司堂上이 大臣에게 詢問하여 품처하였는데 越境採蔘者등은 ‘一切死律隨現必殺’의 용률을 적용시킬 정도로 엄중하였다.
청나라 범월인으로 단순한 구걸이나 病者등의 경우는 我境에 오래 拘留하지 않고 賚咨官을 別定하여 鳳凰城將處로 移咨압송하였는데 그들 중 병자로서 위중하여 압송하지 못할 경우는 범월사연 및 질병 때문에 入送하지 못한다는 사유를 먼저 봉황성장처로 移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의 咨文은 승문원에서 급히 찬출하여 뢰자관에게 부송하게 되며 또 한 뢰자관은 의주부에 머물면서 병자의 처리라던가 봉황성장처에 입송하는 문제들을 처리하게 하였다. 한편 의주부윤(李增)의 장계와 禮部咨文에 따른 압록강 三道溝協領 등지에서의 朝淸양국인의 放槍致傷사건의 처리에 있어 비변사는 司啓辭로 그 방창범인의 나포와 이의 처리를 위해 京官2員을 뽑아 兩界에 급속히 分遣하여 검칙하도록 조치하였는데 이때 비변사에서는 三道溝지방(현재 압록강 상류 백두산 북쪽의 만주경내 지역)을 일찍이 들어본바가 없다고(曾所未聞) 하고 이 곳의 위치와 沿邊어느 읍에서 얼마나 먼 곳인지를 상세히 탐문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조치는 국경부근의 새로 거론된 지역에 대하여 여러가지 정보를 파악하고 확인하려는 적극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다.
2. 問情(漂海人)사안
조선후기 海禁정책에도 불구하고 불시에 외국 선박이 漂到하여 그 외국인을 상대한 경우가 많았다. 이 漂到외래인은 중국인과 일본인 심지어 서양인(주앙맨데스,141) 벨테부레, 하멜)까지 있었고 그들의 신분은 어부이거나 상인인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다국적인으로 구성되어 동남아-중국-일본을 왕래하는 국제무역선단의 무역선원도 있었다. 이러한 漂來人을 당해 지방관이 압송하면 비변사의 관원이 南別宮에서 이들을 問情(심문)하여 신분과 임무, 그들 나라의 여러 가지 제도나 정세까지를 캐묻는 정보파악의 과정이 있었다. 이 問情과정은 당시 외국정황을 알아 낼 수 있는 중요한 정보취득 방법이었다. 조선시대 대외인식 또는 대외정보 파악은 사대교린이라는 공식적인 외교使行과 상대국의 사신왕래 등이 기본적인 매개체이었다. 즉 사신의 왕래를 통한 문물교류와 그 사행들이 남긴 海槎錄, 燕行錄등으로 일컬어지는 여행견문기 등이 중요한 대외인식의 導管이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불의의 표류 귀환자(성종대 崔溥)의 보고서나 전쟁 被虜송환자(선조대朴忠申應昌) 등의 供招정보 그리고 외국 서적의 수입 등을 통해서 상대국의 문물제도와 정세를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적의 경우 자국의 비밀이 새어 나갈만한 지도나 서책류는 각국 모두가 禁書조치하고 있었으므로 대외정세의 파악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漂海人의 問情을 통한 대외 정보획득은 중요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종식된지 얼마되지 않은 해금정책 시대에도 피로인 공초나 표해인 문정 등을 통한 대외정보 파악이 간헐적으로 이루워 지고 있었다. 즉 임란 이후 선조 37년 統制營앞바다에서 당시 中日무장 무역선단을 격퇴한 후 포로로 잡은 왜인 皮古口老등 5명과 그 얼마 후 조선 被擄人나주수군 朴忠등의 供招 등에서 당시 일본정세를 여러 가지로 파악하였던 사례를 들 수 있다. 특히 정유재란 때에 일본 日向縣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광해군 때에 쇄환된 진주 유생 愼應昌의 공초를 통해서는 당시 일본의 江戶, 大板, 對馬島등지의 정세와 당시 권좌에 있던 秀忠, 平調興, 平秀賴, 家康, 源秀忠, 平義智등 중요인물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였는데 이때 특히 秀吉, 家康, 秀忠등의 용심행사를 진술받고 일본 동서 60주의 상황도 상당히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사건의 발생과 함께 간헐적으로 있어왔지만 肅宗朝당시 淸나라의 軍備및 中國東海岸의 상황파악과 관련하여서는 漂漢人問情別單의 내용을 하나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肅宗10년 1월말 중국 登州출신 어부 張文學등 3인이 智島(전라도新智道)에 漂到, 서울에 압송되었는데 이의 문정은 동년 2월 1일 비변사 郞廳과 譯官이 맡았다. 이 문정때에 중국 登州지방의 실정과 雲貴, 泗川, 陝西등지 및 東寧島의 鄭錦舍에 대한 聲息을 문정하였고 北京의 상황 및 海岸城池의 修築如否, 登州의 軍門실태 등을 問疑하였는데 특히 등주의 관원과 군병을 집중적으로 물어 소상히 알아내는 성과를 거두웠고 또 다른 별단에서는 厦門(마카오)와 일본 長崎島등지의 항로 및 정세 등을 파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는 漂到人의 견문한계인 듯 소기의 성과를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후 濟州에 漂到한 漢人問情時에는 더 많은 정보를 入手하였고 이를 통해 또 다른 臺灣의 정세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 問情은 교린대책 수립에 있어서 기초정세 판단으로 비변사가 이를 전담한 사례이며 문정이 끝나면 표래인들을 北京으로 轉送하는 조치도 담당하였다. 효종대 하멜일행의 漂到가 있었으나 여기에는 問情別單이 별도로 남아있지 않고 문정별단의 始末이 자세히 남아 있는 대표적인 내용은 앞에 소개한 숙종 10년 2월의「漂漢人問情別單」과 동왕 12년 9월의「漂漢人問情別單」 그리고 동왕 13년 5월의「濟州漂漢人問情別單」 및 동왕 14년 9월「濟州漂漢人問情別單」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정별단에서 심문항목은 대동소이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다.
․출신지 성명 나이
․신분 생업
․항로 항해목적
․소지물품
․표류과정
․출신지방의 정세, 인물, 제도, 관원, 성곽, 군사, 무기, 로정
․항해 중 타국견문내용
․기타 의문사항
이상과 같은 審問항목을 기본으로 하고 심문과정에서 파생되는 의문점이나 새로이 드러나는 정황은 계속하여 파상적으로 그 내용을 물어 관계전말을 치밀하게 알아내는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문정과정에서 譯官을 대동하고 심문한 비변사관원의 용의주도함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심문항목은 당시 대외정세 파악에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이를 통한 비변사의 대외정보 파악의 경위를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상 거론한 문정별단의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에서 모두 상론할 개재가 아니어서 別稿로 이 부분의 내용을 소개하겠지만154) 어떻든 이러한 문정내용을 통해 취득한 외국 정보는 비변사의 외교정책 議定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었음은 재언의 여지가 없다.
Ⅵ. 맺음말
조선시대 비변사는 16세기초 중종년간에 변사주획의 권설아문으로 창설되어 邊事처리 및 臨戰時의 군국기무를 總領하고 나아가 정치적 기능이 확대 강화되어 19세기 말엽 혁파될 때까지 국정전반을 總掌한 政廳이면서 權府이었다. 따라서 군국기무에 있어 중대사인 외교정책의 議啓權이 비변사에 귀속되는 양상을 띈 것은 물론이었다. 조선시대 외교정책의 수립 결정은 제도적으로 예조가 啓稟하여 의정대신의 논의를 거친 후 국왕의 재가로 이루어 진 것이지만 비변사가 이 외교사안의 의계권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당해 掌政부서는 소외된 형세에 있었다. 양란을 거치면서 역대 국왕은 비변사의 의존도가 깊어졌으며 이와 함께 비변사는 그 외교권의 장악도 심화되어갔다. 국경지대의 사건이 발생하면 국왕은 이를 비변사에 急速議處를 傳敎한 것이 일반화되었고 비변사 또한 이를 집중적으로 처리한 사례는 점차 외교사안의 公事처리에 있어 통상적인 관행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비변사의 회의체인 籌座나 賓座에서 의계처리한 외교정책 사안의 범위는 대청, 대일 교린외교 위시하여 군국기무의 대소사안 등 거의 미치지 않은 바가 없을 정도이었다.
대청외교 사안으로는 支勅, 燕行, 互市, 潛商등의 사안과 대일외교 사안으로는 書契, 萊館, 倭館, 換貿, 金銀, 潛商, 海島등의 사안 그리고 군국기무 사안으로는 邊禁, 犯越, 問情, 漂海人등의 사안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여타 관련사안까지를 포함하면 거의 이르지 않음이 없는 의계권을 행사한 셈이었다. 이와 같은 의계권의 비변사 집중은 비변사의 권능이 강화됨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만 외교사안의 처리에 있어 해당 각조(육조)의 본래 직무와 관계없이 비변사가 주도한 빈좌에서 처리한 것은 비변사의 의계권 주도를 의미하며 반대로 본래 掌政부서의 직무는 무력화 되었음을 뜻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있어 이러한 정치현상이 가능한 것은 비변사가 의정부의 권능을 압도하고 혁파될 때까지 360여년 간이나 존치운영했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즉 권력집중의 권부라는 부정적, 보수적인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변사의 긍정적 측면인 施政의 조정력과 행정의 능률성이 개재되어 역대 왕권의 상보적 수단으로 정치운영의 한 축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비변사의 외교정책 주도는 비변사 존치운영의 긍정적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는 문제로서 각 아문,各官의 이해 상충을 대국적 차원에서 조정하는 능율적인 정청으로서의 기능과 연계하여 그 외교권의 장악을 설명할 수 있다. 중대한 외교정책을 임기처리한 권능과 각종 외교별단을 효과적으로 주도, 작성하였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