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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은 우리 역사의 부침과 그 맥을 같이 해왔다.
정조대에는 왕실 도서관이자 문화 정책 수립의 핵심 기관으로서 국정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정조에 이어 순조가 즉위하면서부터는 그 막강한 힘을 상실한 채
본래의 자료보관 기능만을 담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일제 강점기엔 이왕직(李王職)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다.
한시도 바람 잘 날 없었던 격동과 풍랑의 역사시대를 맨몸으로 뜷어오신 그분,
규장각은 어찌하야 여기 관악 캠퍼스 한구석에 둥지를 틀게 되었을까?
대관절 그 연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속으로 삐걱삐걱 시간의 태엽을 되감아보도록 하자.
규장각이 걸어온 길
규장각의 ‘규(奎)’는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의 이름이며, ‘규장(奎章)’은 황제의 친필 글씨를 의미한다.
따라서 ‘규장각(奎章閣)’은 ‘국왕이나 황제의 친필 글씨를 보관한 건물’이라는 뜻이 된다.
규장각 건립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조선 세조대의 양성지였다.
그는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규장각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694년(숙종 20)에 숙종은 종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사(宗簿寺) 건물에
별도의 건물로서 규장각을 짓는다.
하지만 이때의 규장각은 역대 국왕들의 글·글씨를 단순 보관하는 용도로만 존재했다.
그랬던 규장각이 뜨기 시작한 건
1776년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새로운 규장각을 건립하면서부터다.
여기서 잠깐!
정조가 건립한 건물의 최초 명칭은 ‘어제각(御製閣)’ 혹은 ‘어제존각(御製尊閣)’이었다.
이후 정종이 종부사(宗簿寺)에 걸려 있던 숙종의 ‘규장각’ 현판을 이곳으로 옮겨 달면서
‘어제각(御製閣)’은 자연스레 규장각이 되었다.
이 시기 규장각은 왕실 관련 문서와 중국 및 조선의 도서를 소장하는 단순 ‘책지기’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소수의 정예 관리들을 소속시켜 편찬과 연구 및 정책 마련 등을 담당케 하는 정치적 기구로까지 발전한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정치를 학문적·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창과 방패로서 규장각을 적극 활용했다.
우선 출판 업무를 맡아보던 교서관을 통합해 각종 서적의 보관 및 간행 업무를 규장각에서 총괄케 했다.
또한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여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시행해 자신을 보위할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실무 담당직인 검서관에 서얼 출신 학자들을 과감히 등용하는 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어 1782년(정조 6)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해
왕실 물품과 서적, 역대 군주의 친필 등을 일부 옮겨 보관토록 했다.
규장각의 힘은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바라볼 태양을 상실한 해바라기마냥 급속히 시들어간다.
정조가 친히 양성한 규장각 출신의 친위세력들이 급속히 와해되고,
각신(閣臣, 조선 후기에 둔 규장각의 벼슬아치)들에게 부여되었던 특권도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역대 국왕들의 저술과 친필, 물품을 관리하고 서적을 출판했던
본연의 기능만을 다시 담당하게 된다.
고종 즉위년(1863)에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규장각의 현판을 종친부(宗親府)로 옮긴다
세도정치의 여파로 땅에 떨어진 종친(宗親)의 위상을 끌어올리고자 함이었다.
이로 인해 규장각의 전통적 기능인 역대 왕의 저술, 친필 등의 보관 임무를 종친부에서 수행하게 되고
규장각은 도서의 관리만 담당하게 된다.
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잡은 고종은 규장각의 위상을 제고하고자
규장각이 소장한 도서의 목록을 편찬 간행하고, 장서를 새로이 정리하고,
개화기의 흐름에 발맞춰 서양 관련 서적들을 수집해 비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민국을 장악한 일제는
그러한 노력을 무색케 하려는 듯 규장각을 폐지하고
왕실 소유의 도서 일체를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도록 한다.
이듬해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의 산하에 편입되나
불과 5개월만에 취조국의 기능을 이어받은 참사관분실에 맡겨진다.
일제는 1924년 한국인들의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맞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해
규장각도서를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이관 작업을 실시했다.
이때 이관된 책은 총 151,519책이었으며, 이중 140,913책이 규장각도서로 지정되었다.
이후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하고
1946년 8월 ‘국립대학설치령’에 의해 ‘경성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로 변경되면서
중앙도서관이 규장각도서를 고스란히 맡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규장각도서 일부가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귀중본 도서를 부산으로 발빠르게 옮겨 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으며,
미처 옮기지 못한 도서도 천운이 따른 덕분에 화마(火魔)를 면할 수 있었다.
전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재건하는 데에는 직원들의 노력과 미국의 도움이 컸다.
직원들은 70여 만 권의 도서들을 일일이 정리하는 등 도서관 복구를 위해 철야작업을 계속 했고,
미국은 한미재단과 손잡고 서울대학교 도서관 재건에 필요한 많은 재정적·인적 지원을 제공했다.
전쟁으로 훼손됐던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이후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 및 확대 개편되면서 명실상부한 중앙도서관으로 거듭난다.
당시 규장각도서는 62동 중앙도서관 건물 1층과 2층에서 보관하였고
보존·정리 업무는‘규장각도서관리실’을 두어 전담케 했다.
하지만
중앙도서관 1·2층에 방대한 규장각도서 모두를 보관하기는 힘들었다.
협소한 공간, 고서의 보존·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규장각 독립 건물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됐고
이에 서울대학교에서는 1985년 10월에 공사를 추진, 4년 만인 1989년 10월에 독립 건물을 준공한다.
현재 규장각의 전신(前身)인 셈이다.
이사(移徙)와 개관식을 거친 뒤 1992년 3월 6일 ‘규장각도서관리실’은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해
본부 부속시설인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후 규장각은 전통 기록유산의 보존 및 관리 기능을 바탕으로 국학 연구의 중심 기관으로 발돋움하고자
2006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를 통합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재탄생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접하고 있는 ‘기와지붕에 콘크리트 몸체를 한’ 규장각의 정체이다.
일각에서는 규장각을 일컬어 ‘한국 기록문화의 산실’,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수식의 옷을 입기까지 규장각이 걸어온 길은 녹록치 않은 시간들이었다.
그 길을,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알 때,
규장각은 원래 거기 그냥 있는 ‘건물’이 아니라
좀 더 뜻 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 ‘존재’로
우리들에게 새로이 다가올 것이다.
규장각에는 무엇이 있나?
규장각의 역사를 거칠게나마 훑어보았으니
이젠 안으로 들어가 무엇이 있나를 살펴봐야 할 테다.
현재 규장각에는 국보 및 보물을 포함한 고도서, 고문서, 고지도, 정부기록류, 책판 등을 소장하고 있다.
소장자료의 종류만 무려 80,389종이며 책수는 246,042점이나 될 정도로 방대하다.
규장각은 이 모든 자료를 원출처에 따라
<규장각도서>·<일반고도서>·<문고도서>·<고문서>·<책판> 등으로 분류 및 보관하고 있다.
조선조의 왕실과 주요 기관에서 간행 및 보관해왔던 기록물의 대다수가 규장각에만 보존되어 있고
대부분 역사적 가치가 높아 세밀한 관리가 필요한 것들이다.
이 좁은 지면에 규장각의 그 많은 자료를 전부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규장각의 에이스라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조선시대에 코끼리가 있었다고?
사실이다. 『태종실록』에 보면 태종 때 일본에서 코끼리가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주가 조선에 잘 보이고자 바친 일종의 뇌물이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의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인지 이 코끼리는 매끼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어치웠으며
사람을 밟아 죽이기까지 한다.
코끼리는 그 죄값으로 전라도에 있는 섬 장도로 귀양 가 쓸쓸히 객사(客死)하고 만다.
그때 그 코끼리가 살아남았더라면
우리는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아프리카·인도산 코끼리가 아닌 국내산 코끼리를 볼 수 있었을지도...
대마도에서 왔다고는 하나 어차피 원산지 표시 하던 시대도 아니니 살짜쿵 국산으로 둔갑하지 않았을까
『조선왕조실록』하면 딱딱한 역사서의 이미지를 흔히들 떠올린다.
하지만 위에 본 것처럼
정치와 무관한 생활사나 신변잡기류 이야기도 꽤 많이 담겨 있다.
몇 년 전 대박을 터뜨린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도『조선왕조실록』에 6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독도가 우리 땅임도 명시되어 있다.
한번쯤 읽어보면 재미있을 법도 하다.(물론 번역본으로;;)
교과서적으로 간략히 기술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조선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서술한 국가 공식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법률, 사상, 경제, 군사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조선시대 총괄 보고서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정족산본 완질이며
일제 강점기에 동경대로 반출되었던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47책은
2006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품으로 돌아왔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됐다.
규장각 홈페이지에서 원문과 간략한 내용 설명을 서비스하고 있다.
국보 3호인 데다 워낙 귀중한 기록물인지라 원본 열람은 불가하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288년간 ‘매일’ 쓴 일기
<사진5>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으면서 비서실의 기능을 했던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매일매일 기록한 책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일기라기보다는 일지에 가깝다.
왕의 최측근 기관인 비서실의 기록물답게 왕의 일거수일투족과 국정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왕과 신하들의 독대 기록,
왕의 표정이나 감정,
왕실의 건강 상태,
심지어 날씨에 이르기까지
왕실을 둘러싼 모든 내용을 상세히 표현해 밝혀놓고 있다.
왕실 생활과 국정 운영 전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저서인 셈이다.
현재 남아 있는『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건국 후부터 인조 이전까지 기록한 일기는
임진왜란, 1624년 이괄의 난 같은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1774년(영조 20), 1888년(고종 25) 등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며 없어진 분량을 감안하면 그 양과 권수는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다.
평균 125장 정도가 한 책을 이루는 데 총 장수는 382,487장,
총 글자수는 2억 4,000여만 자에 달한다고 한다.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장의 역사기록물인 점,
장인혼이 깃든 꼼꼼한 기록정신을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통시대 국가의 공식 연대기 기록이 2종이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그만큼 조선시대의 기록정신과 문화가 뛰어났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의궤(儀軌) : 그림으로 읽는 조선시대 왕실 생활사
<사진 6>
‘동아시아 전통과 유교사’에서 정조의 화성 행차를 담은 <화성원행반차도>를 본 적이 있다.
그림은 두루마기로 제작되어 있었다.
선생님과 학생 한 명이 양쪽 끝을 잡고 그림을 펼치자
1500명에 달하는 행차 인원과 의장기, 악대 등 행렬의 화려하고 장엄한 전경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졌다.
강의실 너비 관계로 전면을 보진 못했으나 펼쳐진 부분만도 족히 10m는 되어 보였다.
(필자가 후에 조사해본 바 <화성원행반차도>의 총길이는 1,536cm이다)
현재 규장각은 540여 종, 2,900여 책의 의궤를 보관하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행사의 구체적인 과정을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담아놓은 책이다.
후세에 참고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 일의 전말, 소요 경비와 물품, 행사 절차, 행사 후의 포상 내역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놀라운 것은 하찮게 보이는 기술자와 노동자 및 장인의 이름은 물론
그들의 복식, 근무일수와 품삯 행사에 소요된 물품의 크기·빛깔·재료, 행사에서 연주된 악장과 악기의 편성, 악기 그림 등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 생활사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의궤는 조선 초기부터 제작되어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는 모두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장서각, 프랑스 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의궤 제작은
종묘·사직, 가례·하례, 묘호·시호, 궁궐건축 등 왕실 행사와 생활영역 전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화성 행차와 같은 대규모 국가 이벤트만 의궤로 제작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의궤의 치밀한 장면 묘사와 기록에서 필자는 오늘날의 사진과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과 영상의 본질적 기능은
‘사건과 기억의 보존’이다.
과거의 사진과 영상을 통해 우리는 지난 시간의 생생한 모습과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인간은 망각과 유한성의 동물이므로 아무리 특별했던 순간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기 마련이다.
의궤는 현재의 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우리 선조들의 강렬한 바람과 기록 정신의 결정체이다.
의궤가 지니는 희소성과 세밀한 기록,
3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온 점 등을 들어
우리 정부는 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신청,
유네스코는 2007년 6월 14일 <조선왕조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정식 인정했다.'
이를 기념하고자
규장각에서는 작년 10월 30일부터 11월 11일까지
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함께
규장각 소장 의궤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 규장각 이용안내
- 자료열람 : 월~금 09:30~17:30
- 전시관람 : 월~토 09:30~17:30
※ 공휴일은 휴관.
소장자료검색
- 소장자료에 대한 정보는 (서지목록, 해제, 원문 등)열람실에 설치되어 있는 온-라인 단말기 또는 책자목록에 의하여 검색할 수 있다.
또한 인터넷 및 인트라넷 등 공중 정보통신망을 통해 소장자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규장각에 직접 오지 않아도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http://kyujanggak.snu.ac.kr)
자료열람
- 규장각에 소장된 도서 및 자료는 본교 교직원 및 학생과 일반인이 열람할 수 있다.
- 열람을 원하는 사람은 개인 사물을 사물보관함에 넣은 후 소정의 양식에 의해 대출대에 신청 하면 지정된 열람실내에서 이용할 수 있다.
- 영인자료 및 참고문헌은 열람실내에서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다.
- 고서, 고문서 등의 주요자료는 원본을 보존하기 위하여 마이크로필름 및 영인본, 복사본 이용을 원칙 으로 한다.
- 자료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전자복사기와 마이크로필름 판독기를 이용하여 복사할 수 있다.
--주석--
1.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다.(위키백과 참조)
2.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료집(2008)』, 115쪽.
3. 조선시대의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 북학파의 거장 박제가, 뛰어난 역사가이자 시인이었던 유득공 등이 모두 규장각 출신이다.
4.‘이왕직→취조국→참사분관실→경성제국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규장각은 참으로 모진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일제가 이렇듯 규장각을 돌려 맡은 이유는 조선의 관습과 풍속, 법식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해 이에 맞는 안정적 통치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힘만으로는 식민지를 ‘완전’ 지배할 수 없다는 치밀한 유화 술책이 아닐 수 없다.
5. 다들 잘 알다시피 경성제국대학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前身)이다.
6.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실의 명칭은 ‘국립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새롭게 정해졌다.
7.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2007년 발행한 자료집 『“새로운 한국학을 향하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요람』참고. 현대 한국학 도서(14,839점)까지 합치면 26만점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8.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이기도 하다. 규장각을 대표 명품을 고르는 데는 이점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선별이 다른 수많은 규장각 기록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거나 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미리 밝힌다.
9. http://kyujanggak.snu.ac.kr
10. 제국주의가 남긴 잔혹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전시물의 99%가 약탈품이라는 대영 박물관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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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