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載紹의 詩稿
無事書齋裏 서재에 일없으니
微吟對晩空 하늘 보며 시를 읊네
雲霞迷遠色 구름은 멀리 떠가고
樹木動喧風 따뜻한 바람 나무에 부네
鳥去靑山外 청산 밖에 새 떠나가고
鷄鳴白日中 한낮에 닭이 우네
春來幽興動 봄이 와 그윽한 흥이 일어나니
長憶澗亭東 오래 전 간정 동쪽 일이 생각나네
克卿
오재소는 해주오씨 吳晉周의 손자이고 月谷 吳瑗의 아들, 醇菴 吳載純의 동생이다. 오원은 해창위 오태주에 입양되었다. 오재소는 자가 克卿이고 호는 石泉이다. 한가한 봄날 서재에서의 感興을 쓰고 있다.
이 시고 액자는 도토리서점에서 구한 것인데(2015년), 그 후 인사동 오미재에서 해주오씨 시고 자료 한 다발(2016년), 최근에 오두인 등 해주오씨 간찰이 전주 만물골동상에서 나와서 15점 정도 구하였다. 또 코베이나 한옥션 등 경매에 해주오씨 자료들이 한두 점씩 나오는 것도 있는데, 생각컨대 모두 안산 월곡 해주오씨 齋舍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중 명안공주와 관련된 귀한 것은 일찍이 강릉시립박물관(오죽헌)에 넘어가서 일부는 보물로 지정되었고, 일부 간찰이나 교지류를 중심으로 수백 여 점의 자료는 서울역사박물관에 박 모 교수가 기증(?)하여 관리되고 있다. 전주 만물상에 나온 자료가 간찰류를 중심으로 430여 점의 자료가 있는 것 같은데, 옥션에 경매되어버리면 자료가 산일되어 자료로서의 가치를 많이 잃게 되어 안타까운 생각이다.
吳載紹(1729, 영조 5∼1811, 순조 11)는 자는 克卿, 호는 石泉. 공조판서 斗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晋周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瑗이며, 어머니는 강릉최씨로 寔의 딸이다. 1767년(영조 43) 음보로 기용되어 長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해 정릉참봉이 되었다. 1771년 사옹원봉사로 옮겼으나 그 해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承政院注書가 되었다. 1773년 정식으로 정6품에 오르고 홍문관 관리가 되었다. 1775년 문신들이 행하는 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해 洪國榮과 함께 熟馬 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그 해 승지에 올랐다. 1777년(정조 1) 纂輯堂上이 되고 이어서 대사간에 올라 洪鳳漢의 역변 사건의 처리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801년(순조 1) 천주학 배척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亞卿의 지위에 올랐다. 그 해 進賀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정조실록』 편찬의 찬수당상에 임명되었으며, 1803년 다시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강화유수가 되어 외지로 나갔다. 임기가 끝나자 1806년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1807년 예조판서, 이듬해 판의금부사, 1809년 우참찬을 지낸 뒤 이듬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성격이 온후해 모나지 않았고 남의 의사를 존중해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아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시호는 定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