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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피천득 다시읽기
일 시: 2024년 10월 11일(금) 15시
장 소: 서초문화재단 1층 1교육실
사회자: 김진모 사무총장
인사말: 류대우 회장(인풍 회장)
축 사: 박우상(서울대 영어교육과 동문회장)
축 시: 안양희 이사
琴兒 피천득과 어린이
– 피천득의 삶과 문학의 이정표
정정호(문학평론가, 중앙대 명예교수)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 (중략) …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아니,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가늘게 코를 골면서 편안히 잘 자는 이 좋은 얼굴을 들여다보라! 우리가 전부터 생각해 오던 하느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가 있느냐? 어느 곳에 우리가 싫어할 것이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고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소파 방정환 <어린이 예찬> (⟪신여성⟫1924년 6월호)
들어가며: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금아 피천득
피천득(1910-2007) 아호는 금아(琴兒)이다. 이 아호는 춘원 이광수가 피천득이⟪동아일보⟫에 등단하여 막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1931년에 지어주었다. 금아란 뜻은 “거문고를 켜며 노래하는 아이”란 뜻이다. 거문고가 나온 이유는 10세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거문고 연주에 출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아들로서 피천득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거문고를 켜며 고고하게 노래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 이광수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금아라는 아호에 걸맞게 98세라는 장수를 누리면서도 피천득은 일생 겸손하고 순수하고 청렴결백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일합방으로 나라 잃은 해인 1910년 8월 25일 국치일 3개월 전 5월에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당시 대세였던 일본이 아닌 중국 상하이로 유학하였고 그곳에서 도산 안창호가 시작한 흥사단의 단우가 되어 ‘불령선인’(不逞鮮人)이 되었다. 불령선인은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반동분자인 독립운동가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피천득은 1938년 유학 후 귀국하여서도 일제의 방해로 어떤 공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물론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어떤 정권과도 친분을 맺지 않았고 어떤 동인 활동이나 문인 단체에도 가입해 활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친 결벽주의는 피천득이라는 작가를 한국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인으로 문인 생활을 시작한 피천득 문학 세계도 지나치게 과작(寡作)의 작가이다. 피천득 작품은 상당수 시 번역과 단편소설을 포함한 산문 번역과 약간의 논문이나 평론이었다. 이외에 시집 1권(시 100편 미만), 수필집(100편 미만)에 불과하다. 이러한 피천득의 창작 작품 수는 그의 100년에 가까운 긴 생애로 볼 때 매우 적은 것이다. 작품 수 분량뿐 아니라 문학의 주제나 형식도 주로 매우 짧은 서정시와 짧은 서정 수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 형식의 단순함과 시 주제도 모두 어린이의 이미지와 병행한다. 피천득은 사실이나 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순진무구한 어린이시각으로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어린이는 이렇게 피천득의 삶의 지표이며 문학의 출발점이다.
피천득 개인사를 보면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즈음인 10살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하여 천애 고아가 된 피천득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의 슬픔은 일제에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과 더불어 그의 문학에서 하나의 숙명적인 트라우마로 남았다. 특히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금아는 엄마에 대한 집착은 모정에 대한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의 결과이다. 피천득은 한때 자기 문학의 비밀은 어머니라고 언명한 바도 있듯이 엄마는 그의 삶과 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엄마가 돌아가신 열 살 때 이미 어른으로 성장을 멈추고 “나이를 잊은 영원한 소년”이 되었다. 피천득의 “고아의식”은 끊임없이 엄마의 사랑을 찾아 일생 방황하는 어린이로 남게 했다.
금아는 서양의 모든 미술작품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최고로 평가했다.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을 가진 이 불후의 조각작품은 예수의 젊은 어머니 마리아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아들 예수의 몸을 두 손으로 무릎 위에 눕힌 조용한 모습이다. 여기서 예수 모습은 십자가 처형의 고통보다는 엄마 품에서 잠든 순진하고 평화로운 어린 아기 모습이다. 피천득은 30대 젊어서 돌아가신 아름다운 어머니를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한다. 금아는 나이 들어서도 젊은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기로 영원히 남고 싶었다. 금아는 일생 늙음을 모르는 예쁘고 젊은 엄마의 나이 들지 않는 어린아이가 되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피천득의 삶과 문학의 정수이며 절정이다. 이것을 모르고는 우리는 결코 피천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피천득의 모든 문학적 활동은 다음 본론에서 논의되겠지만 번역이든, 시든, 수필이든, 산문이든 모두 어린이에 집중되어 있다. 아기 시 짓기, 동화창작, 어린이를 위한 외국 문학 번역 등에서 거의 아동문학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린이들만을 위한 문학을 내세우지 않고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문학을 추구하였다. 오히려 어른들이 그들의 영원한 고향인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이가 주제로 된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피천득은 인간의 혼탁한 성장 과정에서 어린이의 가치인 단순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과 문학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어린이 되기”로 인도하고자 하였다. 모든 “되기”(becoming)는 내 자아 밖 대상인 타자에 대한 공감과 대화를 넘어 그것 자체가 되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물 되기’, ‘식물 되기’, ‘여성 되기’ 등 많은 되기를 통해 피천득이 생각한 문학의 정수인 사랑과 정(情)에 이른다. 반복하거니와 ‘어린이 되기’는 궁극적으로 금아 피천득의 삶과 문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1920년 후반부터 피천득이 어린이에 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지금까지 언급된 개인사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사건과 인연이 출발점이기는 하나 일제 초기인 1920년대 조선의 어린이 운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 어른과 견주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소파 방정환(1899-1931)은 동학혁명에서 시작된 천도교의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사위로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고 그 이듬해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였다. 1923년 아동문학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했고 우리나라 최초 아동 잡지⟪어린이⟫도 창간했고 어린이날도 만들었고 동화 번안 작가로 활동했다. 피천득도 당시 10대이던 때 이러한 새로운 어린이 문화 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그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1920년대 30년대 아동문학 운동에 대한 논의로는 양소영⟪1930년대 현대시의 아이와 유년기의 상상력⟫(2015)을 참조 바람)
다음에서 피천득의 문학 활동과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어린이 되기”라는 글의 주제를 짚어보기로 하자.
문단 데뷔와 초기 문학 활동 – 어린이 되기를 향하여
피천득이 처음으로 문단에 내놓은 작품은 시조 <가을비>이다. 이 시조는 ⟪신민⟫(新民) 1926년 3월(제10호)에 실렸다. 필자는 이 잡지를 찾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등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조는 한준섭, 박병순, 리태극의 책임편집하에 1985년 발간된 ⟪한국시조 큰사전⟫(을지출판공사) 97쪽에 실려 있다. 당시 피천득이 사진과 친필원고까지 제출하였고 이 시조 대사전을 교정보았으므로 이 시조는 피천득의 창작임이 틀림없다. 1930년 4월 7일 자 ⟪동아일보⟫에 시조 형식의 자유시인 <차즘>(찾음)을 발표했다. 1930년 초반에 ⟪동아일보⟫에 꾸준히 시와 동시를 발표하였고 ⟪신동아⟫와 흥사단 계열의 잡지 ⟪동광⟫,⟪신가정⟫에도 작품이 실렸다. 지금도 수필가로 주로 알려진 금아는 사실은 “시인”으로 문단 생활을 출발하였다. 그의 초기 아이 또는 어린이 시편들인 <유치원서 오는 길>, <어린 슬픔>, <어린 근심>, <어머니 사랑>, <엄마의 아기> 등이 계속 발표되었다.
그러나 피천득이 이보다 이전에 생애 최초로 신문에 발표한 작품은 소설 번역이다. 그것은 1926년 8월 19일부터 27일까지 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된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유명한 아동 단편소설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학계나 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것은 필자가 우연히 1920년대 후반 ⟪동아일보⟫기사를 검색하다가 처음으로 찾아낸 사실이다. 이에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피천득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최초 문학저작을 찾아낸 놀라움과 기쁨은 차치하고 이 단편을 “천득”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때 피천득 나이가 불과 만 16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재학생이었다. 어떻게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그것도 ⟪동아일보⟫라는 당시 대표적인 일간지에 번역 소설이 실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의 추천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광수는 2년 월반하여 제일고보에 입학한 피천득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동시에 춘원 자신처럼 고아로 자란 피천득에 깊은 동정과 공감을 가지고 자기 집에 3년이나 데리고 살면서 문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당시 피천득이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았기에 번역 원본을 정본으로 삼고 일어 번역본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아동 단편소설은 후에 어린이 잡지에 실렸다가 초중고 국어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피천득이 도데의 단편 <마지막 시간>을 번역한 것은 일제 식민지의 적개심과 모국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후에 다른 글에서 모국어는 결코 억압될 수 없는 한 민족의 영혼이며 한국 시인 작가들의 임무는 이 모국어인 한글을 빛내고 아름답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피천득은 해방 후인 1947년 1월에 주요섭이 주간으로 있었던 상호출판사에서 첫 시집 ⟪서정 시집⟫(청전 이상범 장정)을 펴냈다. 모두 43편이 실린 이 시집은 전체 4부로 구성된 바 제Ⅱ부에 아기와 어린이 시편을 다루고 있고 모두 9편이다. (이 시집의 제Ⅳ부는 “사랑”이란 제목 아래 시조(時調) 16수가 실려있다.) 피천득은 이 시집 개정증보판을 여러 번 출간했는데 아기, 어린이 시편은 항상 2부에 배치했다. 제Ⅱ부의 첫 시는 <아가의 슬픔>이다. 전문을 읽어보자.
엄마!
엄마가 나를 낳아주고
왜 자꾸 성화 멕힌다 그러나?
엄마!
나는 놀고만 싶은데
무엇 하러 어서 크라나?
(1931)
이 시는 원래 1935년 ⟪신 가정⟫(6월호)에 실린 동요로 “옛날 엄마를 생각하며”란 부제가 붙어있었다. 초기 시부터 피천득의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시간은 거꾸로 돌려 정지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성장하지 않고 계속 아기로 남아 영원히 엄마와 놀면서 사랑을 받고 싶은 바람을 엄마가 돌아간 15년 뒤에도 이렇게 아련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번에는 <아가들의 오는 길>을 살펴보자. 전문이다.
재껄대며 따박따박 걸어오다가
앙감질로 깡충깡충 뒤어오다가
깔깔대며 배틀배틀 쓰러집니다.
뭉게뭉게 하얀 구름 쳐다보다가
꼬불꼬불 개미 거동 구경하다가
아롱아롱 호랑나비 좇아갑니다.
(1931)
이 시는 원래 1935년 ⟪신 가정⟫(4월호)에 실린 동요인 <유치원에서 오는 길>이었다. 지금 시는 원시에서 3연이 삭제된 것이다. 이 시에는 아기의 원초적인 생동력(élan vital)이 느껴진다. 어린아기들 특유의 의태어들인 “따박따박”, “깡충깡충”, “배틀배틀”, “꼬불꼬불”, “아롱아롱”이 잘 배치된 매우 역동적인 생명감이 넘친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활기 넘치고 생동감 있는 어린 시절을 모두 잃어버리고 터벅터벅, 느릿느릿, 비틀비틀 거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제2부 마지막에 실린 비교적 긴 산문시 <어린 벗에게>가 실려 있다. 이 시는 “사막”으로 상징되는 족에 대한 탄압과 억압 속에서 “어린 벗”인 “나무”는 추위와 가뭄의 반복으로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확실한 반전이 일어난다.
그러나 벗이여, 이 나무는 죽은 것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 그 나무에는 가지마다 부러진 가지에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꽃이 송이송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이 꽃밭은 별 하나 없는 어두운 사막을 밝히고 그 향기는 멀리멀리 땅 위로 퍼져갑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피천득은 당시 동양의 파리였던 모던 도시, 상하이의 후장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도 성분이 나쁜 흥사단원으로 찍혀 변변히 취직도 못 하고 거의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때는 금강산에 1년간 머물면서 불경을 공부하고 불자(佛子)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 반항”으로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거의 10년간을 절필하고 지냈다. 그러나 이 시는 절망 속의 “어린 벗”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는 어린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하는 어린이 송가이다. 이 산문시는 피천득이 번역 발표한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의 ⟪기탄잘리⟫ 60번 시가 반향되고 있다. 타고르시에는 생명의 원형으로서 “바닷가”에서 생명의 토대로서 “아이들”이 장난치며 놀고 있다. 타고르의 시의 낙관적이고 밝은 분위기는 피천득의 시에서는 비관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이나 결론은 매우 유사하다. 이들의 공통적 주제는 “어린이 예찬”이다.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는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피천득은 제일고보 4학년 재학 중인 1927년에 이광수 권유로 일본이 아닌 당시 동양의 파리로 불리던 국제도시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다. 상하이로 가게 된 주된 이유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도산을 만난 뒤 흥사단에 가입하고 일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도산이 피천득에게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도산의 어린이 사랑이었다. 1961년 ⟪사상계⟫(11월호)에서 장리욱, 김병로, 지명관 등이 참여한 도산 탄생 82회 기념 좌담회인 <도산을 말한다>에서 피천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산은] 퍽 어린애들을 사랑하셨지요. 우아한 분이었습니다. 일경에게 체포당할 때 어떤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사준다는 약속을 지키러 나가셨다가 잡혔지요. … 그렇게 어린아이와 약속도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
사실 도산 안창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있던 임시정부에서 일제의 경찰에게 체포된 것은 동지인 이우필의 어린 아들에게 생일날 선물을 사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그 당시 주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일경의 체포 위험이 크니 그 아이를 만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유했으나 도산은 “어린이에게 한 약속도 못 지키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는가” 반문하며 선물을 들고 아이를 만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 그 뒤 경성(서울)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재판을 받으며 고초를 겪다 1938년 3월 10일에 경성대 병원에 보석입원 중 돌아가셨다. 피천득은 “어린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도산의 어린이 존중과 사랑에 커다란 감화를 받고 일생 잊지 못하고 도산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피천득은 1930년대 초 ⟪동아일보⟫에 연속해서 발표 게재한 동물시편에도 어린이를 염두에 두었다. 이 중에서 동시 <양>(羊)의 전문을 보자.
양아 양아
내 마음은 네 몸같이 희구나
양아 양아
네 마음은 네 털같이 보드랍구나
양아 양아
네 마음은 네 음성같이 정다웁구나
(1932)
이 시는 어떤 사전 시적 지식 없이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다. 피천득은 양의 속성을 흰 몸, 부드러운 털, 정다운 음성으로 나누면서 이 시에서 양의 마음의 특성을 “희고나”, “보드랍구나”, “정다웁고나”로 묘사한다. 이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이미지와 연결하면 해석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이 시에 분명한 기독교적 이미지를 담는 것이 시인의 목적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필자에게는 영국 낭만파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양>의 반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양의 몸이 “희다”라는 말은 양으로 비유되는 예수의 죄 없는 순수함, 순결함을 가리키고, 양의 털이 “보드랍다”라는 말은 예수가 유순하고 온유함을 가리키며, 양의 음성이 “정답다”라는 말은 예수가 사랑으로 가득한 분임을 밝힌다. 편집자의 이런 읽기가 “오독”으로 불릴 수 있지만, “창조적 오독”이라면 독자들도 마다치 않으리라. 피천득은 후에 블레이크 시 <양>을 우리말로 아름답고 부드럽게 번역했다.
아마도 동물 동시들도 어른 독자뿐 아니라 어린이 독자들을 겨냥할 것일 것이다. 동시 <까치>, <타조>, <낙타>, <부엉이>, <학>, <독수리>, <베리깐> (펠리칸), <사자>, <공작>, <백로와 오리>를 ⟪동아일보⟫에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피천득이 동물 동시를 통해 동물의 세계를 동심의 차원에서 재해석하여 인간성을 되돌아보고자 하였다. 피천득은 동물 되기를 어린이 되기와 동일시 한 것일까? 피천득의 단편소설 번역 모음집인 ⟪어린 벗에게⟫에도 모두 어린이가 주인공인 소설들이다. 이 번역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동아일보⟫와 ⟪소학생⟫등 어린이 잡지에 소개되었다. 이 중 <마지막 수업>, <큰 바위 얼굴> 등이 초중고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번역된 단편들은 마크 트웨인의 <하얗게 칠해진 담장>, 윌리엄 사로얀의 <아름다운 흰 말의 여름>, 나다나엘 호손의 <석류씨>, <큰 바위 얼굴>, 작자 미상의 <거리를 맘대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다. 이 번역 소설들은 대부분의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를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피천득이 문학 활동 중에 동시, 동요는 물론 하고 동화도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59년 7월 경문사에서 출간된 최초 ⟪금아 시문선⟫(표지장정 운보 김기창, 표지 제자 원곡 김기승)에 처음으로 시부와 산문부를 나누어 수필 등을 포함했다. 여기에 피천득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꿀 항아리」와 「자전거」 두 편을 실었다. 이렇게 피천득은 자신이 직접 동화를 창작하였을 뿐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외국 동화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피천득은 1953년 ⟪동아일보⟫에 소설가 주요섭이 번역한 안데르센의 동화집인 ⟪미운 오리 새끼⟫에 대한 서평(1월 26일)을 실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동화라는 문학 장르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인류의 문예 사조가 어떻게 흐르든지 ⟪안데르센⟫ 동화는 생명이 길 것입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언제나 이상주의자인 까닭입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안데르센⟫동화를 좋아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초현실적 상상 세계에는 엄연한 현실이 얽혀있는 까닭입니다. … 이런 현실적인 취지를 가지고 찬란한 상상의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동화 속에는 심각한 인간 생활면이 숨어 있습니다.
피천득은 동화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의 제약된 현실을 뛰어넘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꿈꿀 수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는 현실 세계가 투영되고 개재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동화를 통해 상상력을 훈련하고 작동시켜 현실을 바꾸고 더 좋은 세상을 계획할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수필 <인연>에서 피천득은 1927년경에 일본 도쿄에서 처음 만난 초등학교 1학년생 아사꼬에게 안데르센 동화책을 선물로 주었다. 이보다 먼저 ⟪나의 아버지 춘원⟫(1955)을 쓴 춘원 이광수 막내딸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정화 박사(1935~) 어린 시절 회고를 들어보자.
어느 날 밤에 잠자려고 이불 속에 누워 있는데 아버님(춘원 이광수)이 내 곁에 앉으면서 영문책 ⟪그림 형제 동화 안데르센⟫을 읽어주셨다.… 아버님이 이야기를 해 주시더니 갑자기 바깥손님이 오셔서 사랑방으로 나가셨고 가족처럼 지내던 피천득 선생님이 내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이야기를 이어서 읽어주셨다. 천득 오빠도 영어를 하고 하며 나는 감탄했다.… 부드러운 어조로 통역[번역]해 주었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167-68쪽)
피천득은 1938년 상하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수시로 이광수 댁을 드나들었다. 피천득의 동화사랑은 동화가 어린이들의 상상력 계발과 인성 교육에 최고 문학 장르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동화뿐 아니라 문학의 모든 이야기(서사)는 우리를 현실의 질곡에서 해방하고 가르치고 즐겁게 하고 새로운 세계로 도약시켜 주면서 우리들의 감성을 순화해주고 영혼을 맑게 한다.
후기: 시집, 수필집, 번역시집에 나타나는 어린이 되기
피천득은 그 뒤 시와 수필이 분리되어 간행된 시집 ⟪생명⟫과 수필집 ⟪인연⟫과 번역시집 ⟪내가 사랑하는 시⟫에서 창작과 번역을 통해 지속해서 “어린이 되기”를 주제로 한 동심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그의 시집 ⟪생명⟫에서 어린이를 주체로 몇 편 읽어보자. 다음은 시 <그림>의 전문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면
하늘을 넓고 넓게 푸르게 그립니다.
집과 자동차를 작게 그리고
하늘을 넓고 넓고 푸르게 그립니다.
아빠의 눈이 시원하라고
하늘을 넓고 넓고 푸르게 그립니다.
(1959)
이 시의 시적 화자인 “나”는 어린이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하늘을 그린다. 내가 보기에 어른들의 세계인 답답한 현실에서 떠나 바깥의 높은 하늘을 쳐다본다. 피천득은 다른 시 <생명>에서 “억압의 울분을 풀 길이 없거든 / 드높은 창공을 바라보라던 그대여”에서 “그대도”는 아마 어린아이일 것이다. 더욱이 나는 아빠(어른)의 “눈이 시원하라고” “하늘을 넓고 넓고 푸르게”그린다. 더 나아가 어린이의 상상력은 어른들이 현실에 매여 미처 그리지 못하는 다른 세상(하늘)을 넓고 푸르게 보여줌으로써 인위적인 문명에서 하늘이라는 자연의 광활함으로 나아간다!
피천득의 시 <교훈>은 어린 자식들에 대한 훈육 즉 사회화 교육 다시 말해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여러 가지 이념을 강제하는 교육을 유보하기로 한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는 세상이기에
참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하였다
이유 없는 투정을 누구에게 부려 보겠느냐
성미가 좀 나빠도 내버려 두기로 한다
(1959)
여기에서 시인은 아이에게 사회적 자아를 형성해 주려는 강요하는 마음을 유보하고 자아(주체성)를 위해 몸부림치는 (“이유 없는 투정”) 아이를 자기 뜻대로 일단 내버려 두기로 한다. 세상 법도에 순종하는 ‘버릇’을 가르치는 일이 연기된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아이에게는 잠시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여기에 시인의 어린이 성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깊이 배어있다. 그래서 시 <무악재>에서처럼 “어린 학생”, “어린아이”, “어린 것들”들의 “과거는 없고 희망만 있”다고 노래하는 것은 어린이 성이 우리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뜻이다.
<1930년 상해(上海)>라는 시에서 어린아이의 속성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그 시 2연이다.
알라 뚱시(東西) 치롱 속에
넝마같이 팔려 버릴
어린아이가 둘
한 아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
(1947)
피천득이 상하이에 유학하던 시절인 1930년대 중국은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의 식민주의 침략 아래 국운이 풍전등화 상태였다. 1932년 상하이 사변과 1937년 난징대학살 등 중국과 일본이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상태였고 경제적으로 수많은 중국 인민들이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어린이 인신매매도 성했다. 이 시에 알라 뚱시는 넝마 장수를 뜻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팔았다. 곧 누군가에게 팔려갈 한 아이가 이러한 비인도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웃는다.” 어린아이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다. “어린아이같이 웃기를 잘”했던 시인은 이 시에 해외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과 착취 그리고 중국 정부의 무능과 빈부격차라는 대재앙의 비극적 상황에서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 1930년대 중국의 척박한 시대의 궁핍을 이 짧은 시 속에 극화하고 있다.
<이 봄>이라는 시에서 시인 피천득은 칠순에도 고목이 꽃을 피우듯이 이 봄을 “연못에 배 띄우는 아이같이” 살리라고 다짐한다. 시인은 또한 다른 시 <어린 시절>에서 어린 시절이 자기 삶의 뿌리이며 시작임을 천명한다. 시 전문을 보자.
구름을 안으러 하늘 높이 날던 시절
날개를 적시러 푸른 물결 때리던 시절
고운 동무 찾아서 이 산 저 산 넘나던 시절
눈 나리는 싸릿가지에 밤새워 노래 부르던 시절
안타까운 어린 시절을 아무와도 바꾸지 아니하리
(1959)
어린 시절은 피곤한 몸의 은신처이며 어지러운 마음의 피난처이며 딱한 영혼의 치료소이다. 시인에게 어린 시절은 회상의 저수지이며 기억의 보물창고이다. 피천득은 수필 <찬란한 시절>에서 어린 시절이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름도 잊고 얼굴도 기억에 없지마는 나와 제일 정답게 놀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양말이 조금 뚫어졌던 것이 이상하게도 생각난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사는지, 아마 대학에 다니는 따님이 있고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사는 그는 영원한 다섯 살 난 소녀이다.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하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의 작은 아름다운 인연과 기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인생은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다. 어린 시절은 시인에게 이미 언제나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믿음직한 버팀목이다. 그래서 시인은 수필 <장수>에서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피천득은 말뿐이 아니라 수필 <송년>에서 고령이 되어도 “호호옹”(好好翁, Jolly old man)이 되어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지내기를 원했다.
이웃에 사는 명호를 데려다가 구슬치기를 하겠다. 한 젊은 여인의 애인이 되는 것만은 못하더라고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하는 데 힘이 들지 않아 좋다.
피천득은 수필 <서영이>에서 딸 서영이가 결혼하여 손주들이 태어난다면 할 일에 대해 다짐한다.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 살겠다. 아이들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나는 <파랑새> 이야기도 하여주고 저의 엄마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의 엄마처럼 나하고 구슬치기를 하고 장기도 둘 것이요, 새로 나오는 잎새 같은 보드라운 뺨을 만져보고 그 맑은 눈 속에서 나의 여생의 축복을 받겠다.
자기 직계 손주들이니 본능적으로 혈육의 정이 대단한 것은 당연지사이겠지만, 할머니도 아닌 할아버지가 어린아이에 대한 이러한 결심과 바람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피천득 수필 <찬란한 시절>, <외삼촌 할아버지>, <서영이에게>, <서영이와 난영이> 중에서 <서영이와 난영이>를 읽어보자. 그는 1950년대 중반 1년간의 하버드 대학 교환교수 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뉴욕에 들러 당시 초등학생인 딸 서영이를 위해 돌쟁이 크기의 인형을 사 와서 그 이름은 ‘난영’이라고 지었다. 오랜 뒤에 딸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게 되어 인형 난영이는 홀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젊은 엄마들이 부러웠던” 피천득은 “언제나 웃는 낯을 가진” 난영이의 엄마가 되어 타개할 때까지 매일 재우고 젖병을 물리고 목욕도 자주 시키면서 아기엄마 노릇을 하였다. 그는 “난영이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른스러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아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날마다 낯을 씻겨주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목욕시키고 머리에 빗질도 하여줍니다. 여름이면 엷은 옷, 겨울이면 털옷을 갈아입혀 줍니다. 데리고 놀지 아니하지만, 음악을 들려줍니다. 여름이면 일찍 재웁니다. 어쩌다 내가 늦게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난영이를 재우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난영이는 앉은 채 뜬 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참 미안합니다. 내 곁에서 자는 것을 가끔 들여다봅니다.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난영이 얼굴에는 아무 불안이 없습니다. 자는 것을 바라보면 내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피천득의 “난영”이라는 아기인형 돌보기는 최고 사랑의 실천행위이다. 무생물인 아기인형을 친자식처럼 이렇게 돌보는 것은 영원히 늙지 않은 어린 아기 인형 “난영”이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도 아기 인형의 돌봄을 통해 나이를 잊고 사는 사람으로 바뀐다. 우리가 육체의 노쇠를 막을 길은 없겠으나 시인처럼 몸과 마음의 정성을 다하여 어린이들과 늘 함께할 수만 있다면 죽기 직전까지 마음과 영혼만은 어린아이처럼 늘 푸르고 싱싱하게 살면서 순수성과 단순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육체의 노쇠도 어느 정도 연기될지도 모르겠다. “아가의 머리칼을 만지기를 좋아”했던 피천득은 언제나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게 웃기를 좋아했다.
이제부터는 번역시집 ⟪내가 사랑하는 시⟫에서 피천득이 그려낸 어린이 모습을 살펴보자.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시집 ⟪천진의 노래⟫에서 피천득은 <서시(序詩)>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1, 3, 5연만 소개한다.
산골짜기 아래로 피리를 불며
기쁜 노래의 피를 불며
구름 위의 아이를 나는 보았습니다.
아이는 깔깔대며 말했습니다.
…
“피리 놓고 기쁜 피리 놓고
기쁜 노래로 불어요“
그래서 나는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기뻐했습니다
…
나는 거친 펜을 만드렁 맑은 물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기쁜 노래를 적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기쁘게 듣도록.
이 ⟪천진의 노래⟫서시에서 우리는 어린이가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갈 때 진정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선악 기준을 넘어 웃고, 울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블레이크의 시집 ⟪천진의 노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린이가 온유하고 겸손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닮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번역자인 피천득이 독자인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어린이처럼 웃으며 장난치고 뛰어놀고 인간의 타락 이전의 원초적 본능을 아무런 구속 없이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삶과 문학에서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어린이 세계에서는 이미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피천득 문학의 특징 중 하나는 1930년 등단 이후로 어린이 주제가 많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 문단은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린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아동들을 위한 문학이 하나의 주류를 이루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을 필두로 당시 저명한 시인, 작가들은 대부분 아동을 위한 작품들을 써냈다. 해방 전후로 피천득은 외국 단편소설들을 번역하여 아동문학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동화 <꿀 항아리>이다. 첫 문단을 읽어보자.
정남이와 정옥이는, 날마다 어머니 몰래 가만가만 다락으로 기어 올라가서, 사기 항아리 속에 든 꿀을 퍼서 먹고는 고양이들 모양으로 혓바닥으로 입을 핥으면서 내려오고는 하였습니다.
이를 안 남매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다락에 있는 줄도 모르고 못 들어가게 다락문을 자물쇠로 잠가 버린다. 어머니는 온 집안과 동네를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기 찾아 나선다.
아이들을 찾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 엄마는 다락문을 발로 차며 “엄마, 문 열어주어!”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아이고머니나!”
하고, 엄마는 신발을 신은 채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다락문을 열어보니까, 정남이와 정옥이는 어떻게 울었는지 눈이 다 부었겠지요. 엄마는 가엾서서 야단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다락 안에서 정남이와 정옥이는 꿀 한 항아리를 다 먹었더랍니다.
이 동화 마지막 부분이다. 짧은 이야기지만 아이들의 장난과 어머니 마음이 잘 어우러져 웃음을 자아내는 우수한 작품이다. 피천득은 이미 1934년에 그의 첫 동화 <자전거>를 어린이 잡지에 낸 바 있다.
윌리엄 서로이언(1908-1981) 단편소설 ⟪아름다운 흰말의 여름⟫(The Summer of Beauliful White Horse)은 1940년 간행된 단편소설 집 《내 이름은 아람》에 수록되어 있다. 피천득은 이 소설을 번역하여 석동(石童) 윤석중이 주관하는 아동 잡지 《소학생》 68호(1949년 6월)에 게재했다. 소설가 서로이언의 조국 아르메니아는 동부 유럽과 아시아 서부 캅카스 지역에 있는 내륙국가로 주위에 터키, 조지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의 나라가 있다. 18세기까지 주변 국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20년 세브르 조약으로 독립하였다가 1936년 구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고 1991년 소련 해체와 더불어 다시 공화국체제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총인구는 300만 명 정도이고 고유어인 아르메니아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교는 기독교계인 아르메니아 정교다. 윌리엄 서로이언은 아르메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소수민족 이민자 작가다.
정규교육보다 독서와 독학으로 성장한 윌리엄 서로이언은 미국 주류 사회에서 주변부 타자임이 분명하며 그의 소설은 이런 비주류 주변부와 소수민족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이 단편소설에서는 독립되기 전 아르메니아의 전통적 삶의 단편적 모습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이 이야기 주인공 나 아람은 아홉 살로, 어느 날 먼동이 틀 무렵인 새벽에 사촌 모래드가 찾아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래드는 아름다운 하얀 말을 타고 있었다. 모래드가 세상을 즐겁게 사는 줄은 알았으나 말을 타보는 게 소원이었던 ‘나'는 너무 가난해서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정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첫째 거만하고, 그다음에는 정직하고, 그다음에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렸습니다. 도둑질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은 우리 친척 중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람의 민족적 특징을 잘 말해주는 구절이다.
나는 가난한 모래드가 말을 타고 온 것을 보면 훔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말을 얻어 타보고 싶어 계속 따지지 않았고, 더욱이 말을 훔치는 것은 돈을 훔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말을 훔쳐 팔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와 모래드는 아름다운 하얀 말을 타고 포도원, 과수원, 봇도랑, 시골길을 달렸다. 함께 말을 타며 노래도 불렀고 나중에는 혼자 말을 타고 신나게 달렸다. 포도원 포도 덩굴을 뛰어넘다 나는 말에서 떨어져 말이 도망갔으나 모래드가 그 말을 다시 찾아 데리고 왔다. 모래드와 나는 결국 말을 어느 외딴 포도원 외양간으로 데려다 숨겨 놓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날 오후 성격이 활발하고 대범한 코스로브 아저씨가 우리 집 사랑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얼마 후 말 주인인 농부 비로 씨가 놀러 왔다. 그는 지난번 도둑맞은 흰말을 아직 못 찾았다고 투덜거렸다. 코스로브 아저씨는 화가 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건 해롭지 않아. 그까짓 말 한 마리 잃어버린 것이 뭐야. 우리는 모두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말 한 마리 때문에 무얼 그러나?" 코스로브 아저씨는 매사에 항상 "그까짓 것 걱정 말아"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말 주인 비로 씨가 간 후 모래드의 집으로 달려갔다. 모래드는 다친 새를 날려 보내려고 치료하고 있었다. 빨리 말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내가 말하자 모래드는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섯 달은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2주일간 말을 더 탔고 그 후 어느 날 포도원 가는 길에 바로 말 주인 존 비로 씨와 마주쳤다. 비로 씨는 이 말이 자기가 잃어버린 말과 너무 똑같다고 말하면서도 아르메니안 일가의 정직을 믿었기에 의심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그 이튿날 우리는 말을 비로 씨 농장 외양간 속에 데려다 놓았다. 그날 오후 비로 씨는 그 말을 맨 마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서 말을 다시 찾았다고 말하며 말이 더 튼튼해지고 성질도 더 좋아졌다며 하나님 덕택이라고 좋아했다. 마침 사랑방에 있던 코스로브 아저씨는 떠들지 말게, 떠들지 말아. 자네 말이 돌아왔다지. 그거 걱정하지 말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주변국에 나라까지 잃었으나 정직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일상적 삶의 가치를 볼 수 있다. 미국에 이민 와서 1929년 시작된 경제 대공황을 겪은 작가 서로이언은 대공황 이후 천민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타락과 혼란 속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서로이언은 어린 시절 고국 아르메니아에서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잘 짜인 재미있는 이야기로 남겼다. 결국, 작가들이란 과거의 오래된 추억들을 현재 이야기로 만들어 미래를 위해 보존하고 재현하는 기록자들이 아닌가. 피천득은 이 작은 이야기를 번역 소개함으로써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대 생활 속에서 먼 나라 아르메니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삶 속에서도 사랑과 유머를 잃지 않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동적 이야기를 한국 어린이들에게 소개하고자 했을 것이다.
작가 서로이언은 고단한 미국 이민 생활 중에 조국 아르메니아에서의 아름다운 어린 시절 추억으로 얼마나 커다란 위안과 힘을 얻었겠는가?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은 어른이 되어 어렵고 힘들 때 삶의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가면서 언제라도 마실 수 있을 힘의 샘물(원천)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이야기들(Tales from Shakespeare, 1807)》은 19세기 초 영국 낭만주의 시대에 수필가 찰스 램(1775~1834)과 그의 누나 메리 램(1764~1847)이 공동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셰익스피어 희곡 38편 작품 중 20편을 이야기체로 요약 각색하고 개작한 산문 작품집이다. 피천득은 이 새로운 작품의 가치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이 있었다.
피천득이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을 처음 읽은 것은 언제인지 분명치 않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 예과 교수로 전격 임명된 피천득은 찰스 램과 메리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고(故) 석경징 교수와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과에 선생으로 갔는데 뭘 가르쳐야 할지 정해지지도 않았어. 도서관에 들어가 보니까 램(Charles Lamb)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이 있더라고. 거기서 일본 강점기에 일본 교과서도 찍고, 돈도 찍고 그랬어요. (…) 그 사람보고 이걸 어떻게 찍어줄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아 찍어 드리지요 그래. 그래서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어. 그런데 예과에서 그걸 쓴다니까 서울의 학교에서 죄다 그걸 쓰더군. (…) 그런데 그걸 가르친 게 나로서는 이로운 점도 종종 있었어.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석경징과 대담> (1997)>
아마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대학생들의 영어 실력도 높지 않을 테니 피천득은 비교적 쉬운 영어로 쓰인 램 남매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들》 원서를 영어 교재로 사용한 게 틀림없다. 반복해서 몇 번이나 가르치다 보니 아마도 번역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당시에 한국에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셰익스피어에 관한 관심도 한몫했으리라.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번역본은 1957년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한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이다.
피천득은 셰익스피어 전공학자는 아니었으나 시인, 수필가로서 찰스 램과 메리 램 남매가 쉽고 재미있게 짧은 이야기로 축약 개작한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한국 독자들에게 16~17세기 근대 초기 영어로 쓰여 읽기 어려운 셰익스피어의 방대한 작품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에서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은 일반 독자에게 세계 문학 최고 보물 중 하나인 셰익스피어 문학 소개와 전파에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 21세기에도 셰익스피어는 단순한 문학의 영역을 넘어 ‘셰익스피어 산업’이라는 문화예술 사업을 계속해 나간다.
높은 시적 상상력과 탁월한 언어적 능력을 갖춘 번역가 피천득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들》 번역본이 셰익스피어 영어 원문 희곡 작품을 읽기가 부담스러운 우리나라 어린 독자뿐만 아니라 나이든 독자들에게 즐거운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나아가 어린이들이 이 축약 개작된 이야기를 읽은 후 성인이 되어 반드시 영어 원문은 아니더라도 축약되지 않은 원문 전체를 잘 된 번역본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축약본만 읽고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읽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할 일도 많고 읽을 책도 많지만, 인류 역사상 인간성을 가장 깊이 있게 재현하고 넓고 치열하게 탐색했다고 평가받는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작품들을 우리는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피천득의 아동문학계 활동
피천득은 어떤 의미에서 앞서 말한 1926년 9월 발표를 시작한 알퐁스 도데 ⟪마지막 시간⟫번역으로 아동문학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고 볼 수 있다. 1931년 7월에 첫 동시 <다친 구두>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1934년 2월 ⟪신 가정⟫에 동화 <자전거>를 발표했다. 이 동화는 1938년 12월에 ⟪조선 아동문학 전집⟫에 실렸다. 1947년부터 1950년 6월까지 피천득은 아동문학협회(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1일 을유문화사 도움으로 설립)가 주최한 ”아협글짓기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글짓기 대회는 해방과 더불어 되찾은 우리 글을 엮은 어린이 글(동요와 작문) 공모전이다. 이 당시 심사위원은 이희승, 장지영, 최현배, 이병기, 피천득, 이원수, 박목월, 조풍연, 윤석중이었다. 피천득은 1953년 1월 23일 ⟪동아일보⟫에 주요섭 소설가가 번역한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 대한 서평을 발표했다. 1954년 11월 21일에 ”어린이 백일장“이 열렸다. (백일장은 앉은 자리에서 글짓기이다.) 피천득은 이 당시 모윤숙과 함께 참석했는데, 어떤 심사위원이 두 사람이 ‘모피’(毛皮) 회사를 차리면 잘 되겠다는 농담을 한 일화가 전해진다.
1956년 1월 3일 윤석중 주도로 아동문화를 향상, 발전시키기 위해 ”새싹회“가 창립되었다. 이 당시 발기인으로는 윤석중, 조풍연, 피천득, 어효선, 홍웅선, 윤형모, 한인형, 만응령이 있었다. 한국 아동문학의 시초 소파 방정환 선생을 기리는 소파상과 장한 어머니상, 새싹문학상도 이때 제정했다. 새싹문학상은 1973년부터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선정하여 시상하였다. 피천득은 1978년 제7회 새싹문학상(번역부문)을 받았다. 당시 작가상은 김동리가 수상했다. 계간 ⟪새싹문학⟫은 1977년에 창간했다.
지금까지 밝힌 금아 피천득의 아동문학계 활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한국 아동문학계 거두인 석동 윤석중이다. 피천득은 1910년 종로구 청진동에서, 윤석중은 1911년 중구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이 두 사람은 이른바 서울 토박이로 일생 친구로서 아주 가깝게 지냈다. 피천득은 당시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경기고)에 다녔고 윤석중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피천득이 상하이 유학에서 돌아온 뒤부터 두 사람은 아동문학을 매개로 일생 아주 가깝게 지냈다.
윤석중 주관 아동문화협회가 1945년 후반에 창간 후 ⟪주간 소학생⟫에 피천득을 여러 회에 걸쳐 영미 아동소설들을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피천득은 1962년에 초기 윤석중 글의 하나인 <마르지 않은 동요의 샘>이라는 글을 썼다. 길지만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동요하면 윤석중 선생을 연상하게 되고, 윤석중 하면 동요를 생각하게 된다. 그가 좋은 동요를 많이 썼기 때문이요, 그의 한평생은 동요를 위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동요는 벌써 우리 아동문학의 고전(古典)일 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 동요 시인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다. 우선 그 엄청난 양에 있어 놀랄만하다. 아이들의 보고, 듣고, 놀고, 자는 모든 현상이 그에게 부딪히면 다 노래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의 노래는 내용이 다채롭고, 표현 방식도 변화무쌍하다.
바람이 아기처럼
잔디밭으로 기어간다.
바람이 아기처럼
꽃나무를 흔든다.
바람이 아기처럼
모자를 벗겨 간다.
바람이 아기처럼
할아버지 수염을 만져 본다.
이 마지막 두 줄을 다른 어느 동요 작가가 쓸 수 있을까?
그의 동요와 동시에는 분간이 있을 수 없다. 그의 동요는 언제나 시적이요, 그의 동시는 음악적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작곡가들은 그의 작품을 다룰 때 누구 것보다도 무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은 스티븐슨(R. L. Stevenson)의 신경 과민한 아이들이 아니요, 데라메어(Walter De Ka Mare)의 환상 속에서 사는 꿈 꾸는 아이들도 아니요, 타고르(Tagore)의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아이들도 아니다.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뛰고, 웃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주 정상적인 아이들이다. 그의 동요들도 병적이거나 청승맞을 때는 한 번도 없고, 그 아이들같이 늘 건강하다. 작자 자신이 건전하고 유복하기 때문인가 한다.
그는 한평생 동요를 생활화하여 왔다. 그가 동요를 쓰는 것은 오락이요 직업이요 습관이요, 그의 생활이다. 그가 동요를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구두 직공이 구두를 짓듯이, 그보다 훨씬 빨리 수월하게 동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타고난 동요장이요 숙련공이다. 그러기에 그 수많은 여름의 노래, 그 수많은 자장가가 하나하나 아름답게 지어지는 것이다. 어떤 한 작가에게 한둘의 아름다운 자장가를 본 일은 있다. 그러나 한 작가에게서 이렇게 새록새록 자장가가 나오는 것을 본 일은 없다. 그의 동요의 근원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할까? 언제나 넘쳐흐르는 호수인가보다.
나가며: 아동문학가 피천득을 위하여
피천득은 어린이를 위해 1920-40년대 사이에 ⟪동아일보⟫와⟪소학생⟫등 잡지에 번역 소개했던 외국 단편소설 번역본을 묶어 2003년에 ⟪어린 벗에게⟫(2003) 란 단행본을 냈다. 피천득은 역자 말인 <책을 내면서>에서 자기 아호인 금아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 우리 어머니의 정서, 거기에 내가 닮고 싶은 아이 마음마저 아주 잘 어우러진 이름이기에 나는 이 이름[금아]을 많이 사랑하고 또 자랑스러워합니다.”라고 자기 아호 금아를 무척 좋아했다. 피천득은 계속해서 금아라는 호에 든 “어린이”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어린이와 똑같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진실입니다.
한 해 한 해 나이 먹으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다 보면 바로 순수한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면 된다는 해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순수함을 닮고 싶다는 소망하고 아이처럼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 인용문에는 피천득의 삶과 문학 속에서 어린이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타계하기 2년 전인 2005년에 그는 자기 번역시집인⟪내가 사랑한 시⟫에 <시와 함께한 나의 문학인생>이란 제목을 단 머리말을 새로 붙였다. 이 글은 자신이 이전에 언명한 “문학의 본질은 정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구체적인 각론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이 문학(시와 수필, 그리고 번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순수한 동심”, “맑고 고매한 서정성”, “위대한 정신세계” 3가지를 들었다. 나아가 진정한 시인에 대해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의 편, 권력을 가진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시인은 가난하고 그늘진 자의 편에 서야 하고 그런 삶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시는 “영혼의 가장 좋은 양식이고 교육”이며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마음이 맑아지고 영혼이 정갈해진다.”라고 덧붙였다. 피천득은 마치 자신의 삶과 문학을 총결산하는 듯이 (시인들은) “아이들의 영혼으로 삶과 사물을 바라본 이들”이고 자신은 “시를 통해서 … 독자들이 순수한 동심만이 세상에 희망의 빛을 선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피천득이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동심”이며 그것만이 혼탁하고 척박한 세상에 희망을 비출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피천득의 최후진술들을 판단기준으로 삼아 그의 모든 문학 활동의 산물인 시(동시, 시조), 산문(수필, 동화, 평론), 번역(시, 단편소설, 한국작품 영역)을 반추하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동문학가 석동 윤석중과 아동문학계 활동을 포함하며 그의 삶과 문학을 다시 온전히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금아 피천득을 아동문학가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정정호(1947~ )
서울 출생
중앙대 명예교수
미국 위스콘신대(밀워키) 영문학박사
저서; 《피천득 평전》 시집: 《마음 비석에 새긴 노래》
산문집: 《바람 개비는 즐겁다》 외.
현재, 국제펜 한국본부 번역원장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 주) 행간을 뗀 것은 인터넷상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함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