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기다림이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은 오지않아. 열병같은 기대감, 그리고 실망만 계속되는거야. 내 마음은 파도치는 밤바다 같아. 달도 없는 밤에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온통 뒤집어지고 밀려나가. 아침이 되면 부서진 잔해들이 마른 귤껍질처럼 하얀 백사장에 여기저기 널려있고. 다시 밤이 오면 파도가 치고.
다시 말하지만 난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이해할 수 없어.
알아.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
왜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거야?
난 노래를 하고 있는거야. 꼭 이해할 필요는 없어. 너는 그냥 앉아서 비비꼬인 빨대로 토마토 주스나 마시면서 내 노래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 되는거야. 난 네 인생의 걸림돌이니까.
맞아 그것도 치워버리기 힘든.
걸림돌이라면 제대로 걸려넘어질 수 있게 묵직하고 거추장스러워야지. 그게 걸림돌의 존재 이유니까. 걸림돌의 물자체를 상상해보고 싶을 때 생각나는 어떤 존재. 그게 나이고 싶어. 너한테 있어서는.
거창해. 너무 거창해. 소박한 맛이 없어. 그거 알아? 거창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들 수가 없어. 마치 너무라는 말과 아주라는 말을 많이 써서 뭔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덜떨어져 보이는 거랑 비슷한거야.
니 말이 내 마음을 후벼파서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그래서 결국 나의 소중한 고통을 살찌우고 있어. 내 유일한 애완동물인 고통말이야. 고통은 사랑이나 공포같은 거랑 달라서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키울 수 있어.
좋겠다 그거.
나만 키우고 있는 게 아니야. 만일 이게 나만의 생각이라면 왜 약국에서 패인킬러라고 부르는 약을 팔겠어. 패인리무버나 패인디스트럭터라고 부르지 않고 말이야.
뭐가 됐든 너는 폐인이야.
패인이기도 하지.
그래. 영어로 하건 한자로 하건 패인이야 넌.
그런데 왜 계속해서 나랑 얘기하고 있는거야? 다른데로 가버려도 될텐데.
왜냐하면 이야기가 끝나면 백지밖에 남지 않게 때문이야. 게다가 너는 스펀지처럼 무슨 말을 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여버리니까. 종이 표적을 향해 총을 쏘는 사람처럼 무해한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한마디로 너는 사람이 아니니까.
추억같은 이야기구나. 언젠가 이런 저런 사람들이 살았었다. 풍경은 이러저러했고 그렇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 눈이 내렸다. 마을이 온통 흰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크리스마스에는 썰매를 탔다. 나무를 베어 통나무집을 만들었다. 그와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지구는 콩알만하게 작아졌고 모두가 행복에 겨워 깊은 잠에 빠졌다.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또 행복해한다. 새로운 사람들의 세계에는 비가 내리고 모두들 옷이 젖는 건 괘념치 않고 즐겁게 거리를 뛰어다닌다. 그런 뜻이지?
맞아. 토마토 주스를 다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해?
첫째로 그건 주스가 아냐. 주스는 완전한 액체여야만하지 그렇게 뭔가가 녹아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액체를 주스라고 부를 수 없어. 그건 케첩이나 되다만 스파게티 소스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주스라고 부르는걸?
거기서 문제가 시작되는거야. 세계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를 모아서 뭉치면 토마토 주스가 나와. 아니 그러니까 주스가 아닌데 주스라고 부르는 바로 그 묽은 것 말이야.
좋아. 그럼 이 묽은 것을 다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해?
둘째로 그 묽은 것을 다 마셔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고문용으로 쓴다거나 성인이 되기위한 통과의례로 써도 될만한 그런 묽은 것을 스스로 마신다는 것. 그건 정말 불가해한 성격의 행위야.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된 이후로는 사람들이 토마토 주스를 마시는 것을 인정해주기로 했어. 그러고나서 허무주의자가 돼버렸지. 맥이 풀려버리는 것 같은 거 있잖아. 하지만 토마토 주스에게도 좋은 점이 있어. 세상 모든 것들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듯이 말이야.
그게 뭔데? 지금 거의 반이나 마셔버렸어. 대단한 성과야.
토마토 주스의 좋은 점은 내가 세계를 살아가는 데 있어 훌륭한 시금석 역할을 해준다는 점이야. 토마토 주스를 마시는 사람과 마시지 않는 사람을 구분함으로서 나는 살아가는 힘을 얻는거야. 살인자와 비살인자를 구분하면 비살인자가 훨씬 많아서 좋지 않아. 수박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런 것들은 기준이 되기 힘들지만 토마토 주스는 항상 사람들을 반으로 나눠주거든. 지금은 의식적으로 비토마토적인 인류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토마토적인 인간들이 주변에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누구보다도 토마토 주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분명히 토마토 주스를 마시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너는 항상 나보다 똑똑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토마토 주스를 마셔본 적이 있어. 그것도 아주 맛있게. 다음 날 정신분열이 일어날 뻔할 정도였어. 내 자신이 나처럼 느껴지지 않고 거죽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이상한 날들이었다구.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말할게. 어디서부터 말해야하는지 모르겠어. 토마토 주스를 마신 날을 어떤 이야기의 정점이라고 한다면 시작은 내가 태어난 그 해부터 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인류의 시작.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없는 허무의 공간으로부터 시작해야할까.
그냥 그날 얘기만 해줘. 아냐 취소할게. 마시기 한시간 전부터 얘기해. 아니. 30분 전부터.
시간은 네시가 조금 넘은 새벽이었어. 나는 반쯤 남은 참치캔이랑 아주 매운 고추장에 비빈 밥이랑 술을 손이 닿는 곳에 놔두고 불을 다 껐어. 왜 그랬는지는 몰라. 언제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왜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까. 그리고 완전한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먹고 마시기 시작했어. 시계가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계는 한번 가고 한번을 쉬고 한번을 가고 한번을 쉬고. 시간은 언제나 가고 있는지 알았는데 시간도 움직이는 순간과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있어. 나는 그걸 옆에 놓인 종이에 적었어. 어둠 속에서. 괜찮아. 나는 늘 어둠 속에서 종이에 몇마디씩 끄적이곤 하니까. 그렇게 30분 동안 마시고 먹으니까 정말로 기대했던데로 토할 것만 같았어. 불을 켜고 마실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뒤져봤는데 참치 기름이랑 토마토 주스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어. 그거 알아? 언제나 신념보다는 육체의 욕구가 먼저라는 사실. 내 얘길 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토마토 주스를 마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한통을 다 마셔버렸어. 델몬트 오랜지 주스 따위보다 훨씬 맛있었어.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걸 마시는 사람들을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했던걸까? 가만있자. 그럼 내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 뒤집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싸웠던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나는 상대방의 위치에 있어야 했던게 아닐까? 남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내 잘못이고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전부 남들이 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마터면 성인군자가 될 뻔했네?
그랬지. 십 분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하지만 잠들었고 다음 날 깨어났을 때에는 숙취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더라. 여전히 토마토 주스는 주스가 아니었고말야.
언제나 그렇지. 황폐한 백사장처럼.
맞아. 황폐한 백사장처럼.
토마토 주스 다 마셨어.
축하해.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묽은 토마토 즙을 다 마신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묽은 토마토 즙을 다 마실 수 있게 된다.
아멘........그런데 왜 너희 집에 토마토 주스 따위가 있었을까?
왜긴 너희 집에 항상 토마토 주스가 있기 때문이지.
.............서울역에는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글을 쓴다는 건 혼잣말을 하는 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은 무섭다. 서울역에서 뭔가 끄적이고 있다보면 언제나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