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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챔피언 / 렘 38:1-13, 히 12:1-6
요즘 사회 돌아가는 두가지 이야기, 먼저, 경찰의 연세대 사건, 한총련 시위 진압에서 박일룡 경찰청장은 ‘시위 상황이 총기를 사용해야 풀릴 것으로 판단되면 경찰관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총기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경찰이 실제로 시위 학생들에게 총기를 사용한 경우는 4.19혁명 당시다. 이때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접근하는 학생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렸던 곽영주 경무대 경호실장은 5.16 이후에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12월 처형되었다. 이번 사건에서 비록 총기 사용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총기 사용을 허락한 결찰청장은 옷을 벗어야 함이 마땅하다. 또한 시위 학생들을 완전 포위해 놓고 음식은 물론이고 의약품까지 반입을 금지했다는 것은 적의 포로에게도 하지 않는 일이다. 이는 학생들을 적군보다도 못한 존재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꼭 있어야 할 생리대까지 반입을 금했다는 것을 보면 이번 사건의 정부측 관계자는 인간도 못되는 사람, 곧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또 하나는 오늘 설교 내용과도 관련이 있는 장애인 올림픽이다. 장애인 올림픽은 올림픽이 끝난 후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에세 열리는 장애인들을 위한 축제이다. 언론이 너무 무관심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올림픽 때에는 메달을 따든 못따든 중계하느라고 야단법석을 떨더니 이번 장애인 올림픽은 중계는 커녕 경기 소식을 시원하게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 예로 금메달을 땅 김두천씨는 국민학교 다닐 때 앓다가 뇌성마비가 되었다. 농촌에서 살다가 병을 치료해 보겠다고 온 식구가 서울로 이사왔지만 낫지 못하고 가세도 기울어 학교도 못다녔다. 그런데 건강을 위하여 좋아하던 달리기를 매일 했다고 한다. 결국 피나는 노력 끝에 올림픽 3연패가 눈 앞에 다가왔다. 또한 남자 탁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세명의 선수들도 군 복무중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어깨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이를 극복해 상체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금메달을 따게 됐다.
올림픽 등 국제경기에 참관한 우리 선수들이 열심히 뛰는 것을 보면 가슴이 찡할 때가 있다. 특히 피와 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을 보면, 더구나 경기가 끝난 후 운동장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금메달이 안겨주는 감동은 참으로 대단한 것임을 실감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신앙생활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을까?’ ‘우리 하나님 앞에 영광과 기쁨을 돌리는 신앙의 챔피언 이 될 수 없을까?’ 이는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신앙생활을 좀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운동선수가 온국민을 열광시켰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하늘의 천군천사들로부터는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것이다. 제가 그런 영광스러운 관경을 상상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보게 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신앙생활을 장거리 경주에 비교하는 성서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다. 바울은 당시에 국민들의 인가를 독차지하던 장거리 경주를 잘 알고 있었다. 가끔 그는 그 경기를 관람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경주를 지켜보면서 신앙생활에서 자기도 저렇게 뛰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가 제일 마지막에 쓴 딤후 4:7절에 자기의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자기의 지나온 생애를 열심히 달려가는 마라톤 선수에 비유하며 조용히 회상하고 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가? 먼훗날,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며 바울처럼 열심리 달려온 생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분면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꼭 필요한 두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한다. 신앙생활에서 챔피언 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1.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운동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물으나마나 그 목표가 이기는데 있다. 나머지는 그 다음으로 따라오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승자가 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목표는 선수의 삶 전부를 지배하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인한 투지를 소유하게 한다. 따라서 금메달을 따겠다고 하는 그 집념이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우승에 댜한 야망이 없는 선수는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목표가 있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는 것을 목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롬 9:16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구원을 받기 위해 달음박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그때부터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목표가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성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달음박질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달려가야 한다.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달려야 할 뚜렷한 목표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바울처럼 달려야 한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달음박질하는 인생이란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말한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자세로 달려가는 모습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자세로 달려가는 자의 자세이다. 왜 우리가 달음박질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상을 얻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상급을 얻기 위하야 우리는 달려가야 한다.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서말씀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소위 주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상급에 관해서 점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다가 믿음이 크게 자라며서 그 상급이란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성도들도 있다. ‘구원만 받으면 됐어, 난 그것으로도 감사하겠어. 천국에서 상을 받느냐 못받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없잖아?’라며 제법 그럴듯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우리 중에도 아마 이와 비슷한 논리를 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분은 아직도 자기의 믿음이 어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서 상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된다. 믿음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상을 얻으려는 열망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상이 무엇인가? 성서에 보면 의의 면류관이라고도 한다.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라고도 하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도 한다. 감추었던 만나일 수도 있고, 새이름을 기록한 흰돌일 수도 있다고 한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일 수도 있고, 또 저 하늘에 반짝이는 새벽별일 수도 있다. 성서에서 상을 묘사하는 용어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화려해서 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우리가 확실하게 선을 그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의 행복과 영광이 상을 받는데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렸다. 그것은 그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헌신을 했다기 보다는 상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강하게 가진 사람치고 굼뱅이처럼 기어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나라의 그 상급과 영광을 마음에 그리면서 그것을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과 한번 비교해 보라.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너무나 찬란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된다. 이것이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 중한 것은 상급 때문이다. 단 12:3절하를 보면 하나님은 전도하여 생명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자에게 이런 상급을 약속하셨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인가? 여러분은 이런 상급을 받고 싶지 않나? 여러분은 신앙의 챔피언 이 되고 싶지 않나? 하나님께 크나큰 영광을 돌리고 싶다면 목표를 뚜렷하게 정하기를 바란다. 우승을 하겠다는 열망이 없는 사람은 선수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마찬가지이다. 주님에게 상을 받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는 성도는 절대로 달려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2. 신앙생활의 챔피언 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절제생활을 해야 한다.
미인들에게도 체중이 적이지만 달리기 선수에게도 체중이 적이라고 한다. 언젠가 올림픽 100m에서 우승을 한 선수가 미국에서 친선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메스컴은 그 선수가 우승을 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그런데 막상 경기를 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기자들이 대거 몰려와서 1등을 못한 이유를 물었다. 그 선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체중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올림픽 때 자기가 갖고 있던 체중에 비해 조금 더 늘었는데 그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도 반드시 경계해야 할 적이 있다. 히 12:1절을 보라. 두가지가 나온다. 그것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은 죄’라고 했다. 이 두가지는 상을 얻기 위해서 달리는 성도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영적인 적이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당시 이 두가지의 장해물을 방치했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얼마동안은 잘 달린 사람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신앙의 경주를 잘한 사람들인가를 알려면 10:32-35절까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를 받아서 읽었던 독자들은 초창기에 대단히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12: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중도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 틀림없다. 초창기에는 죄와 싸울 때 열심히 싸웠지만 이제는 희생이 많이 요구되는 싸움에는 말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거운 것과 죄되는 것을 벗어버리지 못한 까닭으로 결국 어떤 성도들이 되었나? 12-13절을 보라. 그들이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로 인하여 새로 고침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에 빠졌다. 우리들도 이러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우리의 생활에서 용납하면 아무이 잘 뛰던 사람도 얼마가지 않아 주저않게 된다. 히브리서 독자들처럼 새로 고침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거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 무거운 것의 본래 의미는 몸이 붓는다는 것과 체중이 늘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결국 몸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거운 것을 꼭 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라는 말은 자기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해 버리라는 것이다. 죄가 아니면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기에 바빠서 신앙생활을 앉은뱅이처럼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만일 첫눈에 죄라는 것을 알만한 것이었다면 본능적으로 피하였을지도 모른다. 죄가 아니기 때문에 안심하고 끌어안고 있다가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이 앉은뱅이가 된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적지 아니한 성도들이 소극적인 자기 성격이 무거운 짐이 되어 미지근하게 믿으며 아까운 세월을 허송만 하는 안타까운 예를 많이 본다. 소극적인 성격이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성격이 상을 향해 달려야 할 사람을 주저앉혀 버린다면 그것은 심각한 방해요인이 된다. 어떤 성도에게는 예수 믿는 주변의 친구들이 무거운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친구들은 신앙생활을 달음박질 하는 것으로 여기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보다 조금 앞서 달음박질 하는 사람을 보면 뒷덜미를 잡고 늘어지기를 잘한다. ‘믿어도 별나게 믿는구먼, 주일날 예배드리면 됐지, 또 교회에 가야해? 우리 교회 목사님은 너희 교회 목사님보다도 훨씬 유명한 분인데도 우리를 달달 볶지는 않아.’ 이얼게 떠드는 친구들과 한번 어울리기 시작하면 몸이 무거워져 얼마가지 않아 주저앉게 된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마음을 열어 놓고 조용히 생각해 보라. 여러분의 무거운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취미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일 수도 있고, 이웃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생활습관일 수도 있다.
또한 달음박질을 방해하는 것 가운데 두 번째는 죄라는 것이다. 이 말을 원문대로 읽는다면 ‘그 죄’라고 해야 한다. 이 말은 어떤 특정한 죄를 가리킨다. 이 죄는 히브리서 독자들이 유댜교에 유혹을 받은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 그들의 불신앙을 의미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 이 죄가 어느 것을 가리키든 그 죄가 앞으로 힘차게 달려갈 때마다 발을 걸고 넘어지는 올무가 된다는 것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하다. 본문에서 왜 죄를 얽매이기 쉬운 것이라고 했나? 죄는 덫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발이 빠른 짐승이라도 한번 덫에 걸리면 그 짐승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죄에 한번 발목이 잡히면 아무리 달음박질을 잘하던 사람도 금방 주저앉게 된다. 그렇게 잘 뛰어가던 성도가 갑자기 주저앉는다면 그의 발이 죄의 덫에 걸린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죄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받은 독자들에게는 그들만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죄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웠던 신앙생활에 먹구름이 덮히기 시작했다. 우리도 나만이 아는 어떤 죄를 숨겨놓고 있다면 똑같은 비극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무거운 죄짐을 지고 천국의 시상대까지 오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셔서 어떤 죄가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여러분의 눈이 열러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무거운 것’과 ‘죄’ 이 두가지를 벗어버리지 않고는 우리는 달음박질을 잘 할 수 없다. 일류 선수들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나? 뜨거운 싸우나 실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땀을 흘려 체중을 내리는 안타까운 선수를 본다. 이것저것 먹고 싶어도 체중 때문에 먹지 못하는 선수도 있다. 1초라도 자기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인간적인 정마저도 냉정하게 끊어버리고 고독한 훈련센터에서 홀로 극기 훈련을 하는 선수도 있다. 지난 5월 미스 유니버스에 뽑힌 베네주엘라의 앨리사 마차도 양은 미스 유니버스에 당선된 직후 ‘무엇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먹고 자는 일만 할 것’이라는 소감을 말했었는데, 지금은 미스 유니버스 조직위에서 2주안에 몸무게를 12kg을 빼지 않으면 미스 유니버스를 박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바울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달음박질 하는데 방해물을 만나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고 했다. 고전 9: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몸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방해거리로 작용하는 무거운 것일 수 있다. 아마 바울에게는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것이 자기 몸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다.
몸을 친다는 말은 권투선수가 눈언저리나 급소를 향해 명중타를 때리는 것을 말한다. 복종시킨다는 말은 극도로 자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대로 한다면 바울은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 같다. 그는 자기 몸이 요구하는대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아마 수차례 태장을 맞아 몸이 말을 잘 듣지 아니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극기하는 훈련을 쉬지 아니했다. 끊어야 할 것은 끊고, 피해야 할 것은 피하면서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였다는 말이다. 이런 행동을 그는 고전 9:25절에서 ‘절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달리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기 몸을 쳐 절제하고 있는 사람인가? 절제하지 아니하는 선수가 챔피언이 된 역사가 없다. 절제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울의 경우와는 달리 히브리서 독자들은 무거운 것보다 죄 문제가 더 심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징계에 대한 말씀이 따라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매를 때려서라도 바로 잡으시겠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죄가 아닌 무거운 것은 바울처럼 절제하면 곧 벗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피가 흐르도록 맞고 나서야 그 죄를 버리고 다시 신앙의 달음박질을 시작하는 경우를 본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죄 문제를 해결하자. 그래야만 우리가 잘 뛸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벗어버린다’는 말은 단 한번의 행동으로 끝나는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무거운 것이든, 얽매이기 쉬운 죄이든 간에 우물쭈물해서는 안된다. 그 반면에 ‘경주한다’는 말은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뒤에 것을 돌아보지 말고 목표를 향해 힘차게 뛰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힘차게 뛰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의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조용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향해 이렇게 물어보라. ‘나는 지금 달음박질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오늘 예정된 코스를 향해 제대로 달렸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만약에 그것이 잘 안되었다고 생각되면 나로 하여금 뛰지 못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 나에게 무거운 것들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회개하라. 자기만이 알고 있는 어떤 죄, 그것을 찾아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시험의 연속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저는 이 시간 ‘나는 신앙생활에서 챔피언이 되고 싶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고 싶다.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이 주시는 상을 내가 받을 때에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하나님 나라에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 얼마나 환호성을 올릴까? 그 귀한 영광,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우리 모두 이런 꿈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걸음을 끌어당길 자가 없다. 방해할 자가 없다. 우리는 계속 달릴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바울처럼 끝까지 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