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32) 서남산의 계곡(하)
동남산에서 시작해 남남산을 돌아 서남산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60여개의 계곡을 소개하는 이야기는 이번호에서 마무리 한다. 남산을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와 계곡들을 둘러보면 남산은 바위산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계곡의 바닥 전체가 바위로 형성돼 하나의 바위뿌리에서 기둥으로 자라난 듯하다. 화산활동으로 진행된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어 생성된 화강암덩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풍화작용으로 흙이 생기고 나무가 자라면서 푸르게 우거진 산으로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금오산과 고위봉 정상에서 남산의 뿌리까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본래 한덩어리였던 바위가 결에 따라 균열이 생기고 비바람을 맞아 부드러워지기도 하면서 여러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어 절경을 연출하게 된 것이리라. 이번호에서는 여러 번 소개했던 신라의 시작과 종말을 증언하고 있는 나정과 포석정, 창림사지 등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포석골과 식혜골, 왕정골 등을 역사적인 사실들과 함께 기록한다.
◆낮에도 부엉이 우는 부엉골과 배실 기암골
서남산주차장에 못미처 왼쪽으로 남산 정상을 향해 난 길이 있다. 35번 국도에서 200여m 안쪽으로 진입하면 후백제 견훤의 칼에 신라 55대 경애왕이 신하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목숨을 잃으면서 1천년 영화를 잃게 되는 통한의 아픔을 간직한 포석정이 선조들의 고고한 과학기술을 자랑하며 고목 아래 누워있다.
부엉골에서 부흥사를 거쳐 해목령을 넘어 전망대를 지나 통일전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개설돼 아직도 넓게 포장도로로 고개를 넘고 있다. 이 순환도로를 기점으로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계곡이 배실 기암(바둑바위)곡이다. 기암곡과 부엉골 입구는 바위계곡, 바위산이란 이름답지 않게 처음에는 소나무숲이 그늘을 가려 자못 서정적이다. 여름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로도 손색이 없다.
기암곡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쉽게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할만한 축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절터에는 어김없이 신우대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1시간여를 천천히 완만한 경사로 된 산길을 산책하듯 걸으면 서너 곳의 절터를 지나 2~5m 높이에 이르는 높은 축대를 만나게 된다. 큰 축대 위에 500여m²에 이르는 평지의 절터가 나오고 최근 복구한 삼층석탑을 마주하게 된다. 기암곡 3층석탑이다. 이 석탑 옆에는 석탑 기단과 몇 조각의 탑 부재들이 쌓여 있는데 쌍탑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다. 물론 절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여기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없다. 돌아나와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남산 정상에 쉽게 이르는 방법이 될 것이다. 기암곡이라 이름이 붙어있지만 기암곡에 바둑바위는 없다. 금오산 정상으로 가는 길, 팔부능선에 바둑바위가 있을 뿐이다.
부엉골은 쉬운 순환도로를 따라 오르고싶은 유혹을 떨치고 숲길로 걸어야 한다. 험하지만 오른쪽으로 난 좁은 숲길을 선택하면 반시간이 지나지 않아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자찬하게 되는 절경들을 줄줄이 만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계곡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다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부흥사에 이르게 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곡을 타고 오르면 늠비봉에서 형성된 늠비골로 접어들어 엄청나게 넓은 바위계곡위로 흐르는 맑은 물과 가끔 바위협곡으로 쏟아지는 물길을 만날 수 있다.
줄곧 늠비골 계곡으로만 길을 접다보면 막다른 언덕을 만나 길이 없어져 낭패하게 된다. 산길이 그다지 험하지 않아 왼쪽으로 오르면 의외의 횡재를 한다. 늠비봉의 도드라진 능선에서 우뚝 솟은 5층석탑의 위용을 만나는 행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석탑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온갖 얼굴의 모습으로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서라벌이 시원하게 바라다보이는 터에서 임금의 자리로 보이는 의자모양의 바위 앞에 꽃을 피운 탁자가 놓여있는 용상암을 비롯해 신기하게 생긴 바위들이 남산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윤을곡 삼신바위와 황금대
포석정에서 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로 포장된 순환로를 따라 30여분 걷다가 왼쪽으로 이어지는 1Km 남짓 짧게 형성된 계곡이 윤을곡이다. 윤을곡에는 사람들이 삼신바위라고 부르는 특이하게 ‘ㄱ’자로 형성된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 두 면에 3체의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이다. 다시 순환도로를 타고 30여분 더 오르면 해목령 남쪽 비탈에 허물어진 남산성벽을 만날 수 있고 그 아래로 넓은 평지가 논밭 경작지 형태로 나타난다. 신라시대 군사시설의 주봉이었던 해목령의 아래로 지금은 석탑 탑재가 겨우 몇점 보이지만 넓은 절터로 짐작하게 하는 흔적을 볼 수 있다.
부엉골 허리쯤에서 기암곡으로 넘어가는 능선에 우뚝 솟아 저물녁이면 황금빛을 발하는 바위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뿔딱바위라고 부르는 황금대다. 초여름 녹음이 우거지고 있지만 저녁노을이 질 시간이면 바위의 특이한 황금색 이끼가 빛을 받아 황금색을 발사해 신기한 광경을 연출한다. 이 부근에서 마제돌도끼, 마제살촉, 돌창, 돌칼, 토기, 파편들이 발견돼 신석기시대 유적지로도 알려지고 있다.
부엉골 중턱 부흥사에 이르기 전 산허리에 고려불상의 느낌이 들게하는 마애여래좌상이 선각돼 있다. 항마촉지인을 표시하고 있으며 얼굴이나 몸매가 안정감을 준다. 또 이 불상 맞은편에 개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의 개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어 부엉골의 명물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국 출발지 장창골과 식혜골
장창골과 식혜골은 해목령에서 비롯된 짧은 계곡으로 탑정동 마을입구에서 만나 서천으로 흘러드는 계곡으로 유서깊은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된 곳이다. 장창골에서는 여섯 곳의 절터가 있고 3체의 불상이 발견되었으며 4개소의 탑자리와 보물 제909호로 지정된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당나라 유학을 다녀와 많은 생명을 헤치는 독룡을 항복시키고 신문왕과 효소왕을 섬긴 국사의 위치에 올랐던 혜통 스님이 성장했던 마을이자 천은사터도 이곳에 있다.
신라불상에서는 아주 희귀한 의자에 앉은 불상 석조여래의상과 삼존불협시보살도 이곳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일성왕릉과 신라 최초의 임금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자리 나정이 장창골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또 최초의 궁궐터로 짐작되는 창림사지도 장창골의 유적으로 발굴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다.
장창골 하구로 이어지는 물길에는 일성왕릉 아래 강당못과 금강못이 아직도 많은 물을 담고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주변지역 주민들의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식혜골은 동남산과 서남산의 분수령이 되는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이다. 북쪽 도당산으로 이어지는 목이 7번국도로 잘린 남산뿌리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과 연결된 계곡이기도 하다. 이곳의 절터에서 ‘사제사’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기와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왕가에서 사용하던 우물 있던 왕정골
왕정골은 남산에서도 아주 짧은 계곡중의 하나다. 남산 정상에서 북으로 뻗은 산맥 끝머리인 맨다리 고개에서 시작해 반월성 앞으로 흘러가는 남천으로 불리는 문천에 합류하는 개울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계곡 동쪽에는 최치원 선생이 명필을 다듬었던 상서장이 있고, 서쪽에는 아담하게 솟은 도당산이 있어 남산 북쪽끝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대궐터가 있는 월성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에 왕가에서 사용하뎐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왕정골이라 불리고 있다고 전한다.
이 우물은 포항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국도에 묻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 1체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가늘게 생긴 도생달 모양의 눈썹, 약간 치켜롤라간 긴 눈, 조용히 다문 입, 가슴을 드러내지 않은 통견을 걸친 입상의 불상이다. 도당산이 남산을 자라로 볼 때 자라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보면 왕정골은 자라목에 해당하는 물줄기가 된다.
◆남산성과 장창지
금오산정에서 동남산과 서남산의 분수령을 타고 북쪽으로 1km쯤 내려오면 근래에 세운 전망대가 넓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망대는 동남산의 국사골과 주녹골, 서남산의 큰 늠비골과 작은 늠비골의 시발점이 되는 큰 봉우리이다. 이 봉우리에서 다시 북으로 1km쯤 가면 해목령이 된다.
해목령은 장창골, 큰골, 윤을골의 시발점으로서 해발 281m 되는 큰 무덤같이 생긴 봉우리이다. 해목령에는 많은 바위들이 얽혀 있다. 동쪽에 있는 높이 3.5m 되는 바위와 서쪽에 있는 4.5m 되는 바위는 경주에서 보면 게눈처럼 보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바위를 게눈바위 또는 해목령이라 불러 왔다.
해목령을 성안에 넣고 둘레 4km되는 성이 남산신성 이다. 특히 임금이 있던 반월성을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국경에서 적병들의 침입이 있을 때 높은 봉마다 마련되어 있는 봉수대를 통해 정보를 최종적으로 남산성에서 받아 반월성에 전하고 반월성의 명령을 남산성에서 받아 선도산. 명활산 등을 통해 국경으로 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산성은 신라 국방의 심장부가 되는 중요한 성이었다. 또 지금도 검게 타버린 숯이 된 쌀이 발견되는 등의 창고의 흔적이 남산 곳곳에 남아 있다.
남산은 신라인들의 불국토로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면서 국방의 최첨단 기능을 담당하는 심장부였다.
첫댓글 부엉골
포석곡으로 올라
꽃장식 있는 돌왕좌에 앉아보고 싶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