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서울구경
아들 입시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상경.
북아현동 어느 골목길에 있는 추계예대 앞에 아들을 내려주고 주차할 곳이 없어
서울역 뒤 손기정기념공원 공영주차장까지 왔다.
본래 연대나 이대 쪽을 가보려고 했었지만
코로나 시국인지라 생각을 바꿨다.
서울 고궁 중에 비원이 으뜸이라고 들은바 있어 가보고자 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
월요일은 서울 고궁이 다 쉬는 날이란다.
하는 수 없이 만만한 남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후암동 - 두텁바위골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좌우가 확실하게 대조적이다. 남아공이나 브라질의 빈부격차를 이야기할 때 부자구역과 빈자구역이 확연한 걸 보면서 혀를 차기도 했지만 우리라고 그다지 다르지 않다.
복원한 한양도성은 너무 네모 반듯하고
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여전한 것 같다.
예전에 서울 학생과학관?으로 불리던 돔지붕이 있는 건물은 우리 애들 어렸을 적 여러 번 가서 과학 체험학습을 했던 추억이 있다. 기자재는 좀 낡았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없어 하고싶은대로 맘껏 가지고 놀았다.
길가에 자물통이 주렁주렁이다.
사람이 살면서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어쩌면 사랑의 맹세만큼 덧없는 것도 없으리라.
맹세는 눈비에 바람에 그리고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며 녹슬어가고 잊혀진다.
남산 서울타워도 12시부터 개방하고
인적도 드물어서 잠시 정상에서 서성이다 명동을 목표로 내려왔다.
나름 운치있는 숲길 같은 것도 있어 느낌이 살았다.
명동쪽으로 내려가다보니 세종호텔이 보였다. 이 호텔은 얼마전 각종 갑질로 언론을 통해 유명세를 탔었고, 나와 인연도 좀 있다.
옛날 98~99년도에 구몬학습 다니던 시절
영업실적이 탁월하여 3회 정도 최우수지국 2회, 최우수지구 1회를 했었다.
수상을 하면 사장하고 세종호텔에서 뷔페를먹고 단체사진도 한 장 찍었다. 그게 다였다.
그리곤 싹 잊어버리고 다음날부터 다시 천삽뜨고 허리 한 번 펴기같은 영업을 다시 해야했다.
감히 이야기하건데 눈물젖은 영업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아직 없다.
명동은 젊은 시절 아내와 자주 갔었다. 가만히 있고싶어도 인파에 밀려 어쩔수 없이 밀려가야했던 옛 영화는 이미 오래전 과거로 흘러가버렸다.
드문드문 폐점한 가게가 눈에 띄였고
점심시간이었지만 '인파'는 없었다.
아내와 자주 먹던 '명동칼국수' 원조인 '명동교자'에 들렸다. 명동칼국수는 닭뼈를 고은 국물은 감칠맛이 나지만 국수는 쫄깃하지 않다.
배추김치는 강한 마늘향이 나면서 달콤하다. 예전에는 줄을 서서 먹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고 좀 바쁜 정도이다.
예전에 아내와 처음 갔을 때는 가격이 5천원 이었는데 지금은 9천원이 되었다.
이곳은 일본인들의 요식성지인지라 그들이 단체로 '오이시'를 연발하며 국수를 먹었었지만 현재는 코로나시국인지라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
점심을 먹고 명동성당에 들렸다.
성당 사진을 잘 찍으려고 작은 길을 하나 건넜더니
윤선도의 옛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계단밑에 보인다.
윤선도는 해남윤씨로 지역의 부호인지라 보길도에 원림도 만들고 '어부사시사'도 지었다. 해남의 아흔아홉칸집인 '녹우당'에 가면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대단한 세력가, 남인의 거두가 21세기에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계단 밑의 돌 신세가 되었다.
명동성당은 19세기말의 고딕식 건축물인데 알고보면 벽돌건물이다. 신자들이 울력하여 성당을 지었단다.
이 성당의 앞모습은 잘 알려져있지만 뒷모습이나 옆모습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내 생각에 뒷모습이 오히려 앞모습보다 더 나은 것 같다.
성당 내부는 20여년 전에 한 번 들어가 본 적은 있으나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당시에 겉보기보다 내부가 너무 넓어서 깜짝 놀랐었다.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 더 중요하고, 겉보기보다 내부가 넓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이곳은 현대사의 곳곳에서 정권의 탄압에 맞서 방패가 되어 준 넉넉한 품을 지닌 곳이다.
마지막으로 중국대사관으로 향했다.
내가 알기로 명동 주한중국대사관은 전세계 중국 공관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한다.
새로 지은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은 압도적이지만 길에서는 눈에 띄이지 않는다.
붉은색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경찰이 파수를 선다.
어쩌면 그들은 남의 눈엔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빅브라더가 되고싶은 지도 모른다.
조금 더 걸어서 청계천엘 가볼까 했지만 아들 시험이 끝날 시간이 가까워져서 추계예대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도 이른 바 '격차사회'가 느껴지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일주일마다 한 번씩
2만보의 건강 선물을 보내준 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아울러 생각거리도 덤으로 주어 더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