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산문집 _ 바람개비는 즐겁다
꿀꿀이죽
정정호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를 모아서 한데 넣고 끓인 꿀꿀이죽이 서울 사람의 최고의 영양식이던 때였다.
- 박완서, 「공항에서 만난 사람,
나는 꿀꿀이죽 세대다.
나와 비슷한 세대라도 지역에 따라 꿀꿀이죽이라는 말을 못 들었거나 못 먹어본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이 휴전된 1953년 7월 이후 항구도시 인천 주안에 정착한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1957년경 도화동 산동네로 이사했다. 그때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해방 직후 탈북 실향민이기도 했지만, 공무원인 아버지가 경기도 지방으로 전근하며 근무하다 보니 박봉에 두 집 살림까지 하느라 더 쪼들렸을 것이다. 동생 셋하고 보리밥이나 밀가루라도 세끼를 먹으면 다행이었다. 점심 도시락도 쌀밥이나 맛있는 반찬 등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꿀꿀이죽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웃집에서 한 숟갈 얻어먹었는데 맛과 향이 기묘했지만, 햄과 치즈도 들어 있고 영양은 매우 풍부해 보였다. 우리 집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부평의 미군 부대 근처에 가면 꿀꿀이죽을 살 수 있다고 했다. 1945년 해방 직후인 월 부평구 산곡동에 미군 제24지원사령부가 들어섰다. 이 사령부는 무기나 탄약 등 장비를 만들고 보관하고 보급하는 조병창 시설을 관장하고 있었고 부대시설로 공병대, 항공대, 의무대, 병원 등 하나의 작은 도시를 형상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애스컴 시티(Ascom City)라 불렸던 이곳에는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먹다 남긴 음식물이 엄청 많았다. 음식이 귀하던 시절이라 한국인들은 미군 당국에 이 많은 음식물 찌꺼기를 돼지 사료로 판다고 속이고 가져다가 정리하고 다시 끓여서 한국인들에게 꿀꿀이죽으로 내다 팔았다. 이 부평의 꿀꿀이죽은 동인천역전 과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진출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꿀꿀이죽을 사러 간 것은 1957년 초등학교 4학년 때인 듯하다. 우리 동네에서 꿀꿀이죽을 사러 가는 날은 주로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새벽 4시쯤 어둑어둑할 때 동네 어귀에서 10여 명이 만나 함께 걸어갔다. 30리(12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다. 우리 집에서 는 장남인 내가 대표로 나섰다. 아마도 일행 중 내가 제일 어렸던 것 같다. 토요일에도 등교하던 때였지만 학교도 결석하고 등에 꿀꿀이죽을 사서 담아올 큰 양철통을 단단히 메고 출발하였다. 나는 부평의 꿀꿀이죽 집에 가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다 내 차례가 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죽을 받아들었다. 무겁더라도 좀 많이 사고 싶었으나 돈이 부족 했다. 꿀꿀이죽을 담은 배낭같이 생긴 통을 등에 메고 오니 돌아오는 길은 무겁고 힘들었지만, 엄마와 동생들이 좋아할 모습을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집에 도착하면 인제나 10시가 넘었다.
집에 와서 꿀꿀이죽을 다시 끓였다. 꿀꿀이죽이 끓는 냄새는 아주 좋았다. 미국 음식의 기이한 향이 종합적으로 코에 들어오면 기분이 좋았다. 6·25전쟁 중에 엄마와 단둘이 피난하던 때 언젠가 미군 부대 근처에 잠시 산 적이 있었다. 그때 철조망을 통해 미군에게 건네받은 초콜릿, 껌, 사탕, 커피, 소시지 등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국적인 맛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꿀꿀이죽을 퍼놓고 먹기 시작하며 새로운 추적이 시작된다. 운 좋으면 쇠고기 덩어리, 핫도그가 걸리기도 하고, 감자 덩어리, 삶은 완두콩, 옥수수 알맹이도 올라온다. 동생들과 서로 무엇이 걸렸는지 비교해보며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보릿고개 등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 아마도 이 꿀꿀이죽이 우리 가족의 영양 공급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중 갑자기 1950년대 말 꿀꿀이죽을 함께 먹던 동생들 생각이 난다. 모두 남동생들이고 나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어린 동생들이었는데 작년까지 세 동생이 지병 등으로 차례로 세상을 하직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라 우리 가족 중 남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남동생들이 나만 남겨두고 모두 세상을 버렸으니 이제는 꿀꿀이죽 추억을 함께 나눌 사람도 없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의 상징인 꿀꿀이죽은 동생들의 죽음과 함께 나에게서 한층 더 멀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3월과 6월 사이에는 보릿고개라 하여 식량난에 허덕였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에서는 절량농가(絶糧農家)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량이 떨어지는 시기였다. 꿀꿀이죽을 힘들게 사 먹던 시기인 1957년 3월 25일 자 『경향신문』 기사에 “영남 일대 절량민은 6할”이라고 보도하였다. 소위 “나무뿌리와 나무껍질을 끓여 먹으며 살던 시절이다. 당시 도시 빈민들은 어떠했을까? 1960년 12월 22일 『동아일보』에 남대문시장 노상 꿀꿀이죽 집 풍경이 나온다.
보통 돈벌이가 안 되는 날은 '꿀꿀이죽'이다. '꿀꿀이죽'이란 다름 아니라 미군 군대 취사반에서 미군들이 먹다 버린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한국 종업원이 내다 판 것을 마구 끓여낸 잡탕죽이다. 단돈 10원이면 철철 넘게 한 그릇을 준다. (...) 큼직한 고깃덩어리도 얻어걸리는 수가 있지만 때로는 담배꽁초들이 마구 기어 나오는 수도 있다. 대개 ‘꿀꿀이죽’은 아침에 한 상, 한 가마 끓여도 삽시간에 낼름 팔리고 만다.
꿀꿀이죽의 추억을 살려 대학 다닐 때 나 혼자 자취방에서 먹다 남은 밥, 소시지, 감자, 옥수수, 양파, 돼지고기 목살, 닭고기, 케첩, 김치 등을 넣고 잡탕 찌개처럼 팔팔 끓여 먹은 적도 있다. 그러나 1950 년 후반기에 먹었던 꿀꿀이죽의 맛과 향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동안 내 입맛이 바뀌었거나 음식 재료에서 차이가 난 탓이리라. 그 후 가끔 부대찌개도 먹어보았지만, 꿀꿀이죽에 대한 묘한 그리움을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원조 꿀꿀이죽을 판다는 소리도 들었으나 알아내진 못했다. 지금도 어쩌다 꿀꿀이죽 생각이 나면 부대찌개 집을 찾아가는데 주방장에게 소시지와 햄을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꿀꿀이죽 후예로 등장한 게 부대찌개지만 또 다른 변용 식품이 바로 라면이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생산된 날은 1963년 9월 15일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라면을 처음 생산한 삼양식품(주) 전중윤 사장은 1961년 어느 날 서울 남대문시장 근처를 지나갔다. 그때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비교적 싼 가격인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1961년 내가 인천에서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내식당에서 우동 한 그릇이 3원이었고, 우동 국물은 1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 사장은 우리나라 사람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싼 음식은 없을까 궁리하다가 당시 일본에서 이미 생산되던 라면을 생각해내었다고 한다. 어렵게 자금을 마련해 일본으로 가서, 라면 제조 기계를 사들이는 교섭을 벌였으나 당시 한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 이전이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전 사장은 어렵게 어렵게 라면 생산 기계와 조리법을 들여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첫 번째로 삼양 치킨 라면을 생산했다. 1963년 당시 첫 라면 가격이 10원이었는데 된장찌개 30원, 커피 한 잔 35원 하던 때니까 싼 편이었다. 라면은 제2의 쌀로 칭송되기도 했다.
내가 라면을 처음 먹은 것은 1964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국수하고는 다른 그 맛이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라면 맛이 아직도 생생한데, 1957년 처음 맛보았던 꿀꿀이죽과는 다른 감동(?)이었다. 꿀꿀이죽은 어렵게 사다 먹으면서도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고 돼지 사료로 허가된 것이라는 생각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것도 없어 못 먹던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깊이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라면은 우리나라에서 당당히 생산된 새로운 식품이었고 꿀꿀이죽과는 달리 새벽부터 30리씩이 나 걸어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쉽게 살 수 있었고 그 가격이 저렴하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하지만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된 것은 부대찌개나 라면이 아니라 꿀꿀이죽이다. 어린 시절 내가 스스로 통을 메고 여러 시간 걸어서 사다 먹던 음식(?)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꿀꿀이죽은 인생 초반에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에까지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주름과 흔적을 남겨놓았다.
첫댓글 "보릿고개 등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 아마도 이 꿀꿀이죽이 우리 가족의 영양 공급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