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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럽인문아카데미 발표용입니다.
아도르노의 변증법
1. 들어가며
1. 변증법은 한때 ‘혁명의 대수학’으로 대우받기도 했다. 맑스는 변증법의 합리적 알맹이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이어서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의 [자본론] 전체가 변증법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엥겔스도 변증법적 사고방식의 혁명적 성격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높이 평가하면서 [반듀링론] 등을 통해 유물론적 변증법의 주요 특징들을 서술하고자 했다. 변증법은 이론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특히 현실적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레닌⋅트로츠키⋅룩셈부르크⋅마오⋅호치민 등의 혁명적 실천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2. 현실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패배와 더불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전 지구를 뒤덮으면서, 변증법에 대한 관심은 소멸의 내리막길로 내몰렸다. 변증법의 핵심어인 모순은 차이의 형이상학에 밀려났고, 대립물의 이행⋅전도⋅통일에 대한 감각은 제반 실천 영역들을 엄격히 나누는 분업체제의 칸막이들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은 절대적 제일원리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인류는 자본독재가 초래하는 총체적 문명위기, 즉 기술혁신에 따른 대량실업과 절대빈곤의 양산, 끊임없이 반복되는 제국주의 전쟁, 제2 제3의 후쿠시마를 포함한 환경재앙 등을 마주하고 있다. 자본독재의 극복 없이 인류의 공존과 공영도 없다. 오늘의 현실이 변증법의 혁명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3. 아도르노의 변증법(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반권위주의⋅탈위계화⋅탈중심주의 등 현대 주류 운동문화의 논거들도 나름으로 구축해놓고 있다. 그의 다면적 논의들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강세를 두고 받아들일 것인지는 독자들의 실천적 필요성에 달려 있겠지만, 그의 변증법이 현대사회의 난관들을 극복하고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유용한 이론적 무기들을 풍부하게 제공한다는 점은 단언할 수 있다. 물론 그것들을 무기로 활용하려면 상당량의 지적 노동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도르노의 무기 저장고 가운데 하나인 [변증법 입문]으로 들어가 주요 무기 몇 가지를 살펴보자.
2. 변증법과 도식주의
1. 변증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헤겔과 정반합이라는 공식을 떠올린다.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과 대립물의 통일, 양질전환, 부정의 부정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극소수 남아 있을 것이다. 또 헤겔 변증법에 대한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악담에 솔깃해 변증법을 ‘과잉결정’이나 ‘문제제기적’이라는 측면으로 축소해 놓고 싶어 하는 교양인들도 꽤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레닌이 헤겔의 [논리학]을 읽으며 메모해 놓은 변증법의 주요 요소들만 해도 ‘고찰의 객관성’, ‘분석과 종합의 통일’, ‘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무한한 과정’ 등등 16가지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좋을 것이다. 이로써도 변증법이 충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을 비롯한 몇 개의 공식으로 요약되는 도식주의가 아니다.
2. 헤겔은 사태(Sache) 자체의 생명과 멀어지는 도식과 형식주의적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도식적인 요령은 써먹기 쉽고 금방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이미 들통이 난 요술을 반복하는 것처럼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물에 ‘몇 가지 보편적 도식’을 갖다 붙이고 분류하는 이 형식주의적 사고가 산출하는 것은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을 감춰버리는 ‘삼라만상의 조직에 대한 뻔한 보고서’일 뿐이다. 아도르노는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헤겔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도식의 문제점을 개념적 질서와 사유 전반에까지 확대하여 파악한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변증법을 “개념적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를 통해 개념적 질서를 수정하는 기술을 수행하는 사유”라고 정의한다. 또 “사태를 통해 사유를 스스로 제한하려는 시도” 등으로 규정하기도 한다.(입문19)
3. 위의 규정에 따르면 우선적인 것은 사태 내지 대상이며, ‘개념적 질서’나 ‘사유’는 대상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것에 근거해 수정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대상에 다가갈 자유’(입문256)와 ‘생산적 수동성 혹은 자발적 수용성’(입문145)을 강조한다. 이와 반대로 흔히 대상들을 특정한 도식이나 개념 혹은 원리 아래 집어넣고, 이런 식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들(비동일자)을 무시한 채, 개념과 그 개념의 대상을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 버리기 쉽다. 이러한 사유를 아도르노는 ‘동일성 사유’라고 비판한다. 동일성 사유는 어떤 것이 무엇에 속하는지를 말하는 데에 머문다. 대상을 다루기 편하게 분류해 놓고 더 이상 대상 자체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행정적 사유 혹은 관리되는 사유’(입문240) 따위가 동일성 사유의 극단이다. 동일성 사유는 역동적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단순하고 무자비한 결정으로 치닫기 쉽다. 동일성 사유에 대한 비판은 아도르노 변증법의 주업무 중 하나다.
3. 개념의 운동⋅노동⋅노고
1. 도식적 사유방식의 대안으로 아도르노는 ‘개념의 운동’(현상38)이라는 헤겔의 구상을 적극 받아들인다. 인간의 유한한 사고로는 역동적 현실 대상의 무궁무진한 속성들이나 관계들을 극히 부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부단히 새롭게 다가오는 대상들을 개념들의 한정된 의미에만 의존하여 파악해서는 대상들에 충실한 인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개념의 운동은 인식의 이러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즉 개념들을 활용하여 그 대상들을 추적하고, 양자를 대질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개념의 원래 규정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개념의 원래 의미를 버리거나 자의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대상을 부단히 대질하여 양자의 일치를 추구하는 점에서 원래의 개념을 정당하게 대하는 것이다.(입문29) 레닌은 개념의 운동 내지 유연성이 주관적으로 적용되면 ‘절충주의와 궤변’이 되고, 객관적으로 적용되면 ‘변증법’ 내지 ‘세계의 끊임없는 발전에 대한 올바른 반영’이 된다고 본다.(철학55)
2. 도식주의나 동일성 사유에 빠지지 않고, 심화된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개념의 운동에는 대상을 근거로 기존의 개념적 규정들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인식주체의 지적 노동과 노고가 불가피하다. 아도르노는 이 반성의 수단도 개념적 사유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철학이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부정70-71)고 주장한다. 그에게 “인식의 유토피아는 개념들을 통해 비개념적인 것을 밝히되 그것을 개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부정63-64) 이러한 생각은 이성⋅논리⋅계몽⋅과학기술 등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청산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해방적 관점에서 그 방향을 바꾸고자 하는 아도르노의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한에서 아도르노는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 머문다. 그러나 그는 동구의 공식철학인 디아마트(Diamat)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그는 디아마트가 개념의 노고를 기울이지 않고 기존의 공식과 원리들을 무비판적으로 외워 반복하여 써먹는 데에 그침으로써 변증법에서 멀어졌다고 단언한다.(입문89-90) 이런 평가의 타당성 여부 문제와 별도로, 비판적 사고의 노고를 기울이자는 데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3. 개념을 통해 개념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점에서, 아도르노는 개념적 사고를 버리고 직관에 의존하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직관도 어떤 배타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인식과정 속의 한 계기로서만 정당성을 얻을 뿐”(입문172)이라고 본다. 또 경직된 개념들이 직관 형태로 살아 있는 인식으로 전도되는 배후에는 개념의 운동이 있다고 주장한다.(입문174) 이런 이유로 그는 베르그송을 비판한다. 베르그송은 분류법적이고 기계적인 개념들을 통한 사유를 지칠 줄 모르고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올바르다고 간주한 인식의 종류를 “작은 상자 속에 집어넣고 마치 그것이 인식과정의 총체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인 듯이 다루었다”(입문173)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개념을 통한 재현적 인식, 곧 대상에 다가가려는 인식을 폄하하는 다양한 현대 이론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이론들의 과장법과 인식론적 난관에 비하면 아도르노의 역설적 주장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4. 모순의 중심적 역할
1. 아도르노는 헤겔이 모순을 인식의 기관으로 받아들이며 이로써 칸트의 인식론을 넘어선다고 평가한다.(입문124) 칸트는 감성⋅오성⋅이성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한다. 감성은 경험적 현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오성은 감성으로 받아들인 현상을 규칙에 따라 통일하여 경험적 인식을 만든다. 이성은 오성의 규칙을 원리 아래 통일하는 최고의 능력이다. 이성을 경험의 한계 너머로 확대하여 사유하고자 하면 이율배반에 빠진다. 칸트는 이성을 경험의 한계 너머로 확대하려는 이성의 본성을 경계하지만, 이성이 이율배반적 혹은 모순적 사유에 빠져드는 것이 이성의 본성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인정한다. 칸트의 이율배반론은 그처럼 감성과 오성을 엄격히 구분하는 데에 근거하지만, 헤겔은 그러한 구분을 고수하지 않는다.(입문108) 하지만 헤겔은 이율배반적 사유 자체가 이성의 본성상 필연적이라는 칸트의 생각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를 발판으로 “사유는 본질적으로 모순들 속에서 운동한다”는 논리를 발전시킨다.(입문109) 즉 칸트가 사유에 필연적인 것으로서 끌어들인 모순을 헤겔은 의식적으로 ‘철학적 사유 일반의 기관(Organon)으로’ 삼는다. 아도르노는 이로써 이성이 필연적으로 모순에 얽혀 들어가지만, 동시에 이 모순들에서 벗어나고 스스로를 바로잡을 힘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입문62-63)
2. 모순을 사유의 기관으로 삼는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비합리적 억지나 궤변이 아니다. 판단의 형식을 취하는 어떤 유한한 인식에는 그 판단 형식으로 인해 일정한 허위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A=A라는 동어반복을 넘어서 A=B라는 인식으로 나아가면, 예컨대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판단처럼 명백히 타당한 경우에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며, 이처럼 참과 허위를 동시에 주장하는 점에서 모순에 빠진다. 어떤 유한한 인식도 참이면서 동시에 허위인 이 모순구조를 피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개별 인식은 일반적으로 모순을 통과하면서만 어떤 인식이 된다”(입문124)고 할 수 있다. 유한 판단의 이러한 모순을 넘어서 전체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것이 헤겔이 강조하는 개념의 운동이기도 하다.
3. 모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아도르노가 모든 것을 모순으로 환원하거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차이 자체가 일종의 유토피아를 나타낸다고 본다. 즉 “상이한 것이 나란히 존속하며 서로를 말살하지 않는다는 것, 또 상이한 것이 다른 것에다 발전의 여지를 허용한다는 것”, 그리고 “상이한 것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화해된 세계의 꿈”이라고 주장한다.(입문132) 하지만 아도르노는 현실 자체의 모순적 적대적 성격이야말로 변증법적 사유 일반을 고취한 경험이며, 이러한 경험이 논리적 계기들보다 한층 아래에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이 “객관적 모순상태 위쪽에서의 조율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순상태 자체를 통과하면서만” 세계의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점, “정면돌파를 꾀했다는 점”이 헤겔 철학의 특성이라고 지적한다.(입문134-135) 정면돌파의 측면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이 모순들로 꽉 차 있다”(자본1,20)는 관점에서, 특히 노동과 자본의 근본적 적대관계를 파헤친 맑스가 헤겔을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들뢰즈의 차이 형이상학이 맑스의 자본론에서조차 대립과 모순을 차이로 치환하거나 차이에 종속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달리, 현실적 모순과 적대를 정면돌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점에서 아도르노는 맑스주의의를 고수하는 셈이다.
5. 내재비판의 힘
1. 모순과 적대로 들끓는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주장들은 적대관계의 산물이면서 적대관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언론매체들과 인터넷을 뒤덮고 있는 혐오의 언어들은 우리 사회가 ‘논쟁사회’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본독재가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오늘날 자본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논박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여야 정치권력이 자본독재의 분파들이라면, 이들의 논쟁은 아무리 격렬해도 자본독재의 근본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한계가 있다. 변증법은 표면적 갈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반성 혹은 “조직화된 논박의 정신”(입문19)을 통해 그것들이 자본독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다. 이때 변증법적 논박은 자본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어떤 이상이나 도덕원칙 따위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이데올로기를 따라가면서 그것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즉 어떤 사고에 대한 변증법적 논박은 “그 사고에 맞서서가 아니라 그 사고와 더불어, 그 사고 자체의 힘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적 방법이 기본적으로 “내재적 비판의 방법”이라고 지적한다.(입문65)
2. 예컨대 맑스는 어떤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에 비추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스스로 어떠하다고 주장하는 바에 비추어 이 사회를 평가하고 비판한다. 즉 맑스는 ‘이 사회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교환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이러한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는 식으로 비판을 수행한다.(입문65-66) 이때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주장을 실제의 자본주의 사회와 대질하여 비판한다고 해서 자유와 정의의 이념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에서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이제까지 통용되는 자유와 정의의 개념을 수정하고 확장한다.(입문66-67) 맑스의 잉여가치론부터가 등가교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착취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히는 내재비판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내재비판의 효능을 입증할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그렇다고 해서 내재적 비판이 만병통치약인 것은 아니다. 자본독재의 대리자들이 거짓말을 뻔뻔하게 늘어놓더라도 언론이 적당히 포장해서 묻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엄밀한 내재비판을 통해 그 허위를 입증하고 논박하더라도 그들을 설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내재비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아도르노도 내재비판을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그는 내재적이냐, 초월적이냐 하는 양자택일을 고집하는 것은 전통 논리학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대상을 내부로부터, 즉 그 자체의 요구⋅근원⋅합법칙성에 따라 고찰해야 하지만, 또한 외부로부터, 즉 대상이 처해 있는 기능적 연관관계나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지니는 의의 등의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처럼 사태 속에 있어야 하면서 또한 사태 외부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의 이중성 또는 사고의 유동성도 변증법적 사고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밝힌다.(입문259) 하지만 내재비판은 자본독재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공감을 넓히고 대안적 헤게모니를 키우는 과정에서 충분히 의미 있다. 그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판 대상을 외면하지 않고 면밀히 연구하는 노고, 즉 개념의 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개별과 전체의 관계
1. 개별 인식들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모순과 유동성에 따르는 상대주의를 피하고 인식의 구속성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아도르노는 ‘진리는 전체다’ 내지 ‘진리는 본질적으로 결과다’(현상24)라는 헤겔의 명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헤겔이 말하는 전체는 파손되지 않은 통일성을 이루는 것 혹은 유기체론적인 비합리적 전체가 아니며, 자연 전체를 뜻하거나 어떤 범신론적 색채를 띠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헤겔 철학의 체계와 같은 것이며 “개념의 운동을 완전히 통과함으로써만 그 본연의 상태로 되는 일종의 요구 혹은 계획”(입문50)이다. 즉 전체로서의 진리는 부단한 개념의 운동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종 결론으로 압축된 명제가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의 설명에 따르면 헤겔이 말하는 결과란 “그 자체의 발생, 기원, 그리고 그것을 그 결과에까지 끌고 온 과정 내지 노정도 함께 생각되고 함께 지양되어 있는 어떤 것”(51)이다. 이는 구체적인 것을 “수많은 규정들의 총괄”이라고 보고,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방법”을 “과학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맑스의 입장과 일치한다.
2. 변증법은 대상에 충실코자 함으로써 실증주의와 연루된다. 아도르노는 실증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는 ‘진리는 전체다’라는 생각이 실증주의를 넘어설 헤겔 변증법의 처방이라고 본다. 이때 전체를 강조하는 것이 개별 인식을 소홀히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개별 현상들을 면밀히 보되 개별화에 머물지 말고 그것들을 규정하는 총체성 속에서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것”임을 파악해야 함을 의미한다.(입문197)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비-자연적인 태도”라고 칭하기도 한다.(입문206) 나아가 우리는 한편으로 전체에 근거해 단순하고 경직된 개별 규정을 넘어서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과 특정한 것에 대한 경험을 통해, 전체를 수정하고 그것의 경직된 독단적 성격을 버리게 하는 힘도 가져야 한다.(입문52) 아도르노는 특히 전체를 실체화하여 외부로부터 개별 현상에 덮어씌워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전체와 부분은 단수한 포괄관계가 아니라 상호 대립 속에서 서로를 생산하는 역동적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입문156) 그는 전체를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여 그로부터 단순한 결론들을 끌어내게 되면 그것은 허위가 된다고 보며, 이러한 현상이 동구권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는 변증법이 확고한 테제들의 나열로 경직되며, “이로부터 간단히 개별자가 추론되고 무엇보다 그로부터 개별자가 그때그때 판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상이야말로 변증법 이론이 무너지고 있는 징후라고 비판한다.(입문175)
3. ‘진리는 전체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매우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아도르노는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정신의 산물로 파악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으로 귀결되는데, 주체의 유한성과 대상의 무한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동일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이 궁극적으로 닫힌 변증법이라고 보며, 반면에 유물변증법은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열린 변증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입문49)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동일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구속력 있는 인식을 얻을 가능성을 아도르노는 미시론적 관점에서 찾는다. 즉 미세한 것, 개별적으로 주어진 것에 침잠하고 그것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그 앞에 머물 때, 그것은 정태적이고 궁극적인 것이기를 그만두고 역동적 형성과정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입문229-230) 이 미시론의 설득력과 생산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유물변증법이 열린 변증이 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열린 변증법이 궁극적 절대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인식과 대상의 일치 여부 문제를 회피하는 데에 반해 변증법은 일치를 향해 부단히 개념의 노고를 쏟기 때문이다.
7. 절대적 제일원리 비판
1. 유물변증법은 궁극적인 절대지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제일원리’를 출발점으로서 추구하지도 않는다. 헤겔의 관념변증법도 어떤 제일원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비변증법적 사유는 불변적 제일원리를 찾아내면 그 다음의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답들을’ 얻는다고 상상한다.(입문41-42) 이와 달리 헤겔은 근원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어떤 근원이라는 것도 실은 근원이 아니며, 또 제일원리임을 주장하는 모든 것이 이미 자체로서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입문178) 아도르노는 유물론이 중요시하는 사회생활의 물질적 조건도 절대적 제일원리가 될 수 없다고 본다.(입문42) 또 그는 명석판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만을 받아들이라는 데카르트의 규칙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 규칙은 오류와 혼동을 막는 데에 기여하지만, 인식 대상 자체가 내적으로 일의적이며(명석) 다른 것들과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지(판명)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입문230) 예컨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시각 자료 역시 눈이라는 육체적 조건과 분리되지 않으며, 이 둘의 관계는 제일원리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것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조건짓는 것들의 관계 속에’ 있다.(입문229)
2.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확고부동한 절대적 제일원리로부터 연속성을 띠고 발전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부터 아도르노는 주목할 만한 결론을 끌어낸다. 그는 인식의 출발점은 변증법적 사유에 대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모든 개별 계기들 속에서 전체의 힘이 동일한 방식으로 지배하며, 개별 계기들은 모두가 중심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다면, 일관된 변증법적 사유는 “극히 덧없는 현상, 외견상 극히 비공식적인 현상에서 시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처럼 공식적인 사유의 범주들에 의해 아직 점령되지 않은 것들이 전체의 감추어진 본질로 훨씬 더 잘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입문250) 이처럼 아도르노는 사고가 위계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짜임관계를 이룬다는 관점에서, 모든 사고가 중심과 같은 거리에 있으며, 모든 개별 명제가 논증의 힘, 반성적 사고의 힘으로 충만해 있고, 모든 말, 모든 명제, 모든 구문적 틀이 다른 것들과 똑같은 책임을 지는 것이 철학에는 이상적인 상태라고 본다.(입문361)
3. 확고부동한 절대적 제일원리에 대한 비판은 탈위계적 사유방식 이전에 역사적 사유방식을 고무한다. 아도르노는 몽테스키외와 비코, 콩도르세를 거쳐 마침내는 피히테와 헤겔에 이르러 완성된 ‘역사적 차원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견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입문31) 그는 “세계가 사물화되고 관습화될 때에는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 얼어붙은 것, 굳어버린 것이 마치 우리에게 단적으로 언제나 타당한 즉자존재자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사물화 내지 관습화에 맞선 싸움이 변증법적 사유 일반의 논쟁적 출발점을” 이룬다고 주장한다.(입문33)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영원한 자연상태라고 받아들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보고 그 사멸 가능성을 논증하는 맑스의 ‘세계사적 전제전환’은 변증법의 역사적 사유방식을 떠나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독재의 영속성을 전제하는 무비판적 이론과 실천이 노동자민중의 의식⋅감각⋅욕구까지 압도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변증법적 사유의 퇴조와 맞물려 있다. 자본독재로 인한 인류 공멸의 위기를 공존과 공영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변증법적 개념의 노동도 필수조건일 수밖에 없다.
8. 나가며
1.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생산적 수동성 혹은 자발적 수용성’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 문제’라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번째 테제의 혁명정신과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인식주체를 실천과 동떨어진 방관자로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유발할 수 있다. 또 아도르노가 제일원리 비판에 끌어들이는 ‘미시론적 시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서사 비판’을 예고하는 듯하다. ‘개념의 운동’과 해체론적 ‘텍스트의 그물’ 사이에 연결선을 긋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특히 탈위계적 사고는 오늘날 지배적인 다원주의적 반-노동중심주의적 운동문화의 논거로 쓰일 수 있다.
2. 그러나 모순을 중심에 두는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 전통을 고수하는 점에서, 또 기표나 개념이 아니라 대상 자체에 분명히 우선권을 인정하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변증법은 포스트모던 이론들 속에 파묻히지 않는다. 동일성 사유를 비판하고 개념의 노동을 강조하는 그의 변증법은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에 맞선 인류사적 해방전쟁 속에서 특히 운동 주체들의 자율적 비판적 의식 발전을 위해 상당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자신은 모든 것을 도구화하려 드는 전략적 이성에 격렬히 반대하겠지만, 인간해방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이론의 크나큰 영예 아니겠는가.
3. 변화한 노동환경과 자본의 적응력을 근거로 자본독재의 영구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이데올로기들이 부끄러움 없이 활보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물적 조건이 필요하다. 총체적 지배와 관리되는 사회 개념이 설득력을 지니는 데에는 이차대전 이후 미국과 서독의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이 밑거름 노릇을 했을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한동안 그러한 물적 조건의 생명을 연장해 주었겠지만, 자본의 내적 역동은 불가피하게 위기상황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다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수밖에 없다. 그 답에 따라 풍요로운 평등사회가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첫댓글 고생 많으셨습니다. 봄 비 치고는 많이 옵니다. 건강 챙기시며 다녀오십시오. 오늘 오후 많이 배우겠습니다
거북이님 오늘도 열공모드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