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2025.1.27.월 발제 박은희
영화가 섬세하고 잔잔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세심하다. 제일 좋아하는 배우 안소니 홉킨스의 미세한 표정 연기도 일품이다.
스티븐스는 1930년대 영국 달링턴 경 저택에서 집사 일을 한다.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한 것을 보면 10년 이상은 된 것 같다. 스티븐스에게 만족은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주인의 부와 계급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훌륭할 때만 가능하다는 단서가 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전적으로 믿는다. 그도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하인이지만 주인과 동일시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가 주인처럼 보인다. 달링턴 경이 집에 오는 손님이 몇 명인지 모를 때 정확하게 말해주는 모습을 보면 누가 주인인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스티븐스는 총무와 집사 보조를 새로 뽑는다. 총무는 유능하지만 어린 여자고, 집사 보조는 자신의 아버지다. 주인에게 아버지만 소개하는 것이 이상했다. 총무 켄튼 양이 하급자인 집사 보조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아버지뻘 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1930년대 영국의 남성 중심과 계급 사회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54년을 집사로 일한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청소를 하다가 도구를 그냥 두고 가거나, 중국 인물상을 엉뚱한 곳에 두는 등 실수를 여러 번 한다. 켄튼 양이 아버지에게 일을 조금만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차를 내어 가다가 넘어지는 사고 일어나고 달링턴 경이 중요한 손님들이 오는데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곧바로 식사 시중에서 청소하는 일로 아버지의 역할을 변경한다. 그가 나가자 주인이 소파에 앉아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이 인상 깊다. 말을 타고 있는 손님 옆에서 음료수 잔을 들고 서 있는 모습도 충직한 개가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의사가 왔는데 발이 아픈 손님에게 의사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의사는 위급한 상황이냐고 묻는데 대답 없이 가서 살펴달라고 한다. 그는 충실한 집사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주인이다. 아버지가 쓰러져도, 돌아가셔도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이 먼저다. 오랫동안 집사를 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언제나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다. 그 모든 것이 주인을 위한 것이다. 본인을 위한 일은 없다. 강박적으로 집사 일을 한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과연 스티븐스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저택의 총무 켄톤. 그녀도 일에 있어서는 유능하다. 정원에서 꽃을 꺾어 화병에 담아 스티븐스 사무실에 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둘 사이에 유대감이 형성된 것 같다. 스티븐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눈을 감겨 주기도 한다. 스티븐스 방에 꽃을 가져다주고 무슨 책을 읽는지 질문하고 대답할 때까지 계속 물어본다. 새로 온 하녀(리지)와 하인(찰리)의 키스 장면보다 그와 그녀가 책을 두고 실랑이하는 모습이 더 설레는 장면이다.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만 멈춘 것이 아쉽다. 어학 수준을 높이기 위해 책을 읽고, 사랑도 책으로 배운 그.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한데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밀쳐낸다. 요즘 같으면 그녀가 먼저 키스했을 텐데.
주인이 독일 여자 두 명을 하인으로 고용했었다. 그런데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내보내라고 한다. 그의 기준에서 예의 바르고 청결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항변하지만 결국 주인의 말을 따른다.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안했냐고 질책할 때 주인님의 결정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녀는 그들을 해고하는 것은 범죄이고 만약 해고한다면 본인도 나간다고 경고한다. 난감해하는 그.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그녀는 자신을 비겁자고 속물이라고 진실을 말한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자신을 두렵게 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녀가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 하지 않고 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말해 버리는 장면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에게 리지가 와서 찰리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너무 일찍 결혼해서 후회하는 일이 많고 돈이 없으면 불행할 수 있다고 말리지만 서로가 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하는 리지를 보내준다. 젊은 연인이 떠나고 그녀는 힘들어한다. 어쩌면 그 연인들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휴가를 내는 그녀.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청혼을 받는다. 그녀는 고민하지만 일 얘기만 하는 스티븐스를 보면서 결혼하겠다고 하고 저택을 떠난다. 스티븐스는 손님 대접을 위해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그녀가 떠난다고 했을 때 괜찮다고 하지만 괜찮지 않은 그다. 포도주병을 깨기도 한다. 울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도 다가간다. 겨우 한다는 말이 깨진 병이 있으니 하인을 시켜 치우라고 한다.
20년이 지나 재회한 두 사람. 그녀는 그를 화나게 하고 싶어 떠났고 긴 시간 동안 불행했다고 고백한다.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지만 그들은 헤어진다. 비 내리는 허공에서 맞잡은 두 손이 떨어지는 장면은 애절하다. 그녀는 딸아이가 임신해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한다. 그녀도 결국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녀의 하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녀는 남아있는 나날 동안 손자(녀)가 크는 것을 보면서 지낼 것이다. 하지만 손자(녀)가 어른으로 성장하면 또 외로움을 찾아오지 않을까? 다시 스티븐스에게 연락을 할까? 옛 기억을 추억하며 나이 들 것 같다.
반대로 그가 그녀 옆에 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주인님을 위해 하인들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는 남아있는 나날을 항상 일하고 또 일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언제나 안에서 밖을 본다. 문에 있는 둥근 창을 통해 그녀가 오는 모습을 본다. 창문으로 밖을 보며 그녀가 가는 모습을 본다. 아버지의 실수를 확인하라고 말하는 그녀를 내보내고 열쇠 구멍으로 본다. 굴뚝으로 들어온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창문을 닫은 후 창밖을 본다. 평생 주인으로 살지 못한 그는 과연 저택을 떠날 수 있을까? 그녀가 함께하자고 했다면 저택을 떠났을까? 아마도 아버지처럼 자신의 집도 아닌 저택에서 늙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위엄있게 평생을 사는 것도 자랑스러울 수 있다. 의무와 책임은 있는데 자기의 욕망을 감추거나 못 알아채면서 사랑도 놓치고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 아쉽다.
나에게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두렵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무엇 또는 누구에게 충실했나? 누구 또는 무엇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았나? 나를 지탱하고 버티게 해준 강박은 무엇이었나? 영화를 보면서 질문만 선명해졌다.
첫댓글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장면들을 강박증과 연결하여 읽어내려는 자체가 강박인듯 ㅋ 장면장면 잘 묘사해 주어서 기억을 되살리며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