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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파미르종주기-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공주성(公主城)의 전설
* 구법승들의 발자취
인도로 법을 찾으러 떠났던, 입축구법승 중에서 최초로 타쉬쿠르간을 거처 파미르고원으로 올라간 이는 5세기 초의 법현율사이다. 그는 이곳을 갈차국(竭叉國)1)이라 부르며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5년 마다 국왕이하 온 나라 백성이 모든 승려들을 초대하여 여는 성대한 법회[반차월사(般遮越師)]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당시 타쉬쿠르간 일대는 승려들이 천명이나 되는 불국토였다고 하였다.
[어마국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산으로 25일을 걸어가서 갈차국에 이르러 헤경 등과 다시 만났다. 이 나라의 국왕은 법회인 ‘반차월사’를 열고 있었는데, 이 말은 중국말로 ‘5년 대회’라는 뜻이다.
이 때 사방의 사문들이 초청되어 구름같이 모여든다. 승려들이 앉는 자리를 장엄하게 꾸미고 비단으로 만든 깃발과 일산을 매달며 금은으로 연꽃을 만들어 승려들이 앉은 자리 뒤에 붙이고 앉을 자리를 정갈하게 마련해 놓는다. (중략) 승려들의 한 안거가 끝나면 번번이 서리가 내리므로 왕은 승려들에게 보리가 익은 다음에 한 해를 마무리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 나라에는 석존의 치아[佛牙]가 하나 있는데, 나라 사람들이 탑을 만들어 모셨다. 천여 명의 승려들이 소승에 매진하고 있다.
▼ 법현율사의 순례지도
▼ 법현의 초상
법현 다음으로 519년에는 북위의 송운과 혜생이 서역남로를 통해 호탄에서 이에청[葉城, Karghalik]을 경유하여 타쉬쿠르간을 지나갔다. 그들은 이곳을 한반타국((漢盤陀國)으로 부르면서. 총령은 얼핏 보면 높아 보이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늘의 중간에 이르고 타쉬쿠르간은 바로 그 꼭대기에 있다 하면서, 총령의 지형을 설명하고는 총령을 분수령으로 하여 강물은 동서로 흐른다고 하였다. 특히 현장이 사다하라고 부른 현 타쉬쿠르간 하(河)를 맹진하라고 부르면서 동으로 흘러 카슈가르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구(神龜) 2년(519) 7월 29일에 주구파국(朱駒波國)2)으로 들어갔다. 백성들은 산에서 살고 오곡이 풍성하여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며 짐승을 도살하지 않았다. (중략)
8월초에 한반타국(漢盤陀國,Tashkurgan) 경계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아간 지 엿새 되어 총령산에 올랐다. 이곳에서부터 서쪽은 길이 경사지고 천리 비탈과 만길 낭떠러지가 이어져서 하늘에 닿은 듯 험난하였다. 총령산은 얼핏 보면 높아 보이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늘의 중간에 이르렀다. 한반타국은 바로 그 산꼭대기에 있었다. (중략) 성의 동쪽에는 맹진하(孟津河, Tashkurgan河)3)가 있어 [멀리] 동북쪽의 소륵(疎勒, Kashgar)4)으로 흐른다. 총령은 높고 험준하여 초목이 자라지 못했다. 어때가 8월인데도 벌써 날씨가 차서 북풍은 기러기를 내몰고 눈이 천리를 덮었다.
▼ 타쉬쿠르간의 상징인 석두성
▼ 석두성의 원경
*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공주보 전설
타쉬쿠르간의 개괄적 이야기를 끝낸, 현장법사의 이야기는 어느덧 마치 전설 같은 속으로 들어간다.
▼ 대당서역기 12권 공주성 관련 기록
걸반타국(朅盤陀國)의 둘레는 2천여 리인데 나라의 큰 도성은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고5) 사다하(徙多河)를 등에 지고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중략)
건국 이래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스스로를 지나제파구달라(Cina-deva-gotra(Skt),至那提婆瞿呾羅)6)라고 부른다. 원래 이 나라의 선조는 총령 안의 거친 평원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옛 파리랄사국(波利剌斯國, Persia)의 왕이 중국에서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전쟁이 일어나서 동서의 길이 끊기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왕녀를 외딴 산봉우리에 임시로 피난시켰다. 이 산은 매우 험하고 위태로워서 벼랑에 사다리를 걸치고 오르내려야 했지만 그래도 왕은 산 주위에 경비를 세우고 밤낮으로 경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석 달이 지나자 반란을 일으킨 적들이 비로소 평정되었다. 그때서야 왕은 귀로에 오르려 하였는데 왕녀가 임신 중이었다. 사신은 크게 놀라서 주위 시종들에게 말하였다.
"왕께서 명하여 부인을 맞아들이다 이런 병란에 휩쓸려 거친 평원에서 노숙을 하며 겨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다가 이제 요망한 기운을 평정한 뒤에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렇게 왕녀가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이 일로 우리들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범을 찾아서 그를 죽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용의자를] 심문을 하며 소란을 피웠지만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 때 왕녀를 모시던 몸종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서로 탓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부인이 천신과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장부 한 사람이 태양으로부터 말을 타고 이곳에 내려와서 왕녀를 만났습니다."
사신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겠느냐? 돌아가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고 이곳에 남아있어도 우리를 토벌하러 올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할 지경이니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누가 감히 처벌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국외에서 처벌을 기다리며 지금은 잠시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이내 돌산 봉우리 위에 거처를 마련하여 둘레가 3백여 걸음에 달하도록 궁을 에워싸고 성을 구축한 다음 왕녀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관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다.
산달이 되자 여왕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용모가 아름다웠다. 여왕이 섭정이 되어 보필하면서 아들을 왕으로 모셨다. 아들 왕은 장성하면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바람과 구름을 자유롭게 다루었다. 그리하여 왕의 위엄과 덕은 널리 퍼졌고 그의 명성과 가르침은 아득한 곳까지 두루 미쳤다. 이에 가까운 주변 국가에서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는 곳이 없었다. (중략)
그 자손들은 대대로 오늘날까지 그 선조의 출생에 대해서 어머니는 바로 한(漢)나라 사람이고 아버지는 곧 태양신의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일컬어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왕족의 용모는 중국 사람과 같고 머리에는 네모진 관을 쓰고 있으며 호복을 입고 있다.
마치 한편의 영웅사시시 에픽(Epic poetry) 같은 이 이야기는 다른 기록은 전혀 없다. 오직 현장법사의 것이 유일하다. 조금은 장황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페르시아 왕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여 머나먼 본국으로 가던 중국의 한 왕녀가 지금의 타쉬쿠르간 근처를 지날 때 미침 반란이 일어나 통로가 끊겼다. 이에 왕은 새색시를 한 외진 산위로 피난을 시키고 병력을 배치하여 단단하게 지켰다. 그러다가 반란이 진정되어 막상 귀국하려고 하자 왕녀가 임신을 한 사실이 드러났고 그 상대는 태양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천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도 가도 못한 측근 시종들은 왕녀를 도와 궁을 짓고 수비성벽을 쌓고 사내아기를 낳고 길러서 왕으로 추대하여 왕국을 세워서 그 인근을 오래도록 통치했다는 내용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뭔가 냄새가 나기는 난다. 머나먼 낮선 이역만리로 시집가기 싫은 새색시와 측근 신하와의 불륜사건을 태양의 신과 연결시켜 멋지게 미화하여 한 나라의 개국신화로 처리한 연출솜씨가 돋보이는 이야기 거리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한 왕조를 연 개국시조의 족보를 하늘의 자손으로 이어 보려는 전형적인 ‘천강설(天降說)7)’이다. 대체적으로 고대의 개국신화는 하늘에서 시조가 바로 내려온 ‘천강설(天降說)’과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卵生說)’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유목민의 경우는 전자이고 농경민족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8)
▼ <현장의 귀국로 상의 유적지 지도>
초록선은 국경선/ ‘와칸남로’는 노랑색/ ‘와칸북로[현장로]’는 청색선으로 그려 넣었다. 관련된 지명은 원안에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함.
⓵파미르천=조르쿨호수/ ⓶사리코룸 고개/ ⓷공주보/ ⓸다브다르 마을/ ⓹사르하드 이 부로길=연운보요새/ ⓺와흐지르 고개/ ⓻현장취경동귀비/ ⓼ KKhy의 쿤제랍 고개/ ⓽ 총령진=갈반타국=타쉬쿠르간
▼ 공주성과 밍테게 고개의 <현장동귀비> 인근 지도
▼ 다브다르 마을과 공주성 구굴 위성지도
▼ 공주보 표지석 <바이두 검색사진>
▼ 공주성 유지 전경
한편 역사적으로 보면 현재의 타쉬쿠르간의 옛 갈반타왕국의 왕성이었던 현 석두성 이전에 태양신의 피를 이어 받은 족보를 가진 고대왕국이 있었다는 것이고 현장법사가 친히 이 사실을 원주민들에게 듣고 보고 확인하여 기록했다는 것이다.
현장은 타쉬쿠르간에서 두 달간을 체류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시간적으로는 원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를 그대로 장황하게 수록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위 기록은 누구에 눈에도 그냥 허구적인 전설로만 보였고 그렇게 천 수백 년 간 그렇게 굳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현주민들은 여전히 ‘케즈쿠르간(克孜库尔干)’이라 부르는 고성유지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 뜻은 ‘공주의 성(Princess castle)'’이고 중국어로는 ‘공주보(公主堡)’로 표기되어 있다.
▼ 카슈가르에서 탐험중의 중앙아시아 마니아, 아우렐 스타인 , 1906년
천여 년 동안 그냥 전설이겠거니 하던 이야기를, 혹시나 하는 강한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중앙아시아 탐험과 둔황석굴을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린 영국의 아우렐 스타인(Sir A Stain)9)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중앙아시아를 떠나지 않고 현재 아프간 카불의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을 정도로 중앙아시아 마니아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현장법사를 그의 호법신장, 즉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수호천사로 여긴다고 술회하고 있을 정도로 현장의 마니아였는데, 그는 둔황에서 한 탕 한 뒤, 바로 1906년 5월 30일 『대당서역기』를 가이드텍스트로 삼아 현장의 발자취를 뒤지며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간으로부터 와칸주랑을 통하여 중국 신강서부의 타쉬쿠르간에 거기서 공주성에 대한 현주민들의 이야기와 현장의 기록이 오버랩되는 것을 확인하고 한 산봉우리의 고대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몇몇 고대 유물을 발굴하고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위에서 읽은, 마치 한편의 영웅서시시 같은 스토리의 실제무대라고…
또한 시대적 배경이 당나라 때가 아니고 기원전의 한(漢)나라 시대라고 결론지었다. 나아가 스타인은 케즈쿠르간 부근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대량의 개량농사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곳이 타쉬쿠르간의 선조들이 거주하던 곳이라는 사실을 고증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1972年이 되어서야 일단의 중국학자들이 현장과 스타인의 기록을 더듬어 공주성을 찾아 나섰다. 신장 고고학 연구소장 왕병화(王炳华)였다. 그들은 또 다른 사실을 밝혀냈는데, 그곳에는 3백년 된 청나라 주둔군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주성의 타지크어 이름은 케즈쿠르간(克孜库尔干)으로 타그흐둠바쉬-파미르(Taghdumbash-Pamir) 계곡에서 중국 쪽으로 내려가는 길가의 남쪽에 흐르는 시냇물 건너편 산위에 그 성벽의 유지가 있다. 그곳은 물가에 고립해서 돌출해 있는 바위산 위에는 폐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중국 변경의 요새에서 볼 수 있는 공법으로 축조한 성벽을 지금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 다부다르의 타지크 촌락의 풍경
사족이겠지만, 지금까지 이 공주성을 눈여겨보고 답사한 한국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 종주기가 최초의 기록이 될 것이다. 공주성으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타쉬쿠르간에서 차를 대절하여 314국도를 타고 남방 70km 밍테게 마을로의 갈림길 10km전에 위치한 다브다르[达布达尔]마을로 가서 현주민에게 정확한 위치를 물어 현장을 잘 안다는 사람을 태워 동행하면 좋다.
현재 남아 있는 고성의 유지에는 대략 13개 정도의 건물잔해와 토굴 그리고 남면으로는 동서로 150m 높이 10m의 성벽의 잔해가 남아 있는데, 주위 지형을 종합해보면 절벽 아래로는 타쉬쿠르간하의 원류와 KKhy 국경선인 홍치라포[红其拉甫]와 밍테케[明鐵介] 분지에서 흘러나오는 카라치쿠하[喀拉其库河]가 합쳐지는 곳이어서 한 눈에도 수비하기 용이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인다.
그럼으로 이 요새는 실크로드가 번성하였던, 지난 2천년 간 평시에는 옛 길목을 지키는 국경수비대 기지로 사용하다가 유사시에는 농성용의 요새로 사용해 왔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공주성에서 바라다 본 타쉬쿠르간 하의 격류
1) 현 중국령 신장(新疆)위구르의 파키스탄과의 접경도시인 타쉬쿠르간으로 파키스탄과의 연결도로인 카라코람 하이웨이(KKH)의 국제버스가 다니는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와칸주랑으로 연결되는 사리콜(Sar-i Kol) 계곡에 위치한 국경요새로써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설치한 총령수착소(葱嶺守捉所)가 설치된 곳으로 예부터 서역과 중국 간의 필수 경유지로 국경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하던 이 산성은 시내에서 2km거리에 석두성(石頭城)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건재하다.
2) 현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서남쪽 끝의 도시이며 범어 차코카(cakoka)의 음역으로, 중국인들은 이에청[葉城)]으로, 위구르인들은 카르갈리크[哈爾碣里克/Karghalik)로 부르는 도시를 말한다. 이곳은 현재 신장위구르의 교통요지로 이곳에서 티베트로 가는 신장공로(新藏公路)와 실크로드의 서역남로가 갈라진다.
3) 현 신장위구르의 타쉬쿠르간(Tashkurghan)에서 발원하여 사차현(沙車縣) 근처를 경유하여 동북쪽의 카슈가르[Kashgar/沙勒/疎勒으로 흐르는 강으로 『대당서역기』12권에서의 사다하(徒多河)를 말한다.
4) 현 위구르인은 카슈가르[Kashgar], 중국인들은 커스[喀什]으로 부르는 옛 슈레[疎勒]을 말한다. 혜초도 천축에서 총령을 지나 이곳에 도착하여 “또 총령에서 걸어서 한 달을 가면 카슈가르에 이른다. 외국인들은 카시기르국[伽師祇離國]이라고 부른다. 이곳도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절도 있고 승려도 있으며 소승이 행해진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으며 토착인은 면직 옷을 입는다.
5) 당 현종 개원(玄宗 開元) 연간에 설치한 총령수착소(葱嶺守捉所)가 설치된 곳으로 예부터 천축 그리고 서역과 중국간의 필수 경유지로 국경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하던 이 산성은 시내에서 2km거리에 석두성(石頭城)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건재하다.
6) 현장 자신의 원문 병주(竝註)에 “당나라 말로는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고 한다” 라는 구절이 달려있다.
7) 고대의 개국신화는 천강설과 난생설로 크게 구분되는데, 유목민의 경우는 천강설이 지배적이고 농경민족의 경우는 난생설이 지배적이다.
8) 표본적인 경우가 고구려는 천강설이고 신라와 가야는 난생설을 들 수 있다.
9) 헝가리 출생으로 영국에 귀화하여 독일과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란학과 인도학을 전공하고, 1888년 인도 라호르 동양학교(Oriental College, Lahore) 교장이 되었고 1900년~1901년 신장지역 각지를 탐험하고, 2번째 탐험(1904년)때에는 중국 둔황에서 많은 고문서와 회화를 발견하였다. 3번째 탐험 때는 하라호토(Khara-Khoto) 폐허와 투루판 분지에 있는 옛 무덤을 발견하였다. 많은 미술품과 고고학적인 유물 자료를 발견하여, 이것의 상세한 보고서 및 연구 저서로 중앙아시아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또, 서역을 휩쓴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을 세계적으로 알린 공적이 있다.
첫댓글 신바로운 전설~~ 사실적 역사라니 놀랍습니다.
2000년 전을 현재로 끌어내오는 기록......놀랍습니다......출판기념회를 고대합니다.
타쉬 지나 케즈... 지명 하나 허투르 볼 게 아니군...
맞습니다. 역사적인 대 발견들중에서 사소한 지명에서부터 비롯된 것도 많은 것을 보면 현지의 지명은 데단히 중요합니다.
어, 배꼽사진? 나만 그렇게 보이나?
어, 이상하다. 처음에는 잘 보였는데....하여간 다시 올려야지요.
그러나저라나 어떻게 하루 사이에 이렇게 많이 열람숫자가 올라갔는지도 이상하네....???
수정분? 은 보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