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8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향유 한 옥합의 가치
3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6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여러분은 좋은 향기가 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악취 나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성적으로 좋은 향기를 풍기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씻고 다닙니다. 향수도 뿌리고 다니기도 하고, 일부러 좋은 향기가 나는 비누나 샴푸, 섬유유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코로 감지할 수 있는 향기도 있지만, 생각과 감정 혹은 영혼으로 맡아야 하는 향기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자신이 갖고 있던 가장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그 향기를 모두 예수님께 봉헌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향유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신분도 기록되지 않은 어느 여인이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식사시간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고급 향유가 담겨 있는 옥합을 깨뜨립니다. 여기서 깨뜨렸다는 것은 봉해진 옥합을 깨서 열었다(마치 앰풀을 깨듯이)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옥합 안에 담겨있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 여인의 대답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의 황당한 행실을 보는 두 종류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몇몇 사람들(개역성경의 번역으로는 어떤 사람들-복수의 남성)’이라고 기록된 자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에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제적인 관념에 밝았던 사람들임에는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옥합을 깨고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자, ‘왜 이런 일로 식사를 방해하느냐?’고 말하지 않고, ‘왜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향유의 경제적 교환의 가치가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향유의 옥합이 깨지자 그들의 입에서 처음 튀어나온 말이 고가의 상품을 허비하는 행실을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평범한, 지극히 상식적이며, 일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상황이 지금 여기서 벌어진다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대부분 가치 판단의 기준이 경제적 교환가치인 우리 사회와 시대에서 이러한 반응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우리의 시대정신은 경제적 실용과 물질적 성공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미덕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다른 가족들이나 이웃과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신세를 지지 않는 것은 마음에 부담되지 않는 이점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경제적 교환가치가 주는 유익이 적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당시도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판단에서 나온 발언을 예수님은 그다지 탐탁스럽지 않게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언제라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당신의 대속을 위한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 여인이 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누군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이 여인도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마리아라고 증언합니다-요 12:3). 그래서 오늘날까지 많은 설교자들과 교사들은 이 여인의 헌신과 섬김을 칭찬하고, 설교에 언급하고,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님께 칭찬받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이 어떤 의도로 이루어진 일인지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귀한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젊은이의 장례를 준비한답시고 향유를 붓는 것도 현실적으로 그다지 귀한 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살아야 할 날이 구만리 같은 사람에게 장례식에서나 하는 염을 식사시간 도중에 흉내 낸다는 것이 조금은 난해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이 여인을 더 무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던 것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여인의 행실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는 실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입니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의 상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식탁이나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서 팔을 한 쪽으로 지탱하고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원어의 식사를 하다라는 동사는 비스듬히 눕다로 번역이 됩니다.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그림은 다빈치의 상상의 산물이었습니다.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 불경스러운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라고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일행이 베다니라는 동네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그 집에서 일하던 어떤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심부름하다가 실수로 예수님의 머리 근처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약한 옥합의 입구부분으로 떨어져 향유가 새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 옥합을 주워 들다가 당황한 나머지,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더욱 듬뿍 쏟게 되는 것이지요. 식사하던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어떤 사람들은 향유가 아깝다고 말하며, 여인의 실수를 나무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숙명인 대속의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서를 쓰면서 그 일을 기억해 냈고,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상황을 후대에 남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서 그저 상상한 내용이니까 사실과 많이 다를 것입니다.
그 여인이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러 정성을 드려서 예수님께 봉헌했다는 신학자들의 의견을 저의 사적인 생각보다는 존중합니다. 하지만, 묵상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향유 한 옥합이 지닌 가치를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인 교환가치나 효율, 실용성에 비추어 생각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향유 한 옥합이 지닌 가치를 속죄와 복음을 위한 헌신으로, 한 영혼의 정성스런 섬김으로 생각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소유가 있습니다. 이 소유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향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기를 뿜는 향유가 든 옥합이 모두의 인생에게 허락되었고, 맡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달란트라고도 부르는 재능들과 능력, 그리고 실력과 물질 등이 바로 향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재능, 실력 등을 금전적이고 경제적인 가치로 환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값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지, 얼마나 넓은 집에서 사는지에 높은 가치를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향유의 향기가 가진 가치가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기준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마음과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과 ‘소유’라는 향유의 옥합은 속죄와 복음을 위해 깨어지고 열릴 때 그 향기가 퍼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열고 향유를 부었을 때 사람들은 돈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좋았겠다고 했지만, 옥합 안에 든 향유의 가치를 먼저 돈과 효율성만으로 환산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셨고, 속죄의 제사로 드려질 당신의 대속의 장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각자의 존재라는 옥합을 던져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영혼과 능력이라는 향유를 복음을 위해 부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향유의 향기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언행이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를 불러 제자로 삼아준 스승,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스승 예수를 배신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합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삿대질을 하며 자신은 깨끗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자신의 영혼과 복음, 그리고 교회의 존재가치를 경제와 효율의 논리로 헤아리고 있으면 우리도 마찬가지 배신자의 자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이 가룟 유다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자리에 않게 된다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곳에서 벌떡 일어나서 앉았던 자리를 들고 돌아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치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치, 그리고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초로 흙으로 지어져서, 하나님께 생기를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다 자주 사용하는 시각의 가치관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한 여인의 순수한 헌신과 섬김을 경제적 가치관으로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눈으로 한 옥합의 향유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눈으로 한 옥합의 향유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성령의 눈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런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히 여기고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육의 눈으로만, 경제적인 효율과 교환가치만을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의 전형적인 모습이 가룟 유다의 행위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여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영의 눈이 제대로 열려있어야 향유 한 옥합의 가치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영의 눈이 제대로 열려있어야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물질의 만능으로 대부분의 가치가 규정되는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더욱 성령의 충만함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자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며, 모든 존재하는 것의 영적인 가치를 볼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
첫댓글 건강하시죠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통해서, 성령충만함으로 영의 눈이 제대로 열려있기를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나 소유물 이전에, 존재 자체가 나의 옥합이라는 것이 마음에 박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자신의 인생과 소유에 대해 단지 청지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우리의 소유와 시간을 아낌없이 복음과 속죄에 쏟아 부울 수 있음을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많은 부분을 회개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살 수 밖에 없지만, 참된 아름다움의 가치, 사람다움의 가치를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아내는 인생이길 원합니다. 영생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간구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들이 설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지난 주일 오전 예배를 아이들 본다고 드리지 못하고, 2부예배를 드리면서 역시 재슬이와 예나를 번갈아 가면서 보면서, 설교의 많은 부분들을 놓친 것 같은데 이곳에서 다시 말씀을 접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경제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 눈에 보이고 안보이고에 참 많이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그 가치에 눈을 뜰려면... 성령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