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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I FANTINE
BOOK THIRD - IN THE YEAR 1817(1817년의 일)
CHAPTER I - THE YEAR 1817(1817년)
1817 is the year which Louis XVIII., with a certain royal assurance which was not wanting in pride, entitled the twenty-second of his reign. It is the year in which M. Bruguiere de Sorsum was celebrated. All the hairdressers' shops, hoping for powder and the return of the royal bird, were besmeared with azure and decked with fleurs-de-lys. It was the candid time at which Count Lynch sat every Sunday as church-warden in the church-warden's pew of Saint-Germain-des-Pres, in his costume of a peer of France, with his red ribbon and his long nose and the majesty of profile peculiar to a man who has performed a brilliant action. The brilliant action performed by M. Lynch was this: being mayor of Bordeaux, on the 12th of March, 1814, he had surrendered the city a little too promptly to M. the Duke d'Angouleme. Hence his peerage. In 1817 fashion swallowed up little boys of from four to six years of age in vast caps of morocco leather with ear-tabs resembling Esquimauxmitres. The French army was dressed in white, after the mode of theAustrian; the regiments were called legions; instead of numbers they bore the names of departments; Napoleon was at St. Helena; and since England refused him green cloth, he was having his old coats turned. In 1817 Pelligrini sang; Mademoiselle Bigottini danced; Potier reigned; Odry did not yet exist. Madame Saqui had succeeded to Forioso. Therewere still Prussians in France. M. Delalot was a personage. Legitimacy had just asserted itself by cutting off the hand, then the head, of Pleignier, of Carbonneau, and of Tolleron. 1817년은 루이 18세ᅟᅡᆨ 왕위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재위 22이라고 일컫던 해이다. 브뤼기에르 드 소르솜이 명성을 떨쳤던 해이기도 하다. 이발사들은 머리 분과 왕조의 헤어스타일의 부활을 열망하며 이발관에 파란 칠을 하고, 백합꽃을 장식했다.
랭슈 백작은 매주 일요일 프랑스 귀족원 의원복에 붉은 수장을 달았고, 그의 격조 높은 코에 어울리는 드높은 일을 해 낸 우아한 얼굴로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의 지정식에 교구 회원으로 참가했던 평화로운 때였다. 랭슈 씨의 드높은 일은 바로 그가 보르도 시장직에 올랐을 때 좀 서둘러서 1814년 3월 12일(파리가 함락되던 날)에 그 도시에 앙굴렘 공작(루이 18세의 조카)에게 넘겼다는 사실이다. 그렇게는 그는 귀족 회원이 되어싿. 1817년에느 어린 남자아이들이 에스키모인처럼 뾰족한 모로코 가죽 귀덮개 모자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오스트리아식 흰 제목을 입었다. 연대를 레이옹이라 불렸고, 각 연대는 그 지방의 이름으로 불렸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고, 영국에 그에게 새 옷을 허락하지 않아서 낡은 옷을 고쳐 입고 있었다. 1817년은 페레그리니가 노래로 명성을 얻고, 비고티니 양이 무용으로 인기를 끌던 해이다. 연극계에서는 모티예의 시대가 열렸고, 오드는 아직 알려지기 전이었다. 댄스계에서는 사키 부인이 포이오조의 뒤를 이었다. 프랑스에는 아직도 프로이센의 군대가 남아 있었다. 들랄로 씨가 영향을 마치고 있었다. 정통 왕조는 플레니에와 카르보노와 콜르롱의 손목을 끊고 이어 목을 벰으로써 그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The Prince de Talleyrand, grand chamberlain, and the Abbe Louis, appointed minister of finance, laughed as they looked at each other, with the laugh of the two augurs; both of them had celebrated, on the 14th of July, 1790, the mass of federation in the Champ de Mars; Talleyrand had said it as bishop, Louis had served it in the capacity of deacon. In 1817, in the side-alleys of this same Champ de Mars, two great cylinders of wood might have been seen lying in the rain, rotting amid the grass, painted blue, with traces of eagles and bees, from which the gilding was falling. These were the columns which two years before had upheld the Emperor's platform in the Champ de Mai. They were blackened here and there with the scorches of the bivouac of Austrians encamped near Gros-Caillou. 시종장 탈레랑 공과 재무 대신에 임명딘 루이 신부는 서로 마주 보며 점잖게 같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1780년 7월 14일 파리의 마르스 광장에서연합 대회의 미사를 드렸는데, 탈레랑은 주교로서 미사를 드렸고, 루이는 부제로서 도왔다. 1817년에, 비로 이 마르스 광장의 보도에서 파랗게 칠한 커다란 나무통들이 독수리와 별의 금문장도 벗겨진 채 비를 맞아 잡초 속에 썩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이 년전가지만 해도 열병식 때 황제의 사열대를 받치던 기둥이었다. 그것은 그로카유 근처에서 숙영하던 오스트리아 부대가 댄 불 때문에 여기저기 새가맣게 그을어 있었다.
Two or three of these columns had disappeared in these bivouac fires, and had warmed the large hands of the Imperial troops. The Field of May had this remarkable point: that it had been held in the month of June and in the Field of March (Mars). In this year, 1817, two things were popular: the Voltaire-Touquet and the snuff-box a la Charter. The most recent Parisian sensation was the crime of Dautun, who had thrown his brother's head into the fountain of the Flower-Market. They had begun to feel anxious at the Naval Department, on account of the lack of news from that fatal frigate, The Medusa, which was destined to cover Chaumareix with infamy and Gericault with glory. Colonel Selves was going to Egypt to become Soliman-Pasha. The palace of Thermes, in the Rue de La Harpe, served as a shop for a cooper. On the platform of the octagonal tower of the Hotel de Cluny, the little shed of boards, which had served as an observatory to Messier, the naval astronomer under Louis XVI., was still to be seen. 그 중 두세 개는 그들의 진중에서 불태워져 오스트리아 병사들이ㅡ 커다란 손들을 쬐어 주었다. 그 열병식은 6월의 마르스광장에서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1817년이라는 해에는 두 가지가 일반 사람들의 이야깃거리였는데, 그것은 <볼테르 쿠케> 라는 책과 현자잉 인쇄된 담뱃값이었다. 그 즈음 파리에선 마르셰오플리뢰르의 연못에 제 형제의 머리를 던지 도툉의 죄가 물의를 빚고 있었다. 해군정에서는 후일 쇼마레에게는 치욕을 주고 제리코에게는 명예를 준 저 불행한 전함 메뒤즈호에 관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실브 대령은 솔리만 총독이 되기 위하여 이집트로 떠났다. 아르프 거리의 태름 궁은 한 통 제조업자의 가게가 되어싸 클뤼니 저택 팔각 탑의 평평한 옥상에는 루이 16세 대 해군의 천문학자였던 메시에가 천문대로 사용했던 조그마한 판잣집이 아직도 보였다. 뒤라스 공작 부인은 하늘색 새틴을 깐 X자 모양의 걸사잉 놓인 자기 규방에서서너 명의 친구들에게 아직 간행되지 않는 <우리카>를 읽어 주었다.
The Duchesse de Duras read to three or four friends her unpublished Ourika, in her boudoir furnished by X. in sky-blue satin. The N's were scratched off the Louvre. The bridge of Austerlitz had abdicated, and was entitled the bridge of the King's Garden [du Jardin du Roi], a double enigma, which disguised the bridge of Austerlitz and the Jardin des Plantes at one stroke. Louis XVIII., much preoccupied while annotating Horace with the corner of his finger-nail, heroes who have become emperors, and makers of wooden shoes who have become dauphins, had two anxieties, -Napoleon and Mathurin Bruneau. The French Academy had given for its prize subject, The Happiness procured through Study. M. Bellart was officially eloquent. In his shadow could be seen germinating that future advocate-general of Broe, dedicated to the sarcasms of Paul-Louis Courier. There was a false Chateaubriand, named Marchangy, in the interim, until there should be a false Marchangy, named d'Arlincourt. Claire d'Albe and Malek-Adel were masterpieces; Madame Cottin was proclaimed the chief writer of the epoch. 뒤라스 공작 부인은 하늘색 새틴을 깐 X자 모양의 걸상이 놓인 자기 규방에서 서너 명의 친구들에게 아직 간행되지 않은 <우리카>를 읽어 주었다.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나폴레옹의 첫 글자인 "N'자가 모든 것에서 지워져싿. 아우스터리츠 다리는 그 이름이 폐지되고 자르댕 뒤 루아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그것은 아우스터리츠 다리와 자르댕 데플랑트(식물원)를 동시에 감춘 이중 수수께끼였다. 루이 18세는 호라티우스의 책에 조심스럽게 주석을 붙이면서도, 황제가 된 영웅들과 황제의 후계자가 된 천민들을 생각하면서, 두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나폴레옹과 마튀랭 브뤼노였다. 프랑스 아카데미는 현상 모집에 ‘연구에 의하여 얻어지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벨라르씨는 확실히 웅변가였다. 그의 그늘에서 장차 폴루이 쿠리에의 풍자를 받게 될 저 브로에의 미래의 차장 검사가 싹트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마르샹지라는 사이비 샤토브리앙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다를랭쿠르 라는 사이비 마르샹지도 나왔다. <클레르 달브>와 <말렉아델>은 걸작이었다. 코탱 부인은 당대의 일류 작가로 공인되었다.
The Institute had the academician, Napoleon Bonaparte, stricken from its list of members. A royal ordinance erected Angouleme into a aval school; for the Duc d'Angouleme, being lord high admiral, it was vident that the city of Angouleme had all the qualities of a seaport; therwise the monarchical principle would have received a wound. In he Council of Ministers the question was agitated whether vignettes epresenting slack-rope performances, which adorned Franconi's dvertising posters, and which attracted throngs of street urchins, should be tolerated. M. Paer, the author of Agnese, a good sort of ellow, with a square face and a wart on his cheek, directed the little rivate concerts of the Marquise de Sasenaye in the Rue Ville l'Eveque. All the young girls were singing the Hermit of Saint-Avelle, with words y Edmond Geraud. The Yellow Dwarf was transferred into Mirror. The Cafe Lemblin stood up for the Emperor, against the Cafe Valois, which upheld the Bourbons. 학사원에서는 아카데미 회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명부에서 말살했다. 앙굴렘은 칙령에 의하여 해군 학교의 소재지가 되어싿. 왜냐하면 앙굴렘 공작은위대한 제독이고, 앙굴렘 시는 항구도시로서 당연히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왕정 기간의 파탄을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회의에서는 프랑코니 곡마단의 광고에 곡예사들의 재주를 재미있게 그려 거리의 악동들을 모으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토의했다. <아네즈>의 작곡가이고 볼에 혹이 하나 붙어 있는 네 모진 얼굴을 한 호인 파에르씨는 빌레베크 거리의 사스테 후작 부인이 개최하는 친지끼리의 소박한 연주회를 지휘했다. 젊은 처녀들은 모두 에드몽 제로가 작사한 <생타벨의 은자> 라는 노래를 불러싿. 잡지 <르 냉 존>은 <미루아르>로 바뀌었다. 랑블랭 카페는 황제파를 자처하여 부르봉 파를 자처하는 발루아 카페와 대항했다.
The Duc de Berri, already surveyed from the shadow by Louvel, had just been married to a princess of Sicily. Madame de Stael had died a year previously. The body-guard hissed Mademoiselle Mars. The grand newspapers were all very small. Their form was restricted, but their liberty was great. The Constitutionnel was constitutional. La Minerve called Chateaubriand Chateaubriant. That made the good middle-class people laugh heartily at the expense of the great writer. In journals which sold themselves, prostituted journalists, insulted the exiles of 1815. David had no longer any talent, Arnault had no longer any wit, Carnot was no longer honest, Soult had won no battles; it is true that Napoleon had no longer any genius. 이미 루벨이 으슥한데 숨어서 노리고 있던 베리 공작이 시칠리아의 어느 공주와 결혼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수탈 부인이 세상을 뜬지 일 년이 되었다. 근위병들은 마르스 양을 야유했다. 유명한 신문들도 지면이 아주 작었다. 지면의 크기를 제한되었지만 기사의 자유를 컸다. <통스티튀시오네>은 입헌파였다. <미네르바>는 샤토브리앙의 철자를 ‘Chateaubriant’ 이라고 썼다. 샤토브리앙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자는 시민들을 무척 웃겼다. 매수된 신문 속에서 매수된 기자들이 1815년에 추방당한 자들을 모욕했다. 다비는 이제 재주가 없어졌고, 아르노는 이제 재치가 없어졌고, 카르노는 이제 성실성이 없어졌고, 술트는 어떤 전투에서도 승전 한 번 못 했고, 나폴레옹은 이제 천재적인 재능이 없어졌다고 말이다.
No one is ignorant of the fact that letters sent to an exile by post very rarely reached him, as the police made it their religious duty to intercept them. This is no new fact; Descartes complained of it in his exile. Now David, having, in a Belgian publication, shown some displeasure at not receiving letters which had been written to him, it struck the royalist journals as amusing; and they derided the prescribed man well on this occasion. What separated two men more than an abyss was to say, the regicides, or to say the voters; to say the enemies, or to say the allies; to say Napoleon, or to say Buonaparte. All sensible people were agreed that the era of revolution had been closed forever by King Louis XVIII., surnamed "The Immortal Author of the Charter." On the platform of the Pont-Neuf, the word Redivivus was carved on the pedestal that awaited the statue of Henry IV. M. Piet, in the Rue Therese, No. 4, was making the rough draft of his privy assembly to consolidate the monarchy. The leaders of the Right said at grave conjunctures, "We must write to Bacot." 추방된 자에게 우송된 편지를 경찰이 충실히 도중에서 압류해 버리므로 좀처럼 입수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사실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추방된 데카르트는 그것을 한탄했다. 그런데 다비드가 벨기에의 한 신문에서 자기에게 보낸 편지들이 압수되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추방된 자들을 조롱하던 왕당파 신문으로서는 고소한 일이었다. ‘시역자’라고 말하거나 ‘투표자’라고 말하는 것, ‘적’이라고 말하거나 ‘동맹자’ 라고 말하는 것, ‘나폴레옹’이라고 말하거나 ‘부오나파르테’라고 말하는 거슨 두 사람 사이를 심연보다도 더 갈라놓은 일이었다. 지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헌장의 불후한 작자’ 라고 불리는 루이 18세에 의하여 혁명 시대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앙리 4세의 동상이 세워지기를 기다리는 퐁뇌프 광장의 받침대에는 레디비부스(소생)라는 말이 새겨졌다. 피에시느니 왕정을 공공하 하기 위하여 테레즈 거리 4번지에서 집회를 조직했다. 우익의 영수들은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바코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라고 말했다.
MM. Canuel, O'Mahoney, and De Chappedelaine were preparing the sketch, to some extent with Monsieur's approval, of what was to become later on "The Conspiracy of the Bord de l'Eau" -of the waterside. L'Epingle Noire was already plotting in his own quarter. Delaverderie was conferring with Trogoff. M. Decazes, who was liberal to a degree, reigned. Chateaubriand stood every morning at his window at No. 27 Rue Saint-Dominique, clad in footed trousers, and slippers, with a madras kerchief knotted over his gray hair, with his eyes fixed on a mirror, a complete set of dentist's instruments spread out before him, cleaning his teeth, which were charming, while he dictated The Monarchy according to the Charter to M. Pilorge, his secretary. 카니엘, 오마오니, 샤프들렌 제씨는 왕제 전하로부터 어느 정도 승낙을 받고서, 훗날 ‘해변의 음모’라는 사건이 될 일을 꾸미고 있었다. 들러베르드리는 트로고프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자유주의 정신을 갖고 있던 드카즈씨가 세력을 떨쳤다. 샤토브리아은 긴 바지를 입고, 실내화를 신고, 성성한 머리에 마드라스천으로 된모자를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치과의의 연장을 완전히 갖춘 가방을 앞에 열어 놓고 소눗 그 매력적인 이를 쑤석거리면서도 <헌장에 의한 군주정치> 라는 책의 여러 가지 이본의 차이를 비서인 필로르주 씨에게 받아쓰게 하면서 생 도미니크 거리 27번지의 자기 집 창 앞에 매일 아침 서 있었다.
Criticism, assuming an authoritative tone, preferred Lafon to Talma. M. de Feletez signed himself A.; M. Hoffmann signed himself Z. Charles Nodier wrote Therese Aubert. Divorce was abolished. Lyceums called themselves colleges. The collegians, decorated on the collar with a golden fleur-de-lys, fought each other apropos of the King of Rome. The counter-police of the chateau had denounced to her Royal Highness Madame, the portrait, everywhere exhibited, of M. the Duc d'Orleans, who made a better appearance in his uniform of a colonel-general of hussars than M. the Duc de Berri, in his uniform of colonel-general of dragoons-a serious inconvenience. The city of Paris was having the dome of the Invalides regilded at its own expense. Serious men asked themselves what M. de Trinquelague would do on such or such an occasion; M. Clausel de Montals differed on divers points from M. Clausel de Coussergues; M. de Salaberry was not satisfied. The comedian Picard, who belonged to the Academy, which the comedian Moliere had not been able to do, had The Two Philiberts played at the Odeon, upon whose pediment the removal of the letters still allowed THEATRE OF THE EMPRESS to be plainly read. 권위있는 비평은 탈마보다 라퐁을 더 좋아했다. 펠레츠씨는 A라고 서명하고 호프만씨는 Z라고 서명했다. 샤를 노디에는 <테레즈 오베르>를 쓰고 있었다. 이혼은 폐지되었다. 리세는 모두 콜레주라고 불렸다. 콜레주 학생들은 깃에 황금 백합꽃을 달고서 로마왕에 관해 토올하며 서로 주먹질을 했다. 궁전의 비밀경찰은 왕비 전하에게 도처에 나붙어 있는 오를레앙 공의 초상화를 고발했는데 경기병 사령관의 복장을 하고 있는 이 초상화는 용기병 사령관의 복장을 하고 있는 베리 공보다 풍채가 더 좋았다. 그것은 대단히 불리한 일이었다. 파리시는 시 비용으로 앵발리드의 둥근 지붕에 다시 금칠을 했다. 착실한 양반들은 이러이러한 경우에 트랭클라그 씨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클로젤 드몽탈 씨는 여러 가지로 문제로 클로젤 드 쿠세르그 씨와 손을 끊었다. 드 살라베리씨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희극 작가 몰리에르도 될 수 없었던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희극 작가 피카르는 오데옹 극장에서 <두 사람의 필리베르>를 상영했는데, 이 극장 정면에 있던 ‘황후 극장’이라는 글자를 떼어 버렸지만 아직도 그 흔적이 똑똑히 보였다.
People took part for or against Cugnet de Montarlot. Fabvier was factious; Bavoux was revolutionary. The Liberal, Pelicier, published an edition of Voltaire, with the following title: Works of Voltaire, of the French Academy. "That will attract purchasers," said the ingenious editor. The general opinion was that M. Charles Loyson would be the genius of the century; envy was beginning to gnaw at him-a sign of glory; and this verse was composed on him:- "Even when Loyson steals, one feels that he has paws." As Cardinal Fesch refused to resign, M. de Pins, Archbishop of Amasie, administered the diocese of Lyons. The quarrel over the valley of Dappes was begun between Switzerland and France by a memoir from Captain, afterwards General Dufour. Saint-Simon, ignored, was erecting his sublime dream. 퀴데 드 몽타를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파비에는 나동 분자, 바부는 혁명가였다. 출판업자 페리시에는 ‘프랑스 아카데미판 볼테르 작품집’이라는 제목으로 볼테르의 작품을 출판하고 있었다. 그 순진한 출판업자는 “이건 팔린다” 라고 말했다. 페여론은 샤를 루아종 씨는 당대의 천재일 것이라고 했지만, 그르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를 혹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영광의 징조였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이런 시구가 만들어졌다. ‘루아종이 제 아무리 날고 날아도, 다리가 있음을 어이하리.’ 슈 추기경이 사직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아마지의 대주교 드 팽씨가 리옹의 주교구를 관리했다. 뒤에 장군이 된 뒤푸르대위의 각서로 말미암아 프랑스와 스위스 사이에 다프 계곡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생시몽은 그의 숭고한 꿈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There was a celebrated Fourier at the Academy of Science, whom posterity has forgotten; and in some garret an obscure Fourier, whom the future will recall. Lord Byron was beginning to make his mark; a note to a poem by Millevoye introduced him to France in these terms: a certain Lord Baron. David d'Angers was trying to work in marble. The Abbe Caron was speaking, in terms of praise, to a private gathering of seminarists in the blind alley of Feuillantines, of an unknown priest, named Felicite-Robert, who, at a latter date, became Lamennais. A thing which smoked and clattered on the Seine with the noise of a swimming dog went and came beneath the windows of the Tuileries, from the Pont Royal to the Pont Louis XV.; it was a piece of mechanism which was not good for much; a sort of plaything, the idle dream of a dream-ridden inventor; an utopia-a steamboat. 과학 아카데미에는 당신에 유명했으나 후세엔 잊혀 버린 푸리에라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는 오두막집에는 아직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래에 길이이름이 남게 될 푸리에라는 자가 있었다. 바이런 경이 명성을 타나내기 시작했다. 밀부아의 어떤 시의 주에서는 다음가 같은 말로 그를 프랑스에 소개했다. ‘바이런 경이라는 사람“ 다비드 당제는 열심히 대리석을 깎고 있었다. 카롱 신부는 푀이양틴의 막다른 골목에서 열린 신학교 학생들의 조그만 집회 석상에서 후일 라므네라고 불린, 그러나 당시에는 무명의 신부였던 펠리시테 로베르를 극구 찬양했다. 센 강 위를 헤엄치는 개 같은 소리를 내면서 연기를 뿜으며 찰랑거리는 사물 하나가 튈르리 궁전의 창 아래를 우아야 다리에서 루이 15세 다리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별로 쓸모가 없는 하나의 기계요, 일종의 장난감이요, 망성적 발명가의 몽상이요, 모래 위의 누각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증기선이었다.
The Parisians stared indifferently at this useless thing. M. de Vaublanc, the reformer of the Institute by a coup d'etat, the distinguished author of numerous academicians, ordinances, and batches of members, after having created them, could not succeed in becoming one himself. The Faubourg Saint-Germain and the pavilion de Marsan wished to have M. Delaveau for prefect of police, on account of his piety. Dupuytren and Recamier entered into a quarrel in the amphitheatre of the School of Medicine, and threatened each other with their fists on the subject of the divinity of Jesus Christ. Cuvier, with one eye on Genesis and the other on nature, tried to please bigoted reaction by reconciling fossils with texts and by making mastodons flatter Moses. M. Francois de Neufchateau, the praiseworthy cultivator of the memory of Parmentier, made a thousand efforts to have ‘pomme de terre’[potato] pronounced parmentiere, and succeeded therein not at all. The Abbe Gregoire, ex-bishop, ex-conventionary, ex-senator, had passed, in the royalist polemics, to the state of "Infamous Gregoire." 파리 사람들은 무관심하 ㄴ태도로 그 무용지물을 바라보았다. 단행과 규정과 무더기 임명으로 학사원을 개혁했고 여러 아카데미 회원을 만들어 낸 뛰어난 인물이었던 드 보블랑시는 그러한 이릉 ㄹ하고 난 뒤에 정작 자기 자신은 아카데미 회워닝 되지 못했다. 생제르맹 교외 사람들과 마르상 마을 사람들은 경찰청자으로서 들라보 씨를 바랐는데, 그것은 그의 열성 때문이었다. 뒤퓌트랭과 레카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의학 학교의 계단 강의실에서 논쟁하며 서로 삿대질까지 했다. 한쪽 눈으르로는 <창세기>를 보고 다른 눈으로는 자연을 본 <퀴비에>는 화석을 <창세기> 원문과 부합시키고 마스토돈으로 하여금 모세를 기뻐하게 함으로써 맹신적 반동에 추파를 던지려고 애썼다. 파르망티에가 남긴 기록의 갸륵한 연구가인 프랑수아 드 뇌샤트 씨는 폼 드테르(감자)를 파르망티에르라고 발음하게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레구아르 신부는 예전에 주교였고, 국민의회 의원이었고, 상원의원이었는데, 왕당파와의 논전에서 ‘파렴치한 그레구아르’ 상태로 변해 버렸다.
The locution of which we have made use-passed to the state of-has been condemned as a neologism by M. Royer Collard. Under the third arch of the Pont de Jena, the new stone with which, the two years previously, the mining aperture made by Blucher to blow up the bridge had been stopped up, was still recognizable on account of its whiteness. Justice summoned to its bar a man who, on seeing the Comte d'Artois enter Notre Dame, had said aloud: "Sapristi! I regret the time when I saw Bonaparte and Talma enter the Bel Sauvage, arm in arm." A seditious utterance. Six months in prison. Traitors showed themselves unbuttoned; men who had gone over to the enemy on the eve of battle made no secret of their recompense, and strutted immodestly in the light of day, in the cynicism of riches and dignities; deserters from Ligny and Quatre-Bras, in the brazenness of their well-paid turpitude, exhibited their devotion to the monarchy in the most barefaced manner. 내가 방금 사용한 “. . . 의 상태로 변했다” 라는 어구는 루아예콜라르씨에 의하여 신어법으로 알려졌다. 예나 다리의 세 번째 아치 아래에서는 블뤼허가 다리를 폭파하려고 뚫었던 화약구멍을 이 년 전에 막아놓은 새 돌을 아직도 그 새하얀 빛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법 당국은 한 사나이를 법정에 호출했는데, 그는 아르투아 백작이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소리 높여 이렇게 외쳤다. “제기랄! 보나파르트와 탈마가 서로 팔을 끼고 연병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던 때가 그립구나” 선동적인 언사였다. 육 개월의 징역에 처해졌다. 반역자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횡행하고 있었다. 전투 전날 적의 편으로 넘어간 작자들은 받을 보수를 하나도 감추지 않았고, 뻔뻔스럽게도 재물과 감투를 둘러쓰고 비열하게도 대중 앞에서 활보하고 있었다. 리니아 카트르브라의 탈주병들은 그 파렴치와 행위애 대한 보수로 흉측하게 몸을 휘감고 서 왕에 대한 충성르 숨김없이 과시했다. 그들은 모두 저 영국의 공중변소에 다름과 같이 씌어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 복장을 단정히 하시오.”
This is what floats up confusedly, pell-mell, for the year 1817, and is now forgotten. History neglects nearly all these particulars, and cannot do otherwise; the infinity would overwhelm it. Nevertheless, these details, which are wrongly called trivial, -there are no trivial facts in humanity, nor little leaves in vegetation, -are useful. It is of the physiognomy of the years that the physiognomy of the centuries is composed. In this year of 1817 four young Parisians arranged "a fine farce." 이상은 오늘날에는 잊혀 버렸지만 1817년이라는 해와 관련, 뒤죽박죽 떠오르는 일들이다. 역사는 이 모든 특구한 사실들을 거의 다 무시하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한없이 많은 것이 역사에 밀려들 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일들을 사람들은 사소한 일이라고 잘못부르고 있는데(인류에 사소한 일은 없고 식물에 사소한 잎은 없다). 거것들은 모두 유용하다. 시대의 모습은 연년의 표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1817년에 파리의 네 젊은이가 ‘재미 나는 연극’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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