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루가(2: 19)
젊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 천사 가브리엘이 한 말이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현실’을 잘 말해주는 진실이다. 우리는 어떤 때에 마음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가? 한 번이라도 이를 체험해 본 사람은 이 말의 의미와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가 깊을수록 관계가 보다 순수한 것일수록 작은 티끌도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인간관계라는 것은 항상 금이 가고 또 틀어지고 티끌이 끼인다.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항구하거나 영원한 관계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란 누구나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고 또 절대적으로는 의롭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직 진리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오직 절대자만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하다. 그가 시인의 모습이거나 성직자의 모습이거나 구도자의 모습이거나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든지 정도의 차이를 달리하여 인간은 나약하다. 영적으로 나약한 것이다. 가끔 우리는 자신과 개인적으로는 별관계가 없지만, 동일한 신념이나 동일한 이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산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 사람이 ‘여느 세상 사람처럼’ 세속적인 욕망으로 인해 의로움을 저버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가슴은 예리한 칼에 찔린 듯 ‘싸’ 함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일수록, 진리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작은 불의에도 그것을 마주할 때 가슴속은 작은 상처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여러 번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는 ‘순수한 사람’ 혹은 ‘순결한 사람’의 이미지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거짓이나 위선이나 욕망이나 허영이나 그 어떤 것도 그의 마음을 휘어잡지 못하고 진리나 진실이 자리할 수 있도록 마음속이 비어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순수하고 잔잔한 마음속에는 세상의 작은 불의나 악함이 약간만 스쳐지나가도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자주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이 때문에 철학자 ‘디오니게스’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인간세상을 떠나 유랑을 하거나,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이성선 시인>의 시를 읽게 되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마치 ‘세상으로부터 예리한 칼에 찔리듯’ 가슴 속의 아픔을 지녔을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연상되는 시였다. ‘세상에 바라볼 것이 없었다’는 시인의 마음은 자칫 교만하게도 들리겠지만, 진리와 진실에 강하게 집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보았을 마음일 것이다.
젊다는 것의 특성은 여럿 있으되, 그 중에서도 순수하다는 것이 그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세상이 늙어 버렸는지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본다는 것은 마치 ‘수 억 년 전 화석 속 희귀생명체’를 보는 것처럼 희귀한 일이 되어버렸다고 ‘키르케고르’는 한탄한 적이 있다.
며칠 전 죄 없는 수많은 젊은이가 죽었는데, 오늘 또 다시 소중한 한 생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마도 저 시인이라면 가슴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싸’ 함을 느끼겠지.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악할까!(루가, 11, 29)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라고 시를 쓰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