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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무제」 이달
[ 無題 李達 ]
處處多逢馬跡(처처다봉마적) 곳곳에서 말 발자국 많이 만나는데
行行且避車塵(행행차피차진) 가며 가며 또 마차 먼지 피하네
長安陌上花柳(장안맥상화류) 장안의 거리 위 꽃과 버들 속엔
半是高官貴人(반시고관귀인) 반이 고관과 귀인들이네
〈감상〉
이 시는 6언시로, 어느 봄날 서울 거리에서 겪은 일상적인 경험을 노래함을 통해서 은근한 풍자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곳곳에서 말을 탄 고관과 귀인들을 많이 만나는데, 가다가 고관과 귀인이 탄 마차를 피하고 가다가 또 피한다. 그렇게 절반의 고관과 귀인들을 피했다. 그런데 서울의 거리엔 봄이 와서 꽃과 버들이 한창 늘어졌는데, 꽃과 버들 속에 놀고 있는 사람은 또 나머지 절반인 고관과 귀인들이다. 결국 서울의 거리엔 온통 고관과 귀인들뿐이다.
이달(李達)은 허봉(許篈)과 아주 친했는데,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 이에 관한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손곡 이달이 젊은 시절에 하곡 허봉과 친했는데, 손곡이 하루는 하곡의 집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허균도 하곡을 찾아왔는데, 손곡을 깔보고서 예우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은 채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하곡이 ‘시인이 자리에 계시는데 아우는 일찍이 소문도 듣지 못했는가? 내 아우를 위해 시 한 수를 부탁드리겠소.’라 하고, 곧 그가 운자를 부르자, 이달은 운이 떨어지자마자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낙구는 ‘담 모퉁이 작은 매화 피고 지기 다 끝나자, 봄의 정신은 살구꽃 가지로 옮겨 갔구나.’였다.
이것을 보고 허균은 깜짝 놀라 얼굴빛을 바꾸며 사죄하고 마침내 맺어 시벗이 되었다(蓀谷李達少(손곡이달소) 與荷谷相善(여하곡상선) 一日往訪焉(일일왕방언) 許筠適又來到(허균적우래도) 睥睨蓀谷(비예손곡) 略無禮容(약무례용) 談詩自若(담시자약) 荷谷曰(하곡왈) 詩人在坐(시인재좌) 卯君曾不問知耶(묘군증불문지야) 請爲君試之(청위군시지) 則呼韻(칙호운) 達應口而賦一絶(달응구이부일절) 其落句云(기락구운) 墻角小梅開落盡(장각소매개락진) 春心移上杏花枝(춘심이상행화지) 筠改容驚謝(균개용경사) 遂結爲詩伴(수결위시반)).”
〈주석〉
〖跡〗 자취 적, 〖陌〗 거리 맥
각주
1 이달(李達, 1539 ~ 1612): 본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당시(唐詩)에 뛰어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문장과 시에 능하였고, 서자 출신이어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제자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일찍부터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인(賤人) 신분(身分)이었기에 서얼(庶孼)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능력 또한 쉽사리 세상에서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김만중(金萬重)이 “손곡(蓀谷)의 작품 「별리예장(別李禮長)」은 조선을 통틀어서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최고작”이라고 논평할 만큼 시재(詩才)와 문장력이 뛰어났기에 선조 때 사역원(司譯院)의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기도 했으나,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 사직하고는 향리에 은거했다. 손곡(蓀谷)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뜻을 모아 시사(詩社)를 조직한 후, 고죽(孤竹)과 옥봉(玉峯)의 스승인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만나 당대(唐代)의 여러 시집(詩集)들을 접하게 되면서 시(詩)의 정법(正法)이 당시(唐詩)에 있음을 깨닫고 당시인(唐詩人)의 시체(詩體)를 탐구하는 한편,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를 지어 내기 시작해 5년 동안 오로지 시법의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 당시(唐詩)에서 아무도 손곡(蓀谷)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면서 고죽(孤竹)과 옥봉(玉峯)을 제치고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일인자로 꼽히게 되었다. 한편, 손곡(蓀谷)의 명성과 고결한 인품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당시의 명문 귀족이었던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자식들인 허초희(許楚姬)와 허균(許筠)을 보내 제자로 삼아 줄 것을 부탁하자, 손곡(蓀谷)은 그들 남매에게 평민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상을 전수시켰는데, 훗날 허균이 서자(庶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것이라든지, 적서(嫡庶) 타파(打破)를 주장한 것이라든지, 양반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자세와 함께 풍자적이면서도 서민 생활을 옹호했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 정신은 손곡(蓀谷)의 정신적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곡(蓀谷)은 허균(許筠)이 반역죄로 참형당했던 그해에 역시 5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도망」 김정희
[ 悼亡 金正喜 ]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어쩌면 월하노인을 데리고 저승에 하소연하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부부가 처지를 바꾸어서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나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그대로 하여금 나의 이 슬픔을 알게 할까?
〈감상〉
이 시는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시로, 절구(絶句)라는 짧은 형식 속에 애도(哀悼)의 마음이 함축(含蓄)되어 있는 만시(輓詩)이다.
김정희는 1840년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그의 나이 57세인 1842년 11월 13일에 예산(禮山)에서 부인이 죽었다. 그 사실도 모르고 부인과 금슬이 좋았던 김정희는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현존하는 언간(諺簡) 33통 가운데 31통이 부인에게 쓴 것이며, 13통은 제주도에서 쓴 것임) 제주도 음식이 맞지 않음을 투정하여 젓갈 등을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한 달 뒤인 12월 15일에야 부인이 죽고 난 뒤에 반찬 투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이 시를 쓴 것이다.
어떻게 하면 혼인을 관장하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을 데리고 저승에 가서 내세에는 부부가 서로 다른 처지인 자신은 부인으로, 아내는 남편으로 바꾸어 태어나 자신이 죽고 아내가 천 리 먼 제주도에 살아남아 아내를 잃은 자신의 이 슬픔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주석〉
〖悼〗 슬퍼하다 도, 〖將〗 거느리다 장, 〖月姥(월모)〗 =월하노인(月下老人): 혼인을 관장하는 신인(神人).
〖冥司(명사)〗 옥황상제.
각주
1 김정희(金正喜, 1786, 정조 10~1856, 철종 7):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09년(순조 9)에 생원이 되었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예문관검열을 거쳐, 1823년 규장각대교·충청우도암행어사와 의정부의 검상(檢詳)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 만 9년 만에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書畵)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관서악부」 백팔수 신광수
[ 關西樂府 百八首 申光洙 ]
其六十五(기육십오)
朝天舊事石應知(조천구사석응지) 하늘에 오르던 옛일을 응당 돌은 알겠지
故國滄桑物不移(고국창상물불이) 고도(古都)는 상전벽해(桑田碧海)되었지만 사물은 그대로니
城下滿江明月夜(성하만강명월야) 성 아래 온 강 가득 달빛 밝은 밤인데
豈無麟馬往來時(기무린마왕래시) 어찌하여 기린마는 다시 올 때가 없는가?
〈감상〉
이 시는 평양감사로 가는 채제공(蔡濟恭)을 위해 지은 「관서악부」 108수 가운데 65수로, 이색의 「부벽루(浮碧樓)」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부벽루」의 전문(全文)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滄桑(창상)〗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줄임말. 〖麟馬(린마)〗 영명사(永明寺) 아래에 기린굴이 있는데, 기린은 주몽(朱蒙)이 타던 말을 말한다. 그 남쪽에 조천석(朝天石)이 있는데, 이곳에서 주몽이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음.
昨過永明寺(작과영명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잠등부벽루) 잠깐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성공월일편) 성은 빈 채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千秋(석로운천추) 돌은 오래되어 구름은 천 년간 흘러가네
麟馬去不返(인마거불반) 기린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天孫何處遊(천손하처유) 천손은 어느 곳에 노니는고
長嘯倚風磴(장소의풍등) 길게 휘파람 불고 돌계단에 기대자니
山青江水流(산청강수류) 산은 푸르고 강물은 흘러가네
其九十八(기구십팔)
羊皮褙子壓身輕(양피배자압신경) 양가죽 배자 꼭꼭 묶어 몸이 가벼운데
月下西廂細路明(월하서상세로명) 달빛 아래 서쪽 별채 가는 샛길이 훤하네
暗入冊房知印退(암입책방지인퇴) 통인(通引) 간 후 몰래 책방에 드니
銀燈吹滅閉門聲(은등취멸폐문성) 문 닫는 소리에 은등불이 꺼지네
〈감상〉
기생이 털을 대어 만든 조끼 모양의 양 가죽으로 만든 배자를 입으니, 몸이 가볍다. 아마 밤길을 가기 위해 가벼운 차림을 한 것이리라. 달빛에 비춰진 서쪽 별채로 책방 도령을 만나러 가는 샛길이 훤하게 밝다.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통인이 퇴근을 하자, 기생은 책방 도령이 있는 책방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런데 문을 닫는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문에 이는 바람 때문에 촛불이 꺼졌다고 했지만, 사실은 책방 도령이 입으로 은등을 끈 것일 것이다).
이 시에 대해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영월 신광수의 호는 석북(石北)이다. 젊었을 때는 시가(詩歌)로 과거를 보는 곳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관서죽지사(關西竹枝詞)」 1백 80수를 지었는데, 화려하고 폭넓은 기상을 다하였다(申寧越光洙(신영월광수) 號石北(호석북) 少以詩歌(소이시가) 擅名場屋(천명장옥) 甞作關西竹枝詞一百八首(상작관서죽지사일백팔수) 極其繁華駘宕之狀(극기번화태탕지상)).”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
〈주석〉
〖褙〗 배자 배(여자의 겉옷의 하나), 〖廂〗 곁채 상, 〖知印(지인)〗 =통인(通引): 수령의 잔심부름을 맡아서 하는 지방 관아에 딸린 이속(吏屬).
각주
1 신광수(申光洙, 1712, 숙종 38~1775, 영조 15):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오악산인(五嶽山人). 5세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나, 13세인 1724년 가세가 기울어 낙향했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1746년 한성시(漢城試)에서 「관산융마(關山戎馬)」로 2등 급제했는데, 이 시는 당시에 널리 읊어졌으며 과시(科詩)의 모범이 되었다. 1750년 비로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후 시골에서 칩거생활을 했으나, 갈수록 궁핍해져서 가산과 노복들을 청산하고 땅을 빌려 손수 농사를 지었다. 이때 몰락양반의 빈궁과 자신의 처지를 읊은 「서관록(西關錄)」을 지었는데, 이 작품이 뒷날 역작인 「관서악부(關西樂府)」를 짓는 계기가 되었다. 음보(蔭補)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이때 벗들과 여강에서 소일하며 「여강록(驪江錄)」을 지었다. 악부체 시인 「금마별가(金馬別歌)」도 이 시기에 지어졌다. 1763년 사옹봉사(司瓮奉事)가 되었고, 다음 해에 금부도사로 제주에 가서 45일간 머물면서 제주민의 고충과 풍물을 노래한 「탐라록(耽羅錄)」을 지었으며, 1767년 연천(連川) 현감이 되었다. 1772년 2월 어머니의 권유로 기노과(耆老科)에 응시하여 갑과(甲科) 1등으로 뽑혔다. 3월에 돈령도정(敦寧都正)이 되었는데, 영조가 궁핍한 사정을 알고 가옥과 노비를 하사했다. 1774년 관서지방의 풍속·고적·고사 등을 소재로 한 「관서악부(關西樂府)」를 지었다. 1775년 우승지에까지 올랐다. 저서인 『석북집(石北集)』은 시인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지은 많은 시가 실려 있는데, 특히 여행의 경험을 통해서 아름다운 자연과 향토의 풍물에 대한 애착을 느끼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민중의 애환을 그린 뛰어난 작품집이다.
「상춘」 이매창
[ 傷春 李梅窓 ]
不是傷春病(불시상춘병) 봄을 근심해서 생긴 병이 아니라
只因憶玉郞(지인억옥랑) 다만 임 그리워 생긴 병이라오
塵豈多苦累(진기다고루) 진세(塵世)에 어찌나 괴로움이 많은가?
孤鶴未歸情(고학미귀정) 외로운 학이 되어 돌아갈 수 없는 정이여
〈주석〉
〖傷春(상춘)〗 봄이 와서 일어나는 근심. 〖玉郞(옥랑)〗 정인(情人)에 대한 애칭(愛稱).
誤被浮虛說(오피부허설) 잘못 뜬소문 도니
還爲衆口喧(환위중구훤) 도리어 여러 사람 입들이 시끄럽구나
空將愁與恨(공장수여한) 부질없이 시름과 한스러움으로 보냈으니
抱病掩柴門(포병엄시문) 병난 김에 차라리 사립문 닫으리
〈주석〉
〖喧〗 시끄럽다 훤, 〖將〗 보내다 장
〈감상〉
이 시는 봄이 와서 일어나는 근심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며 살던 매창은 37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이에 예전에 만났던 허균은 파직되어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다가 그를 슬퍼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哀桂娘(애계랑)」
妙句堪擒錦(묘구감금금)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청아한 노래는 구름을 멈출 수 있어라
偸桃來下界(투도래하계)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竊藥去人群(절약거인군)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등불은 부용의 장막에 어둑하고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향내는 비취색 치마에 남았구려
明年小桃發(명년소도발) 명년에 작은 복사꽃 피어날 때
誰過薜濤墳(수과벽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에 들를는지
凄絶班姬扇(처절반희선)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요
悲涼卓女琴(비량탁여금)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
飄花空積恨(표화공적한) 나는 꽃은 부질없이 한을 쌓고
衰蕙只傷心(쇠혜지상심) 시든 난초는 다만 마음 상할 뿐
蓬島雲無迹(봉도운무적)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滄溟月已沈(창명월이침) 큰 바다에 달은 이미 잠기었다오
他年蘇小宅(타년소소택)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殘柳不成陰(잔류불성음)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하네
〈감상〉
이 시의 제주(題注)에, “계생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절개가 있어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桂生扶安娼也(계생부안창야) 工詩解文(공시해문) 又善謳彈(우선구탄) 性孤介不喜淫(성고개불희음) 余愛其才(여애기재) 交莫逆(교막역) 雖淡笑狎處(수담소압처) 不及於亂(불급어란) 故久而不衰(고구이불쇠) 今聞其死(금문기사) 爲之一涕(위지일체) 作二律(작이률) 哀之(애지)).”라고 말하고 있다.
〈주석〉
〖擒〗 쥐다 금, 〖駐〗 머무르게 하다 주, 〖偸桃來下界(투도래하계)〗 『한무고사(漢武故事)』에, 서왕모(西王母)가 선도(仙桃) 7개를 가지고 와서 한(漢) 무제(武帝)에게 5개를 주고 2개는 자기가 먹었는데, 한 무제가 그 씨를 심으려 하자 서왕모가 “이 복숭아나무는 3천 년에 한 번 개화(開花)하고 3천 년 만에야 열매가 맺는다. 이제 이 복숭아나무가 세 번 열매를 맺었는데, 동방삭(東方朔)이 이미 3개를 훔쳐갔다.” 하였음.
〖竊藥去人群(절약거인군)〗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예(羿)가 서왕모에게서 불사약(不死藥)을 얻어다 놓고 미처 먹지 못하고 집에 둔 것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 먹고 신선이 되어 달로 달아나 월정(月精)이 되었다고 함.
〖薛濤(설도)〗 당(唐)나라 중기의 명기(名妓)임. 음률(音律)과 시사(詩詞)에 능하여 항상 원진(元稹)·백거역(白居易)·두목(杜牧) 등과 창화(唱和)하였다. 여기서는 계생(桂生)을 이에 비유한 것임.
〖凄絶班姬扇(처절반희선)〗 『한서(漢書)』 권(卷)97 「열녀전(列女傳)」에, 반첩여(班婕妤)는 한(漢) 성제(成帝) 때의 궁녀이다. 성제의 사랑을 받았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로 총애가 옮겨가자 참소당하여 장신궁(長信宮)으로 물러가 태후(太后)를 모시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신세를 소용없는 가을 부채(추선(秋扇))에 비겨 읊은 「원가행(怨歌行)」을 지었음.
〖悲涼卓女琴(비량탁여금)〗 탁문군(卓文君)은 한(漢)나라 촉군(蜀郡) 임공(臨邛)의 부자 탁왕손(卓王孫)의 딸임. 과부로 있을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서 그의 아내가 되었는데 후에 사마상여가 무릉(茂陵)의 여자를 첩으로 삼자,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자기의 신세를 슬퍼했다고 함. 〖飄〗 회오리바람 표, 〖蕙〗 혜초(난초의 일종) 혜,
〖滄溟(창명)〗 큰 바다. 〖蘇小(소소)〗 남제(南齊) 때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이름. 전하여 기생의 범칭으로 쓰임.
각주
1 이매창(李梅窓, 1573, 선조 6~1610, 광해군 2):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계생(癸生) 또는 계생(桂生)이라 했으며, 애칭으로 계랑(癸娘)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자를 천향(天香), 향금(香今)이라고도 하였으며, 초호(初號)를 섬초(蟾初)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자호(自號)를 매창(梅窓)이라 하여 널리 매창으로 불리고 있다. 매창은 16세기 말 부안 출신의 기류문학(妓流文學)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다.
「추천곡」 삼수 임제
[ 鞦韆曲 三首 林悌 ]
白苧衣裳茜裙帶(백저의상천군대) 흰 모시 의상에 붉은 띠 두르고
相携女伴競鞦韆(상휴녀반경추천) 서로 이끄는 처녀들 다투어 그네 탄다
堤邊白馬誰家子(제변백마수가자) 둑 가 흰 말을 탄 사람은 누구 집 자제인가?
橫駐金鞭故不前(횡주금편고불전) 금채찍 움켜쥐고 일부러 앞으로 가지 않네
〈주석〉
〖鞦韆(추천)〗 그네. 〖苧〗 모시 저, 〖茜〗 빨강 천, 〖裙〗 치마 군, 〖携〗 이끌다 휴, 〖駐〗 머무르다 주, 〖鞭〗 채찍 편
粉汗微生雙臉紅(분한미생쌍검홍) 붉은 두 볼에 땀이 조금 배이고
數聲嬌笑落煙空(수성교소락연공) 고운 웃음소리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네
指柔易著鴦索(지유역저원앙삭) 부드러운 손가락은 원앙줄에 뚜렷하고
腰細不堪楊柳風(요세불감양류풍) 가는 허리는 버들에 부는 바람도 견디기 어려울 듯
〈주석〉
〖粉汗(분한)〗 여자들 얼굴에 분이 많으므로, 여인의 땀을 이름. 〖臉〗 뺨 검, 〖嬌〗 아리땁다 교, 〖煙空(연공)〗 높은 하늘. 〖鴛鴦索(원앙삭)〗 색채가 화려한 줄.
誤落雲鬟金鳳釵(오락운환금봉채) 구름 같은 머리채의 금봉 비녀 잘못해서 떨어지니
游郞拾取笑相誇(유랑습취소상과) 놀던 도령 주워서는 웃으며 들어 보인다
含羞暗問郞居住(함수암문랑거주) 부끄러움 머금고 몰래 도령 사는 곳을 묻기를
綠柳珠簾第幾家(녹류주렴제기가) “푸른 버들 옥 주렴이 있는 몇 번째 집인가요?”
〈주석〉
〖鬟〗 쪽진 머리 환, 〖釵〗 비녀 채(차), 〖誇〗 자랑하다 과
〈감상〉
이 시는 그네를 타는 곳에서 일어나는 남녀의 상봉 장면을 재기 발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첫 번째 수에서는 곱게 차려입고 그네를 타는 여인을 보고 발길을 채근(採根)하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두 번째 수에서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여인의 뺨, 웃음소리, 손가락, 허리에 대해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수에서는 그네를 타다가 떨어진 비녀를 매개로 하여 남녀 간의 상봉 장면을 대화체를 사용하여 발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임제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자순(子順) 임제(林悌)는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 ‘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을 감도니, 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林子順有詩名(임자순유시명) 吾二兄嘗推許之(오이형상추허지) 其朔雪龍荒道一章(기삭설룡황도일장) 可肩盛唐云(가견성당운) 嘗言往一寺有僧軸(상언왕일사유승축) 題詩曰(제시왈) 竊食東華舊學官(절식동화구학관) 盆山雖好可盤桓(분산수호가반환) 十年夢繞毗盧頂(십년몽요비로정) 一枕松風夜夜寒(일침송풍야야한) 詞甚脫洒(사심탈쇄) 沒其名號(몰기명호) 不知爲何人作也(부지위하인작야) 固有遺才(고유유재) 而人未識者(이인미식자)).”
각주
1 임제(林悌, 1549, 명종 4~1587, 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린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인 이이(李珥)·허균(許筠)·양사언(楊士彦)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 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적(肉談的)인 시를 지어 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朴彭年)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漢詩)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敍情詩)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관어」 오수 유득공
[ 觀魚 五首 柳得恭 ]
其二(기이)
潭上看魚處(담상간어처) 못 위에 물고기를 구경하는 곳
時時不敢跫(시시불감공) 때때로 발자국소리도 못 내겠구나
忽來兒一一(홀래아일일) 새끼 하나하나 홀연히 왔다가
何去婢雙雙(하거비쌍쌍) 새끼들은 한 쌍 한 쌍 어디로 가나?
偶觸如相恠(우촉여상괴) 우연히 닿곤 서로 괴이하다는 듯하고
方嬉却自欆(방희각자쌍) 막 노닐다 문득 스스로 두려워하니
濠梁差可樂(호량치가락) 해자와 도랑도 조금 즐길 만한데
張翰謾秋江(장한만추강) 장한은 부질없이 가을 강을 떠났네
〈감상〉
이 시는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구경하면서 지은 시이다.
못 위에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는 곳에 물고기들이 놀랄까 발소리도 못 내고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다. 어떤 새끼들은 홀연 한 마리씩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새끼들은 한 쌍씩 무리지어 오더니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서로 부딪히자 서로 괴이한 듯이 쳐다보며 바야흐로 노닐다가 문득 두려워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즐길 만한데, 장한(張翰)은 순채와 농어를 찾아 고향으로 떠나야만 했던가?
〈주석〉
〖潭〗 못 담, 〖跫〗 발자국소리 공, 〖嬉〗 놀다 희, 〖〗 두려워하다 쌍, 〖濠梁(호량)〗 해자와 도랑으로, 장자(莊子)가 여기서 물고기가 노니는 즐거움을 말하면서 혜자(惠子)와 논변을 했음.
〖差〗 조금 치, 〖張翰(장한)〗 진(晉)나라 사람으로 벼슬살이를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는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유쾌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다.” 하고, 벼슬을 버린 채 곧바로 고향에 돌아갔던 고사가 있음(『진서(晉書)』 「장한전(張翰傳)」). 〖謾〗 부질없다 만
각주
1 유득공(柳得恭, 1749, 영조 25~?):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제천·양근 등의 군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한 뒤 만년에 풍천부사를 지낸 바 있으나,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한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체계화를 위해 역사연구 대상을 확대했다. 『발해고(渤海考)』에서 한반도 중심의 역사서술 입장을 벗어나서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遼東)과 만주 일대를 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했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또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세운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 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경도잡지(京都雜志)」는 조선시대 서울의 생활과 풍속을 전하고 있는 민속학 연구의 필독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