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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 세보(南陽洪氏世譜) < 癸卯譜 >
마천공(麻川公) 홍일동(洪逸童)께서 처음으로 수보(收譜)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유실(遺失)되고 그 서문(序文)만 남아 있는 것을 서담공
(西潭公) 홍 위(洪瑋)께서 1603( 선조36)년 족보의 계통을 확인
하여 처음으로 남양홍씨 세보(南陽洪氏世譜)를 손수,만드시고,그 서문
(序文)도 이 보(譜) 첫 장에 함께 실어 전한다.
만든 세보(世譜)를 갖고 스승 유성룡(柳成龍)선생께 서문을 청하면서
앞으로 더욱더 탐문하여 자세한 세보를 만들겠다하니 스승이,부지런
함에도 지극하다 <근역지의;勤亦至矣>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이 보(譜)의 특징은 남,녀(男女)를,출생 순(出生順)으로 기록(記錄)
하였으며 이다음 족보(族譜)를 만드는데 근간(根幹)이 되었다.
그리고 ,문화재자료 제213호(1989,5,29)로 경상북도에서 지정하였다.
이 세보(世譜)는 현재 원본은 문중 종손이 소장 관리하고 있으며
필사본(二冊 227長)은 2006년 8월에 한국국학진흥원에 이관되어
보관 관리 되고 있다.
남양홍씨 족보(南陽洪氏族譜)
1, 계묘보서(癸卯譜序)
謹按吾洪氏之東肇自李唐其世久矣自吾始祖以來其德業之隆勳爵
之盛忠義之節文學之傳世濟其美輝映簡策歷歷乎在人耳目而其子
姓兄弟派系蕃衍歷數十世而彌昌以흘于今名卿士大夫代不乏人尤
足以想夫積植者厚深而錫類之悠久也
삼가 살펴보니 우리 홍씨가 동으로 온 지가 이당시대(李唐時代)
부터이니 그 대수가 오래이다.
우리 시조이래로 덕업의 높음과 훈작의 융성함과 충의의 절개와
문학의 전함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다했음이 밝게 간책(簡册 ;
서적 또는 역사)에 실려 있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역력하고 그
자성(子姓;직계의 자손) 형제(兄弟)의 파계가 왕성하게 불어났고 수십대를 지나
더욱 창성하여 지금에 이르면서 명경사대부,대대로
끊어지지 않아서 족히,덕을 쌓음이,두텁고 길어,효자의 덕행이,퍼져
나가기가 유구함을 상상할 수 있다
嗚呼盛哉獨我倉使公一派自落南以後門祚日漸衰薄至於不肖孫
瑋僅得不絶其殘緖而已深懼夫祖先之世派裔之傳湮沒於兵희之
餘方欲因 家舊譜而益廣之歲壬寅在京城得洪中樞逸童所爲序文
及譜於西川鄭相公比吾舊藏尤詳遂
다만 우리 창사공(倉使公) 한파가 낙남이후로 문조(門祚)가 날로
점점,쇠박(衰薄)해져,이에,불초손,위(瑋)에,이르도록,겨우,그,끄나풀을
이어 갈뿐이로다.깊이,두려워하는 것은,조상의,대(代)와,파예(派裔)의
전함이 병화속에 인몰(湮沒) 되었음이다.
바야흐로 구가보에 의거 더욱 넓게 찾으려 하는데 임인(1602)년
서울에 있을 때 중추 홍일동(洪逸童)께서 지은 서문과 보책을,서천
정상공(鄭崑壽)으로부터 얻어 봤는데 나의 소장한 구보(舊譜)보다
더 상세 했다.
參互考證蒐輯繕修先自吾始祖直至吾祖吾父具載官爵事業及비夫
人家世以見吾派之所自來而冠之編首別爲族譜圖於其後而獨詳於
子姓者以其世代雖遠親服雖盡而其初及一人之身故也
드디어,서로,번갈아,수집,고증하여,선별하고,먼저,우리,시조로, 부터 바로
할아버지,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 관작 사적등과
비부인,가세에 이르도록 갖추어,등재되어,우리 파(派)의,유래를 나타내어
그 편수에 싣고 별도로 족보도를 그 뒤에 실었으며, 더욱 자손된 자의 그
세대가 비록 멀고 상복(喪服)이 비록 다했더라도,그 처음은 다 한 사람의 몸인 때문이다.
異姓則只書數三代而 其間表表可稱者及倉使公以下女孫則特加
詳焉 噫根深而葉茂源遠而流長 五先祖子孫之布在東方者奚시
千百而今之所記僅得其什一焉
이성(異姓)에 있어서는 다만 2, 3대에 그쳤다.
그간에 표표(表表;크게 훌륭한 모양)히 가히 나타낼만한 자와
창사공(倉使公) 이하 여손(女孫)에 있어서는 특히,상세히,했다
아 ! 뿌리가 깊으면 지엽이 무성하고 원류가,길면 흐름이,길다
우리 선조의 자손된 자 동방에 흩어져 있어 어찌 천백(千百)
뿐이겠나마는 지금에 기재된 자 겨우 그 십분의 일뿐이로다.
吾將廣詢博訪悉搜而備錄之以成一姓之譜至於先列祖德業之隆
勳爵之盛忠義之節文學之傳數十代家乘之實蹟與夫積德鍾善而
雲伋之所以蕃衍而久長者則必欲得夫內外孫賢君子之老於文辭
者以闡揚其美而壽其傳於無窮云爾
萬曆癸卯夏二十一代孫 瑋 謹記
내 장차 널리 묻고 찾아 갖추어 수록하여 한 성씨의 족보를
이룰터이고 열선조의 덕업의 높음과 훈작의 융성함과 충의와
절개, 문학의,전통등,수십대,가승(家乘;그,집의,역사)의,실적과
적덕종선(積德鍾善)의,자손은,번연하고,장구한 전통에,있어서는
반드시 내외손 현군자들의 노숙한 문사자(文辭者)를 얻어 그
아름다움을 천양(闡揚)하여 무궁한 후세에까지 전하리라.
선조 계묘(1603년) 여름에 21대손 위(瑋) 삼가 쓰노라.
자료제공 ; 남양홍씨세보 남양홍씨 문정공파 문헌록
근 역 ; 태사공 34세손 홍 원 표(洪元杓)
작 성 ; 양천서원 보존회 전 총무부장 홍 현 표 이기
2, 계묘보서(癸卯譜序)
南陽洪氏世譜者正字洪君瑋所編 洪君之言曰吾洪氏之東肇自
李唐其德業勳爵忠義文學之傳世濟其美輝映簡策
남양홍씨의 세보(世譜)는,正字인,홍군(瑋)이,편찬한,것이다
홍군(洪君)이 말하기를 우리 홍씨가 동방(東方)으로 온 시초
(始初)는 당(唐)나라 때부터인데 그 덕업(德業) 훈작(勳爵),충의
(忠義)와문학(文學)이전해오면서,대대로,계승(繼承) 하여 그 미덕(美德)을 완성하여 서적에 빛나고 있습니다.
其子姓兄弟派系蕃衍歷數十世而彌昌獨我倉使君一派自落南以後 門祚日漸衰薄至於不肖孫瑋僅得不絶其殘緖而已深懼
그 자손과 형제의 파계(派系)가 많이 퍼져서 수십 세(대)를
지나오면서,더욱,번창,하였지만,유독,창사공(倉使公) 한파가
낙남(落南)한 이후부터 가운(家運)이 날로 점점 쇠퇴하여
불초 손(不肖孫) 위(瑋)에 이르도록 근근이 그 잔서(殘緖 ;
남은 단서)가 끊어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祖先遺績及雲仍嗣續湮沒無傳方欲因家舊譜而益廣之歲壬寅在京
城得洪中樞逸童所爲序文及譜於西川鄭相公比吾舊藏尤詳遂參互
선조(先祖)의 남기신,사적(事績)과,자손이,계통을,이은 것이,묻혀
없어져서 전해지지,않을까 깊이,두려워서 바야흐로,집안의 구보
(舊譜)에 따르면서 더욱 넓히고자 임인(壬寅)년에 경성(京城)에
있으면서 서천(西川) 정상공(鄭崑壽)으로부터 중추(中樞),홍일동
(洪逸童)께서,지으신 서문(序文)과,보첩(譜牒)을 얻으니,우리가
예로부터 간직해 온 것에 비해 더욱 상세하였다.
考證蒐輯繕修自吾始祖及吾祖吾父具栽官位事實及비夫人家世以
見吾派之所自來而冠之編首別爲族譜圖於其後而於倉使公以下 并其女孫加詳焉
드디어,대조하여,서로,고증하고,수집(蒐輯)하여,고쳤는데,우리
시조로부터,나의,조부,나의,아버지에 이르기까지,벼슬의,직위와
사실(事實)을 갖추어 기재하고 어머니의 문벌과 세계(世系)에
이르기까지 우리 파(系)의 내력을 나타내어 책머리에 첫째 번 으로 하고 별도로 그 뒤에 족보도(族譜圖)를 만들되 창사공
(倉使公)이하는 그 외손(外孫)까지 함께 더 자세히 하였다.
然吾先祖子孫之布在四方者奚止於是今之所得寸什一將欲廣詢博
訪備書而悉錄之以成之譜傳於無窮 一日洪君携譜過余河上具道 所以余撫卷嘆曰昔蘇老泉云觀吾譜者孝悌之心可以油然而生
그러나 우리 선조(先祖)의,자손들이,사방으로 퍼져,있는,사람이
어찌 이에 그치겠는가 ?
이제 거둔 사람은 열에 하나이니 앞으로 널리 문의(問議)하여
널리 찾아가서,글을,갖추어,다,기록하여,한,성씨(姓氏)의,족보를
완성하여 끊없이 전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홍군(洪君)이,족보를,지니고,우리,하회(河回)로,찾아와서
사정을 다 말하니 내가 보첩을 어루만지면서 감탄(感歎)하고
말하기를 “ 소노천(蘇老泉)이 이르기를 우리 족보를 살펴보는
사람은 효제(孝悌)의 마음이니 뭉클하게 떠오를 것이라고 “
하였다.
嗚呼豈獨蘇譜也 哉抒嘗聞之程子曰管攝天下人心收宗族厚風俗
須是明譜系蓋人之於譜系如水之尋源委如草木之理根本
아 ! 어찌 유독 소씨(蘇氏)의 족보 뿐이겠는가 ?
아니 또,일찍이,들어보니,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천하의
인심을 지배하고 종족(宗族)을 모으며 풍속을 순후(醇厚)하게
하려면,모름지기,족보의 계통을,밝혀야,한다고,하였는데.대체로
사람에 있어서 족보의 계통은 물의 근원을 찾고 초목(草木)의
근본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譜系明然後報本追遠之誠尊祖敬宗之道敦敍九族之義皆由此出今 世之人雖名爲士夫者往往忘其祖問其高曾以上已有曰不知者其遠 者無論也
족보의 계통을 밝힌 다음이라야 그 근원을 잊지 않고 갚으며
원대(遠代)를 추모하는 정성과 조상을 존경(尊敬)하고 일가를
공경하는 도리와 구족(九族)을 친히 사랑하여 질서(秩序)를
세우는 뜻이 다 이로 말미암아 나오게 된 것인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비록 명칭은 사대부(士大夫)라고 하는 자들도,때때로
그 조상을 잊고,그 고조 증조 이상을,물으면 모두 모른다고, 하는 자가 있으니 그보다 먼 조상은 말할 것도 없다.
夫如是孝敬之心何自而生乎今洪君此譜自近而推遠由親而及매
窮探遍索靡以歲月之功上下六七百年間昭然如措諸掌而其志猶
未已勤亦至矣
대저 이렇게 된다면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하는 마음이 어디
에서 생기겠는가 ? 지금 홍군(洪君)의 이 족보는 가까운데서
먼데로 옮겨가고 친족(親族)에서 원족(遠族)으로 미치어 궁구 (窮究)하고 탐색(探索)하여 널리 찾아보면 세월의 공적으로 얽혀져서 위,아래로 6,7백년,사이가 밝게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아주 명백하고 그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아니하니 성의가 또한 지극하다고 하였다.
竊惟南陽之洪源出於中華而蔓近於東土代有名世者出磊落相望可
謂盛德之胤而百世之宗也
가만히 생각하니 남양홍씨는 근원(根源)이 중국에서 나와서
동쪽땅에 널리 퍼져 대대로 세상에 유명한 이가 나와서,재상이
될만한 명망(名望)을 많이 지녔으니 성대(盛大)한 덕(德)을,지닌
자손이고 뿌리 깊은 씨족(氏族)이다.
然其經綸之業忠義之節莫盛於文正公 文正之後近二百餘年子孫
頗衰替旣極復飛將必有時余
그러나 그 경영(經營)하고 처리(處理)하는 업적 및 임금과,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절개는 문정공보다 풍성한 이가 없다.
문정공(文正公) 이후로 200년이 가까움에도 자손이 자못,쇠퇴
하여 벌써 극도에 달했으니 다시 부흥(復興)될 날이 장차,
반드시 있을 것이다.
觀洪君敦厚以有文以科第敎靭且篤於孝思不忘其本又如是是必
能繩祖武再昌大其門洪氏旣復興乎余亦文正公外裔旣嘉洪君之
志而樂睹其譜之有成於是乎書
萬曆甲辰五月 日 豐原府院君 柳成龍 謹書
내가 홍군(洪君)을 보니 돈후(敦厚)하고 학문(學文)을,
갖추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하고 또한
효성이 돈독하여 잊지 않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이는
반드시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여 그 집안을 다시 창성
하고 크게 할 것이니 홍씨(洪氏)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또한,문정공(文正公)의,외손(外孫)이라,벌써,홍군(洪君)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족보가 완성된 것을 즐겁게 보며
이렇게 서문(序文)을 쓰노라.
만력(萬曆) 갑진(甲辰; 1604)년 5월 일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 삼가히 쓰다
자료제공 ; 남양홍씨세보 남양홍씨 대구화수회 65년사
근 역 : 태사공 33세손 홍 순 만(洪淳萬)
작 성 ; 양천서원 보존회 전 총무부장 홍 현 표 이기
3, 구보서(舊譜序)
南陽洪氏之源久矣傳記云唐遣才士八人來敎高句麗其一洪也
家于唐城郡西二十許里居焉 因此以知源之始而未知幾代之孫
爲鼻祖有
남양홍씨(南陽洪氏)의 근원은 오래이다. 전기(傳記)에 이르기를
당(唐)나라에서 재자(才子) 8인을 보내 고구려(高句麗)를,교화
하게 하니 그 중 하나가 홍씨이다.
당성군(唐城郡) 서쪽 20리쯤에 거주를 정하며 살았다, 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근원의 시작은 알 수 있으니 몇 대(代)의 손자가
비조(鼻祖)가 된다는 사실은 알수 없다.
諱殷悅當王氏開國之初以翊戴功受十八字功臣號官至太師是爲
鼻祖至 五代孫諱灌力學善寫官至左僕射當仁宗朝李資謙等稱兵
犯闕不避遇害故 追贈優例諡曰忠平
홍은열(洪殷悅)이 왕씨(王氏)가 개국(開國)할 때를 맞이하여,익대
(翊戴; 받들어 추대함)한 공(功)이 있어 18자의 공신호(功臣號; 광익
효절,헌양,정난,홍재,분용,양변,보예,경제)를,받았고 벼슬은,태사(太師)
에 이르니 곧 시조이다.
5대손 휘 관(灌)에 이르러 힘써 배웠고 글씨를 잘 썼으며 벼슬은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인종(仁宗) 때,이자겸(李資謙)등이,병사를
동원하여 궁궐(宮闕)을 침범하였을 때에 피하지 않음으로 해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추증(追贈; 죽은 뒤에 벼슬을 높여 줌)
하였고 시호(諡號)를 충평(忠平)이라 하였다.
忠平五代孫贈諡匡定公諱奎在忠敬朝誅賊臣林惟茂以安王室
然公性恬淡寡欲倜당不羈見同僚阿意苟容치與同列累拜樞要之任
固辭不受以南陽府院君致仕家居卒于私第
충평공의 5대손 증시(贈諡) 광정공(匡定公) 홍 규(洪奎)는 충경조
(忠敬朝)에서 적신(賊臣)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하여 왕실(王室)을
안정시켰다.그러나 공은 본래,욕심이 없고 매이기를,싫어,하였다
아첨을 떨고 구차스런 행동을 하는 동료를 보고 같은 반열(班列)에
서기를 부끄러워하였다.여러 차례,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으나,고사
(사양)하여 받지 않고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으로 치사(致仕; 나이
70이 되어 벼슬을 그만 두고 물러남)하여 집에 있다가 사제(私第)
에서 졸(卒)하였다.
我朝嘉其忠義績記于三綱行實淡庵白文寶於文正公碑銘記之曰
公十三世祖殷悅有功於三韓自是以來世冑光大皆登輔相
그러므로 아조(我朝)에서,그 충의(忠義)를 아름답게,여겨,삼강행실록
(三綱行實錄)에 속기(續記)해 넣었다.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가
문정공(文正公)의 비명(碑銘)을 기술하여 이르기를 공의 13대조
은열(殷悅)은 삼한(三韓)에 공(功)이 있었다.
이로부터 대대로 광대(光大)하여 모두 큰 벼슬에 올랐다고 하였다.
又曰以及匡定公功德冠世家政益修 莊簡淳謹克承維持
嗚呼吾之洪自初世焉忠貞故 至中世益增貴盛猶漢之袁楊唐之崔盧
甲於東方不可與他郡縣姓氏等夷之也
또 이르기를 광정공(匡定公) 때에 와서 공덕(功德)은 세상의 으뜸
이었고 가정(家政)이 더욱 수양(修養) 되었으며 장간공(莊簡公)은
순박하고,근실하여,능히,가풍(家風)을,이어,받아 유지하였다,고하였다
아 ! 우리 홍씨는 처음부터 대대로 충정(忠貞)에 득실하였다.
그러므로 중세(中世)에 이르러 더욱 귀하고 성대해 지는 것이 한(漢)
나라의 원씨(袁氏),양씨(楊氏)와 당(唐)나라의 최씨(崔氏),노씨(盧氏)
처럼,동방(東方)에서,제일이어서,다른,고을.성씨(姓氏)와는,같을 수,
없다.
< 지은이는 알수 없다 >
자료제공 ; 남양홍씨세보 남양홍씨 대구화수회 65년사
근 역 ; 태사공 36세손 홍 혁 기(洪奕基)
작 성 ; 양천서원 보존회 전 총무부장 홍 현 표 이기
4, 갑술보서(甲戌譜序)
盖自氣分於一而三才肇立人生於寅而父子相傳則人之生也久矣
曰自上古 一人之身而蔓延波流至于今日不知其幾世也 然沂而
觀之實一氣之流通是以
대체로 기(氣)는 하나에서 나뉘면서부터 삼재(三才; 天,地,人)가
비로소 형성되고 사람은 인(寅)에서 태어나 아비와 아들이 서로,
전하니 사람이 태어난 지는 오래이다. 먼 옛날에 한 사람의,몸으로
뻗어나고 갈리어,오늘에 이르렀으나,몇,세(世)나 되는지,알,수가,없다
그러나 거슬러 생각해 보면 실은 한 기(氣)의 유통(流通)인 것이다.
聖人必重其祖以其所出也 且不忘本也 此派系之圖所自出也
稽傳記曰某某幾世祖也 某某幾世孫也
이러므로 성인(聖人)이 반드시 그 조상을 존중함은 낳아주신 바이기
때문이요 또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파계(派系)의 도표(圖表)가 생기게 된 것이다.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면 아무 아무는 몇 대조(代祖)요,아무 아무는
몇 세손(世孫)이라 하였다.
又稱人之善者必擧其先曰某之祖有是德有是功有是才有是名則古
之重祖先謹派系有自來也 吾東方自箕疇之敍而貴賤分秩族屬之辨
또 사람의 선(善)을 말함에는 반드시 그 선조(先祖)를 들어 말하기를
아무의 선조에 이러한 덕(德)이 있고 이러한 공(功)이 있으며 이러한
재능이 있고 이러한 명성이 있었다 고 하였으니 옛날 선조(先祖)을
존중하고 파계(派系)를 삼가했슴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동방(東方)에 기자(箕子)의 교화가 퍼지면서 귀천(貴賤)이
나뉘 었고 족속(族屬)의 구분이 생겨났다.
謹矣是以家承累葉之其世籍舊德之名若某州某郡之姓爲我國之望
族如楚之昭屈唐之崔盧者比比有之 日休門衰祚薄家君早世又生也
已晩內外叔伯亦皆早逝其於先波僅記高曾而已
그러므로 집안에는 여러 대의 기업(基業)을 잇게 되어 대대로,선조의
덕을 힘입게 되므로,아무,고을의 아무,성(姓)은,우리나라의,망족(望族;
명망 있는 집안)으로서 초(楚)나라의 소씨(昭氏),굴씨(屈氏)와,당(唐)
나라의 최씨(崔氏),노씨(盧氏)처럼 번창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그런데 일휴(日休; 홍일동<洪逸童>의 字)의 가문(家門)은 쇠퇴하고
복이 박하여 가군(家君)께서 일찍이 돌아가시고 또 나는 늦게 태어 났으며
내외의 백숙(伯叔)도 역시 모두 일찍이 돌아가시어 그 선대 의 파계(派系)에
겨우 고조(高祖),증조(曾祖)만을 기록할 뿐이었다.
歲辛酉春從堂兄明哲手携族譜來示於余曰 此南陽洪氏派系之圖而
藏於吾家乃先祖相傳之舊物也 然自始祖太師諱悅至尙書諱斯胤而
止自以下絶不爲錄不知斯胤於吾兄弟幾代祖也
그러던 가운데 신유(辛酉; 단종1년 1453)년 봄에 재종형(再從兄),
명철(明哲)이 직접 족보(族譜)를 들고 와 내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남양홍씨의 파계도(派系圖)로서,우리 집에,소장되어,있던,것이요
선조(先祖)로부터 전해오는 구물(舊物)이라네 그러나 시조(始祖),태사
(太師) 휘 열(悅)로부터 상서(尙書) 휘 사윤(斯胤)에 그쳤고,그,이하는
끊겨 기록되지 않았으니 사윤(斯胤)이 우리 형제에 몇 대조(代祖)가
되는지 알 수 없네
吾子幸有家寶續而記之 日休受而掛諸璧間仰覽數日一幅自太師
至尙書而止一幅自王璟至嗣宗而止分爲兩觀盖尙書太師之孫而於
嗣宗爲壻也
그대에게 다행히,가보(家寶)가 있으니,이어서 기록하도록,하게,하였다
일휴(日休)가,이를,받아,벽에 걸고,며칠을,우러러,보았는데,한,폭(幅)은
태사(太師)로부터,상서(尙書)에,이르러,그쳤고 한,폭(幅)은,왕경(王璟)
으로부터 사종(嗣宗)에 이르러 그쳐 둘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었다.
대체로 상서(尙書)는 태사(太師)의,손자로서,사종(嗣宗)의,사위가,된다
知此爲尙書所修之譜而 王氏乃尙書妻黨之波也又高麗侍中諱彦博
於日休曾叔祖也謹按神道碑淡庵白文寶記之曰公十三世祖諱悅
有功於三韓自是以來世冑光大皆登輔相 又曰以及匡定公功德冠世
家政益修莊簡淳謹克承維持盖莊簡日休之高祖也
그러므로,이는,상서공(尙書公)께서 만든,계보(系譜)요,왕씨(王氏)는 곧
상서 처당(妻黨))의 계파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려 시중(高麗侍中)
홍언박(洪彦搏)은 일휴(日休)에 있어 증숙조(曾叔祖)가 된다.
삼가 신도비(神道碑)를 상고해 보면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가
기록하여 이르기를,공의 13세조 휘,열(悅)이,삼한(三韓)에,공(功)이
있었다. 이로부터 자손이 광대(光大)하여 모두 보상(재상)에 올랐다.
하고 또,이르기를 광정공(匡定公)에 이르러,공덕(功德)은 세상에,으뜸
이었고,가정(家政)은 더욱,닦였으며 장간공(莊簡公) 융(戎)은 순후
(淳厚)하고 근실(勤實)하여 능히 선덕(先德)을 받들어 유지 하였다
하였으니 대체로 장간공(莊簡公)은 일휴(日休)의 고조(高祖)이다.
又於家藏得匡定公爲吏部尙書時貫籍於京兆以學士諱縉爲父而祖
斯胤由此知斯胤於日休곤祖也 又唐城君洪海中樞洪約之兄一日進
而質之曰吾家舊譜亦如子之言 日休旣考之家又質諸伯叔遂續
또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것 가운데에서 광정공(匡定公)이 이부 상서
(吏部尙書)때에 서울에 호적(戶籍)을 한 문안(文案)이 발견 되었는데
이에 학사(學士) 홍진(洪縉)을 아버지로 사윤(斯胤)을 조부로 하였다.
이로보아 사윤(斯胤)은 일휴(日休)에게 6대조(六代祖)가 된다.
또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는 중추(中樞) 홍약(洪約)의 형이다.
어느 날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집의 구보(舊譜)도 그대의 말과
같다고,하였다.그러므로,일휴(日休)는,이미 집안에 있는것을 상고
하였고 또 백숙(佰叔)에게 질정(質正) 하였다.
而記之曰南陽洪氏派系之圖 嗚呼自三韓旣唐代五百餘年之父子
兄弟昭然可考 又只以知祖先積德연裕之所由也 義子孫者宜爲
傳世之寶而勿失焉
景泰甲戌季秋望後 日 十六代孫 逸童 記
이어서,기록하기를,남양홍씨(南陽洪氏),파계지도(派系之圖)라,하였다
아 ! 삼한(三韓)으로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500 여년간의,
부자(父子) 형제(兄弟)를 분명히 상고할 수 있고 또 선조(先祖)의
덕(德)을 쌓아 후손에게 드리운 연유를 족히 알 수 있으니 자손이
된 자는 마땅히 세전(世傳)의 보물로 삼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태(景泰; 명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갑술(甲戌; 단종2년,1454)년
9월16일 16대손 일동(逸童)이 쓰다
자료제공 ; 남양홍씨세보 남양홍씨 대구화수회 65년사
근 역 ; 태사공 36세손 홍 혁 기(洪奕基)
작 성 ; 양천서원 보존회 전 총무부장 홍 현 표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