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때를 갈망하는 자
2024. 9. 1(주일낮예배) 전도서 3:1-11
미국 시골의 한 소년이 10살 생일에 할머니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할머니는 집 앞의 호수를 가리키면서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10살 생일 때 저 호수 위를 뛰어 다녔단다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소년은 그럼 나도 호수 위를 뛸꺼야! 하면서 호수를 향하여 달려갔다. 그리고 소년은 호수에 빠져서 죽을 뻔하였다. 겨우 어른들에 의하여 구조를 받은 소년은 낙심에 빠져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호수 위를 뛰어 다녔는데, 나는 왜 호수 위를 뛸 수 없느냐?고 나는 주워온 아들이냐?고 말했다. 그 말에 깜짝 놀라면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니란다. 네가 물 위를 뛰어다닐 수 없는 것은 태어난 달이 달라서 그런거란다.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1월에 태어났는데, 너는 8월에 태어났으니 호수 위를 뛰어다닐 수 없는 거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1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10살 생일날 호수 위를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소년은 8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호수 위를 뛰어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호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때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때를 잘 맞추어 살고 있는가?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그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말한다. 그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여서 그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 주었다.
이 사건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을 증거하신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심으로 그 말씀을 전한 자의 권위가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고친 후에 4절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8장 4절을 읽기 바란다.
(마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당시 나병에 걸렸거나, 또는 나았을 때 그 사람을 살펴서 진단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병환자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계속하여 나온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 길을 가는데 두 명의 맹인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고함을 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외침의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맹인들은 집까지 따라왔다. 그때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시며 눈을 고쳐준다. 그 후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30절로 말씀하신다.
(마 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예수님은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신 후에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실 마가복음 9장 맹인의 눈을 고치는 사건 앞에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동일 본문인 마가복음 5장 43절, 누가복음 8장 56절에는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엄히 경계하였다.
무슨 말인가? 산상수훈을 가르친 예수님은 계속하여 병자를 고쳤는데 그때 아무에게도 내가 너를 고쳐 주었음을 알리지 말라고 강하게 말씀했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겠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자신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①유대인들의 시기를 조심하기 위함이다고 해석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②기적에만 집중하여 복음 증거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한다.
여러분 생각에는 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생각하는가? 최명희의 혼불 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서 최명희는 이런 말을 한다.
달걀이 바위를 부수겠다 온 몸을 던져 치면 세상이 웃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요, 달걀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니,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고 달걀은 깨어나 바위를 넘는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계란의 처참한 흔적만 남는다. 그래서 바위는 많은 계란을 깨뜨렸다는 자랑만 쌓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계란이 부화하여 닭이 되면 유유히 바위를 넘어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계란은 생명이 있어서 자라지만, 바위는 생명이 없기때문에 점점 더 쇠퇴해져 가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담은 독수리와 까마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을 보면 까마귀가 독수리를 공격하는데, 독수리는 까마귀와 싸우지 않는다. 독수리는 그냥 자기의 목표점을 향하여 높이 날아오르기만 한다. 왜 독수리가 높이 날아오르기만 하는지 동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독수리와 까마귀 동영상>
그런데 예수님이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였던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나아왔을 때 칼을 던진 베드로를 책망하시고,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다. 그리고 순순히 잡혀가면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눅 22;53) 라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은 어둠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독수리가 묵묵히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보기 바란다.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실수하고 실패한 사건 중에 하나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겠다고 몇 번 약속하였지만 기다리지 못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때를 구하고 사는가? 이제 오놀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가질 수 있는 14가지의 때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때를 살펴보면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던지 간에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2절)가 있다. 그리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2절)도 있다. 저는 농사를 잘 모르지만 봄에 씨를 심고 가을이면 추수를 한다. 그런데 그때를 맞추지 못하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4절). 그런데 만약 울 때에 웃고, 웃을 때 울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5절). 우리가 자식을 낳아서 기르면서 사랑한다고 안고 다녔다. 그런데 5살 6살이 된 아들을 예쁘다고 안고만 다니면 그 아들은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날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안을 때가 있으면 이제 안는 일을 멀리할 때도 있다. 나는 더 살고 싶고, 나는 심고 싶고, 안아주고 싶지만, 내 생각과 뜻과 달리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그 때를 알고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지혜자인가? 우리가 잘 아는 조삼모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송나라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해서 많이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양식이 부족했던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아침에는 도토리 3개를 주고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낸다. 그래서 저공은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준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다 좋아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에 도토리 7개를 먹는 것은 똑같은 것인데 원숭이가 속은 것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원숭이가 속은 것인가? 경제학에서는 조삼모사보다 조사모삼이 훨씬 더 효용가치가 높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저도 잘 모르는 이상한 수식을 만든다.
χ1 < χ2 ⇒ u(χ1) < u(χ2)
이런 수식을 만들어서 아주 복잡한 계산을 하면 결국 아침에 받은 도토리 하나와 저녁에 받은 도토리 하나의 효용가치는 아침에 훨씬 더 높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그렇게 어렵게 계산할 것이 무엇인가? 제가 대학원 공부할 때 책은 고사하고 밥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가 저에게 밥 사먹으라고 5만원의 돈을 주어서 받았다. 그래서 받은 5만원과 지금 우리 교회 성도 중에 목사님 식사하세요 하고 준 5만원의 가치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전도자가 말하는 때는 효용가치가 더 높은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전도자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할 때 때는(עֵת 에트) 대답하다, 반응하다, 증거하다는 의미의 עָנָה(아나)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천하 만사에는 때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응답하고 반응하는 최적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범죄한 인생은 하나님이 응답하고 반응할 때를 알지 못하여 수고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정한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그 때가 있음을 확신하는가? 그 때를 확신하는 사람은 2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본문 11절이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앞에 나오는 14가지의 때를 통하여 ①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때를 통하여서 ②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는 영원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반응하고 역사하여서 반드시 아름답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가 있음을 기억하여 그 때를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그 때를 통하여 우리와 영원한 연합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