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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기(佛國記)』 해제문>
<<사진과 지도 설명>>
<법-해-1 법현의 순례총도 . 표지 이면에 2페이지로 나오게... >
<법-해-2 법현사문의 초상화 >
<법-해-3 법현의 고향인 산서성 임분의 ‘법현박물관’에 서 있는 동상 >
<법-해-4 진(晋)나라 때의 중국 지도 >
<법-해-5 3世紀 타림분지의 지도 >
<법-해-6 한나라 장건의 서역기행도 >
<법-해-7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도>
<법-해-8 헬레니즘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쿠샨왕국의 판도>
<법-해-9 『법현전』 권1의 표지 >
<법-해-10 불국기 목판본>
1. 프롤로그
요새 나이 64세이면, 분명히 환갑, 진갑이 다 넘은 노인네가 분명하지만, 그러나 정식 노인네 축에는 못 드는 어정쩡한 애늙은이 부류에 속한다. 직장에서 쫓겨난 지는 오래지만, 그렇다고 경로당으로 가면 커피 타 오는 심부름만 할 군번이고, 그렇다고 딱히 새로이 뭘 벌이기도 그러한, 그야말로 어정쩡한 상태의 나이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이 나이 때의 애늙은이들의 현실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천 년 전 아니 자그마치 1천 6백 년 전이라면 이야기는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오래 살았다하여 주위에서 이른바 ‘고려장’을 지낼 준비를 할 준비를 해두고 있을 나이였기에 ‘그런 나이’에 뭘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테니까….
오늘의 주인공 법현(法顯,334~420)사문은 그런 나이에, 그러니까 딱 64세에 머나 먼 길을 떠났다. 그것도, 당시는 우리에게도 너무 친숙한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602-664)의 성공담으로 인해 서역으로의 구법 순례길이 승려들에게 일대 '로망'이었던 시대가 오기도 전, 무려 2백여 년 전 일이었다.
그러니까 수백 년 전의 한나라의 장건(張騫,?~BC114)같은 여행가 정도 만 서역까지 다녀왔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 전해오던 때였고 삼국시대 들어와서는 위(魏)의 주사행(朱士行)이라는 사람이 서역으로 떠났지만, 그 뒤 소식이 끊기고 다만 그가 인편에 보낸 불경만이 중원에 전해져온 일이 풍문에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서역 말고, 정작 ‘부처님의 나라’ 라는 천축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완전한 미지의 백지였고 당연히 천축으로의 여행정보도 전혀 없었던 시대였다.
<법-해-9 『법현전』 권1의 표지 > <법-해-2 法顯화상 초상화>
법현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남십자성이 빛나는 천축의 하늘아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을 가지고 해와 달과 별에 의지하여 수만리 길을 떠난 것이다. 그것도 칠순에 가까운 노인네가 무거운 바랑을 메고 말이다.
그 길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수만리 길이었기에, 그의 주위에서는 ”고려장 지낼 상늙은이가 망령이든 것도 아닌데,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3년 뒤, 그와 같이 떠났던 11명의 젊은 동료들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지만, 법현은 보란 듯이 중원 땅으로 돌아왔다. 그 때 법현의 나이 77세였지만, 그의 눈빛만은 보랏빛 꿈을 성취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신념으로 마치 별처럼 빛났을 것이다.
그건 한 마디로 ‘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아마도 당시에 ‘기네스북’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혹시 신불(神佛)의 가피력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건 확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법현은 미지의 나라 30여 개국을 거쳐서 불경을 하나 가득 가슴에 안고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옮긴이가 이번 ‘5대 여행기전집’ 번역의 가장 큰 분수령인『대당서역기』의 역주본을 대충 마감하고서 달려든 작업이 바로『불국기』였다. 그 첫째 이유는 역자 역시 법현과 같은 나이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미 서두에서 이는 강조한 바 있다.
두 번째는 기행문학으로서의 격조 있는 문학적 향기를 넘어 문자가 가진 기능성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본서는 무려 1천6백 년 전의 기록이다. 당연히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어 긴장감을 풀지 못하고 시작을 하였지만, 그러나 반복되는 지명이외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글자가 별로 없어서 옥편 찾는 시간이 많이 절약된 탓도 있었지만,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당송시대의 문장과 별로 다르지 않은 문체 때문인지, 행간과 행간 속에서 무려 1천7백 여 년 전의 사람인 법현의 미세한 뜻까지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신기함까지 느껴졌을 정도였다.
또한 그래도 딱딱할 수밖에 없는 한문원서를 번역하다보면 때로는 지루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정감 있는 대화식의 구어체로 하여금 분위기를 새롭게 할 수가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
예를 들면 법현이 붓다의 자취가 짙게 배어있는, 현 라지기르(Rajigir)의 영취산(靈鷲山)에 올라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에 울음을 터트리는 광경 같은 것이다.
[법현은] 왕사신성에서 향과 꽃과 기름등을 사서 두 비구에게 부탁하여 가져오게 하여 기사굴산[靈鷲山]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꽃과 향을 공양하고 유등(油燈)을 계속 밝히면서 문득 슬픈 감상에 빠져 들었다.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는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옛날에 이곳에 머무셨고, 『수능엄경』을 설하셨는데, 법현은 살아서 여래를 뵙지도 못하고 다만, 그 유적지만 찾을 뿐이로다.”
그리고 경을 염송하고는 [그곳에서] 하루 밤을 머무르고 다시 왕사신성으로 돌아갔다.
또 한 대목 더 소개한다. 법현이 소설산(小雪山)을 넘을 때 눈보라를 만나 4년이나 동거 동락해 온 도반(道伴) 혜경(慧景)사문이 죽어갈 때의 장면은 보는 이까지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소설산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눈으로 덮여 있었는데, 산의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에 찬바람이 갑자기 거칠게 일어나는 것을 만나 사람들은 모두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일행 중 혜경(慧景)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입에서 흰 거품을 토하면서 나 법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도저히 다시 살아나기는 어렵겠군요. [그러니] 빨리 가십시오. 머뭇대다간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혜경이 결국 마지막 숨을 거두자, 법현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며 애통해했다.
"우리들이 원래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죽다니 어인 일이요!“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서정적인 문체는 구법기로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물론 우리의 혜초사문처럼 중간에 시구절이 들어간 경우는 있지만, 이런 문체는 이채롭기에 번역하는 내내 덜 지루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리라.
세 번째는 동서문화의 소통과 융합 그리고 변용의 위대한 산물인 ‘간다라문화’를 동양인 처음으로 몸으로 체험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법현이 경험한 간다라문화와의 첫 조우는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흔히 간다라문화를 평해서 “그리스인을 아버지로 불교도를 어머니로 한 그리스풍 문화” 라고 해석하고 있다. 옮긴이의 경험으로는 귀에 쏙 들어오는 정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라시아와 인도대륙이란 광대한 무대에서 벌어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이란 역사상 처음 벌어진 거창한 정복전쟁에 대해서, 대부분의 문화비평가들은 그의 요절에 의해 막을 내린 ‘이벤트’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나 옮긴이의 견해는 좀 다르다.
이 위대한 정복자의 원대한 꿈은 그가 점령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그가 인류 최고의 문명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리스문화의 향기에 물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갈등과 이질감을 해소하여 보편타당한 가치관을 가진 세계인으로서의 기틀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보랏빛 꿈을 제국의 각지에 건설되었던 75개에 달하는 식민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무대로 꽃피우게 안배를 하였다.
물론 그가 요절한 후에도 이 프로젝트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대왕과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으로 계승되어 내려 왔지만, 그러나 간다라문화는 결국 5~6세기에 간다라문화의 중앙무대인 중앙아시아를 침입한 유목민족인 에프탈족(Ephthal)에 의해 타격을 받아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한 동안은 그 향기는 여전히 풍기고 있었다. 법현이 간다라지방을 찾은 것은 바로 그 간다라의 마지막 불꽃이 스러지기 전이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그 향기를 직접 접한 유일한 순례승이었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옮긴이가 다녀본 옛 간다라 유지들 곳곳에는 아직도 이 위대한 정복자의 보랏빛 꿈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고 더 나아가 해동반도의 끝자락인 서라벌에서까지 그 향기는 지금까지 간간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불국기』의 특징 중의 하나는 5대 여행기 어디에도 없었던, 사자국(獅子國)즉 현 스리랑카(Srilangka) 섬에 대한 풍부한 정보에 있다. 특히 5세기 초 당시나 지금이나 상좌부 남방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의 생생한 자료들을 불교사적으로도 정말로 귀중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럼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법현의 프로필은 어떤지 살펴보자.
그는 동진시대의 인물로, 속성은 공씨(龔氏)로, 현재의 산서성 옹단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법현은 삼형제인데, 위는 차례로 병사하였다. 이에 요절이란 화가 막내까지 미칠까 두려워한 부친에 의해 겨우 3살 때 사원에 보내져 사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 비구계를 받자 계율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도 철저했다고 한다.
그렇게 40수년 간 수행을 계속하면서 환갑 진갑을 넘겨 64세에 들어섰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늘 비어있는 것 같았다. 바로 천축의 꿈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동진(東晋) 홍시원년(399년) 기해년에 혜경(慧景)사문을 비롯하여 도정, 혜응, 혜외 등과 의기투합하여 천축국에 가서 율장(律藏)을 가져오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장안을 출발하여 도중 장예[張液]에서 지엄, 혜간, 승소, 보운, 승경의 5인, 그 위에 호탄[和闐]에서 혜달이 합세하여 모두 총 11인이 되었다.
당시의 여행은 지금처럼 달러[$]만 있으면 아무 나라나 갈 수 있는 지금과는 사뭇 차원이 원초적인 상태였을 것이다. 그냥 가는 곳마다 즉석에서 물물교환의 방식이나 또는 엽전이나 물품을 보시(布施)받아서 필요한 것을 구하면서 다니는 여행이었다. 말하자면,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시대였다.
각설하고, 하여간 이렇게 급조된 법현 일행의 테마여행팀은 실크로드의 본격적인 베이스 켐프였던, 둔황[敦煌]의 옥문관을 나가 흐르는 모래 강[沙河]을 건너 죽음의 대설산과 소설산을 넘어 스와트계곡에 있던 우디아나, 간다라, 탁실라, 페샤와르, 카슈미르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신비한 전설이 가득한 붓다의 본생담인 ‘자타카(Jataka)’의 고향을 두루 섭렵하고 다시 중천축으로 가서 붓다의 탄생지를 비롯한 ‘8대 성지’를 순례하고 중천축의 수도 파트나에서 3년간 경전의 필사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는 갠지스하를 따라 동부의 해안도시인 땀룩에 이르러 다시 2년 동안 경전을 필사한 후 배를 타고 스리랑카에 들려서, 다시 2년간을 율장의 필사와 연구를 하다가 무역선을 얻어 타고 수마트라, 자바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특히 사자국(獅子國)에서의 기록은 그 희귀함으로서도 빛이 나는 것으로써, 특히 한 고승의 다비(茶毘:Jhāpita)식을 묘사한 장면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하여 국왕은 율장을 참고하여 나한의 장례법대로 사유(闍維), 즉 다비식을 치르게 하였다. 정사의 동쪽 4.5리 되는 곳에 좋은 장작을 사방 3장, 높이도 3장 되게 쌓고 왼쪽에 전단과 침향 등의 향나무를 올려놓고 네 변에 계단을 만들고는 그 위에 깨끗한 하얀 천을 두르고 장작을 쌓아 큰 침상을 만들었으니 그 모양은 중국의 상여[轜車]와 같은데, 다만 어용(龍魚)의 귀 같은 장식이 없을 뿐이다.
사유를 할 떄에는 국왕과 사부대중들이 모두 모여 꽃과 향으로 공양을 하고 상여를 따라 묘소에 이르렀다. 왕은 자신이 꽃과 향으로 공양하고 그것이 끝나면 상여 위에 수유(酥油)를 두루 붓고 불을 붙이고 불이 탈 때에는 사람들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각기 상의, 누의, 산개 등을 벗어 저 멀리 불 속에 던져 넣어 타는 것을 도왔다. 화장이 끝나자 뼈를 추려 탑을 세웠다.
법현이 이곳에 이르렀을 떄는 이미 나한은 살아있지 않고 오직 장사지내는 광경 만 볼 수가 있었다.
법현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는 곧장 중국의 광저우[廣州]로 갈 예정이었으나, 풍랑 때문에 표류하다가 훨씬 북쪽의 산둥반도 남단까지 올라가서 지금의 칭다오[靑島]인근의 도교의 명산인 노산(勞山,1133m) 앞 바다에 도착한 진(晉) 의희(義熙)8년(412년) 7월 14일이었다고 한다.
해양실크로드를 통한 그의 귀로는, 뒤의 마르코 폴로보다 9백년 그리고 같은 해로를 택한 8세기의 의정(義淨)이나 혜초(慧超)보다도 근 3백년 가까이 앞서는 선구적인 장도였다.
당초 법현과 같이 인도로 출발한 일행 11명 중에서 도중에서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이가 두 명이고 도중에 뒤돌아온 이가 여섯 명이고 인도에 눌러 앉은 이가 두 명이어서 제일 연장자인 법현 단 한 사람만 목적을 이루고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중국으로 돌아온 뒤의 법현의 행적 중에서 눈에 띠는 대목이 보여서 사족을 붙인다. 후에 법현이 산동에서 지금의 난징[南京] 인근의 도장사(道場寺)에서 천축승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와 같이 공동으로 그가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고 있을 때, 그 당시 같이 인도로 떠났다가 먼저 육로로 돌아온 지엄(智嚴)과 보운(寶云)이 법현을 찾아왔다고 한다. 10여 년만의 성사된 그들의 상봉 장면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겨보고 싶다. 그 뒤 보운은 법현을 도와 같이 번역에 참가하였다고 전한다.
법현은 해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만일 비바람이 몰아치면 바람을 받아 나아갈 뿐 지표로 삼을 것은 전혀 없다. 칠흑 같은 밤이면 다만 파도가 부딪치는 빛깔이 불빛인 양 보일 따름이다. 만일 암초에 걸리면 살 방법이 없다.
이렇게 하여 90여일 만에 한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는 자바[耶婆提]라 불렸다. 그곳에서는 5개월 간 머물렀다. 노자돈이 바닥이 났기 때문에 시주를 찾아다니고, 태워줄 배를 구하느라 바빴다. 드디어 4월 16일 50일분의 식량을 준비하고 2백인 정도의 상인들이 탄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배는 동북쪽으로 하여 1개월 남짓 항해하여 광저우[廣州]를 향해 나아갔는데 밤중에 큰 폭풍우를 만났다. 상인과 선원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법현은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마침내] 그 가피력으로 밝은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한 부라만이 말을 했다.
“[외도인] 이 사문을 배에 태웠기 때문에 우리들이 고난을 만났다. [그러므로 그를] 해변에 내려놓고 가자. 한 사람 때문에 전부가 위험해서야 되겠는가?”
그때 법현의 시주가 나섰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내려달라. 그렇지 않겠거든 즉시 나를 죽여라. 당신들이 이 사문을 내려놓는다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왕께 나아가 호소하겠다. 중국왕이 불법을 숭상하고 비구승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모르느냐?”
상인들이 주저하였지만, 나를 [배에서] 내리게 하지는 않았다. 험난한 항해는 계속되었다. 물은 떨어지고 식량도 바닥이 났다. [그렇게] 50일이 훨씬 지난 12주 만에 배는 우연히 어느 해안에 닿게 되었다. (중략) 장광군계[長廣郡界]인 뢰산(牢山) 남쪽 해안이었다.
각설하고, 이제 마지막 마무리를 해보자. 물론『불국기』는, 여행기의 쌍벽으로 꼽히는, 현장법사의『대당서역기』처럼 대하적인 다큐는 아니다. 9천 5백 자, 1권 정도분량의 단편이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헬레니즘 문화를 직접 조우한 첫 번째 기록이라는 점과 고대 중앙아시아와 인도대륙 뿐만 아니라 해로상의 스리랑카 등을 아우르는 아시아 전체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질적으로는 오히려 현장의 것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되고 있다.
『불국기』는 앞에서 여러 차례 밝힌 바이지만, 『고승법현전』또는『역유천축기(歷遊天竺記)』라고도 불리는데, 법현이 귀국한 다음 해인 413년에, 본문에 의하면 스스로 기술하였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상 편찬자가 따로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인다.
물론 이외에도 그가 번역한 많은 경전들-『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6권,『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40권 등 6부 63권, 미완역인 채로 남아 있는 『장아함경(長阿含經)』5부 등이 - 불교사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법현을 인류역사의 찬란한 별로 만들어준 것은 역시 본 여행기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막막한 모래사막 그 너머에 신기루 같은, ‘서역의 꿈’을 꾸던 여러 후배들 -송운, 혜생, 현장, 의정, 혜초 등과 같이 순례기를 남긴 여행의 사문들과 그들 외에도 여행기는 남기지 않았지만, 이름만은 남긴 180여명의 순례승들-에게 처음으로 어떤 비젼을 제시한 선구적인 텍스트였다.
말하자면, 후배들에게 서역으로의 보랏빛 꿈을 꾸게 만든, ‘동기부여’를 하게 해준 일종의 스테디셀러 가이드북이었다. 그 점은 현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업적이라 하겠다.
또 한 가지 추가해서 밝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불국기』가 두 종류 있다는 사실이다. 법현은 당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유명한 선승인 혜원(慧遠,334-416)의 요청에 의해 여산에서 경을 설하였는데, 그 때 혜원의 속가제자인 뇌차종(雷次宗)이 법현의 천축행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를 하여『유천축기전(游天竺記傳)』이란 책 한권을 편찬하였고 이것을 법현 스스로가 보충하여 완성시킨, 본 역주본인[팔만대장경본]을 편의상 대전(大傳)이라 부른다면 석혜교(釋慧皎)가 편찬한 소전(小傳)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전자가 행로 자체에 중점을 둔 반면 후자는 법현의 행장에 중점을 두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다음 구절을 보면 확연해진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나이는 86세이셨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법현사문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답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고승법현전』석혜교찬 제3권>
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도 이른바 『법현전』은 소전, 대전 두 본이 존재함을 알 수 있으니, 독자제위는 혼동이 없기 바란다.
법현의 유업을 추모하여『불국기』의 재조명은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근대 서양에서도 번역판이 이어져 불어번역으로는 A.레뮈사(1836), 영역판은 S.빌(1869년), H.A.자일스(1877), J.레그(1886) 번역판 등이 있어 모두 세계적인 명저의 반열에 들었고 동양 쪽으로는, 청(淸)나라의 정겸(丁謙)의『불국기지리고증(佛國記地理考證)』를 비롯하여 일본의 나가사와 가즈도시(長澤和俊)의,『法顯傳』,平凡社, 그리고 대만의 三民書局에서 펴낸 역주판도 있다.
한편 국내 번역판은 동국대 불전간행위원회,「현대불교신서」제32권,『불국기』(1980), 이재창역주본이 있기는 하지만, 절판된 지 오래되었고 또한 세로읽기 방식이어서 이 자체로도 고전이 된지 오래이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요구되었기에 옮긴이는 이번 <5대 여행기전집>의 2번째 대본으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총 서문에서 옮긴이가 이미 밝힌 것처럼 1천6백 년 전의 법현이 우리 후손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바로, “지금도, 아직,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2012년 맹춘지절에 서역만리 석류(石榴)의 꿈을 꾸며 수리재 설역서고(雪域書庫)에서 다정거사 두 손 모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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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기』일러두기>
1.번역 대본은 고려대장경<K.1073(32-749)>『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을 사용하였고, 대조용으로 신수대장경<T.2085 (51-857)『高僧法顯傳』과 인터넷 『法顯行傳』學津討原本을 사용하였고 각주용으로는 <가즈도시(長澤和俊)의『法顯傳』,平凡社>을 참조하였고 국내 번역판으로 <「현대불교신서」제32권,『불국기』(1980), 이재창 역주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일부 인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2. 지명과 인명 등 고유명사는, 이번 여행기전집에 공통적으로 사용한 방법인, 우리말의 한자음대로 표기하되 외래어나 외국어는 현지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엿다. 그리고 우리말로 굳어진 것은 관용을 존중하여 [현지명 한글표기:영어/한문 한글표기:한문] 식의 표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예를 들면, 중국지명은 호탄(Khotan:和田:우전국(于闐國), 한마성[捍摩城/Chira:策勒], 타쉬쿠르간(Tashkurghan/한반타국(漢盤陀國) 등으로 표기하엿고, 외국지명은 볼로르(Bolor:발려륵국(鉢盧勒國), 우디야나(Uddiyana/오장국(烏場國) 등으로 사용하여 <한국어 현지명:영어 표기명:원문 한국어 표기:원문> 등으로 역시 통일했다.
3.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일반적인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의 원문 그대로의 한문표기는 가능한 한글화를 원칙으로 하였고 또한 인명에 대한 중복되는 존칭은 생략하였다. 예를 들면 법현스님, 법현사문 등은 그냥 법현, 혜초, 현장, 의정, 송운, 등으로 호칭을 줄였다.
4. 원문에는 없지만, 옮긴이가 꼭 필요하다고 보는 대목에는 [***]로 병기(倂記)하여 보충설명을 간략히 추가하였다.
5. 관련 사진과 행선도, 참고지도의 경우는 본문의 제목 번호와 같은 일련번호를 사용하여 독자들이 읽고 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6. 언어명은 구분이 확실한 경우에는 산스끄리뜨어(skt), 티베트어(Tib), 빠알리어(Pli) 등으로 표기했고 불분명한 경우에는 그냥 범어(梵語)로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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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기』목차
제1장. 장안을 출발하다.
(1-1) 장안성(長安城)에서 둔황[敦惶]까지
(1-2) 타클라마칸(塔克拉玛干;Taklamakan)을 건너
(1-3) 엔치[焉耆/Arki/阿耆尼國/烏夷國]
(1-4) 호탄[和闐/Hotian/于闐國]
(1-5) 차레크[恰熱克:Qiareke/子合國]
제2장. 파미르 고원[총령산맥]을 넘다
(2-1) 타쉬쿠르간[塔什庫爾干;Tashkurghan/竭叉國]
(2-2) 총령산맥[蔥嶺/Pamir]
(2-3) 절벽사이 조교(弔橋)를 건너
제3장. 북인도에 들어서다.
(3-1) 우디야나[Udyana;鬱地引那/오장국(烏長國]
(3-2) 간다라[Gandhara/건타위국(犍陀衛國)]
(3-3) 탁시라[Taxila/축찰시라(竺刹尸羅)]
(3-4) 페샤와르[Peshawar/불루사국(弗樓沙國)]
(3-5) 핫다[Hadda/헤라성(醯羅城)]
(3-6) 나가라하라[Nagarahara)/나게나갈국(那揭羅曷國)]
(3-7) 소설산(小雪山)을 넘어서
제4장. 드디어 중인도에
(4-1) 마투라[Mathura:마두라국(摩頭羅國)
(4-2) 산카샤(Sankāsya:승가시국(僧迦施國)
(4-3) 칸나우지(Kanāuji:계요이성(罽饒夷城)
(4-4) 사기대국(沙祇大國)
(4-5) 스라바스티(Sravāsti:사위성(舍衛城)
(4-6) 카필라바스투(Kapilavāstu: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
(4-7) 람막국(藍莫國)
(4-8) 쿠시나가라(Kusinagāra:구이나갈성(拘夷那竭城)
(4-9) 바이샬리국(Vaishāli:비사이국(毘舍離國)
(4-10) 마가다국(Magādha:마갈제국(摩竭提國)
(4-11) 라지기르(Rajgir:왕사신성(王舍新城)
(4-12) 보드가야(Buddh Gayā:가야성(伽耶城)
(4-13) 바라나시(Varanasi:파나날성(波羅柰城)
(4-14) 코삼비(Kosāmbi:구섬미국(拘晱彌國)
(4-15) 달친국(達嚫國
(4-16) 파탈리푸트라(Pataliputrā:파련불읍)
(4-17) 참파(Campā:참파대국(瞻波大國)
(4-18) 탐라립티(Tamrā-lipti:다마리제국(多摩梨帝國)
제5장. 사자국에서
(5-1) 스리랑카(Sri Lankā:사자국(師子國)
(5-2) 불치정사(佛齒)와 무외정사(無畏)
(5-3) 사자국에서의 회향(廻向)
제6장. 귀국항로(歸國航路)
(6-1) 인도양으로 나아가다.
(6-2) 자바(Java:야바제국(耶婆提國)을 경유하여
(6-3) 드디어 산동(山東)반도에 도착하다.
제7장. 송승(宋僧)의 발문(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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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장안을 출발하다.
(1-1) 장안성(長安城)에서 둔황[敦惶]으로
<사진설명>
<법1-1장-1 하서주랑(河西走廊) 지도 >
<범1-1-2 둔황의 천불동 막고굴 원경 >
<법1-1-3 명사산의 월아천>
<범1-1-4 세트용으로 복원된 사주고성(沙州古城) >
<법1-1-5 타클라마칸 부분 지도>
<범1-1-6 둔황의 상징인 비천상 >
동진(東晉)의 사문 법현(法顯)이 천축에서의 일을 스스로 기록하다.
이전에 [나] 법현은 장안[西安]에 머무를 때, [삼장중에서] 율장(律藏)이 부족함에 대해 개탄하였었다. 그리하여 동진(東晋) 홍시원년(弘始元年,A.D.399) 기해년(己亥年)에 혜경(慧景), 도정(道整), 혜응(慧應), 혜외(慧嵬) 등과 함께 천축국에 가서 율장을 가져오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처음 장안을 출발하여 농주(隴州)을 지나 건귀국(乾歸國)에 이르러 하안거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마치고 길을 재촉하여 녹단국(褥檀國)에 이르렀고, 다시 양루산(養樓山)을 지나 장예[張掖]에 이르렀는데, 이 때 장예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길이 막혀버렸다. 장액왕 단업(段業)은 이틀을 머무르게 하고는 이내 신도가 되었다.
여기에서 지엄(智嚴), 혜간(慧簡), 승소(僧紹), 보운(寶雲), 승경(僧景)사문 등과 만나게 되었는데, 기꺼이 천축으로 함께 가기로 뜻을 모으고 함께 하안거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보내고 다시 출발하여 둔황[敦煌]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의 길이가 약 80리, 남북의 길이가 40리에 이르는 성곽이 있었다. 여기서 일행은 1개월 정도 머무른 다음에 법현과 5인은 사신을 따라 먼저 떠나게 되어 보운 등과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둔황태수 이고(李暠)의 일행이 사하를 지나가는데 필요한 재물을 보시해주었다.
(1-2) 타클라마칸(塔克拉玛干沙漠;Taklamakan)
<법1장-2-1 둔황에서 ‘서역남로’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할 때 반드시 거처야 하는 국경관문이었던 옛 양관(陽關)의 유지의 봉화대>
<법1-2-2 옛 양관유지에 세워 놓은 당나라의 유명한 왕유(王維, 699~759)의 초상화). 그는 “그대에게 한 잔 술을 권하노라, 서쪽으로 양관을 나간 이가 돌아온 이 어디 있으리…” 라는 시를 남겨서 이곳과 인연이 깊은 시인이다. >
<법1-2-3 서역남로의 요충지였던, 옛 고대도시 선선왕국[樓蘭]의 유지>
<법1-2-4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의 풍경
사하(沙河,Kum Darya)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갈지를 알 수가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죽은 사람의 고골만이 길을 가리켜 주는 표지가 될 뿐이다.
[일행이] 17일 만에 약 1천리를 가서 선선국(鄯善國/樓蘭國)에 이르렀다. 그곳은 땅이 거칠어 농사가 잘 안 되며 속인들의 옷은 모직물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 거칠기는 중국인들의 옷과 마찬가지였다.
이 나라의 왕은 불교를 신봉하며 승려들은 4천명 정도였는데, 모두 소승을 믿는다. 사문들은 물론 속인들도 모두 천축의 예법을 행하고 있었는데, 이곳뿐만 아니라 서쪽에 있는 나라들도 대게 이와 비슷하였다. 다만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지만, 출가한 사람들은 모두 인도의 문자를 익히고 있다.
첫댓글 원문을 복사해서 집어 넣자니, 각주본과 사진이 전부 날라가 버렸내요. 실은 본문보다 각주본이 훨씬 분량이 많으면서 볼만하기도 한데... 좀 아쉽지만, 책이 나올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시기를...
새도 없고 짐승도 없고...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알려주는 표지가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건가요?
64세에 길을 떠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