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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생뢰(牲牢)
정의
제사 때 희생(犧牲)으로 사용하는 가축.
개설
조선시대 국가에서 거행하는 제사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와 속제(俗祭)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단오나 추석, 설 등에 지내는 속제에는 희생을 사용하지 않는 반면 대사·중사·소사에는 반드시 희생을 올렸다. 희생으로 사용하는 고기는 소, 양, 돼지 세 가지였으며 제사의 크기에 따라 희생의 수를 달리하였다. 소, 양, 돼지를 모두 사용하는 경우 태뢰(太牢)라고 하였으며 소를 제외하고 양과 돼지로 지내는 제사를 소뢰(小牢)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 등에 지내는 대사에서는 태뢰를 올렸고, 그보다 한 등급 낮은 제사인 중사에서는 소뢰를 올렸다. 그 외 소사에서는 돼지 한 마리를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유교 경전에 근거한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는 희생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는 제사에 임박하여 정성스럽게 기른 가축을 죽여서 제물로 올리는 의식이다. 『세종실록』「오례」 길례 서례에는 ‘생뢰’의 항목을 별도로 두어 각 제향(祭享)에서 올리는 희생의 수와 희생을 기르고 관리하는 방식을 규제하였다. 이러한 법식은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찬실준뢰도설(饌實尊罍圖說)」에 게재되었다. 이에 따르면 국가 제사의 대사와 중사는 각각 대뢰와 소뢰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소사는 돼지 1마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사인 경우라도 국왕이 직접 제사를 올릴 경우 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뢰의 예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중사인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제사를 올리는 석전(釋奠)에는 성우(騂牛)를 사용하였다. 성우는 붉은 소를 가리키는데 실제로는 황우(黃牛)를 사용하였다. 그 외 종묘나 사직 등의 제향에 사용하는 소는 흑우(黑牛)를 사용하였다. 다만 조선후기에 대보단(大報壇) 제향은 성우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양 대신에 염소[羔]를 사용하는 제향도 많았다. 한편, 영조대에 편찬된 『태상지(太常志)』에서는 소, 양, 돼지 모두를 사용하는 것을 태뢰, 소와 양을 사용하는 것을 중뢰, 돼지만을 사용하는 것을 소뢰로 구분하였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서례』에 의하면 희생은 우리에서 기른 것을 사용하였는데 대사는 90일, 중사는 30일, 소사는 10일 기른 것을 사용하는 반면 나라에서 특별히 기원할 것이 있어 임시로 시행되는 기고제(祈告祭)의 희생은 기르지 않은 것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희생은 매질 등으로 손상시켜서는 안 되고, 죽으면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묻어야 했다. 실제 조선시대 희생에 사용하는 가축은 제주도나 거제도의 목양지에서 기르다가 일정 수를 상납하면 희생을 담당하는 관청인 전생서(典牲署)에서 3개월 동안 키워 살찌운 다음에 제향에 사용하였다. 한편 제향 전에 희생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을 성생의(省牲儀)라고 하였다. 종묘의 경우 정전(正殿) 동편의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신주(神廚) 앞쪽에 성생위(省牲位)가 있어서 이곳에서 희생으로 사용할 가축을 점검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영조는 왕이 희생을 직접 살피는 친림성생의(親臨省牲儀)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희생으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축은 재살청(宰殺廳)에서 도살하여 제사 때 올렸다. 대사인 경우 희생은 털과 피인 모혈(毛血)과 구운 간인 간료(肝膋), 생살코기인 생체(生體), 삶은 고기인 숙육(熟肉) 등으로 분리되어 제상에 올려졌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희생을 사용하는 제향이 많지 않았고, 두부나 유밀과 등을 이용한 제향이나 공양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에도 영향을 미쳐 속제에서는 희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적인 제향들의 대부분은 희생을 사용하는 제향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소는 귀한 것이라 함부로 도살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제향을 위해서는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제향을 빌미로 도살하여 판매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종묘의궤(宗廟儀軌)』
『태상지(太常志)』
『제등록(祭謄錄)』
생수갑(牲首匣)
정의
상제(上帝)에 대한 제사 때 제물인 희생(犧牲)의 대가리를 담는 상자.
내용
고대 중국에서는 교제(郊祭) 때 보양(報陽)의 뜻으로 생수(牲首), 즉 희생의 머리를 화로에 구워 올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후의 예를 행한 조선중기 이후에 없어졌다. 이 생수는 갑(匣), 즉 상자에 담기도 하고 적대(炙臺)나 소반에 담기도 하였다. 생수갑(牲首匣)에 대해서는 1457년(세조 3) 예조(禮曹)에서 상제에게 제사지내는 일에 대해 왕에게 아뢴 다음의 내용 중에 나온다. “상제에게는 송아지[犢] 한 마리에 창벽(蒼壁)을 사용하고 창백(蒼帛) 1개, 변(籩) 12개, 두(豆) 12개, 보(簠)·궤(簋) 각기 1개, 두 1개, 등(登) 1개, 비(篚) 1개, 조(俎) 2개[1개는 생육갑(牲肉匣)이고, 1개는 생수갑]이다. (이하 생략)”
용례
禮曹啓 上帝犢一 壁用蒼 蒼帛一(除緘成郊祀制帛四字)籩十二(實以形鹽魚鱐糗餌粉餐榛實乾棗白餠黑餠菱仁芡仁栗黃鹿脯)豆十二(實以豚拍鹿醢醓醢糝食韭菹酏食魚醢兔醢芹菹笋菹脾析菁菹)簠簋各一(實以稻梁黍稷)豆一(實以毛血)登一(實以大羹煮肉汁不用鹽醬)篚一(實以玉帛)俎二(一牲肉匣一牲首匣)俎二(一腥腸冑肺小匣 一熟腸胃肺小匣)[『세조실록』 3년 1월 8일]
執禮曰 樂作 燔柴 瘞毛血 諸大祝擧牲首盤毛血豆 各由其陛授祝史 祝史各捧牲盤 詣燎壇上加柴燔之[『세조실록』 3년 1월15일]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생육갑(牲肉匣)
정의
상제(上帝)에 대한 제사 때 제물인 희생(犧牲)의 고기를 담는 상자.
내용
제사 때 생육(牲肉)을 갑(匣)에 담는 예와 제물로 생수(牲首)를 올리는 예가 조선중기 이후에 없어졌다. 하지만 생육은 이후에도 조(俎), 즉 적대(炙臺)나 소반에 담아 올렸다. 생육갑(牲肉匣)에 대해서는 1457년(세조 3) 예조(禮曹)에서 상제에게 제사지내는 일에 대해 왕에게 아뢴 다음의 내용 중에 나온다. “상제에게는 송아지[犢] 한 마리에 창벽(蒼壁)을 사용하고 창백(蒼帛) 1개, 변(籩) 12개, 두(豆) 12개, 보(簠)·궤(簋) 각기 1개, 두 1개, 등(登) 1개, 비(篚) 1개, 조(俎) 2개인데 조 2개 중 1개는 생육갑이고, 1개는 생수갑(牲首匣)이다.”
용례
禮曹啓 上帝犢一 壁用蒼 蒼帛一(除緘成郊祀制帛四字)籩十二(實以形鹽魚鱐糗餌粉餐榛實乾棗白餠黑餠菱仁芡仁栗黃鹿脯)豆十二(實以豚拍鹿醢醓醢糝食韭菹酏食魚醢兔醢芹菹笋菹脾析菁菹)簠簋各一(實以稻梁黍稷)豆一(實以毛血)登一(實以大羹煮肉汁不用鹽醬)篚一(實以玉帛)俎二(一牲肉匣一牲首匣)俎二(一腥腸冑肺小匣 一熟腸胃肺小匣)[『세조실록』 3년 1월 8일]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석전의(釋奠儀)
정의
성균관(成均館)의 문묘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하는 의식.
개설
석전(釋奠)이란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인(聖人)과 현인(賢人)들인 선성선현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자로서 ‘추(酋)’는 술병에 술을 담은 뒤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으로 술을 의미하고, ‘대(大)’는 물건을 놓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은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의미가 된다.
『주례(周禮)』나 『예기(禮記)』 등의 경전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본래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에서 거행하는 제사였고, 또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올리는 제사를 석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자의 의식은 사라지고 학교에서 거행하는 제사 의식만을 석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석전은 ‘정제(丁祭)’ 또는 ‘상정제(上丁祭)’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석전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는 유학이 수입되고 국립 학교가 설립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신라에서 648년(신라 진덕여왕 2)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 국학(國學)에서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한 점, 717년(신라 성덕왕 16)에 당나라로부터 공자·10철(十哲)·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했던 점 등은 국학에서 석전이 봉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는 국학에 문묘(文廟)를 설치하고 석전을 거행했으며, 왕이 직접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酌)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6월 한양에 새 문묘가 조성되기 시작하여[『태조실록』 6년 6월 2일] 이듬해 완성되었다. 이후 정종대에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정종실록』 2년 2월 2일], 태종대에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에 재건되었다[『태종실록』 7년 3월 21일]. 그리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부터 1604년(선조 37)까지 두 차례로 나누어 복원하였다[『선조실록』 38년 2월 26일].
문묘에서의 석전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거행되었으며, 중사(中祀)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조선의 문묘에 봉안된 신위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정비된 것을 살펴보면,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10철과 송조(宋朝)의 6현(六賢) 등 유학(儒學)에서 성인과 철인, 현인으로 받드는 인물 21위(位)가 봉안되었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우리나라의 명현(名賢) 18위와 중국의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가 봉안되었다. 한편, 지방의 향교(鄕校)에서도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봄과 가을로 1년에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절차 및 내용
조선초기 국가 전례 정비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세종실록』「오례」에는 석전 의식이 네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시학작헌문선왕의(視學酌獻文宣王儀)’는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문묘의 공자 신위에 술을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학(視學)하는 의식이다. 시학은 국왕이 유생들의 공부 상황을 둘러보는 것을 가리키며, 때로는 이때에 알성시(謁聖試)를 베풀어 인재를 뽑기도 하였다. ‘왕세자석전문선왕의(王世子釋奠文宣王儀)’는 왕세자가 주관하여 석전을 거행하는 의식이며,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는 관원들이 주관하여 석전을 거행하는 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주현석전문선왕의(州縣釋奠文宣王儀)’는 각 주현에 있는 향교에서 거행하는 석전 의식이다.
이상의 석전 의식들이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새로운 의식들이 추가되고 세분화되고 명칭도 일부 조정되어 수록되었다. 『국조오례의』에 실린 석전 의식은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 ‘작헌문선왕시학의(酌獻文宣王視學儀)’, ‘왕세자작헌문선왕입학의(王世子酌獻文宣王入學儀)’, ‘왕세자석전문선왕의(王世子釋奠文宣王儀)’,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 ‘문선왕삭망전의(文宣王朔望奠儀)’, ‘문선왕선고사유급이환안제의(文宣王先告事由及移還安祭儀)’, ‘주현석전문선왕의(州縣釋奠文宣王儀)’, ‘주현문선왕선고사유급이환안제의(州縣文宣王先告事由及移還安祭儀)’ 등이다.
『국조오례의』에서 정비된 석전 의식은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다. 또,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제정된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도 왕세자가 황태자, 문선왕이 문묘(文廟)로 바뀌는 등의 명칭 변화만 있을 뿐, 실제 거행되는 의식의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준수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태학지(太學志)』
『대한예전(大韓禮典)』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석전대제』,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석전제(釋奠祭)
정의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의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와 그 제자 및 유교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
개설
석전제는 고려 및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의례로, 당시의 학교 제도 및 유학의 교육 방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시행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과 향교, 조선시대의 국립학교인 성균관과 향교 및 사립학교인 서원(書院) 등은 모두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장소인 동시에 유교의 성현을 제사하는 공간이었다. 이 모든 학교에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공간과 제사를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석전제를 올리는 장소인 문묘에는 유학의 발전에 기여한 성현들의 신위가 등급에 따라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석전의(釋奠儀) 정위(正位)는 공자 1위(位)이며,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의 4위가 배향위(配享位)에 해당한다. 여기에 공자의 대표적인 제자인 10철(哲)과, 송나라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소옹(邵雍)·장재(張載)·주희(朱熹) 등을 종향위(從享位)로 삼았다. 그밖에 대성전의 좌우에 별도로 지어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공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공문(孔門)의 72제자와 유학의 진흥에 공을 세운 중국의 역대 성현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름난 유학자 18명 등을 각각 모셨는데,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동무에는 55위가, 서무에는 54위가 있었다.
문묘에 종사(從祀)된 우리나라 유학자에는 신라시대의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 고려시대의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 등이 있다. 조선시대 학자 가운데는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김장생(金長生)·이언적(李彦迪)·조광조(趙光祖)·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김집(金集)·박세채(朴世采)·송준길(宋浚吉) 등 14명의 신위가 모셔졌다.
우리나라 유학자의 문묘 종사는 광해군 때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붕당(朋黨) 간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1611년(광해군 3)에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하여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그들의 신위를 문묘에서 빼자고 주장한 회퇴변척(晦退辨斥) 사건이나, 숙종 연간에 서인과 남인의 환국(換局) 과정에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와 출향(黜享)이 반복된 사건 등은 이를 둘러싼 붕당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가 사전(祀典)에 수록된 석전제는 왕의 시학(視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성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조선시대에, 왕이 석전제를 시행하는 날 유생들의 유학 실력을 시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태종대에 처음 시행된 이래 조선말기까지 이어진 전통인데, 정기적인 석전제에 왕이 참석할 때는 물론이고, 갑자기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유생들을 시험할 때도 반드시 먼저 문묘에 나아가 제사를 지낸 뒤 시학을 하였다. 시학은 유생들을 시험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개 일종의 과거 즉 알성시(謁聖試)를 치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공자에 대한 제사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유교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천명된 한(漢)나라 때부터였다. 그러다가 오례(五禮)의 형태로 국가의 사전에 등장한 것은 당(唐)나라 때인데, 이때 석전제는 중사(中祀)에 편입되었고, 이러한 제사의 등급은 청(淸)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국학(國學)이 설립되고, 717년(신라 성덕왕 16)에 당나라에서 문선왕(文宣王)과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들여와 태학(太學)에 두게 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석전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1061년(고려 문종 15)에 왕이 몸소 국자감에 나아가 공자에게 제사하면서, 석전제가 국가 제사로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의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편찬한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를 바탕으로 쓰인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 따르면, 석전제가 중사 등급에 편입되었다. 그 뒤 고려후기에는 성리학의 도입이 이루어지면서 석전제는 성리학의 틀 안에서 운영·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전제는 제도적으로 보완되었으며, 왕의 친제에 대한 의례도 마련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왕이 직접 문묘에 행차하여 석전제를 지내면서 왕의 친제의(親祭儀)가 모색되었는데, 특히 태종대 후반에 이르러 역대 중국의 의례를 바탕으로 한 석전의가 새로 제정되었다. 세종 연간에는 1429년(세종 11)부터 그 이듬해까지 집현전(集賢殿)에서 역대 중국의 석전제 제도를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태종대의 제의(祭儀)를 검증하고 의식의 세부 사항들을 수정하였다. 이때 정해진 의식은 그 뒤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조에 최종적으로 수록되었다.
『국조오례의』에는 왕이 친제한 뒤에 시학하는 의식과 세자 및 유사(有司)의 석전제 의식, 주현의 석전제 의식 등 문묘에서 행하는 다양한 의식의 제도와 절차가 수록되었다. 이러한 의식 규정은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그대로 이어졌고, 부분적인 수정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에도 수록됨으로써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준용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왕조실록』 등의 연대기 자료를 살펴보면, 왕의 석전제 친제는 제사에만 한정되지 않고 반드시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시험한 알성시와 결합되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국조오례의』를 비롯한 역대 예서(禮書)에 수록된 왕의 문묘 친제 의식은 제사와 시학이 결합되는 형태를 띠었다. 물론 제사의 시행 주체가 왕이 아닌 왕세자 및 신하인 경우, 시학의 절차는 따로 설정되지 않았다.
『국조오례의』 길례조에 따르면, 왕이 참석하는 문묘의 제사 의식에는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와 작헌문선왕시학의(酌獻文宣王視學儀)가 있었다. 그중 전자는 정기적인 석전제의 의례를 규정한 것이고, 후자는 비정기적인 행사의 의식을 설명한 것이다. 후자의 의식 절차는, 왕의 출궁과 환궁 및 시학의 의식이 빠져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하다. 왕의 친제의에 대비되는 의식으로는 신하가 대행하는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가 있는데, 이 경우 1품관이 제관(祭官)으로 의식을 주재하였다. 여기서는 왕의 친행인 ‘향문선왕시학의’를 기준으로 내용을 살펴보겠다.
왕의 친행 의식을 규정한 향문선왕시학의에 따르면, 석전 의식의 과정은 크게 의식의 준비, 거가출궁(車駕出宮), 행례(行禮), 시학(視學), 거가환궁(車駕還宮)의 5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인 준비 과정에는 제사를 시행하기 전 5일간의 재계(齋戒)와, 3일 전부터 시행되는 왕과 제관의 위차(位次) 마련 및 제수·제기 등 관련 물품의 설치, 하루 전에 아헌관(亞獻官)이 시행하는 희생(犧牲)과 제기의 검사 등이 포함된다. 석전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인 중춘(仲春)과 중추(中秋)의 첫 정일(丁日)에 지냈는데, 제사의 대상이 많은 이유로 소 1마리, 양 1마리, 돼지 5마리 등 다른 중사에 비해 풍성한 희생이 사용되었다.
2단계인 거가출궁과 5단계인 거가환궁은 왕이 문묘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왕의 의장과 시위 군사의 수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3단계인 행례는 제사의 본 과정으로, 신위에게 폐백을 드리는 전폐(奠幣), 제수를 올리는 궤향(饋享) 뒤, 신위를 다시 돌려보내는 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주목할 점은 제사의 대상을 정위(正位), 배위(配位), 종향위(從享位)로 구분하여, 각각에 별도의 제관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전폐에서는 왕이 정위인 문선왕(文宣王) 곧 공자의 신위에 세 차례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 후 폐백을 드린 다음, 부복하고 몸을 바로 한다. 그 뒤 배위의 초헌관(初獻官)이 안자·증자·자사·맹자의 4위(位)에게 차례로 왕과 같은 방식으로 폐백을 올린다. 궤향(饋享)은 신위에 술을 올리는 절차로,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의 삼헌으로 구성된다. 왕이 문선왕 신위에 초헌을 시행하면 다음으로 배위의 초헌관이 4위에게, 마지막으로 분헌관(分獻官)이 종향위에 초헌을 행한다. 초헌이 끝나면 아헌관과 종헌관(終獻官)이 정위에게 아헌과 종헌을 각각 시행하고, 이후 배위의 헌관(獻官) 및 종향위의 분헌관이 각각의 대상에게 아헌과 종헌을 행한다. 작헌이 끝나면 왕이 제사에 쓰인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의 의식을 거행한다. 마지막으로 변두를 거두는 철변두(撤邊豆)를 행한 후 아헌관이 제사에 쓰인 폐백을 구덩이에 묻는 장면을 보는 망예(望瘞)를 시행하면 의식이 종결된다.
이러한 제례가 끝나면, 4단계인 유생들에 대한 시학이 시행된다. 왕이 자리에 앉아 먼저 시강관(侍講官) 이하에게 술을 하사하면, 시강관의 우두머리인 반수(班首)가 왕에게 술잔을 올린다. 이후 강서관(講書官)의 강서(講書)와 시강관의 논란(論難)으로 이어진다. 시학은 단순히 유생들의 학습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과거 시험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이 끝나면 왕과 관원이 퇴장함으로써 의식이 종결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삼국사기(三國史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명사(明史)』
『송사(宋史)』
이범직, 『韓國中世 禮思想硏究』, 일조각, 1991.
지두환, 『朝鮮前期 儀禮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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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先農壇)
정의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
개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제사 대상을 몇 가지로 구분하였다. 하늘에 속한 자연물은 ‘천신(天神)’, 땅에 속한 것은 ‘지기(地祇)’라고 하였다. 또 천신에게 올리는 의례는 ‘사(祀)’, 지기에 지내는 제사는 ‘제(祭)’라고 불렀다. 그에 비해 살아서 행한 공덕(功德)을 인정받아 죽은 뒤 신으로 모셔진 사람은 ‘인귀(人鬼)’라 하고, 인귀에게 지내는 제사는 ‘향(享)’이라고 하였다. 신농씨와 후직씨는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보급한 공덕으로 사후에 국가의 제사 대상이 되었으므로, 이들에게 지내는 제사는 ‘향’에 해당하였다. 선농단은 이들에 대한 제사 즉 ‘향’을 거행하던 제단으로,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는 ‘향선농의(享先農儀)’라고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의 선농단은 한양 동대문 밖의 동쪽 교외, 즉 동교(東郊) 보원동동(普院東洞)에 위치해 있었다.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帝王)이자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알려진 신농씨와, 요(堯)임금의 농관(農官)이었던 후직씨에게 향사하던 제단으로, 적전단(籍田壇) 또는 교단(郊壇)이라고도 하였다. 매년 음력 2월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왕이 직접 참여하는 ‘친향선농의(親享先農儀)’나, 왕을 대신해 대신(大臣)이 참여하는 ‘향선농섭사의(享先農攝事儀)’를 거행하며 한 해의 풍년을 빌었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한편 숙종대에는 선농단에 대신(大臣)을 보내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거행하였으며[『숙종실록』 3년 6월 30일][『숙종실록』 5년 7월 21일], 1704년(숙종 30)에는 왕이 친히 선농단에 행차하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숙종실록』 30년 5월 22일].
변천 및 현황
선농단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는데, 의종대의 규모는 사방이 3장, 높이가 5척이었다. 사방에 계단이 있었고 2개의 담이 둘러져 있었는데, 담의 길이는 각각 25보(步)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동쪽 교외에 선농단을 설치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406년(태종 6)에 적전단을 쌓고 관리하는 사람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14년(태종 14)에 예조(禮曹)에서 아뢴 설치 규정에 따르면, 선농단의 규모는 높이가 3척, 둘레가 8보 4척이었다. 또 단의 사방에 섬돌을 설치하고, 각각 25보의 담 2개를 두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4년 6월 13일]. 1416년(태종 16)에는 예조의 건의에 따라 재실(齋室)을 짓게 하였다. 세종 연간에는 선농단의 규모를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으로 변경하였으며, 1424년(세종 6)에는 선농단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다[『세종실록』 6년 1월 20일]. 이후 1908년(융희 2)에는 ‘칙령 제50호 향사이정건(享祀釐正件)’에 따라 선농단의 신주를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기고, 향사 의례는 폐지하였다.
선농단 터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남아 있다.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에 사적 제436호로 변경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에는 ‘서울 선농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79년에 동대문구에서 향사를 재개하였는데, 1992년부터는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선농단 친목회에서 이를 넘겨받아 매년 거행하고 있다.
형태
선농단은 신위를 모시고 제사 음식인 예찬(禮饌)을 진설하는 제단과, 단을 둘러싼 2개의 담, 향사가 끝난 뒤 폐백과 축판을 묻는 예감(瘞坎)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단은 너비 2장 3척, 높이 2장 7척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단의 사방에 오르내릴 수 있는 섬돌을 설치하였다. 단을 둘러싼 2개의 담은 길이가 각각 25보였으며, 예감은 단의 북쪽에 땅을 파서 만들었다. 향사를 거행할 때 정위(正位)인 신농씨의 신위를 모시는 신좌(神座)는 단의 북쪽에 남향으로, 정위와 짝이 되어 함께 제사를 받는 후직씨의 신좌는 단의 동쪽에 서향으로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욱, 「근대국가의 모색과 국가의례의 변화-1894~1908년 국가제사의 변화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95,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