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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모니카 교우 이야기
양력 6월 1일은 구주 승천하신 명절이온데 본 교회는 사제가 항상 계시지 못하여 성사를 영치 못하고 큰 첨례를 지낸 고로 즐거운 중 섭섭하게 지내었나이다. 대저 이때를 당하여는 농사를 힘쓸 때인 고로 교인과 외인을 물론하고 새벽 첫닭 울기에 농사를 시작하니 잠을 자지 못하고 이같이 노력함은 겨울을 편히 쉬고자 함이니라. 그와 같이 영생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예비하는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본 교회의 채동이란 동리에 강모니카라 하는 이는 집안이 번렬하고 다 자손하야 육신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이로되 천주를 위하여 수고하는 일이 많으니 자기 사는 곳에서 본 교회가 15리오, 겸하여 산골 흠로이라. 이러한 곳에서 새벽과 밤과 추위 더위를 무릅쓰고 성당에 다니며 자기 남편에게 고난을 많이 당하였으니 그 남편은 일찍 영세를 받았으나 배도자의 유혹에 빠져 삼사년을 외인으로 지내며 제사하기를 힘쓰더니 금년 1월부터 감화되어 몇 주일을 잘 지키므로 가중이 희락으로 주를 섬기더니 천주께서 해씨를 이 세상에 오래 두지 아니 하시고 6월 1일에 그 영혼을 부르시니 별세할 때에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너희는 성당에 잘 다니며 내 집에 기도소리 떠나지 않기를 바라노라. 대저 나는 죄가 많아 집 식구 중에 외인 있는 것을 보다가 확실히 회개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하고 인하여 다른 말을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그 가중이 슬픈 중 후세에 서로 만나볼 것을 깊이 믿고 천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916년 11월)
* 진명하교 교사들, 그리고 후원자들
본 교회를 다년 근무하신 이는 김부제 바나바씨온데 해씨가 청년교육을 극히 힘쓰사 열심하신 결과로 오늘까지 교육하기에 이르렀사오니 해씨의 열심을 찬송하나이다. 대저 어느 곳을 물론하고 사립학교를 유지하기가 극히 어려움은 다만 재정에 관한 연고라. 본 학교 경비를 대강 말하건대 선교회로 지출되는 바는 신학문 교사의 월봉에 지나지 못하고 한문교사는 학부형이 담당하오나 다른 경비는 월사금으로 유지하오며 년년히 동절을 당하면 난로비를 국어교사 박아고스듸노씨께서 전담하다가 작년에는 본 군청에서 보통학교로 매호에 곡식 1두씩 기부하라 하매 교인과 학부형들이 본 교회로 기부하였으므로 겨울을 지냈사오나 금년 겨울을 당하매 경비를 지출할 도리가 없음으로 학부형회를 개최할 새 일반학생도 회집게 하고 4학년 반 학생 2인을 택하여 모든 사업이 학문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문제를 국어로 설명하고 1인은 조선어로 번역하게 하고 또한 9세 된 생도 둘을 택하여 천지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고란 문제를 국어로 설명하고 한 아이는 조선어로 번역하매 일반 학부형께서는 희열이 만심하여 자기 자질이 항상 장난만 하는 줄 알았다가 이같이 설명을 듣고 곧 열심을 발하게 되었나이다. 날로 경비예산에 대하여 학부형 제씨들이 금 1환 50전씩 기부하였으므로 수입금액이 7환 5전이 되었는데 외인 부형의 기부금액이 1원 5전 이온 즉 이 교인의 열심 곧 더하기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하사이다. (1917년 1월)
* 진명학교 교사 정아덕
본 교회 내 진명학교에서 다년 교사로 근무하시던 임병무씨는 천주의 부르심을 입어 경성 마포수도원에 신학 공부하기 위하여 가셨으므로 해씨 대에 수원 진명학교에서 교수하시던 정아덕씨가 교수하시오니 천주께 감사하오며 또한 학교 경비 곤란함을 인하여 본 학교를 유지할 계칙이 없더니 교인과 학부형 제씨께서 열심을 발하여 기부한 금액이 65원이 되매 해 금액을 기본금으로 삼아 신구학 교사에 월봉을 지불하기로 작정하였사오니 천주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나이다. (1917년 6월)
* 전도사 임요셉씨와 주일학교
임요셉씨는 지난 사월부터 병천리 학교에서 시무할 새 저간에 신병으로 월여를 신고하였으나 교무를 일층 힘써 지금은 생도의 수효가 사십명이요, 또한 해씨가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성적이 양호하옵나이다. 본 신부 생각건대 각처 교회의 어린아이들이 별로 성도상 교육을 받지 못하는 모양이니 만일 전도사마다 주일학교를 시작하시면 어찌 다행치 아니하오며 교회의 큰 사업이 아니오리까. (1919년 9월)
아병천발전소감(我幷川發展所感)
- 병천 고객 임인재(요셉) -
기고자는 결백한 지면을 더렵혀 감사와 희망 하에서 감격한 심사를 다소간 끄집어내어 소감됨을 잠시 소개함이 있을까 하나이다. 만족한 말씀을 드리기 어려움을 애석하게 생각하오나 독자 여러분이 용서하여주심을 믿습니다. 금번에 기고의 동기를 득함은 하등의 독특한 문제를 연구함이 아니라 병천의 발전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격하던 바이었고 따라서 그 발전의 작자 내지 작자의 최후의 승리로운 환희를 보고 싶었던 것을 잠시 쓰고자 하나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병천은 실로 비애의 세계이요, 암흑의 사회이요, 영리의 생활 등 들을 것도, 볼 것도, 끄집어내어 자랑할 것도 없는 몽매침묵의 세계였도다.
이와 같은 과거의 병천을 말씀함은 좌상공담(座上空談)으로 남의 과거를 조소함도 같지 마는 이는 사실 안 듯 합니다. 그러나 오인은 들었노라. “오인은 모름지기 과거를 초월치 아니하면 미래를 보지 못함”이라 함이 있은 즉 병천의 침묵은 영원히 무의미의 병천으로 해석하기 불능하도다. 그런즉 병천은 영원히 암흑면의 향(鄕)이 아이오, 이것을 정복시키고 조일의 백광(白光)을 보고 최후의 희망이 새록새록 있을 것을 자신하노라. 금춘 이래로 우리 병천에도 일대각종(覺鍾)의 성(聲)이 파급되어 무릉도원의 백일몽을 불각(不覺)하던 병천 청년도 두뇌에 무슨 감촉이 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동기로 하여 대대적 활동을 행하여 전도기관을 확포하며 따라서 교육장려의 두 주먹을 쥐고 기운차게 활동하여 오던 결과 지난 팔월 분에 본 교회 내에서 운동구락부를 조직하고 잡지, 신문 기타 서적을 구독하여 지식을 계발하며 강연 또는 토론도 하여 부의 발전과 우리 교인이 교육에 번창함을 도(圖)하며 경(更)히 외교청년이 다수 참교케 되어 장래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천국의 풍군도 이에서 산출되기를 열망하며 겸하여 구락부 내에 영어부와 노동야학부를 설치하여 우리 교육 장려의 본의를 환하는 바이라. 배우고 아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 하노니 우리 문화운동은 무엇보다도 우리 불쌍하고 암매한 더벅머리와 고수상투에게 우리의 글을 가르쳐주어서 저들의 두뇌를 개량함이 최급무라 절규하겠도다. 불연즉근(不然則根)이 없는 나무와 신경(神經) 없는 토우(土偶)에 하유(何喩)리오, 따라서 무엇보다도 제일 막개무량힌 바는 우리 사회의 여자교욱이 비열낙오에 처한 지라. 그런즉 우리 사회의 운명을 증진하려면 여자교육이 일대 문제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다. 고로 우리는 십일월 십구일에 병천성공회 내에 여자 야학부를 증설하게 되어 무엇무엇 가르쳐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수종(數種)의 기관이 설치됨은 시대의 순응인지 우리 자각인지 알지못함이어니와 금일의 병천은 발전의 간판을 게양케 되어 실로 하느님께 영광이며 오인의 기쁨과 환영하는 바이라. 금일 우리 병천은 옛날 암흑면을 탈하고 변천에 지(至)함을 감(感 )하는 동시에 악마에게 불절불요(不折不撓)함을 기도불이(祈禱不已)하는 바이며 기업자의 견고심으로 결실의 추(秋)를 보고자 분투용진함을 원하나이다. (1921년 2월)
* 주일학교와 진명학교 교사들, 그리고 후원자들
병천 성마태성당은 성당을 건축한 이후로 주일학교를 매우 재미있게 진행하여 열심 교수하시던 이마태씨는 그곳 금융조합에서 근무 중에 있으나 그 여가를 이용하여 교회 일은 물론 주일학교까지 열심 성력하신 바 학생이 90여명에 달하여 성적이 좋은 중 감사하나이다. 본 교회에 새로 망세입안자가 남녀 40인이오, 문자가 10여인이오니 저희들이 세상 허영을 거절하고 진실한 교우가 되기를 바라오며 또 이곳 전도사 박아고스디노씨는 악마의 신병으로 인하여 연내로 고민하더니 다행히 천은을 입어 지금은 무병 중에 건강하여 모든 교무가 집정되오매 기쁜 가운데 저를 위하여 기도하사이다. 본 지교회에서 관리하는 여학교는 재정의 곤란으로 인하여 정지까지 되었던 것을 본 교회 지부회 위원 제씨와 전도사 박아고스디노씨의 주선 하에 인근 동네 유지들의 협찬을 얻어 경비 상 후원을 조직한 결과 지금은 모든 것이 원만히 진행 중에 본교 여교원 김미리암(英淑)씨의 열심 교수하심과 후원 제씨의 성의를 감사하오며 또한 남학교 교원 송(宋)갑열씨는 가사로 인하여 사직하시고 본 교회 이마태씨가 교무를 집행하오니 그의 열성을 부조하여 교육사업이 진흥되기를 바라나이다. 여학교를 후원한 제씨는 아래와 같음.
송인섭, 천(千)기형, 송관섭, 김찬응, 송근섭, 유(柳)연하, 임(林)정호, 이창여, 전(全)용준, 박병무, 민(閔)철호, 임(林)병갑 (무순) (1923년 12월)
* 나눔을 실천하는 교우들
본 지방은 토지가 박하고 수원이 부족하여 비가 자주 오지 아니하면 흉년을 가끔 만나는데 금년에도 한발로 인하여 일반 농민들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오직 한 분 되신 상주께 감우 내리시기를 위하여 기도할 뿐이러니 즐겁도다 우리를 보호하시며 사랑하시는 천주께서 그이들의 간곡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사 감우를 알맞게 내려주시므로 일반은 감사함을 천주께 돌리는 중에 이앙(모내기)에 매우 분망히 지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신도는 기도를 마치시고 나오신 후 장로 되시는 몇 분께서 일반 신도와 같이 어느 겨를에 의논하셨든지 다음 주일 성삼후주일에 맥추감사기도 보기로 정하신 것을 신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맥추감사기도를 거행할 때에 일반 신도는 첫 아침 삼종소리가 귀 밑을 울릴 때에 이곳저곳에서 삼삼오오로 다 손에 감사예물로 드릴 곡물을 가지고 오시는 중 몇몇 분은 땀을 흘리시며 한 지게씩 가져오셨습니다. 과연 천주의 무한하신 은혜가 이곳 교회에 계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감사기도에 들인 곡물을 합한 즉 70여두며 금전은 3원 가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은 오히려 이것이 부족하니 우리는 일층 더 분발하여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말씀하셨습니다. (1925년 8월)
* 김엘리아씨의 독행(篤行)
김엘리아씨는 대략 5년 전부터 봉항리 성공회 서당선생으로 부임하여 그 직무에 열심 근무할뿐더러 여가에는 교회 일을 많이 조력하므로 교외, 교내인의 칭송을 받아오다니 지난 1월 2일에 쌀쌀한 바람이 살을 에워내는듯한 때 50대 남짓한 남자 병인 하나가 여러 끼를 굶주려 기력을 모두 잃고 몸에는 남루한 홑옷을 걸치고 거리에 누워서 죽게 된 것을 그가 보고 즉시 데려다가 일변 약을 쓰고, 일변 먹을 음식을 주면서 근 보름을 구호한 결과 천행으로 회생하여 일어나매 그는 솜옷 일습을 주어 보내었으므로 교인은 물론 동네사람들도 탄복하였다더라. (1927년 3월)
* 봉항리 진명학교 교사 김엘리아
천안 갈전면 봉항리교회는 일반 설비는 부족한 점이 많으나 진실한 교인이 적지 아니하며 그곳 서당교사 김엘리아씨의 열심과 사랑으로 교회에 찬조하심을 인하여 잘 전진하오니 감사하나이다. (1928년 3월)
* 강신덕씨의 기고하신대로
병천교회 강신덕은 여러분 교우들의 안녕을 축원하며 본 교회의 소식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하나이다. 본 교회가 다년간 천주의 도우심을 받아 오던 중 1929년부터 더욱 부흥하여지며 교역자 되신 선생님들의 부단한 노력하신 결과로 금년부터는 문자와 망세자도 많아졌으며 특별히 새로 영세한 25명의 청년과 12명의 유년과 30명의 견진자가 있게 된 것은 진실로 감사하는 바이올시다. 또한 신자 중의 담당자로 있던 교회 선생님들의 간곡한 권고를 받아 사순대재 간에 회개하여 열심히 천주를 공경하며 오랜 동안 신병으로 고생하였으나 지금은 신병도 완쾌하였으며 씨는 감사한 뜻을 표하기 위하여 제단 전면휘장을 새로 제조하여 기부하였고 또 본 교회의 다년 회장의 임무를 보시는 홍경애씨는 구주부활기념으로 제단 후면휘장을 새로 제조하여 기부하셨나이다. 타 지방에 계신 형매제씨여, 우리들이 다같이 천주께 영광을 돌리고 이 두 분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여주시기 바라나이다. (1930년 6월)
* 모든 교인이 힘을 모은 봉항리교회 신축
수년간 성당이 퇴락되고 경비에 곤란이 많은 봉항리교회는 1932년 여교인 성미회(誠米會)를 조직한 바 성적이 매우 우량하여 한 주일 두 주일 지날수록 교회 재산이 적립되고 신앙이 두터워지매 천주께서 돌아보시고 냉담자와 외인들의 마음을 감화하사 성당이 좁게 되었더니 여러 교인들을 격동시키어 지난 봄에 성당신축적립금 일금 2백원을 세우고 선교회에서의 8백원의 보조와 합하여 1000원으로 건축한 바 병천교회 교우께서 제단 휘장과 촛대 가격 20원을 기부하여 주시고 제시 수녀께서는 십자고상과 미사용 제단보를 기부하시어 지난 10월 26일에 축성식을 거행한 바 250여명의 교인이 참석하시고 다수의 외인은 천주께 찬송함을 듣기 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참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나이다. 앞으로 본 교회 교인들이 주께서 주신 은총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1933년 12월)
* 93세의 어느 노인 신자
어떤 신도들은 때로 옳지 못한 행동을 취하면서도 스스로 핑계를 대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나이다. 그 반면에 어떤 신도들은 많고 큰 유혹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신실한 마음과 열성이 충만하여 계신 분도 있음을 볼 때가 있나이다. 지난달에 내가 93세의 노령의 노인으로서 봉항리에서 병천까지 20리나 되는 먼 길을 멀다하지 아니하고 오셔서 성례성사를 영하시고 나의 축복을 받으시고 가셨다는 말씀을 여러 신도에게 들은 바 있나이다. 그 노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간 지 사흘 후에 별세하셨다고 하나이다. 그 노인은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을 계속 하셔왔고, 가정상 일로 많은 지장이 있었으며, 자기가 가졌던 소유물도 다 잃고 동네 사람에게 방 한 칸을 얻어서 거기서 여생을 보내시던 분이셨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낙심치 아니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믿음과 평안한 마음으로 별세하셨나이다. 원컨대 별세한 신자의 영혼이 음간에 평안히 쉬어지이다. (1937년 7월)
* 신학 공부를 마친 강애단 부제
그 외에 새로 신학원에 받아들인 신학생이 오직 두 분 밖에 없으나 자격을 갖춘 분들이 나오시게 되어 대한성공회의 지도자가 되시기를 크게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강애단(姜俊熙) 부제와 심바우로(沈興燮) 부제 두 분이 지난해 여름에 신학원에 가셔서 공부를 마치시고 장림절 중인 지난 12월 16일에 사제 신품을 받드시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사제 두 분이 느신데 대하여 천주께 감사하는 바이다. 여러 교우들은 이 분들과 신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950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