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 조미숙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빠짐없이 나간다. 커피의 유혹은 어떤 것도 날 이기지 못한다. 어느 날 눈보라가 치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서 앞집 여자를 만났다. 이 날씨에 어디 가냐고 물었다. 커피 마시러 간다고 했더니 멋있단다. 김장 김치 한 포기를 갖다줬더니 그때도 직접 담갔냐며 그러더니, 멋있는 것도 다 얼어 죽었나 보다.
곰이 되어 겨울잠을 잔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배가 남산만 해졌다. 빈궁기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헬스도 끊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가스비가 걱정되어 보일러도 켜지 않은 거실은 썰렁하다. 소파 위에 이불을 하나 두고 추우면 뒤집어쓰고 지냈다. 추운 데서 일하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눈치가 보였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난로를 하나 샀다. 남편 전용으로 켠다. 그래도 기온이 5도쯤 되는 추위에는 보일러를 돌렸다. 물론 애들이 모인 설연휴에도 켰다. 그렇게 아꼈는데도 지난달 가스비가 5만 원이 나왔다.
오직 이불 속에서 지내다 보니 잠만 쏟아진다. 책도 유튜브도 수면제다. 느슨해진 일과에 커피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점심 챙겨 먹고 나서는 길은 한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고 있었다. 카페에서 책 좀 읽다가 온다. 그나마 지인들을 만나면 수다로 시간을 때운다.
봄도 다가오는데 이젠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도 된 것 같아 기지개를 켰다. 보름달이 되어버린 얼굴과 텅 빈 머리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움직여야 한다. 만 보를 목표로 걷는다. 유달산 둘레길을 가지 않으면 만 보 채우기가 쉽지는 않았다. 건강뿐만 아니라 각종 어플의 포인트를 받으려면 편법(그냥 핸드폰 흔들기)을 써서라도 채워야 한다. 또 게으름에서 벗어나려고 다섯 시 50분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새벽 독서 모임에 참가하거나 명상이나 요가를 했다. 하지만 작심 3일로 끝났다. 독서 모임은 내 수준 미달로 자괴감에 패했고, 명상이나 요가는 하고 나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이불 밖은 위험했다.
어제는 보물이(반려견)와 유달산을 돌았다. 쌀쌀한 데다 오후 세 시가 다 되는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둘레길에서 벗어나 한적한 옛길로 접어들었다. 가끔 혼자서도 잘 가는데 어쩔 때는 갑자기 무섬증이 들기도 해서 한동안 안 다니던 길이다. 보물이가 옆에 있으니 안심이 된다. 너덜지대를 지나는데 백발의 할아버지가 햇볕을 쬐며 누워 계셨다. 명당자리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내리막길은 뒤로 돌아서서 걸었다. 그럴 때마다 보물이가 이상한 듯 쳐다본다. 무릎이 덜 아픈 것 같았다. 지팡이를 짚기도 하는데 강아지 목줄을 쥐면 손이 불편해서 그냥 간다. 누군가 봄은 연둣빛이 아니라 붉은빛으로 온다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단풍나무 잎눈이 붉은빛이다. 수리딸기 새 줄기도 불그스름하다. 쥐똥나무 새순이 연둣빛으로 앙증맞게 올라왔다. 제일 빨리 잎을 틔웠다.
둘레길을 걷고 와서 바로 유튜브를 보며 근력 운동과 요가를 한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숨이 차올라 헉헉거린다. 요가를 할 때면 굳어 버린 몸이 아우성을 친다. 혼자 뒹굴고 나자빠지고 난리굿이다. 거기에 틈나는 대로 명상한다. 잠시도 잡생각을 떠나지 못하는 내가 참 안쓰럽다. 시도 때도 없이 이끈이의 말을 듣지 않고 딴생각에 빠진다. 잠깐씩 졸기도 한다. 배는 비우고 자세는 바르게 하고 머리는 채우려니 벅차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로 속꾀나 끓였다. 산림복지전문업체에서 일하는데 연말이면 계약기간이 끝나 쉰다. 다시 입찰을 받아야 일자리가 생기는데 늘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여러 군데서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청에서 간부로 퇴직한 분이 업체를 차렸다고 해서 전관예우하는 일이 생길지, 지난해 사고로 불이익은 당하지 않을지 여러모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직도 앞날은 오리무중이지만 이젠 거의 포기 상태다. 4월 말에나 공고가 난다는데,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전히 난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뭘 쓸까 고민만 하다가 이렇게 됐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하지 못한 채 숙제 마치기에 급급하다. 그래도 겨울잠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켰으니 이젠 시작이다. 다가오는 봄을 두 팔 벌려 안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