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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장 밤비(夜雨)와 밤나비(夜蝶)
"빌어먹을…"
세차게 흘러 내리는 급류(急流)를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설화린은 혀를 찼다.
사류천(沙流川).
장강(長江)의 한 지류(支流)인 이곳은 거대한 유람선조차 얼씬도 못하는 험탄(險灘)이다.
그것은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거센 급류(急流) 때문이었다.
깊고 가파른 계곡을 흘러온 급류는 이곳 사류천에서 절정(絶頂)을 이룬다.
그래서 사시사철 인적 하나 볼 수 없는 이곳은
보는 이 없는 절경(絶景)과 하얗게 부서지는 급류만이 이곳 사류천의 전부(全部)이다.
콰콰콰-- 콰아아아--!
애초에 지름길을 택한 것이 실수였다.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이제는 험탄에 발목이 묶인 것이다.
날은 저물고 게다가 궂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낭패로군…"
설화린은 비맞은 중처럼 연신 중얼거리며 툴툴 웃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조각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유람선조차 얼씬 못하는 이 사류천에 조각배라니…
그러나 그것은 분명 조각배였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무서운 급류 속에서도 조각배는 일점의 동요도 없다는 점이었다.
스스스… 촤아아아!
조각배는 순식간에 설화린이 서 있는 곳까지 오더니 이윽고 우뚝 멈추어 섰다.
이어 뜻밖에도 조각배 안에서 한 여인(女人)이 몸을 일으키며
설화린을 향해 배시시 웃는 것이 아닌가?
"호호… 건너 가실 건가요?"
"…?"
설화린은 말없이 여인을 바라봤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으나 설화린의 두 눈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광채가 떠올랐다.
손바닥만한 조각배 하나로 이 거센 물결을 건너온 것도 그렇지만,
여인의 용모는 한 번 보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천생우물이라 하는 것인가?
정말이지 여인(女人)의 자태는 기요(奇妖)로왔다.
그린 듯한 이목구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머리카락 한 올,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마저도 예사롭지 않았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옷 또한 기이하기 짝이 없다.
일반적으로 여인의 옷이란 하체(下體)를 완전히 덮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여인이 걸친 옷은 종아리조차 가리지 못했다.
그나마 헐렁한 것이 아니라 몸에 꽉 끼이는 옷이었는지라
풍염한 속살과 섬연한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가슴은 옷을 찢고 금방이라도 드러날 듯 위태롭게까지 보였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어깨며, 둥그스름하달까, 펑퍼짐하달까?
발정기에 다다른 노루의 엉덩이처럼 잘 발달된 둔부는
아찔한 긴장감마저도 불러 일으켰다.
실로 보기드문 염정적(艶情的)인 미태를 지닌 여인이다.
여인은 비에 촉촉히 젖은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쓸어 올리며
또 다시 교태로운 웃음을 흘려냈다.
"뭘 그렇게 바라보시나요?"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설화린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나를 향해 한 말이오?"
"호호! 그럼 이곳에 상공과 저 말고 또 누가 있나요?"
"흐흠… 그렇군. 한데 조금 전에 뭐라고 했소?"
"후후…제가 한 말을 벌써 잊으셨나봐? 건너 가실 거냐고 물었잖아요…"
설화린은 씨익 웃었다.
"건너 간다면… 태워 주시겠소?"
"그럼요. 명색이 사공인데 손님을 거절할 리야 있겠어요?"
"사공이라구?"
사공 치고는 너무도 예쁘다.
하긴 사공이라고 해서 반드시 못생기라는 법이야 없겠지만,
이 여인은 그야말로 십전십색(十全十色)이었다.
사내를 위해 태어난 여인이랄까?
손짓 하나, 눈짓 하나까지 상대의 심혼을 빨아들일 듯 교태롭기 짝이 없다.
여인은 조금 추운 듯 몸을 움츠렸다.
"추워요. 어서… 올라 오세요."
"……!"
"어마? 처음이신가 봐?"
"…!"
"지금까지 배를 타본 경험이 없으신가 보죠? 괜찮아요, 이래 뵈도 전 경험이 많답니다.
어서… 어서 올라 오세요. 호호호…"
"그럼… 실례하오."
잠시 망설이던 설화린이 그녀의 배에 올라 타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살짝 비틀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실례라니요? 배를 태워드리는 게 제 직업인데…"
말이란 종종 분위기나 어감에 따라 그 뜻이 변하거나 달라질 수도 있다.
그것이 남녀(男女)간의 대화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서 올라오라 든가,
배를 태우는 것이 직업 어쩌구 하는 여인의 말은
사실 따지고 보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그녀의 직업은 뱃사공이니까…
그러나 이 순간의 분위기는 절대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다.
설화린을 향해 던지는 고혹적인 추파(秋波),
사내라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그 선정적인 몸짓,
게다가 비에 젖어 몸에 착 달라 붙은 그녀의 옷은
입고 있으되 정작 벗은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 비근한 예로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아랫배의 그 탄탄한 질감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렇다.
천하에 아무리 도덕적인 사내라 할지라도
이러한 선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지금까지 한 말은
결국 사내를 유혹하는 요설(饒舌)로밖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설화린의 입술꼬리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는… 누군가?"
반말이다.
그러나 여인은 설화린의 반말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불쾌한 빛도 떠올리지 않았다.
"소녀는… 호호… 야우(夜雨)라고 해요…"
오오… 야우(夜雨)!
그러했다.
이 여인이 바로 야접을 제거하기 위한 창궁무벌의 최후의 비밀병기(秘密兵器)인 야우,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全無)한 설화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야우(夜雨)라…"
세상에 그런 이름도 있으랴 싶었지만 설화린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는 누가 뭐래도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勝負師)이며
야접이란 이름의 위대한 자객이었다.
그는 자객의 날카로운 눈으로 이 여인에 대한 세 가지 사실을 간파했다.
이러한 여인은 목적(目的)이 없이는 절대 접근하지 않는다.
돈(銀子)과…
사내(男)와…
그리고 죽음(死)!
그러나 돈(銀子)과 사내(男) 때문이란 가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타당치 않다.
이런 류(類)의 여인이 은자를 벌려고 마음 먹는다면 이 따위 사공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즐기면서 손쉽게 은자를 벌 수 있는 직업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므로.
욕정(欲情)의 해소책으로 사내를 유혹한다는 것 또한 설득력이 없다.
그러한 미모와 이렇듯 농염한 몸으로
보다 번화한 금릉(金陵)이나 항주(杭州)거리를 헤매다 보면
욕정을 해소할 수 있는 젊고 잘 생긴 사내는
그야말로 발치에 밟혀 터질 정도로 부지기수일 테니까…
그 두 가지가 아니라면 결국 이 여인의 직업은…
(흠! 나와 같은… 자객(刺客)이란 말인가?)
내심 생각한 설화린은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한 설화린의 모습을 고혹스런 눈길로 바라보던 여인 야우는 베시시 미소했다.
"호호… 술 한 잔 어때요?"
"술이…?"
"가끔 혼자 마시기 위해 준비해 둔 게 있어요. 전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서…"
"……!"
"이곳엔 아무도 없어요. 보세요, 우리… 단 둘 뿐이예요."
여인의 유혹은 점차 노골적이 되어갔다.
이곳 사류천 근처 십리(十里) 안에는 아무도 없다.
단지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발정기의 암노루 한 마리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설화린이 있을 뿐이었다.
"호호… 이런 날엔 술이 좋아요. 기분도 그렇잖은데… 한 잔 좋죠?"
여인은 설화린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나룻배 한켠에 놓여 있던 술병과 잔을 잡았다.
그리고는 설화린을 향해 두 볼을 붉히며 속삭이듯 말했다.
"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무엇인가?"
"제 앞섶을 좀 여미어 달라는 말이예요.
손에 술병을 들었더니… 호호… 그보다도 이런 일은 남자가 해야…"
술병을 잡느라 몸을 굽혀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의 앞섶은 정말 풀어 헤쳐져 있었다.
조금만 더 풀어지면 그대로 가슴이 드러날 것이다.
"어서요, 으응?"
설화린이 망설이자 여인은 상체를 더욱 교묘히 비틀며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눈짓이나 몸짓보다도 더 효과적인 무기(武器)이다.
여인의 숨결 속에는 사내의 욕정을 일깨우는 힘이 숨어 있다.
야우는 더운 숨결을 설화린의 목덜미에 퍼부어 대며 자신의 앞 가슴을 내밀었다.
"흐흠… 그건 어렵지 않소."
설화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녀의 옷고름을 잡았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 옷고름이 풀썩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일순 그녀의 앞섶이 쫘악 벌어지며 부풀어 있던 두 개의 가슴이 물결치듯 삐져 나왔다.
"아아, 몰라요…"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그 바람에 무릎 위에 걸쳐있던 옷자락이 스르르 말려 올라가며
눈부신 허벅지의 신비한 곳이 엿보였다.
역시 그녀는 속에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아이, 짓궂어. 뭘 그렇게 보고 계시나요?"
야우는 설화린을 향해 눈을 살짝 흘기며 사르르 웃었다.
가히 폭발적인 유혹의 미소였다.
설화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후후… 그대는 정말 아름답군. 허나 어쩐지 꺾기가 아깝구나."
"……!"
설화린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어조에는 형용못할 어떤 위엄이 실려있어
은연중 상대를 뒤흔들리게 하였다.
야우는 배시시 미소지었다.
"호호… 당신은 역시 강하군요. 저는 강한 사내를 좋아해요. 당신처럼…"
그녀는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띄운 채 교구를 살짝 뒤틀었다.
그러자 옷은 뱀의 허물이 벗겨지듯 부드럽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옷은 풍만한 둔부의 배꼽부분에서 살짝 걸렸다.
조금만 더 미끄러져 내려가면 신비림(神秘林)이 보일 것이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이미 보이고 있었다.
아아…그 충격적인 모습이란,
혼(魂)을 내어주고 생명(生命)을 내준다 할지라도
천하의 그 어떤 사내가 이 가공할 유혹의 여체(女體)를 마다할 것인가?
그러나 설화린의 눈은 그녀의 몸을 떠나 요란하게 흐르는 물결로 향하고 있었다.
야우의 현란한 육체가 그 순간 파르르 잔떨림을 보였다.
허나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호호… 나비(蝶)는 꽃(花)에 약해요…
비(雨)에는 더 더욱 약하구요… 난 그걸 알아요."
"흠!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내 검(劍)은 이 정도의 비(雨)에는 녹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호호… 아시나요? 제 숨결 속에는 유향장춘분(柳香 春粉)이 섞여 있어요.
자신이 있으시다면 계속 음미해도 무방할 거예요."
"유향장춘분이라… 흐음… 대단하구나."
설화린은 탄성처럼 가벼운 신음을 흘려냈다.
유향장춘분(柳香 春粉).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독(毒)은 아니다.
다만 사내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욕정을 유발케 하는 강력한 최음제(崔淫劑)일 뿐이다.
유향장춘분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무공(武功)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상대가 고수(高手)일 때는 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약효가 지속성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약효가 서서히 나타나므로 쉽게 눈치챌 수 없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강렬해져 종내에는 이성(理性)을 잃게 되는 것이다.
설화린은 그러나 씨익 웃었다.
"후후… 야우, 네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 아닐 것이다.
너는 지금 상대의 경계심을 일깨워 그 허(虛)를 찌르려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담담한 한 마디,
지나친 경계심은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야우의 아름다운 두 눈이 언뜻 흔들렸으나,
그녀는 곧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 당신은 너무 치밀하군요. 저는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스르르르…
그녀는 말하며 둔부를 선정적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둔부에 걸려있던 옷이 흘러내려 앙증스런 두 발목 위에 덮였다.
한쪽 발이 빠져나와 옷 위를 짓누른다.
그리고 또 한쪽 발마저 옷 밖으로 빠져나오려 할 때,
설화린의 시선이 그녀의 나신(裸身)에서 고요하게 옮겨졌다.
"야우, 너는 남자를 잘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모르는 게 많구나."
"무슨 뜻이죠?"
"남자는… 스스로 벌거벗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다행이로군요. 아직 이 몸은 다 벗지 않았어요."
그녀는 한쪽 발을 마저 빼다말고 교구를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그녀는 여인이 어떤 모습을 해야 사내를 가장 흔들리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꿈결같은 옥음(玉音)이 속삭이듯 이어졌다.
"당신은 제 몸을 한 번 안아보고 싶지 않나요?"
"후후… 네 아름다운 몸 속에는 가시가 있을 것 같구나."
"호호… 그 가시에 찔리면 피가 나겠군요."
"물론, 그것은 과히 보기에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비오는 날에는 피가 더욱 아름답게 번지죠. 난 그걸 좋아해요…"
"귀엽구나, 이런 유치한 수법으로 야접을 상대하려 하다니…"
어째서 설화린은 상대가 펼치는 이 가공할 사술(邪術)을 한낱 유치하다고 평가했을까?
"가거라. 이대로 돌아간다면… 널 막지 않겠다."
"호호…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당신의 멋진 솜씨를 한 번 보고 싶어요."
"그 아름다운 몸에서 피가 흐를 것이다."
"호호… 벌써 잊으셨나요? 비가 오는 날에는 피가 더욱 아름답게 번지는 법이예요."
"피가 흐르는 여체(女體)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호호… 피가 흐르는 건 제 몸이 아니예요.
난 지금 당신의 살갗을 도려내고 싶어요.
조금씩… 조금씩… 뼈를 깎고… 그러면서 말이예요…"
여인(女人)은 더할나위 없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설화린의 얼굴은 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불패(不敗)의 위대한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싸움 역시 확률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당연히 이겨야 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이 불안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여인(女人),
그것도 절색(絶色)의 여인을 베어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뭔가?
그것은 바로 분위기 때문이었다.
설화린과 같은 냉혹하고 치밀한 불패의 승부사(勝負師)가
분위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도대체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휩쓸리게 된
이 기요(奇妖)로운 분위기와 막연한 불안감,
그에 반하여 상대가 지니고 있는 여유로움과 어딘지 모르게 요기(妖氣)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염정적(艶情的)이고도 신비스런 이 분위기…
게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 비는 또 뭐란 말인가?
(으음… 오늘의 일전(一戰)은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이제껏 싸워온 어떤 싸움보다도 더…)
그렇다.
주위의 이러한 분위기가 어쩌면 자신을 패배의 수렁으로 빠뜨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설화린은 느꼈다.
"호호… 긴장하고 있군요. 당신같은 강한 사내도 긴장할 때도 있나요?"
야우는 배시시 웃으며 천천히 설화린 곁으로 다가왔다.
"……!"
설화린은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여인은 이미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야우란 살인술사(殺人術師)가 아니었다.
선녀(仙女),
그녀는 나비(蝶)를 잡는 포접사(捕蝶師)가 아니라 성스럽고 고결한 선녀일 뿐이었다.
"호호… 오늘을 기다려 왔어요. 당신과 이렇게 단둘이 외롭게 만날 날을 말이예요…"
혼을 앗아갈 듯한 육향(肉香)을 풍기며
그녀는 천년(千年)을 두고 기다리던 연인(戀人)처럼 설화린의 품에 안겼다.
눈빛과 눈빛이 허공에서 만나고,
살(肉)과 살(肉)이 닿는 순간
설화린은 자신의 몸이 용광로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르르르…
조물주가 억겁(億劫)을 두고 조각한 듯 아름다운 옥수(玉手),
그녀의 손이 설화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름다운 얼굴이로군요…
이 얼굴에 피가 흐른다면 더욱 더 아름다울 거예요… 그렇죠?"
야우(夜雨)는 흥분하고 있었다.
"난… 매일 밤 나비를 태워왔어요…
이렇게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예요…"
그녀는 사르르 두 눈을 감아 내렸다.
그러나 반대로 주사빛 고혹적인 입술은 꽃잎처럼 가볍게 벌어졌다.
"나비는… 비(雨)에 약해요… 밤비(夜雨)에는 더욱…"
(으음… 대단한 계집이다!)
설화린은 초극(超極)의 진기(眞氣)를 끌어올려
진탕되려는 자신의 심기를 억지로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이미 그녀의 물기 머금은 가슴은 더없이 황홀하게 몸에 닿아 있었다.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끊어뜨릴 듯 끌어안고 있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똑같이 죽음(死)의 문턱에 있었다.
주어진 상황은 최악(最惡)이었다.
손가락만 뻗으면 둘 중의 하나는 죽게 될 것이다.
설화린은 누가 뭐래도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자객(刺客)이었고,
야우는 이 방면에서 최고의 전문가(專門家)였다.
그러므로,
평범한 상식 따위는 이러한 싸움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으음…)
설화린은 신음했다.
그는 지금 나른해지는 전신에 살기(殺氣)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과의 가공할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이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상대는 이미 야우가 아니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경우 돌아오는 건 죽음 뿐이었다.
설화린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아 내렸다.
그리고는 마음을 정갈하게 가라앉히며 야우의 손길을 음미했다.
"손이 차갑구나…"
"처음 듣는 말이예요.
저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여자예요. 당신같이 강한 남자 앞에선 더더……"
"……!"
"제 가슴을… 괜찮아요…"
이 속삭임은 야우가 흘려낸 것이 아니었다.
뱀의 혓바닥같은 악마(惡魔)의 유혹(誘惑)이었다.
부르르…
한순간 설화린의 손 끝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 야우의 터질 듯한 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
설화린은 전율했다.
손 안에 가득히 넘실거리는 이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감촉!
천하의 그 무엇이 이 촉감에 비견될 텐가?
"난 약간 늦게 달아 오르는 체질이예요… 이상하죠?"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녀는 자지러질 듯한 교성을 흘려내며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설화린의 하반신을 뱀처럼 휘어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신을 억제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것이예요…"
"……!"
순간,
흔들림이 없던 설화린의 두 눈 동공이 확 풀어졌다.
(드디어!)
야우는 기회를 잡았다.
기회는 이번 단 한 번 뿐이다.
두 번째 기회는 이미 기회가 아니었다.
"됐어요… 이제… 당신의 검(劍)으로… 당신의 목을… 찌르는 거예요… 어… 어서…"
"……!"
"피(血)가 흐를 거예요… 분수처럼 아름답게 말이예요…"
"……!"
"난… 당신의… 살점을 도려내고… 그리고 뼈를… 뼈를 깎을 거예요…"
"……!"
"조금씩… 조금씩… 칼 끝에 와닿는 짜릿한… 그 짜릿한 감촉을 음미하면서 말이예요…"
야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전신은 푸들푸들 경련까지 일으켰다.
"어서… 어서요."
흐느끼듯, 자지러질 듯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교성…
그때다.
어떤 마력(魔力)에 감응(感應)이 된 듯 설화린의 손이 스스로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어서…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단 말이예요…"
기다렸다는 듯 야우의 교성이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스윽!
설화린은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검날을 자신의 목부분으로 가져갔다.
"피를… 당신의 피를 보고 싶어요…
빗물에 피가 번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울 거예요…"
그 순간이었다.
으지지직!
섬뜩한 파육지음(破肉之音)과 동시에 진홍빛 선혈이 야우의 뽀얀 가슴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녕 설화린은 스스로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었단 말인가?
비릿한 혈향(血香)을 동반한 선혈은 야우의 목과 가슴을 적시며 아래로 흥건히 흘러 내렸다.
순간,
야우의 입술이 한껏 벌어졌다.
"더… 조금만 더…"
투둑! 후두둑…
선혈은 계속 흘러 나왔다.
그것은 이제껏 상반신을 한껏 젖힌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야우의 얼굴에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됐어요… 이젠 됐어요…"
이윽고 전신을 격렬하게 떨던 야우는 쾌감을 만끽한 듯
설화린을 밀어 젖히며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 쩍!
한 줄기 강렬한 섬광이 눈부시게 허공을 갈랐다.
곧 이어 야우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으며,
그 순간 설화린은 두 무릎을 풀썩 꿇었다.
"너… 너는…?"
야우는 뒤로 벌렁 나자빠진 채 경악성을 질렀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
눈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인데도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태로 설화린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이 순간 경악과 회의와 불신의 빛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설화린(薛華麟)은 자신의 목을 찌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자신의 혀를 깨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야우가 몸을 밀치자 퍼뜩 정신을 차렸으며,
넘어지는 순간 야우를 향해 일검(一劍)을 날린 것이다.
허나,
설화린도 자신의 목을 찌르지 않았지만,
야우도 설화린의 검에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설화린의 검날을 피한 것이다.
그러나 설화린은 제이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
야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지금 그들에겐 상대에게 공격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렇게 말없는 대치가 한 동안 계속됐다.
설화린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劍)으로 자신의 상반신을 의지한 자세로
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우는 벌렁 넘어진 자세 그대로 한껏 드러난 알몸을 가릴 생각도 않은 채
설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각배는 이미 사류천을 건너 맞은편 모래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휘스스스…
강을 건너온 한 줄기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무심히 지나칠 때
설화린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가거라. 오늘은… 너를 치지 않겠다."
모랫바람보다 더 메마른 일성에 야우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옷도 입지 않은 채 몸을 빙글 돌리며 배시시 웃었다.
"역시… 당신은 강하군요.
그러나 언젠가는 내 손에 죽게 될 거예요.
왠지 아나요? 나비(蝶)는 비(雨)에 약해요… 밤비(夜雨)에는 더더욱… 호호호홋…"
한 줄기 흐드러진 교소를 남긴 채 야우는 느릿하게 멀어져 갔다.
설화린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잘 생긴 엉덩이를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려냈다.
"야우… 정녕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계집이다…"
이것이 불패(不敗)의 냉혹한 승부사 야접(夜蝶)과
이 시대 최고의 살인술사(殺人術師) 야우(夜雨)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