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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조선의 수도
게일이 1902년에 독일 잡지 Der Ferne Osten에 기고한 글로써, 독일인 에손 티르트가 독일어 번역으로 개재했다. 그것을 부산 장신대 김종홍 교수가 번역함. 유영식, 착한목자 pp 181-193
서울이라는 낱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견해가 아주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인도에서 그 유래를 찾아서 예수 탄생 어간에 이 낱말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에 다른 이들은 한국 자체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착민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은 어떤 낱말의 어원을 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냐는 것이다. 서울은 그냥 수도라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베이징은 중국의 서울이고 도쿄는 일본의 서울이라는 등이다.
남서울에서 바라본 당시의 서울 모습
그래서 그것은 사실상 집합명사이지만, 실제로는 제물포에서 동쪽으로 28마일 정도 떨어진 아름다운 구릉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200만 정도의 인구를 지닌 한국의 수도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510년의 역사를 지닌 이 도시는 오늘날에는 크기가 3마일이 채 못 된다. 대부분 1396년에 돌로 둘러쌓은 성벽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평균20 피트 정도의 높이이며 부분적으로는 벽돌로 덮여 있다. 성벽의 상부는 수평선을 이루고 있어서 언덕에서 구릉으로 뻗어가는 부분에서 는 성벽이 이어지는 지점의 낮은 지점보다 사실상 더 낮다(성벽이 비탈에서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는 뜻).
서울의 대규모 접견관(근정전)
과거의 작품으로서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능력과 의도에 더하여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에 대한 함축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서울은 한국 왕조의 혼이다. 그것은 옛부터 그 영적 삶의 중심점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렇다. 이 땅의 통치자는 성 안에 거주하며 그 옆으로 귀족들과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이 자리잡고 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지붕이 하늘로 향한 궁정이 치솟아 있다.
서울의 배추 장수
여기에서 한국이 소유한 모든 위대하고 좋은 것들이 통합되어 있다. 지방에 있는 그 어떤 산들조차도 여기처럼 아름답지는 않다. 서울의 풍수,곧 수호신은 왕국에서 으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풍수가 본디 무엇을 뜻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의 비밀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이 나라의 다른 많은 신들처럼 그것은 외국인의 눈으로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유럽의 학자들은 한국은 종교가 없는 나라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에서 신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 자체가 수천 개의 신상 • 산신 • 지신 • 조왕신 • 문왕신 • 물귀신 • 풍신 등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만신전이다. 실제로 이 신들에게는 음식을 바쳐야 한다. 해가 바뀌는 때가 되면 이 도시는 순례자들의 숙영지 같아진다. 여성들은 일하느라 바쁘고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있다. 반면에 남성들은 흥청거리며 술을 마신다. 그러한 정신적 환경에서 서울은 오늘날에 이르렀다.
서울의 한 거리
서울의 겉모습은 어떠한가? 거리는 우리가 농가의 마당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썩은 것들과 더 이상 쓸모없는 것들이 가득 쌓여있다. 집 벽에 나있는 구멍을 통해서 모든 오물들이 거리로 버려진다. 서울의 좁은 골목길을 처음으로 걸어보는 외국인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골목에서부터 도시의 모든 오물들은 담벼락 아래 드러난 채 동쪽으로 흘러가는 수로를 따라 흘러간다. 나는 오래된 역사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두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흙점쟁이가 자리를 정갈하게 하려고 도시를 청소하려 했다. 그러나 물고기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그것을 반대했다. 그는 임금에게 이렇게 적힌 진정서를 바쳤다. ‘죽은 이들의 안식처와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장소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죽은 이의 문 앞에는 쓸어낼 것이 없습니다. 아무런 오물도 쌓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떻게 그렇겠습니까? 임금은 이 진정서를 읽고서 그 남자를 칭찬하고 그의 귀 뒤에 신분과 지위를 뜻하는 단추들을 달아 주었다. 이때부터 이것이 풍습이 되어 문 앞에 오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수로
이런 분위기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은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이 자신의 안녕에 필요하다고 여긴다. 위생과 세균 존재에 대한 이론이 실제로 맞는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라면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베를린의 전체 제국보건당국을 단번에 죽여버릴 것 같은 습지 옆에서 자기 곰방대로 50년 동안이나 담배 피운다. 그런데도 생생하고 건강하다.
한국 사람들의 주식은 쌀과 김치이다. 김치는 붉은 고추와 염장한 생선 등을 넣은 신 배추이다. 배추는 사람들은 매일 볼 수 있는 길가의 밭에서 자란다. 이 사실이 벌써 코흐 교수와 리스터 경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독버섯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체 한국 사람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다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가옥들은 낮다. 방들은 대략 높이가 6피트 정도, 너비가 8피트 정도 된다.사람들은 난방 연료를 아껴 써야 한다. 그럼에도 심한 겨울 추위에 수은주가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면 따뜻한 공간을 원한다. 그래서 모든 방 아래에는 3인치 정도 두께의 돌판으로 만든 네 개의 구들장이 뻗어 있다. 그런데 이 돌판을 다시 황토로 바르고 기름종이로 덮었다.
그렇게 하여 모든 방에는 오븐이 있는 셈이다. 그것은 빵을 구울 수 있을 정도로 뜨겁지는 않지만,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이 자칫 누르스름하게 델 수 있을 정도로는 따뜻하다. 하지만 이 난방에 수백 년 동안 익숙한 한국인은 방바닥의 다른 쪽에 누워서는 우습게도 헐렁하게 옷 입은 자기 육신이 추위로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방바닥 아래 있는 불은 한국인의 특성 발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모든 고정된 것들이 거기서 데워져 나왔다.
육체와 영혼과 정신은 메말랐다. 한국인은 더 높은 정신적 관심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외부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충돌에 굴복한다. 아니다, 잠깐! 이 의견을 철회해야겠다. 한국인의 특징적 생김새 가운데 하나는 완고함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사람들뿐 아니라 말 • 개 • 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가치를 두는 그 어떤 것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이 완고함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사람은 시간이 있으면 자기 자신의 방식을 고집한다. 사람들은 한국사람과 다툴 수도 있고 그를 가르칠 수도 있으며 재촉할 수도 있는가 하면 외국 사람들이 벌써 시도했던 대로 폭력으로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 자기 주위에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닫든 자신의 모든 환경이 비뚤어져 가든 상관없이 말이다.
군인들의 행렬
서울에는 종로와 남(문)로 두 개의 주요 도로가 있다. 오늘날 이 도로에는 20세기의 진정한 산물인 전차가 다닌다. 그 감흥으로 10분마다 붉게 칠한 서양의 바퀴 귀신이 윙윙 소리를 낸다. 다소 유럽적인 이것을 제외한다면 한국의 시설로서 거리는 아주 조용하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가마들,짐을 진 나귀들, 그리고 느릿느릿한 소 달구지가 들어차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내는 소리는 베를린의 라이프치거 거리와는 사뭇 달라서 꿈의 세계에 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작 몇몇 사람들이 내는 소리와 간간이 찰랑거리는 마구의 독특한 소리나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기에 아주 새로운 것이라면 덜컹거리는 인력거의 특유한 소리도 난다. .
가마
서울의 독특한 소리 가운데 하나는 물장수가 지날 때 나는 꺼억꺼억거리는 소리이다. 이 도시에서는 10, 15 또는 20피트 정도 깊이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심지어 몇몇 도시 구역은 이 생활필수품(삶의 영약)을 공급받는 우물에 따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그 어떤 도시에서도 그렇게 박테리아가 서식할 수 있는 물을 사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대번에 경찰들이 금지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물장수가 기쁜 마음으로,그리고 아무런 염려없이 외친다. 한 달에 7.5센트에 그는 매일 물 두 통을 도시로 가져온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물 예순 통을 하루에 요구한다면 아마도 35센트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30일 동안 같은 양의 물을 주문하면 그는 물장수에게 7.5센트만 지불하면 된다. 한국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현금보다 더 싸게 빌릴수 있는 데가 어디인가?’ 그리고 그 해답은 “물장수에게서” 이다. 이 이상한 논리는 그 밖에도 극동지방의 이 지역 다른 가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장수
물장수와 더불어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 가운데는 특히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한 몫을 한다. 그들은 흥미롭게도 물장수처럼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누가 그들이 일하고 있는 데를 지나가면, 빨래하는 아낙네들은 수줍게 얼굴을 감춘다.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나라들에 있는 또래의 여인들보다 섬세한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빨래방망이로 젖은 빨래를 내리치는 소리를 들어본다면! 일반적으로 한국 여성은 선하고 성실하다. 하지만 그들은 남성보다 더 능력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이미 미션스쿨에서도 종종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토록 무능한 남성들이 있는 민족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힘겹게 일하는 여성들의 선량한 본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피조물로서 남편들을 먼지와 재로 표현할 수도 있게 한다.
소 달구지
서울의 거리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질서가 지배한다. 더러 다툼이 날 수도 있다. 또한 작은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대개 동료들 사이의 작은 의견 차이일 뿐이며 가만히 놔두면 금세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래서 그들을 그대로 놔둬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러한 일을 끝장을 볼 때까지 이어간다. 그렇게 두면 큰일이라도 날 듯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툼이 끝난 뒤에는 상대방과 그 자리에 앉아서는 서로에게 아무런 말없이 자기 담배를 태운다. 이런데 경찰이 왜 필요하겠는가? 행렬이 있는 날과 같이 아주 많은 백성들이 한 데 모였던 그날에도 백성들은 아주 질서정연하게 행동해서 새롭게 조직된 경찰들이 지루할 정도이다.
냇가의 빨래하는 여인들
서울 거리에서 익숙한 광경은 조선 군인들의 행렬이다. 그들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무기가 뒤섞여 있는 형세이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이다.그들의 육체적 훈련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선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며 나라에충성한다. 그들은 내가 묵단에서 보았던 만주군대 보다 훨씬 더 민주화되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종족에 속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은 본질적으로는 군사도시가 아니라 문필도시이다. 군인들조차도 학자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화로움을 내보인다. 내가 경험한 바로 일본은 칼의 나라이다. 일본 민족은 용맹스러우며 전쟁을 좋아한다. 반면에 한국은 문필의 나라이며 그 백성들은 습격과 전쟁터의 소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만주는 몽둥이와 곤봉의 나라이다. 한국 군인들의 유일한 오류라면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을 찍을 때나 행군할때에나 되어야 무기를 제대로 어깨 위에 든다. 그밖에는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그 자세로 곧잘 좌우로 흔들어대기 때문에 주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지속적인 위험에 빠져 있게 된다.
한 남자
그럼에도 한국의 군인은 사실상 주위의 환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20세기의 산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울의 힘줄은 명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초가집에서 얼룩 없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온다. 명주옷을 입고 명주 같은
손에 명주 같은 영혼으로 나온다. 거리는 더럽고 가엾은데도 그들은 마치 마법세계의 유령들처럼 그렇게 흥겹게 걸어 다닌다.
장옷을 쓴 두 여인
내가 서울을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골라야 한다면 ‘축제일 이라는 낱말을 고르겠다. 무엇보다 서울은 느릿한 도시이다. 마치 거기서는 아무도 심각하게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일한 예외라면 언제나 열성적인 중국인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육체노동자들조차도 항상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둣이 일한다. 서양의 창조적인 민족들은 육체와 영혼을 보존하려고 일하는 동안에 한국인은 되돌아가서 달콤한 잠을 택한다. 한국인의 익숙한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아주 가까이 있다. 그들은 분노와 근심스런 생각이 없다. 그들이 깨어 있을 때조차도 의식이 반쯤만 깨어있다. 그들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말은,‘신이 이름 모를 들꽃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고 만든 인간은 한 명도 없다’ 이다.
경찰이 군중 속에 섞여있다, 대안문 앞
서울의 거주민은 남녀 구분 없이 200만 정도 된다. 서울에는 화젯거리가 없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이야기꾼도 없고 작가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이 주문되는 지역이 너무 적어서 이 도시가 이것을 통해서 어떻게 일상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대부분의 경험을 수면의 예술에서 얻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남성들은 담배를 피우고 장기와 바둑을 둔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다양한 악기들로 이루어진 악단의 음악을 듣는데,이 악단은 연주할 때 세 음으로만 한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이 음악에 무관심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마도 이 음악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귀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 악단
앞서 언급한 대로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화젯거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기분전환을 찾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서울은 엘도라도 같은 곳이다.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과 그 산들이 둘러서 있는 궁중정원에는 언덕 자락의 아담한 곳에 숨어 있는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과 정자가 빠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유연한 풍경 속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산책로와 오솔길이 있다. 800피트 정도 높은 남산 꼭대기에서는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북쪽에 있는 산들에는 여름 나들이객들의 목적지 인 수많은 좁은 등산로가 있다.
서울 근교의 수련 연못
또한 서울은 정신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의 도시인데,그들은 한문공부를 유일한 업으로 삼는다. 그들은 온통 머릿속에 고대 중국의 전승들,음양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음양사상은 거의 모든 집 대문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정신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한국인들의 모든 사상을 움직이는 주축이기도 하다. 양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원칙은 다섯 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곧 쇠 • 나무 • 물 • 불 • 흙이 그것인데 이것들을 바탕으로 이른바 한국의 철학이 형성된다. 수도에 있는 학교들은 벌써 400 여 년 전부터 오로지 중국으로만 주의를 집중하며 자기네 나라에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이 학교의 유숙생들은 중국의 요순시대 (주전 2300년)부터 일어난 사건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 그러나 자기네 들이 주후 57년부터 936년까지 지속되었던 신라 제국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현재 중요한 정신적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아마도 이종웅 왕자가 으뜸일 것이다. 그는 왕실 가문에 속하였는데,런던에서 있을 에드워드 국왕의 대관식의 왕실 대표로 임명되었던 터였다. 그의 유럽 여행을 개선 행렬로 구성할 모든 준비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연로한 부친이 별세하였다. 그래서 이종웅 왕자는 준비해둔 예복 대신 상복을 입게 되었다.그가 한국의 상황에서 옳게 행동하려 한다면 3년 동안 집에 머물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품위도 저버 리고 살면서 땅도 하늘도 볼 수 없는 모자를 써야 한다. 그리고 누구도 그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평안한지 물어봐서는 안 되고, 그대신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라고 말을 건네고 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긴 한숨이어야 한다. 이종웅 왕자는 중간쯤 가는 유교 신봉자였다. 그가 정말 신실한 유교 신봉자였더라면,그는 부친의 죽을을 계기로 이후 3년 동안 씻지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부친의 무덤 옆에다 움막을 짓고 무덤 앞에서 절하고 거듭 절하며 울며 애곡하는 일만 해야 했을 것이다.
이종응 왕자와 두 아들
무덤은 가문의 신당이며 무덤을 덮은 잔디는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가꾸고 청소하게 된다. 결국 왕릉은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산이며 가장 잘 가꾸어진 숲이 된다.
장례식 때는 시신을 밤에 옮긴다. 시신 뒤로 긴 등불 행렬이 따른다. 죽은 이의 집에서부터 이 행렬은 성의 서문이나 동문 방향으로 움직인다. 다른 문으로는 절대로 시신을 운구할 수 없다. 종종 아주 멀리 돌아가기도 하는데 이는 운구행렬이 궁궐과 특히 그 입구에서 일정 거리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수구문을 통해서 성을 떠나가는 운구행렬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성문 바로 곁에 전을 펼치고 있는 행상에게 왜 시신이 이 문을 통해서
만 나갈 수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모르신다구요?’라고 놀라며 되묻고는 계속해서 “여기 성문 위에 원숭이나 다른 동물같이 보이는 형상들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걸 누가 알겠어요?’라고 그 행상이 말했다. “그것들이 왜 저기 있는 것입니까?’라고 내가 계속해서 캐물었다. 그는 “거참,저 성문은 벌써 오래 전에 지어졌는데 그게 왜 거기 있는지 내가 알게 뭐요?’라고 말했다. 이것이 한국에 대해서 그 어떤 정보라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보기이다.
고종 황제
시신이 나가는 이 문에 있는 작은 형상들은 다른 고종황제 문에서도 거듭 찾아볼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는 존재들을 상징한다. 한국 사람들은 가령,서로 균형을 이루는 다섯 존재를 코끼리 •호랑이 • 개 • 고양이 • 쥐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쥐를 죽이고, 개는 고양이를,호랑이는 개를,코끼리는 호랑이를,쥐는 다시 코끼리를 죽인다. 왜 그런가?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정말 그것들은 서로를 죽인다. 같은 이야기를 한국인들은 관리제도를 두고서도 한다. 관리들은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문 위에 있는 형상들은 이제 이런 사상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악령들을 붙잡아 두고서 굳건한 통치를 돕는다는 것이다.
수구문
서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는 증기와 석탄 연기를 들 수 있다. 아마도 나도 여지껏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여기서 좀더 제대로 말해야 하겠다. 모든 제조업은 수공업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수공업자들은 초가나 기와 아래 그 어떤 조용한 골방에서 일한다. 갖바치나 가죽 세공업자 • 도공 • 대장장이나 필장 (筆匠)이 모여 사는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작업장을 찾아볼 수 없다. 길거리에서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늘 변함없는 갈색 먼지 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이 변함없는 단조로움을 다소 깨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성문 바깥에서 잠시 기적을 울릴 뿐이다. 이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가 궁금하여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조그만 소년이 수줍어하며 내게로 와서는 내게 물었다. “선생님,기차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나요? 입으로 소리를 내나요?’ 그런 소리가 영원한 고요 속에 있는 이 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갓 일 하는 사람
또 몇 달 전에는 여기 서울에 발전소를 위한 기계실이 설치되었다. 그것도 지금은 세찬 연기 구름을 공기 중에 내뿜는다. 지금껏 듣지 못했던 끽끽거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뿜어댄다. 이 기계 아래서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껴보면 전율이 흐르며 또 다른 한국의 특징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는 곧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한국인들의 무책임 감이다. 그리고는자기도 모르게 전율하게 된다. 한국인은 자기의 의무를 등한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자기에게 부탁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는 육체적 • 정신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서울의 한 상점
서울에 있는 전기 발전소의 운영 책임은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미국인의 손에 맡겨졌다.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관찰력으로 999번은 물이 증기 보일러에 있는지 직접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1,000번째에 그 책임을 한국인에게 맡긴다면,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폭발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폭발은 곧바로 용의 꼬리를 치는 격이 되어서,이 귀찮은 일의 여태껏 미뤄두었던 끝장을 보려 들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서울에서처럼 비신뢰와 무책임을 찾아볼 수 있는 도시는 거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단 투표나 극장,경마나 그 어떤 공식적인 행사도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자주 만나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다. 한국인들이 가지는 유일한 기분풀이는 아마도 연날리기 경기일 것이다. 이때도 관중들의 생각은 대부분 땅보다는 공중에 가 있어서 공식적으로 모일 계기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아마도 서울에는 여러 단체,클럽이나 조합 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경찰의 감시 아래 있어서 즉시 해산되는 처지에 놓이지 않으려면 설립된 목적에 정확히 따라야 한다. 그런 즉각적 해산은 얼마 전에 이른바 독립협회에서 발생했다. 그들이 세운 독립문은 지금에는 잃어버린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어떤 토론 클럽에서 내국에서 하는 교육이 좋은지 외국에서 하는 교육이 좋은지의 문제가 해명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떤 젊은이가 경솔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누가 외국에서 교육을 받는다면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투옥 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공안 요원이 와서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 지를 물었다. 그는 그에게 ‘가부’ (Ka -pu)를 정하고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누가 가부’ 인가?’라며 그 요원이 계속해서 물었다. “아,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그에게 대답하고는, “우리는 토론 클럽입니다”라고 말하였다. “토론 클럽이라고?’라며 그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누가 어떤 의견을 표현하면,다른 사람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뭐라고? 여기서 어떤 의견이 표현된다고?누가 감히 의견을 표현하는가? 여기서 그 의견이 뒷받침된다고? 누가 감히 어떤 의견을 뒷받침한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모두 사기꾼들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를 체포한다’ 는 것으로 끝났다. 그 요원에게 법이 옳지 않다는 의견을 개진했던 그 젊은이는 3년 동안 사슬에 묶여 강제노동을 하는 판결을 받았다. 토론클럽은 이때부터 서울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문
내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나는 독자들에게 서울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이부인(Yi-Wou-Yin)이라는 인물로 경오년(1810년)에 태어났다. 그는 지난 새해에 나를 방문했는데,그때 나는 그와 그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제게 당신께서 85년 전 어린아이 시절에 특별한 것이 있으면 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서는 말했다. “내가 어렸을 적,그때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 특별한 일이라는 것은 당신네 같은 외국인들 이 여기로 들어오면서부터 생겨났어. 이제 나는 늙은이가 되었고” “당신은 나이가 많으시니…”
내가 말을 이어갔다. “가장 좋은 삶의 원칙 이 뭐라고 여기십니까?’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옳은 일이더라도 폭력을 행사하지는 마시오. 그것이 하나님(Hananim)께서 바라시는 것이오” “여기 서울에 젊어서 부터 당신과 함께 살아온 동료가 있으십니까?’ 내가 계속해서 물었다. “아니오” 그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모두들 죽었소. 남대문 앞에 가락(Karak)이라는 늙은이가 하나 살고 있는데,그 사람도 나처럼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거요. 그 사람 내가 어른이 된 한참 뒤에도 아이였었지.”
이부인 선생
서울은 여러 면에서 이 친절하면서도 가부장적인 나이 많은 사람과 닮아있다. 전반적인 변혁만이 이 도시를 다시 젊어지게 만들 수 있다.
1902.
에손 티르트(Von Esson Th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