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계시는 하나님 (단 6:16-28)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도대체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존재 합니까?” 때마침 목사님과 대화를 하고 있던 장로님이 넌지시 질문했습니다. “자네, 밖에 무엇이 보이는가?” 청년은 나무와 돌이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아니, 그곳에 나무와 돌이 어디 있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장로님, 나무와 돌이 보여서 나무와 돌이 있다고 대답 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자 장로님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나는 소경이라 나무와 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네,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영적인 소경이라 하나님이 살아계시지만 모르고 있는 것뿐일세.”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으로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안 계시지 않는가!’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들의 일이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는 선택의 문제도 인간들 편에서의 이야기이지, 하나님은 믿는다고 존재하고 안 믿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세계적인 화학자 이수민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한남대 생명나노과학대학 학장을 지내신 분이신데, 한 때 참 잘 나가던 분이셨어요. 34살에 박사 학위를 받고,35살에 한남대 교수로 학과장이 되고, 36살에 장로 장립을 받고, 37살에 국비 유학생으로 해외에 파견 받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침침하고 잘 안보여서 병원에 갔더니 녹내장 말기라고 했습니다. “이제 교수님은 곧 눈이 멀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계 최고의 안과 의사에게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을 받고 나서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안보이게 되어 버렸습니다. 절망의 늪에 빠지자 신앙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교회 장로까지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서 낙심해가지고 밤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신앙생활하기 싫어졌고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잘나가던 내가,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까 성경 읽는 것도 싫고, 교회 가자고 그러니 할 수 없이 끌려는 가도 설교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뭘 먹고 싶지도 않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가져다주시는가? 왜 멀쩡한 내 두 눈이 보지 못하게 되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이제 죽어야 되겠다’는 생각만 자꾸 들고 우울증만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던 교회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람하러 간다고 하니까 본인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데 왜 폭포를 따라갑니까? 거기에 뛰어내리려고요. 그런데 떠나기 전날 밤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 같은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번갯불같이 번쩍 치는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귀에 들려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음성을 듣고 난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이 나오는데 막 통곡하면서 ‘하나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네가 장로냐?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장로로서 죽을 생각을 했느냐?’ 주님의 책망이 들려왔어요.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준다고 하지 않느냐? 수민아, 거기서 넘어져서는 안 된다. 나를 의지하고 일어나 보려무나.’ 주님이 권능의 손을 내미셔서 저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한 다음에 한밤중에 자는 아내를 깨워가지고 ‘여보, 나 이제 뭐 좀 먹어야 되겠어. 밥해 줘.’ 밥을 먹고, 그 날 이후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는데 메사추세츠 대학교의 화학과에 연구교수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들과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을 다 녹음을 했다가 집에 와서 틀어보면서 다시 그것을 듣고 연구를 하고 원서는 아내가 읽어주면 그것을 가지고 녹음했다가 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 중의 하나인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로부터 ‘세계의 탁월한 과학자 2,000명’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3대 인명사전 중의 하나인 미국인명정보기관(ABI)로부터는 ‘2011년 최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화학자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력은 잃었지만 영적인 눈을 떴다고 생각해요. 사도 바울처럼 앞으로도 저는 약한 것(실명)을 기뻐하고 주님을 자랑하며 살아갈 겁니다.” 할렐루야. 절망의 무거운 짐, 우울증의 무거운 짐, 자살충동의 무거운 짐을 지고 마지막 그가 죽음의 자리로 한걸음 옮겨나가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그를 붙들어주시고, 십자가 밑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자유하게 하여 주셔서 그는 새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증명의 대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아야지 그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궁금해 하면서 하나님을 증명해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눈에 보입니까? 천국이 지금 보입니까? 안보이니까 예수님도 안계시고 천국도 없습니까? 우리가 믿던 안 믿던 예수님은 계시고 천국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을 믿으시고 그 좋은 천국에 모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슈퍼컴퓨터를 사용해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까 공기가 없는 것입니까? 우리 육신의 시청각으로는 존재의 유무를 모두 판단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지만 우리 눈에는 그 사랑의 실체나 사랑의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존재하시지만 그런 하나님을 우리의 감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굳이 구차하게 구걸하듯이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면 자기가 만난 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해야할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하나님은 만들어지거나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장학사가 어느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지구본을 보고 어떤 학생에게 “지구본이 왜 기울어져 있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당황해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제가 안 그랬습니다.” 장학사는 기가 막혀 그 학생의 담임선생님에게 “이 학생이 안 그랬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이 학생은 착한 학생입니다. 본인이 안 그랬다고 하면 안 그랬을 겁니다.” 기가 찬 장학사가 이번엔 교장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 학교가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하자 교장선생님 왈, “국산품이 다 그렇지요 뭐!”
지구의 공전 속도는 얼마입니까? 초속 30킬로미터입니다. 달까지 4시간 만에 통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자전 속도는요? 초속 470미터입니다. 2012년 8월에 불어닥친 초대형 태풍인 볼라벤 태풍은 “28일 순간 최대 풍속 초속 33.8m에 이르는 강풍으로 도내 15만 8,970가구에서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라고 경남도민일보가 전했습니다. 그런데 10배가 넘는 초속 470미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지구가 그런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어도 우리는 속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런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지구가 공전도 안하고 자전도 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안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 계셔서 지금도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참 좋은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계십니다.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해주시고 감화 감동해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힘들 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괴롭고 답답하고 죽을 지경일 때는 속수무책이라 못 본척하다가 있다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짜잔” 하고 나타나셔서 생색내시는 분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발을 헛디뎌서 그만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악~~” 하면서 끝도 없이 떨어지다가 손을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때 손에 조그마한 나무가 잡혀서 꽉 잡았습니다. 이제 겨우 살았다 싶어 한숨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절벽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오를 수 없어서 소리쳤습니다. “그 위에 누구 없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얘야, 잡고 있는 그 손을 놓아라.” 절벽에 겨우 매달려 있는데 어찌 인정사정도 없이 놓으란 말인가? 야속한 생각이 들어 절벽을 향해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거기 다른 사람 없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잘해줄 것 같고 또 다른 그 무엇이 잘 해결해 줄 것처럼 여기십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을 놓을수록 하나님의 손은 우리 손을 더 많이 잡아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루어주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잘해도 탁월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월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은 인간의 탁월함을 뛰어넘어 환경이든 능력이든 그 무엇이든 그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십니다.
다니엘이 그런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그 당시 세계 초강대국의 세 사람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다니엘은 다른 총리들보다 고급관리들보다 더욱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다리오왕이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총리와 고관들이 국가의 일과 관련해서 고발할 자료를 찾았으나 아무런 허물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찾지 못하면 고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모여서 왕에게 찾아가서 청하였습니다. 법률을 정해서 삼십일 동안에 왕 이외의 어떤 신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다리오왕이 좋게 여기고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렸습니다.
다니엘은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드렸습니다. 무리들이 이것을 보고 잘 걸려들었다고 기뻐하면서 왕에게 나아가서 고발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다니엘을 구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였으나 무리들이 모여와 금령과 법도를 대면서 말하므로 왕은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놓고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고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인봉하였습니다. 다니엘에 대한 조치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왕은 마음이 아파서 궁에 돌아가서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도 마다하였습니다. 이튿날 왕은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갔습니다. 굴에 가까이 가서 슬피 소리를 지르면서 다니엘에 물었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20절).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습니다”(22절). 왕이 심히 기뻐하면서 명령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려내었습니다. 정말로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다니엘이 자신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23절).
왕은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해서 그들을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사자들은 다니엘과 함께 있었던 사자였습니다. 다니엘은 그 사자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자는 힘이 없는 사자이거나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자이거나 아니면 온순한 사자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사자였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무서운 사자였습니다.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서뜨렸더라.” 무시무시한 사자였습니다. 그런 사자였지만 다니엘은 조금도 해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다리오왕의 조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리오왕이 모든 백성과 나라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26절과 27절입니다.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리오왕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의 왕입니다. 그런 그가 다니엘을 통해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평소 다니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섬기는 모습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오왕은 습관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16절에서는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구원하시리라.” 20절에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시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26절에서는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의 대적자들은 사자 굴을 봉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입은 봉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끝장이 날 것 같았던 다니엘은 오히려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에 가로막는 사람들이나 환경이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죽을 지경에 빠질 수도 있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지 않고 역사해주십니다. 다니엘처럼 아무리 사나운 사자들이 우굴거리는 험악한 굴속에 갇힌다 하더라도 보호해주시고 풀려나게 해주십니다.
살아계신 주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이나 환경에 짓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러한 살아 있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주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을 받아 여러 가지 문제로부터 풀려나시길 바랍니다. 잘하고 있는 일은 더 잘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마는지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확실히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신자나 신자나 가족이나 친구와 친인척과 이웃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평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를 통해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의 살아 있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살아 계신 것을 보여주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크게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