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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尋牛莊 : 사적 550호)
한국사람 ・ 2023. 5. 13. 7:34
심우장(尋牛莊 : 사적 550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심우장 전경
1. 연혁 및 개요
심우장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10년간 거처하시다가 입적한 곳이다.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심우장은 1984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됐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으로 승격됐다. 현재 지어진 때가 문화재청과 기타 글에서는 모두 1933년으로 하고 있으나 김광식은 1935년에 지은 것이라 주장한다.
심우장尋牛莊에서 심우尋牛는 사람 마음을 소로 비유하여 잃어버린 소(마음)를 찾아 간다는 뜻이다. ‘심우’의 과정은 10단계로 나누는데 이런 과정을 그린 것이 심우도尋牛圖이고 주로 사찰 벽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만해가 당호를 심우장이라고 한 것은 이곳을 자기의 본성을 찾아가는 정진의 장소로 생각했던 것이다.
심우장은 한때 남의 손에 넘어간 적도 있었다. 만해 사후 생활이 어렵다보니 집을 52년 12월에 팔았다가 만해 제자였던 김법린의 도움으로 1962년 유족에게 돌려졌고, 1970년 초반까지 유족들이 살다가 빈집이 된 것을 1979년 출범한 만해사상연구회가 1981년 10월 유족으로부터 인수했다.(김광식/34,5쪽)
1984년 문화재로 지정된 후 1990년 딸과 사위가 성역화사업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1991년 심우장 내 1층 양옥을 짓고 거주했다. 이 집은 성북구관리로 넘어가면서 철거되고 관리사를 새로 지었다. 성북구는 1997년 인근 토지를 수용하고 1999년부터는 직접 관리하고 있다.(김광식/34~7쪽)
2. 심우장 건축연도
<심우장실측조사보고서>에서 묵서명墨書銘이나 상량문에 대한 언급이 없다. 큰 집이 아닌 경우 일반적으로 종도리에 ‘모년모월모일입주상량某年某月某日立柱上樑’이란 글을 써놓아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실측에서도 묵서명이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심우장 건축연도는 문화재청을 비롯한 다른 곳에서는 모두 1933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김광식은 1935년이 심우장 건축연도라고 주장한다.
김광식은 만해가 결혼하고 잠시 성북동에 있는 김철중의 동생인 김정국의 집이 비우게 돼 이곳에서 살다가 심우장을 짓고 이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김광식/12쪽) 김정국 동생 집에서 살았다는 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심우장은 결혼 후 지은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931년 8월 혜성이란 잡지에서 만해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근래近來에는 독신수도獨身修道를 너무도 고적孤寂하게 생각하여 마땅한 인물만 있으면 다년간 끊었던 고갑古匣의 금현琴絃을 다시 이어 봉예鳳兮 예노이덕불퇴兮老而德不衰한 일곡一曲을 타기 사양치 않겠다.” 그리고 1933년 2월 15일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적당한 곳이 있으면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김광식/10쪽) 이런 것을 보면 오랜 항일투쟁에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진성당 병원의 간호사였던 유숙원兪淑元(당시 36세)을 설득해 결혼하게 했다. 만해는 14세에 결혼해서 스물여섯에 아들을 하나 뒀다. 그 후 출가해 전부인과는 인연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재혼하기 전까지 만해는 사글세방이나 선원에서 유숙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만해는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것 같지 않다.
주 : 만해는 14세에 전정숙全貞淑과 결혼에서 26세인 1904년 아들인 보국을 얻었다. 보국은 월북해서 5녀를 두었다고 한다. 만해는 아들을 낳은 다음해 출가하였다.
심우장을 지을 때 벽산스님이 땅을 제공하고 건축에 필요한 돈은 1000원 이었는데 만해가 200원 부인이 200원, 조선일보 사장 200원, 제자 모금이 100원 이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300원은 저당으로 마련했다.(김광식/13쪽 주 35)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심우장 건축비용은 1933년 재혼 후 마련됐다는 것이다.
즉 재혼 후 사는 집이 마땅치 않자 김벽산이 땅을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심우장 건축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심우장 건축 시기는 1933년 이후가 맞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필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에서도 확인된다. 1931년 12월 26일 222번지가 3필지로 분할되고 다음해인 1932년 1월 19일 소유권이 이전된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여러 자료에 나오는 김벽산 스님이 제공했다는 52평에 맞는 대지는 222-2로 정규찬 소유다. 아마도 김벽산 스님이 친인척 명의로 대지을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지와 현재 심우장이 부지인 222-1이 만해 부인의 명의로 등기되는 때는 정규찬 명의가 된 후 2년 8개월 후인 1934년 9월 14일이다.
이런 것으로 보면 만해가 유숙원과 재혼한 후 집을 짓는 이야기가 나왔고, 김벽산이 집터를 내놓겠다고 한 후 집터를 살펴본 결과 김벽산 소유인 222-2로는 필요한 집을 짓기가 어려워 다시 추가로 222-1을 매입한 것이다. 이때가 1934년 9월 이다. 따라서 심우장을 실제로 짓기 시작한 것은 소유권이 넘어온 1934년 9월 14일 이후로 봐야 한다.
1973년 <문학사상> 4호에는 만해가 결혼 후 집이 없어 성북동 집에 세 들었다는 것과 이것을 본 동지들이 집을 장만해줄 계획을 세웠고, 만해 부인인 공사 중 밥을 지어 날랐다는 내용이 있다.(김광식/12,3쪽) 부인이 공사 때 밥을 지어 날랐다는 것으로 보아 집을 지은 시기는 1933년 결혼 이후라는 것이다.
김광식은 등기부 등본에 집이 등기 된 것은 1935년 3월로 확인하고 있다.(김광식/3쪽 주1) 이런 집의 이력은 건축물대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건축물대장에도 “1935년 4월 30일 신규작성(신축)”으로 기재돼 있다. 또한 1935년 3월 23일 토지등기부에서 소유주가 부인인 유숙원에서 한용운으로 바뀐다.
토지소유주의 변경이 있었던 것은 심우장 공사가 끝난 다음 1935년 3월 23일 토지와 집에 대한 등기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토지와 집에 대한 등기하고 한 달 뒤 건축물대장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1935년 4월 30일 신축’으로 기재된 것이다.(그림 5 참조) 이런 일련의 상황으로 보아 심우장이 지어진 때는 1935년 3월으로 수정돼야 한다.
소유권변천내용(출처 : 심우장 사적지정요청서)
3. 심우장 건축
심우장은 건축적으로는 크게 의미있는 건물은 아니다. 건물규모도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성북동에 지어진 집들에 비해서도 규모나 격이 떨어진다. 부엌 천장이 연등천장으로 노출됐다. 추녀부분 치목을 보면 엇선자로 마무리 했다. 다른 곳 부재도 넉넉하지 않다. 이것을 보면 고급집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은 그러나 만해 선생에겐 고대광실高臺廣室과 다름없는 집이었을 것이다. 이전에 신혼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집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단 주거가 안정됐고 부인 도움으로 몸이나 마음모두 안정 됐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심우장은 크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오히려 크거나 화려했다면 ‘만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았을 것이다.
집은 뒤집힌 ‘ㄴ’자 형으로 전면은 4칸 측면 한 칸 반이고 몸체는 1고주 5량이고 부엌은 3량 집이다. 부엌은 뒤쪽으로 한 칸 찬방이 돌출돼있다. 찬방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이곳부터 후면 전체와 만해가 거주했던 건넌방 전면까지 좁은 툇마루가 깔려있다. 이 집에서 가장 큰 특징은 대청이 없다는 것이다.
집이 4칸일 경우 한 칸 정도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우장에서는 두 칸 모두 온돌을 설치해 방으로 사용했다. 단출한 식구에 방을 넓게 쓰려는 의도와 북향집에서 겨울에 대청을 쓸 일이 별로 없는 것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안방 앞에는 반칸 퇴가 있고 이 퇴는 부엌에서 건넌방까지 연결돼 있다.
퇴칸 천정은 얇은 판재로 문양천정을 만들어 놓았다. 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이것을 우물반자라고 했는데 전통적인 우물반자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본 문양이다. 단면도로 보면 초기부터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꽤 많은 집에서 이런 천정을 했을 것이다. 이런 천정이 언제부터 유행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우장은 전통의 답습보다는 실용성을 우선했고, 근대 한옥에서 유행했던 유형들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앞서 말한 안방은 실용성을 우선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한옥에서는 유리창이 도입되면서 퇴칸이 실내로 된다. 이런 변화가 이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퇴칸이 실내화 되면 추위를 막고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근대 한옥에서는 처마에 함석 차양을 설치하는 것이 유행하는데 이곳도 역시 그런 함석차양을 설치했다. 이렇게 함석으로 차양을 만들면 처마가 짧아도 된다. 처마가 짧아진다는 것은 지붕 면적이 줄어든다는 것으로 목재나 기와 등이 덜 들어가 공사비도 줄어든다. 지붕은 전면 몸체는 팔작지붕이고 부엌 몸체는 맞배지붕으로 구성했다. 처마는 앞과 사랑방 쪽은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부엌 쪽과 후면은 홑처마다.
개인적으로 심우장의 가장 큰 매력은 풍광이다. 지금이야 그저 그런 풍광이 됐지만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심우장에서 바라본 풍광은 대단했을 것이다. 성북동 산꼭대기까지 건물로 들어찬 것은 70년대 이후다. 삼청터널이 뚫리고 모 그룹이 이곳을 고급주택 단지로 개발하면 집들이 들어찼지만 심우장이 들어설 때만해도 교외의 풍광 좋은 동네였을 것이다.
심우장 평면도(출처 : 심우장정밀실측보고서)
우물천정이 있는 툇마루
4. 심우장의 북향 배치에 대하여(총독부를 등지기 위해 북향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내가 심우장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건물보다는 배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 비슷하다. 상대적으로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전인적 차원에서 보면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냥 한 인간으로써 어느 분야의 특별한 능력을 존중할 뿐이다.
한용운 선생도 그렇다. 만해 선생의 문학적 소양과 일제강점기하에서 수많은 사람이 변절했음에도 변절하지 않고 독립정신을 견지한 것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기 때문에 한용운 선생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경도 도를 넘으면 안된다. 도를 넘는 순간 그것을 또 다른 해악을 우리에게 남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몇 십 년간 경험한 독재가 그렇다. 한계를 지키지 못하고 자의든 타의든 넘지 않아야할 선을 넘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만해 선생 심우장 해설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였다. 심우장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총독부가 보기 싫어 집을 북향해서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답사를 하고 나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선 심우장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있는 성벽까지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고, 심우장보다 한참 높은 뒷산 때문에 북쪽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림 6 참조) 이미 북쪽이 산으로 막혀있는데 보기 싫어 돌아앉았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북향이지만 조망이 좋아, 나라도 북향을 선택했을 곳이다.
그리고 북사면에서 억지로 남향하는 집을 짓는 것도 순리에 맞지 않는다. 북사면 경사지에서 남향효과를 보기 위해 남면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남향 효과를 보려면 뒷산이 문제다. 정작 햇빛이 필요한 겨울에는 남중고도가 낮아 일찍부터 햇빛을 가리기 때문에 남향한 효과가 없다. 평지에서 북향했다면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집을 지었다는 말이 맞지만 북사면에 집을 지으면서 남향하려다 북향을 했다는 말은 상식적이 아니다.
산등성이에 짓는 집들은 대부분 등고선을 따라 집을 짓는다. 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지를 효율적으로 쓰려면 그렇게 지어야 한다. 감천 마을의 사진을 보면 모든 집이 등고선을 따라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배치도에 나온 심우장 주변 집도 대부분 그렇게 등고선을 따라 짓는다. 실제로 북사면에 집을 지을 때 남면한 효과를 보려면 평지에서 집을 지을 때 몇 십 배 땅이 있어야 한다.
김천마을사진(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산등성이에 집을 지을 때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집을 지으려면 대지를 평탄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석축을 쌓거나 후면의 경사면을 깎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심우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222-1, 222-2, 224-85의 세 지번에 걸쳐 있었다. 처음엔 김벽산 스님이 주겠다는 222-2번지에 계획했을 것이다. (그림 4 참조)
그러나 경사면을 제외하고 나니 집터가 부족해서 앞에 있는 222-1를 더 매입하여 집을 지은 것이다.(그림 1 참조) 224-8은 임야로 돼있다. 그래서 임의로 쓴 것이 아닐까 한다. 김벽산 스님이 주겠단 땅 52평이 평지였다면 심우장 면적인 41.72㎡(12.6평) 정도의 건물은 그럭저럭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대지가 경사지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는 남향집을 지으려면 훨씬 넓은 대지가 있어야 하고 되도록 건물을 높게 짓던지 대지 높이를 높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대지구입비용과 공사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필요하다. 공사비가 부족해 대출을 받는 입장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향을 선택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산등성이로 막힌 답답한 경관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북향이지만 굳이 좋은 조망을 버리고 답답한 집을 짓는다는 것도 우습다. 이런 저런 상황을 보면 심우장은 대지여건에 맞춰 지은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 집에서 살았던 만해 선생 따님인 한명숙씨가 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한영숙씨는 이 집에서 자랐고, 출가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분이다. 이런 분이라면 집에 대해서 흘러가듯이 말한 것까지 다 들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향집에 대한 사실이 왜곡됐다고 했다.
또한 한영숙씨가 여러 곳에서 언급된 ‘일본 대사관이 들어와서 꼴 보기 싫어 떠났다’는 이야기도 부정하고 있다. [서화숙의 만남]이란 인터뷰기사에서 다음과 이야기했다. “내가 이러니까 인터뷰를 하기가 싫어. 뭐든지 너무 흥미위주로 만들어버리니까. 내가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와서 성북동 심우장에서 이사갔다고? 아니 그 사람들 들어온다고 터주가 왜 떠나, 거기가 떠나면 몰라도. 나 보편적인 보통사람이야.”
현재 심우장은 정북향이다. 심우장에서 정남향해서 산등성이를 넘으면 바로 현 성균관대학이어서, 문묘와 성균관이 있고, 창덕궁이 있다.(그림 7 참조) 그에 반해 일본총독부는 남서쪽에 있다. 이런 상황인데 총독부를 보기 싫어 북향했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 않나?
5. 나가는 이야기
심우장 아래 덕수교회에는 이종석李鍾奭별장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한옥이 있다. 지금은 교회 부속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종석(1875-1952)은 한용운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거부였다. 그가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풍광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종석별장은 북서향이다. 그만큼 북쪽풍경이 좋다는 뜻이다. 이종석이 누렸던 풍광을 만해도 같이 누렸을 것이다. 이런 풍광 때문에 만해 이전 김벽산이 초당을 지으려 했던 것이고 만해 역시 풍광에 매료돼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한다.
심우장이 한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법이나 치목 수준으로 볼 때 수준 높은 집이 아니다. 어쩌면 당시 건축업자들이 많이 지어졌던 소위 집장사 집과 같은 한옥이다. 따라서 건축사적 관점에서 대량 공급하던 한옥주택을 닮았다는 점에서 참고할 점은 있어도 근대를 대표할 만한 한옥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만해가 말년에 거주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한옥이다. 즉 ‘만해萬海’라는 이름이 이 집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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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이종석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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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萬海 韓龍雲 尋牛莊 實測調査報告書/서울특별시 성북구/2009.10.
- 심우장(尋牛莊)의 정체성 확립과 보존관리 방안에 대한 연구/白元基/동방대학원 대학교 /2008/東方論集/Vol 2
- 심우장의 어제와 오늘-한용운과 심우장의 정신사/김광식/동국대학교 전자불전 문화콘텐츠 연구소/2019/전자불전/Vol 21
- 金陀禪師 생애의 재검토/김광식/大覺思想 제 29집/2018.06.
- 문화적 기억의 공간과 장소, 심우장(尋牛莊)/민족어문학회/2020/어문논집/Vol-No 88
- 문화재청 사이트 : 사적 심우장/만해 한용운 심우장
- 나무위키/심우장 : https://namu.wiki/w/%EC%8B%AC%EC%9A%B0%EC%9E%A5
- [서화숙의 만남]만해 한용운의 딸 한명숙씨
https://v.daum.net/v/20120226201306488
- 홍성신문・내포타임즈 : <광복 72주년 특집> 홍성 밖에서 화려한 만해 기념행사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954
- 이보세상 : 만해 한용운 관련 사실이 왜곡되었다(딸 한영숙씨 주장 두 가지)
- 부산역사문화대전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8905
그림 1 : 심우장 후면( 뒷쪽 언덕 위 담이 대지경계선임)
그림 2 : 심우장대지단면도( 출처 : 심우장 정밀실측보고서)
그림 3 : 심우장 주변배치 (출처 : 심우장 정밀실측조사보고서)
그림 4 : 심우장 지번도 (출처 : 심우장 정밀실측보고서)
그림 5 : 심우장 건축물대장
그림 6 : 심우장과 한양성벽까지 직선거리
그림 7 : 심우장과 창덕궁
[출처] 심우장(尋牛莊 : 사적 550호)|작성자 한국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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