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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12장1~13절
제목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11장에서 바울은 “나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하시면서 자기의 어리석은 자랑(21~33절)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도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합니다(22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23절)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24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25절)
-여행 중에 여러 번 위험을 당하였습니다(26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다.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27절).
-내가 부득불 자랑하지만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30절).
오늘 본문은 바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랑을 한 후에 또 다시 자랑을 하나 더 하려고 합니다.
이 자랑은 앞에서 언급한 어리석은 자랑과 같은 육체에 따라 하는 자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는 전혀 무익한 자랑이었지만 바울은 꼭 해야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이 바울보다 더 영적인 존재라고 자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도 영적 경험이 부족하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그가 경험한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다가 중단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만하지 않도록 주께서 주신 육체의 가시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1. 약함을 자랑함(1~6절).
1) 내가 부득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합니다(1절)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 바울은 이미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11:1,16-18).
*11:1,16~18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17]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18]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그러나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오도(誤導)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 - 여기서 '환상'(헬라어 '와타시아스')은 바울이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할 때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합니다(행26:19).
이 말은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으로 어떤 실체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보는 것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인지 아니면 무의식의 상태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잠을 자는 상태라기보다는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계시'(아포칼류세이스)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환상이 직접적으로 보여진 현상이라면,
'계시'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감지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환상은 대부분 계시이지만, 모든 계시가 환상인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지금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의 자랑은 적대자들의 자랑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자랑입니다.
적대자들은 자기들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했고(11:13),
*11: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자칭 권위 있는 추천서를 내밀면서 자기들의 자격을 자랑했습니다(3:1).
그리고 그들은 신비적인 경험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발하는 것은
그의 적대자들이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자랑한다면
바울 자신도 그런 것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의미로,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진술하게 되었습니다.
2) 십사 년 전에 환상입니다(2절).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이러한 자랑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러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환상을 이야기 할때 3인칭의 화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아노니. - 바울은 오래 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이 있어, 자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나'라는 말대신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랍비적 표현법이 영향이었거나, 또는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 사년 전. - 바울은 매우 오래 전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특히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증언의 신빙성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경험이 본서가 집필도기 14년 전이라면 A.D. 43년 경이었을 것이고,
수리아의 길리기아에서 보냈던 '침몰의 세월'(약 A.D. 35-43년)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혹자는 행 22:17에서 언급 된 바대로 성전에서 본 환상을 가리킨다고 추정합니다.
*행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세 째 하늘. - 본문에 대해서는, 그 개념상의 특이성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됩니다.
먼저 '세째 하늘'이 유대인들의 하늘 개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12족장의 유언). 그 중 세 번째 하늘은 의롭게 죽은 자들이 머무는 처소라고 합니다(에녹서8:1-13;42:3). =삼층천
그렇다면 바울은 바로 이 죽은 의인들의 처소에 다녀온 것이 됩니다.
이 경우 바울이 당시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지 말고
바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래서 언어로는 정확히 묘사할 수 없는 곳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체험을 환상 중에 했다는 것으로 이해함이 무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째 하늘'의 개념은 엡 4:10의 '모든 하늘 위에'란 표현과 일맥 상통합니다.
*엡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혹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본문의 표현이,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들어갈 하늘 혹은 천국의 선취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끌려 간 자라.-'이끌려'는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힌바 되었음을 뜻합니다. 즉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몸 안에...아시느니라. - 본 구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여 자아가 몸과 분리될 수 있음을 바울이 생각했다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다만 그 환상의 경험이 인간의 오성(悟性)과 관념의 범주로는 포착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아시느니라'는 진술에서 바울은 계시나 한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임을 암시적으로 가르칩니다.
따라서 만약 적대자들이 그들의 환상 경험을 자랑하되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3) 내가 이런 사람을 압니다(3절)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환상과 계시는 경험하는 자가 자의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일상사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초월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간적인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4절).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으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낙원'이라는 말은 '세 째 하늘'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유대인들의 '세 째 하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낙원'은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동산(창 2:8;사 51:8), 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겔 28:13;31:8).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눅 23:43),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계 2:7)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따라서 '낙원'은 구원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구약에서 보여지는 봉인(封印)된 계시에 관한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사 8:16;단 12:4).
*사8: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단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이와 달리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그 체험이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은 묵시 문학이나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체험을 자세하게 진술하는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더 이상 그 환상에 대해 진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5절).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의 당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은폐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2절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여기서 묵시 문학자로서의 바울과 인간 사도로서의 바울을 구별하여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른 학자는 교회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바울의 기본적 관점에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즉 바울은 '방언'이나(고전 14:9) '황흘경 체험'에 대해 말할 때(5:13) 교회의 유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과 바울 자신만의 일을 말하는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일는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그런 자랑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취할 영광은 그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곧이어 언급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약한 것들. - 바울은 매우 현명하게 자신의 논리를 진전시켜 이제 정말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다만 적대자들이 그들의 사도직의 증거로서 황홀경 체험을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사도직의 증거라면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말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상 체험을 진술했을 뿐입니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로서의 자랑이 오직 자신의 약함이 있다는 것을 적대자들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周知) 시키는 것입니다.
6) 내가 만일 자랑하여도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지나치게 생각할까 그만 두노라(6절)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자랑도 모두 참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경험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의 적대자들이 보지도 않은 환상에 대해 말했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 바울은 얼마든지 더 말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곡해(曲解)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과거에 그가 미쳤다고 악평하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5:13) 이번에도 그런 것을 염려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절은 자기가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소극적 의미에서 보다는 자기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평범한 성도들에게 시험이 될 수도 있었음이 우려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도모한다는 바울의 원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높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받고 자신은 오직 사도적 봉사를 통해서만 인정받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삼층천 체험을 이야기 하기전에 수치스러운 광주리 탈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삼층천 체험을 이야기 한 후에는 고통스러운 질병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거절하신 은혜(7~10절)
1)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7절).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주어진 이 특수한 은총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그런식으로 실족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속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육체에 가시. - 이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시'(헬라어 '스콜롸스')라는 말 외에 '파편', '말뚝'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이 이 가시를 육체에 지닌다고 할 때 이것을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자로 보거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갈 4:13-15)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마 17:14-18;행 9:9;갈 4:14).
이 밖에 참고로 바울이 '복음을 위한 유대인 동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와 '언어의 장애'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근거로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첫 인상이 나쁘고(갈 4:13)
*갈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외모나 언변이 보잘것없다는 것을(10:1, 9-11;11:6)언급합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견해들이 많으나 모든 것이 추측에 의한 진술들입니다.
사단의 사자. - 이렇게까지 표현한 데에는 바울이 그 '가시'로 인하여 당한 고통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해 사용됨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바울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 까요?
이러한 불균형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현실안에 있는 곤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는 “고난중에도 기뻐하라는”바울의 신학에 전반적으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아마도 육체적인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많은 추측이 있지만 사물을 잘 보지 못하는 눈의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바울은 그이 대서에게서 팬을 넘겨 받으면서 내손으로 너에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또 그보다 좀 앞부분에서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의 눈이라도 빼어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지만 바울에게 더 큰 근심과 고통의 문제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병을 않는다고 바울을 멸시하고 나아가서는 바울의 진정성과 그가 전한 복음의 메셋지를 폄하해 교인들의 신앙을 흔들어서 잘 못되게 빠져가는 교회를 위한 염려였습니다.
행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질병의 간구는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2)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8절)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세 번'이라는 숫자는 일정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자적 의미의 세 번을 뜻할 수 있습니다(막 14:32-42).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질고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주께'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헬라어 '호 퀴리오스'를, 하나님을 지칭할 때 관사 없이 단순히 '퀴리오스'를 사용했는데 본 구절에서는 전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기도한 것은 질고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사53:4)구체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거론하여 기도했음을 암시합니다.
3)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였습니다(9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르시기를. - 상당히 선언적이고 종결적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주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매우 친절한 거절'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만족해야 했습니다.
한편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은혜'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본 구절에서의 '은혜'는 그가 사도가 되고 또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입니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됩니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 '머물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노세'의 의미는 '장막에 확고히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하는 적대자들은 결국 주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 들어난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 위에 머무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울은 더더욱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4)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합니다(10절)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강해지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는 감추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영광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 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도록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의 결과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약하고 비천(卑賤)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를 알면서 바울이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진정한 사도의 표(11~13절)
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11절)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 이제 바울은 그의 어리석은 자랑(1절)을 끝맺음 하면서 자기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결국 고린도 교인들의 침묵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적대자들이 여러 가지로 자랑을 하고, 상대적으로 바울을 비난했을 때, 당연히 바울을 옹호했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했으므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하여 "사실 여러분은 나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로 되어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어리석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스스로를 자랑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먼저 바울을 인정했어야 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해주는 산 증거였습니다(고전3:6, 10;4:3, 4, 15).
그러나 그들이 사실을 망각하여, 당당하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한 거짓 사도들(11:20)에게 바울이 보잘 것 없고(11:7-11) 언변이 모자라는 자임을(10:1,10;11:6) 침묵을 통해 그들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나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 '아무것도 아니나'란 표현은 혹 적대자들의 비난을 인정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에서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그런 존재로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사도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11:5 주석 참조).
*이러한 자랑을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들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거짓 사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다시 참된 복음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12절)
사도의 표. - 이는 사람이나 어떤 인간의 권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도로서의 초자연적인 자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행위도 포함됩니다.
바울은 이전에 이미 몇 달 동안 적대자들의 훼방을 참으면서 고린도 지역에 선교(宣敎)함으로써 사도된 증거를 남겼습니다(행 18:6).
참음. - 이것은 육체적인 피곤함과 외부로부터 오는 극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내력을 가리킵니다(6:4-6).
표적과 기사와 능력. - 이것들은 각각 다른 유형의 능력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된 능력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표적'은 복음을 확증하는 능력이며,
'기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는 능력이고,
'능력'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예수님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행 2:22, 43).
이는 바울의 사도직을 더욱 확증해줍니다.
3)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13절)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 바울은 사도직에 관한 논의에서 사도직의 권리에로 그 초점을 옮겨가고 있는데, 이는 부드러운 풍자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독특한 표현법입니다(11:5-12;고전 9:1-18).
그리고 이 풍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은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11:9).
바울은 사도에게 요구되는 모든 자격을 구비했으나(1-4절, 12절)
복음 전도자에게 부여되는 재정 지원에 대한 권리는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마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긴 오해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재정적 권리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혹시 정당한 사도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도록 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만은 받지 않음으로써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이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미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리라는 추측입니다. 바울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재정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불공평한 사랑의 표현으로 오해되었기에 바울은 이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장점이 들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통해 하나님이 강함이 나타나기를 원하였던 바울.
영적인 체험 앞에서도 겸손할 줄 알았던 바울.
자신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 할 줄 알았던 바울.
간절한 기도를 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바울의 신앙을 닮아 가는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놀라운 “계시”와 함께 육체의 “가시”도 주십니다(7,9절).
바울이 허탄한 자랑에 빠져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배려입니다.
이에 바울은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는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고 도리어 기쁨으로 육체의 가시를 받아 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헛되고 무익한 자랑에 취해가는 세상에서 고난은 물론 자기 약함과 약점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야 합니다.
내게 허락된 육체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2) 가시와 같은 고통을 제거해달라는 바울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하십니다(8,9절).
하지만 거절 자체가 은혜이고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할 일보다 바울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탁월하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사역자가 되기보다, 부족하지만 겸손하여 주를 의지하는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성급히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나는 거절된 기도에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바울은 낙원에 올라가 형용할 수 없는 환상과 계시를 목격합니다(1~6절).
누구도 견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지만 바울은 자신과 무관한 사람의 일인 듯 담담히 진술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랑을 무익한 것으로 여겨 중단합니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자신을 달리 볼까 봐 염려합니다.
내게 있는 무엇이든 내가 이룬 무엇이든 주님이 아닌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나를 통해 주님을 드러내는 일에는 이미 쓰임새를 잃은 것입니다.
2) 바울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어리석게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오래 참는 가운데 사도직을 정당히 수행했으며 교회에 어떤 폐도 끼치지 않기 위해 힘썼다고 말합니다(11~13절).
진정한 사도의 표는 이기한 체험이나 표적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주를 닮은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자기 소명에 충실한 지도자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