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萬源 墓表
公諱萬源, 字君一, 豐山縣人. 世系在先考墓碑. 曾祖諱履祥大司憲, 贈領議政. 祖諱𩆸南原府使, 贈左參贊. 考諱柱天陽城縣監, 贈吏曹參判. 妣贈貞夫人安東金氏, 左議政文正公諱尙憲之孫, 同知中樞府事 贈領議政諱光燦之女. 以崇禎庚辰九月二十四日生. 公自幼誠孝甚篤, 九歲能通經史作詩, 遑遑有驚人語. 見者稱以神童, 王考奇愛之. 旣長, 累膺公車, 竟不第, 以蔭仕進. 己未始參進士第二名. 丙寅上試士頖宮, 擧人多蹶死, 自是不復應擧. 其所履歷, 內則將作郞·司畜別提·司饔太僕·司宰主簿·掌隷院司評·工曹正郎, 或仕或不仕. 外則左水運判官·靈山·扶餘·高靈·眞寶縣監, 或棄歸或因事故罷, 素志不樂仕宦故也. 以甲申十二月初六日, 猝感風眩,易簀于寓舍, 享年六十五, 葬于先考墓傍負壬之原. 配韓山李氏牧隱之後, 縣監景沆之女, 有女士風. 協尊章奉蘋蘩, 靡不盡誠, 上自宗族下之僕御, 皆懽如也. 生於戊寅十二月初五日, 卒于丁亥十一月二十七日. 有二子, 長重績, 次重謙, 先公夭. 重績子卨輔士人. 鄭道天·姜紳, 卽其婿, 三女皆幼. 重謙子喆輔也. 公性恬靜, 不事交游, 平生行已不苟, 與人寡合. 尤謹於理慾之卞, 苟非其義, 一芥不取. 四典縣邑, 甔石屢空, 而處之晏如. 噫! 公圽已六載矣, 麗牲石尙闕, 適按嶺節, 旣埋幽誌, 又竪阡表. 若其潛德隱行, 文不能盡述, 悲夫!
舍弟 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大丘都護府使 萬朝 謹撰
堂姪 通政大夫 守 全羅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全州府尹 重夏 謹書
己丑 五月 日立 卽康熙四十八年
홍만원(洪萬源, 1640~1704) 묘표(墓表)
아산시문화유산과 팀장 지원구박사 국역
공의 휘는 만원(萬源)이며, 자(字)는 군일(君一)으로 풍산현(豐山縣) 사람이다. 세계(世系)는 선고(先考: 죽은 아버지)의 묘비(墓碑)에 있다. 증조(曾祖)의 휘는 이상(履祥)인데, 대사헌(大司憲)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탁(𩆸)인데,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좌참찬(左參贊)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주천(柱天)인데,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된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좌의정(左議政)인 문정공(文正公) 휘 상헌(尙憲)의 손녀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광찬(光燦)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경진년(庚辰年:1640년) 9월 24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매우 독실하였으며, 9세에는 경사(經史)와 작시(作詩)에 능통하였다. 황황(遑遑:어쩔 줄 모르게 급한 상황)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보는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칭하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기특해하며 사랑했다. 커서 여러번 공거(公車:과거에 급제하는 것)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음사(蔭仕)로 나아갔다. 기미년(己未年:1679년)에 비로소 진사시(進士試)에 참여하여 2등이 되었다. 병인년(丙寅年:1686년) 성상께서 선비를 반궁(頖宮:성균관)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응시자가 많이 넘어져 죽어 이로부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역임한 바는 내직(內職)으로는 장작랑(將作郞)·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사옹원 태복(司饔院太僕)·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장예원 사평(掌隷院司評)·공조정랑(工曹正郎)인데, 출사하기도 하고 출사하지 않기도 하였다. 외직(外職)으로는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과 영산(靈山)·부여(扶餘)·고령(高靈)·진보(眞寶)의 현감(縣監)으로 혹은 버리고 돌아오거나 혹은 어떤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평소의 뜻이 벼슬살이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신년(甲申年: 1704년) 12월 6일 갑자기 풍현(風眩)이 일어나 거주하는 집에서 역책(易簀)하셨다. 향년 65세였으며,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 묘 옆의 임좌(壬坐: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목은(牧隱:이색)의 후예이며, 현감(縣監) 이경항(李景沆)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시부모님께 순종하고 제사를 올리는데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위로는 종족(宗族)으로부터 아래는 하인들까지도 모두 기뻐서 좋아하였다. (부인은) 무인년(戊寅年:1638년) 12월 5일에 태어나서 정해년(丁亥年:1707년) 11월 27일에 돌아가셨다. 아들 둘을 두어 장남은 중적(重績)이며, 차남은 중겸(重謙)인데, 공(公)보다 먼저 죽었다. 중적(重績)의 아들은 설보(卨輔)로 사인(士人:벼슬하지 않은 선비)이며, 정도천(鄭道天)·강신(姜紳)이 곧 그의 사위이다. 세 명의 딸은 모두 어리다. 중겸(重謙)의 아들은 철보(喆輔)이다. 공의 성품은 편안하고 고요하여 서로 사귀고 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행실이 구차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마음이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성과 욕망의 분변을 엄하게 하여 구차하게 그 의리가 아니면 하나도 취하지 않았으며,사전(四典)과 현읍(縣邑:군현)이면서담석(甔石)이 늘 비었는데도 태연하게 거처하였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6년으로 이생석(麗牲石)을 여전히 못하였는데, 마침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어 유지(幽誌:묘지석)를 묻고 또 천표(阡表:묘표)를 세웠다. 그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덕과 숨어있는 행적을 글로 모두 기술할 수 없으니 슬픈 일이구나!
동생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대구도호부사(大丘都護府使) 홍만조(洪萬朝)가 삼가 지음.
당질 통정대부(通政大夫) 수(守) 잔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전주부윤(全州府尹) 홍중하(洪重夏) 삼가 씀.
기축(己丑:1709년) 5월(五月) 일(日) 세움. 즉 강희(康熙) 48년(1709년)
기축보(1709년)
첫댓글 감사합니다.
제13세 홍만원 묘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