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티 순교 성지(2015년 2월 7일 - 8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전화 043)533-5710
[배티순교성지의 네 가지 영성]
1.천주교 신자들의 비밀교우촌
2.최양업 신부님의 땀과 신앙이 어려 있는 곳
3.한국 최초의 신학교(가톨릭 대학의 효시)
4.순교자들의 본향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의 장남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고, 두 번째 사제이다.
선종하는 순간까지 한달에 3일 정도 주무시고 1년에 7000리를 걸어다니시며 양들을 찾아 12년 동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땀의 순교자이자 백색순교자임에도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못하셨기에 시복 시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현재 추진 중에 있다.
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 신부님은 그곳 신학교와 필리핀의 마닐라, 만주의 소팔가자 등지를 전전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1849년 4월 15일에는 마침내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이후 신부님은 요동의 차구 성당에서 7개월 동안 사목하시다가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순방하기 위해서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1853년 여름에 배티 조산교구 신학교의 지도를 맡은 이후 약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본당(사목)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또 장마로 길이 끊기는 7-8월에는 배티 사제관에서 저술에 몰두했습니다.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도 지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결국 과로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의식이 꺼져 가는 가운데서도 신부님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에 선종하셨습니다. 이후 신부님의 시신은 진천 공소(경상도 문경설도 있음)에 가매장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초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도록 지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내 존재의 유일한 이유지만 과연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지요. 그러자면 인간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마음도 바꿔야 하고...
우리 신앙 선조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한 삶을 살았고 순교의 삶을 살았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은 소중한 순례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티아서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