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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명하여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찬집(纂輯)하게 하셨는데, 짐작하여 손익(損益)한 것은 다 왕의 예단(睿斷)에서 나왔다.
추9월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탄강(誕降)하고 원손(元孫)으로 봉해지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공시 당상(貢市堂上) 세 사람을 두어 공시의 민폐를 바로잡게 하셨다. 29년 계유(癸酉)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는데, 경우(耕牛)는 반을 줄이고 종경(從耕)·선온(宣醞)·설과(設科) 등의 절차를 없애셨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셨다. 초헌(初獻)하고 나서 소리가 나며 쓸쓸히 바람이 부는데 명하여 장막을 치우게 하고 비를 맞으며 서 계셨으므로 제사를 마칠 때에는 면불(冕黻)이 죄다 젖었다. 사흘 뒤에 비가 모자란다 하여 다시 선농단(先農壇)에서 친히 빌었는데, 비가 쏟아지고서야 그치셨다.
6월에 삼강(三江)에서 촘촘한 그물을 쓰는 것을 금하셨다. 왕께서 명하여 강민(江民)의 폐단을 바로잡게 하시자, 일을 맡은 자가 절목(節目)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촘촘한 그물이란 말이 있으므로 왕께서 말씀하기를, ‘촘촘한 그물로 죄다 잡는 것이 어찌 왕정(王政)이겠는가? 금하고 범하는 자는 도배(徒配)하라.’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소녕묘(昭寧墓)를 원(園)으로 개칭(改稱)하고 육상묘(毓祥廟)를 궁(宮)으로 개칭하고 수위관(守衛官)·수복(守僕)·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향(祭享)은 한결같이 궁원(宮園)의 규례대로 하게 하셨다. 숙빈(淑嬪)의 시호(諡號)를 화경(和敬) 이라 추상(追上)하였는데, 숙빈이 봉작(封爵)된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왕께서 종백(宗伯)에게 말씀하기를, ‘한(漢)·당(唐) 이래로 중국에서는 모두 낳은 어버이를 추숭(追崇)하였으나, 아조(我朝)는 가법(家法)이 엄하고 또 성고(聖考)의 하교가 있으므로 내 뜻이 추숭에 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만은 짐작하여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겠으나, 외인(外人)이 헤아리지 못하면 반드시 아직도 여사(餘事)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9월에 하교하기를, ‘지금 악원(樂院)을 속칭하여 이원(梨園)이라 하나, 이원은 당 명황(唐明皇)이 이름 붙인 것이니, 어찌 법악(法樂)의 부(府)에 대하여 쓸 수 있겠는가? 금하라.’ 하셨다. 곧 명하여 강서원(講書院) 소장인 《능엄경(楞嚴經)》을 북한(北漢)의 중흥사(中興寺)에 옮겨 두게 하여 이단을 배척하는 뜻을 보이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혜국(惠局)에서 아뢰기를, ‘홍부미(紅腐米)를 오래 쌓아 두면 도리어 신미(新米)를 상하니, 값을 싸게 하여 경기 백성에게 팔아서 쓸모 없는 것을 쓸모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그러나 그것이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백성을 속일 수 있겠는가? 내가 백성을 위하여 먼저 맛보아야 하겠으니, 홍부미를 빨리 가져오라.’ 하셨다.
12월에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존호(尊號)를 유모 영운 홍인 준덕(裕謨永運洪仁峻德) 이라 가상(加上)하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존호를 선목(宣穆) 이라 가상하고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존호를 숙성(淑聖) 이라 가상하고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를 영복(永福) 이라 가상하였는데, 이듬해가 인현 왕후께서 다시 곤위(壼位)를 회복하신 해이고 또 왕께서 주갑(周甲)이 되시는 해이기 때문이다.
30년 갑술(甲戌) 춘정월(春正月) 초하루 아침에 뭇 신하가 성수(聖壽) 때문에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받아들이지 않고 드디어 태묘(太廟)·영수각(靈壽閣)·육상궁(毓祥宮)에 배알(拜謁)하셨다.
2월에 영남 이정사(嶺南釐正使)가 복명하니, 왕께서 조용히 백성의 고통을 묻고 풍토(風土)·속상(俗尙)에 언급하셨다. 이정사가 전복을 따는 자가 바가지를 차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정상을 대단히 아뢰니, 왕께서 섭이중(聶夷中)의 시(詩)를 외고 말씀하기를, ‘신고(辛苦)가 낟알보다 훨씬 심하니 차마 소반에 올리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당장 명하여 날전복의 공헌(貢獻)을 멈추게 하셨다.
31년 을해(乙亥) 춘정월(春正月) 상원일(上元日)에 왕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셨는데, 이듬해에 동조의 수가 칠순이 되기 때문이다.
3월에 윤지(尹志)·이하징(李夏徵) 등이 처형되고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과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인 역적들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등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는데, 윤지는 윤취상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을사년157) 국옥(鞫獄) 때에 윤취상은 고문당하다가 죽고 윤지는 나주(羅州)에 귀양갔는데 밤낮으로 나라를 원망하고 그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시켜 나주의 향리(鄕吏)와 서로 맺어 계를 만들고 무리를 모아 불궤(不軌)를 꾀하고 객관(客館)의 망화루(望華樓)에 글을 걸어서 인심을 어지럽혔는데, 감사(監司) 조운규(趙雲逵)가 알아내어 아뢰었다. 왕께서 윤지 등을 국문(鞫問)하여 옥사(獄事)에 관련된 역적들을 차등을 두어 처형하거나 귀양보내셨는데, 이 일은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실려 있다. 윤지의 상자 가운데에는 이하징이 나주 목사(羅州牧使)이었을 때에 왕복한 글이 많은데 주무(綢繆)하고 매우 비밀스러워 드디어 이하징을 국문하였다. 이하징은 신축년158) ·임인년159) 의 역적 이명의(李明誼)·이명언(李明彦)의 조카인데, 감히 김일경 등 일곱 역적의 소(疏)를 일컬어 신하의 절조가 있다 하였으므로, 조정의 신하가 모두 놀라고 분개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다. 또 조태구·유봉휘 등이 역적들의 근저(根柢)라 하여 모두 추율(追律)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최석항은 병오년160) 에 추탈(追奪)되었다가 그 뒤에 이 광좌가 입상(入相)함에 따라 복관(復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조태억과 함께 추탈되었다.
추8월(秋八月)에 명하여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천의소감》을 찬집하게 하셨는데, 역변(逆變)의 원류(源流)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32년 병자(丙子) 춘정월(春正月)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융화(隆化)라 가상(加上)하고 왕의 존호를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라 가상하고 왕비의 존호를 강선(康宣) 이라 가상하였다. 왕께서 명정전(明政殿)에서 기곡 서계(祈穀誓戒)를 행하셨다. 끝나고서 대신(大臣)·종백(宗伯)·태학생(太學生)을 불러 사륜(絲綸)을 내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셨다.
2월에 왕께서 문묘에 작헌(酌獻)하고 물러가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친히 대학서(大學序)를 외우고 강서관(講書官)·태학생에게 명하여 차례로 《시전(詩傳)》·《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게 하고 문의(文義)를 토론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학문을 권하셨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여조(麗朝)의 명현(明賢) 정몽주(鄭夢周)의 묘(墓)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는데,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이기 때문이다.
하5월(夏五月)에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농사를 권하셨다. 왕께서 친히 어원(御苑)에 나아가 관운(觀耘)하여 백성을 선도하셨다.
6월에 명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석담 서원(石潭書院)과 유거(幽居)를 그려서 바치게 하셨는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보고 유례없는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동조(東朝)의 칠순(七旬)이기 때문에 기사(耆社)의 신하를 불러 선찬(宣饌)하여 경사를 나타내고, 동조께서도 왕께서 63세라 하여 음식을 갖추어 내리셨다. 신하들이 취하여 돌아가고 나서 왕께서 동조에 이르러 모시고 이야기하여 동조의 마음을 기쁘게 하셨다. 물러나실 때에는 날이 이미 밝았는데 법복(法服)을 벗지 않고 바로 정당(正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셨다. 며칠 뒤에 기사의 신하와 나이 60 이상인 종친(宗親)과 문무 경재(文武卿宰)를 거느리고 동조께 진하(進賀)하셨다. 이윽고 또 사서(士庶)와 함께 경사를 같이하고자 하여 기로과(耆老科)를 설치하여 나이 60 이상인 유생(儒生)·무사(武士)를 시험하고 탁명(坼名)·창명(唱名)을 규례대로 하였다.
8월에 왕께서 다시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께 진하하셨는데, 동조의 탄미절(誕彌節)이기 때문이다.
33년 정축(丁丑) 춘정월(春正月)에 침체되어 있는 문무 당하관(文武堂下官)은 그 이름을 적어 첩(帖)을 만들어 바쳐서 등용에 갖추게 하셨다. 관원을 보내어 임진년에 전사하여 장(場)161) 이 안변(安邊)에 있는 자를 치제(致祭)하게 하고 또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하게 하고 명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사당을 부조(不祧)하게 하고 적장(嫡長)은 그 벼슬을 세습하게 하셨다. 이때 회양(淮陽)·금성(金城)의 굶주린 백성이 서울에 많이 흘러 들어왔는데, 왕께서 혜국(惠局)에 명하여 그 양식을 도와 주어 본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안집사(安集使)를 보내어 회양·금성의 백성을 안집하여 진구(賑救)하게 하고 회양·금성의 조세·부역·공물을 면제하셨다.
2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훙서(薨逝)하셨는데, 왕께서 명하여 상례(喪禮)를 간략하게 하고 공제(公除) 전부터 사서(士庶)의 장사(葬事)를 금하지 말게 하셨다.
3월에 두 진청(賑廳)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 2만여 명을 나누어 진구(賑救)하였다. 이달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께서 훙서(薨逝)하셨다. 처음에 후(后)께서 편찮다가 곧 나으시니, 왕께서 매우 기뻐서 경하하고 제도(諸道)의 구포(舊逋)를 면제하고 친히 너그럽게 처결하여 사죄(死罪) 이하는 죄를 용서하셨다. 얼마 안가서 후께서 다시 위독하시니, 왕께서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빌게 하고, 곧 뜰에 내려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빌어 몸소 대신하기를 바라시니 슬픔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후께서 훙서하시니, 왕께서 사모하여 마지않아 그 당(堂)을 이름하여 영모(永慕)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단양(丹陽)·회인(懷仁)의 유민(流民)을 안집(安集)하여 저치미(儲置米)로 진구하게 하셨다.
5월에 가물었는데, 왕께서 자신을 책망하고 찬선(饌膳)을 줄이고 형장(刑杖)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관원을 보내어 산천에 비를 빌게 하시니, 하늘이 곧 비를 내렸다. 6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를 홍릉(弘陵)에 장사하였다. 국제(國制) 가운데 능침(陵寢)에는 사방에 큰 돌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승민(僧民)을 징발하여 나르므로 이따금 눌려 죽는 자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죄다 없애게 하셨는데, 이 일은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려 있다.
추7월(秋七月)에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명릉(明陵)에 장사하였는데, 크고 작은 일을 왕께서 몸소 살펴서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능히 후(后)의 뜻을 따르셨다. 무릇 능전(陵殿)의 비용은 경자년162) 보다 3분의 1을 줄이고 경기의 결전(結錢)과 북도(北道)의 전조(田租)도 3분의 1을 면제하였다.
8월에 왕께서 경연(經筵)에 나아가셨을 때에 명하여 고(故)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는데, 《숙야잠주해(夙夜箴註解)》를 강독하고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동10월(冬十月)에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침체되어 있는 자를 낱낱이 적어 올리게 하셨다. 어사(御史)를 보내어 청안(淸安)의 유민(流民)을 안집(安集)하게 하고 탐라(眈羅)의 곡물을 날라다 진구(賑救)하게 하셨다.
11월에 관원을 보내어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의 사당에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12월에 인종(仁宗)의 시책(諡冊)을 개수(改修)하여 인종실(仁宗室)에 봉안하였다. 무릇 시책과 보(寶)는 반드시 태묘(太廟)의 당실(當室) 옆에 봉안해야 하는데, 인종의 시책은 잃어서 전해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우주(虞主)163) 를 묘정(廟庭)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옥찰(玉札) 한 조각을 얻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인종의 시책이었다. 왕께서 매우 기이하게 여겨 친히 전문(全文)을 베껴서 옥에 새겨 합하여 완편(完篇)을 만들어 인종실에 보관케 하셨다. 명하여 당하관(堂下官)의 홍포(紅袍)를 청록(靑綠)으로 바꾸게 하셨는데, 《대전(大典)》에 따른 것이다.
34년 무인(戊寅)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장차 친히 사직(社稷)에 기곡(祈穀)하려 하시는데, 대신이 왕의 춘추가 높아서 근력을 써서 예(禮)를 행할 수 없다 하여 대행하기를 힘껏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세우지, 어찌 임금을 위하여 백성을 냈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히 행하셨다.
3월에 왕께서 운관(雲觀)164) 에 하교하기를, ‘산꼭대기에 태(胎)를 묻거나 한 고을에 한 태를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제 《실록(實錄)》을 살펴보건대, 광묘(光廟)와 여러 대군(大君)·왕자(王子)의 태가 묻힌 곳은 함께 한 산등성이에 있으니,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은 여기에 말미암아야 한다. 이제부터 비롯하여 대(代)가 멀고 가까움에 불구하고 태를 한 산에 묻되 서로 거리가 두세 걸음을 넘지 말고 산등성이가 다할 때까지 하고 적자(嫡子)·중자(衆子)·원손(元孫)·군주(郡主)를 달리하지 말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명나라 사람의 후손을 적어 올리게 하고, 신칙하여 그들을 군역(軍役)에 잘못 충정(充定)한 수령(守令)에게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게 하셨다.
8월에 왕께서 명릉(明陵)에 거둥하고 회란(回鑾)하는 길에 가을장마가 벼를 손상한 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이것은 내 허물이다.’ 하고, 열흘 동안 감선(減膳)하여 농민에게 사죄할 것을 명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예조(禮曹)에 명하여 《황단봉실의(皇壇奉室儀)》를 짓게 하셨다.
35년 기묘(己卯) 춘3월(春三月)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채권(債券)을 죄다 불사르고 강계(江界)에서 삼(蔘)을 사는 값을 늘리게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태묘(太廟)의 숙종실(肅宗室)에 부제(祔祭)하고 반사(頒赦)하셨다. 명하여 헌가(軒架)는 벌이되 연주하지 말게 하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부자(夫子)가 자장(子張)·자하(子夏)를 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라 허여하였고, 아조(我朝)에서는 결채 가요(結彩歌謠)165) 를 성조(聖祖)께서 없애시고, 전후의 고취(鼓吹)를 성고(聖考)께서 벌이되 연주하지 않게 하셨는데, 감히 지나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도 예(禮)이다.’ 하셨다.
6월에 왕께서 봉작(封爵)되신 지 주갑(周甲)이 되기 때문에 정전(正殿)에 나아가 뭇 신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다.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따님을 왕비로 책봉(冊封)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우리 주상 전하를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황단(皇壇)에 전배(展拜)하셨다.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하고 하교하기를, ‘한 고조(漢高祖)의 4백 년의 기업(基業)은 실로 태뢰(太牢)로 공자(孔子)를 제사한 데에 근본하였다. 그 예(禮)를 생략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어서 사성(四聖)의 신위(神位)에도 모두 친헌(親獻)하고 계성사(啓聖祠)에 재배례(再拜禮)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8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임금은 법으로 아랫사람을 어거하는데, 뜻대로 가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경자년166) 이전에는 결안(結案)을 기다리지 않고 처형한 자가 없었는데, 한번 행하고서는 드디어 관례로 삼아 심하면 혹 한번의 전지(傳旨)로 처형한다. 뒷날 임금이 되는 자가 혈기에 맡겨 답습하고 신하가 된 자가 당습(黨習)을 부려 답습한다면 그 유폐(流弊)는 스스로 내가 인도한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두려워진다. 이 뒤로는 결안을 기다리지 않은 것과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는 것과 전지로 처형하는 것과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는 것은 일체 영구히 없애고, 임금이 혹 어기는 것이 있거든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이 하교로 다투라. 그러지 않고 영합(迎合)하고 승순(承順)하면 이는 간사하고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는 무리일 것이니, 왕법(王法)이 분명하고 천망(天網)이 넓은데 어찌 감히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준수하면 흥하고 준수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니, 아! 금오(金吾)·추조(秋曹)·양사(兩司)는 인쇄하여 관부에 두고 길이 후세에 전하라.’ 하셨다.
36년 경진(庚辰) 춘2월(春二月)에 준천(濬川)하였다. 내[川]는 백악(白岳)·인왕산(仁王山)·목멱산(木覓山)의 물을 합하여 도성(都城) 가운데를 둘러서 동으로, 오간수문(五間水門)을 나가 또 동으로 가 영제교(永濟橋) 동남에서 중량천(中梁川)과 만나 한강(漢江)으로 들어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개천(開川)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세종(世宗) 때에 이선로(李善老)가 더러운 물건을 투입하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히기를 청하고,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그 형세가 행할 수 없는 것이라 배척하였는데, 세종께서 어효첨을 옳게 여기고 이선로의 말을 채용하지 않으셨다. 역대에서 세종 때의 일을 존중하고 믿어서 드디어 바닥을 쳐서 소통시키는 일을 모두 거행하지 않은 것이 또한 3백여 년이 되므로 내[川]가 점점 막혀서 거의 둑과 높이가 같아져 장마 끝에는 이따금 넘치는 재앙이 있었다. 왕께서 경(耿)·박(亳)의 고사(故事)167) 에 따라 여러 번 임문(臨門)하여 뭇 백성에게 물으셨는데, 모두가 쳐내는 것이 편리하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어찌 백성의 힘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수만 민(緡)을 내어 일꾼을 사서 쳐내게 하되 재촉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나 몇 달 안 가서 공역이 끝났다. 그래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한성 판윤(漢城判尹)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으로 준천 당상(濬川堂上)을 겸하게 하고 도청 낭청(都廳郞廳) 각 1인을 두어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남단(南壇)에서 기우(祈雨)하고 회란(回鑾)하다가 태상(太常)에 이르러, 신실(神室)의 한 위판(位版)에 ‘대명동정관군(大明東征官軍)’이라 써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명하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손자 이태상(李泰祥)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손자 이훤(李萱)을 대축(大祝)으로 삼고 노량(露梁)에 제단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하게 하고 이어서 위판을 선무사(宣武祠)에 배향(配享)하게 하셨다.
동12월(冬十二月)에 왕께서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국자생(國子生)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또 체직(替直)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여 하교하기를, ‘임금과 스승의 책무를 내가 감히 그렇다 할 수 없다마는, 노년에 한 달에 세 번 《중용(中庸)》을 강독(講讀)하였으나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경들 및 유생들과 함께 문난(問難)하여 내 천박한 학문을 보태고자 한다.’ 하셨다. 그래서 무릇 천인 성명(天人性命)부터 존양 성찰(存養省察)까지 유미(幽微)한 데를 출입하여 광대하고 충만하게 토론하셨는데, 그 말이 다 적을 만하다. 무릇 연석(筵席)에 있는 신하들이 자신이 회금점슬(回琴點瑟) 사이에 있는 듯이 황홀하여 간사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함께 일어서서 경례하고 말하기를, ‘인재를 만드는 데에는 강설(講說)이 중대하다는 것은 수사염락(洙泗濂洛)에서 보아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거조(擧措)가 관감(觀感)을 감화시키는 것이 워낙 적지 않습니다마는, 정제(定制)가 없이 백성을 스스로 감화하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이라도 할 수 없으니, 정제할 것을 감히 청합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사유(師儒)의 장(長)이 국자생과 함께 한 달에 세 번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회(講會)하되 장구(章句)만 이어 가지 말고 이의(理義)를 숭상하라.’ 하셨다.
37년 신사(辛巳) 동11월(冬十一月)에 명하여 연여(輦輿)에 금을 쓰던 것을 모두 구리로 바꾸게 하셨다. 12월에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의 예악(禮樂)·문물(文物)이 중국에 견주게 된 것은 다 기성(箕聖)이 끼친 은택이다. 특별히 중신(重臣)을 보내어 기성묘(箕聖墓)에 치제(致祭)하라.’ 하셨다. 곧 명하여 곤수(閫帥)에 대한 결장(決杖)도 시종(侍從)의 예(例)와 같이 속(贖)으로 논하게 하셨다.
38년 임오(壬午) 하4월(夏四月)에 경조(京兆)·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다른 성(姓)을 가칭하여 성으로 삼은 자가 각각 스스로 고하게 하시어, 모두 60여 인이 죄다 제 성을 회복하였다.
동10월(冬十月)에 안집사(安集使)를 보내어 경기·삼남(三南)의 백성을 안집하게 하셨다. 남한(南漢)·북한(北漢)·강도(江都)의 어공미(御供米)를 폐지하였다.
39년 계미(癸未)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뭇 신하의 진하(陳賀)를 받으셨는데, 성수(聖壽)가 칠순(七旬)이기 때문이다. 곧 연화문(延和門)에서 조참(朝參)하고 육전(六典)에 따라 육관(六官)에 신칙하기를, ‘어떻게 사람을 등용하는가?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없애야 한다. 어떻게 수령(守令)을 의망(擬望)하는가?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야 한다. 아! 이방 승지(吏房承旨)는 이조(吏曹)에 신칙하라. 호구(戶口)가 문란하니 바로잡아야 한다. 생민(生民)이 위험에 처하였으니 구제해야 한다. 국저(國儲)가 갈진(竭盡)하였으니 절약해야 한다. 아! 호방 승지(戶房承旨)는 호조(戶曹)에 신칙하라. 제사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면 신명을 감동시킬 수 없고 예(禮)를 행하여도 질서를 잃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아! 예방 승지(禮房承旨)는 예조(禮曹)에 신칙하라. 융정(戎政)이 허술한 것은 책임이 사마(司馬)에 있고 무부(武夫)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 것은 허물이 서전(西銓)에 있다. 아! 병방 승지(兵房承旨)는 병조(兵曹)에 신칙하라. 옥에 갇힌 자의 모습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니 천화(天和)를 손상하는 것이 많다. 문안(文案)을 상세히 살피면 대저 어찌 반드시 죽어야 할 자 중에서도 살릴 길을 찾을 수 없겠는가? 아! 형방 승지(刑房承旨)는 형조(刑曹)에 신칙하라. 공장(工匠)도 백성인데, 근심하고 조석(朝夕)도 보전하지 못한다. 수부(水部)는 한가한 관직이라 말고 제 직무를 닦으라. 아! 공방 승지(工房承旨)는 공조(工曹)에 신칙하라.’ 하셨다.
3월에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굶주린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4백 53명임을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 허물이다.’ 하고, 사흘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하교하기를, ‘예전에 송 인종(宋仁宗)이 귀비(貴妃)의 수식(首飾)이 다 구슬임을 보고 머리에 가득히 흰 것이 어지럽다는 말을 하였는데, 귀비가 황공하여 구슬을 제거하니, 인종이 크게 기뻐하여 모란꽃을 잘라서 내렸다. 며칠 안가서 경사(京師)의 구슬 값이 천해졌으니,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뜨는 것이 대개 이처럼 빠르다. 그러나 나는 번상(蕃商)이 구슬을 사서 저자에 파는 것이 사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그 말단을 다스리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명하여 왜관(倭館)에서 구슬을 사는 자는 잠상률(潛商律)로 논하게 하셨다.
40년 갑신(甲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인일제(人日製)168) 를 설행(設行)하여 친히 선비들을 책시(策試)하셨는데, 대책(對策)한 것에 절직(切直)한 말이 없었다. 왕께서 하교하기를, ‘까마귀·소리개가 알을 깨면 봉황(鳳凰)이 오지 않는다. 이는 반드시 이현필(李顯弼)의 일 때문일 것이다.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대강 듣건대 단주(丹朱)169) 와 같지 말라는 말을 우(禹)가 경계하고 순(舜)이 받아들였고, 겉으로 인의(仁義)를 베푼다는 말을 급암(汲黯)이 말하고 한 무제(漢武帝)가 받아들였다 한다. 어찌 이현필 한 사람에게만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겠는가? 그 마음씀이 바르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청함에 따라 처분하였으나, 사기(士氣)가 꺾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늘그막에 이르러 어찌 후손에게 우족(優足)한 도리를 끼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현필에게 직첩(職牒)을 도로 주고 서용(敍用)하라.’ 하셨다.
2월에 왕께서 종친(宗親)·문무관(文武官)으로 나이가 일흔 이상인 사람과 함께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다. 이튿날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사(享祀)하셨다. 제사를 마치고서 남은 정성이 그치지 않아서 제단 앞에 노복(露伏)하셨는데, 날이 밝기에 이르러 백기(白氣)가 황악(黃幄) 위에 퍼져 걸치니, 보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하4월(夏四月)에 중외(中外)의 무복(巫卜)·잡술(雜術)을 금하였다.
5월에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동10월(冬十月)에 사대부에게 친영례(親迎禮)를 신칙하셨는데, 《시경》 제풍(齊風)을 강독하고 느낌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41년 을유(乙酉)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의 성경대(省耕臺)에 이르러 성경하고 경기 백성의 종량(種糧)을 도와 주셨다. 3월에 왕께서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향사하셨다. 철찬(撤饌)하고 나서 신하들에게 말씀하기를, ‘아헌(亞獻)하고서 기운이 더욱 맑아지는 것이 거의 신명의 도움 같았다.’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친히 약제(禴祭)를 지내셨다.
추9월(秋九月)에 왕께서 명하여 고려 왕릉의 금표(禁標)에 관한 수교(受敎)를 인쇄하여 다섯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고 개성(開城)·강화(江華)·경기 감영(京畿監營)에 반포하여 백성의 경작·매장을 금하되 범하는 자는 지방관(地方官)도 아울러 죄를 처단하게 하셨다.
43년 정해(丁亥) 춘2월(春二月)에 왕께서 세손(世孫)과 함께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셨다. 하루 전에 선농(先農)에게 제사할 때 왕께서 초헌(初獻)하시고 세손이 아헌(亞獻)하셨으며, 이날 왕께서 다섯 번 쟁기를 미시고 세손께서 일곱 번 미셨다. 왕비께서도 빈어(嬪御)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의 채상단(採桑壇)에서 친잠(親蠶)하셨다.
3월에 전주(全州)에 불이 나서 2천 3백여 호를 연소(延燒)하였는데, 명하여 쌀 2천 3백여 석을 주고 결전(結錢) 1만 냥을 빌려 주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정부(政府)·후원(喉院)·팔도(八道)·양도(兩都)에 고치를 나누어 내리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45년 기축(己丑)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적전(籍田)에 거둥하여 관예(觀刈)하시고 회란(回鑾)하여 이튿날 국자생(國子生)을 불러 《숙야잠(夙夜箴)》을 외어 스스로 경계하셨다. 며칠 뒤에 친히 밀을 받으셨다.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두곡(斗斛)·권형(權衡)을 동일히 하게 하셨다.
46년 경인(庚寅) 춘정월(春正月)에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게 하셨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은 금궤(金櫃)에 담고 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보관한 것이 있으나 이 밖에는 증거할 것이 없으므로 무릇 조종(祖宗)의 예악(禮樂)·문물(文物)은 노사(老師)·숙유(宿儒)도 혹 그 연혁(沿革)을 모르고 육관(六官)·서직(庶職)은 다 서리(胥吏)의 전설(傳說)에 의지하므로 뒹굴고 잘못되어 점점 그 옛것을 잃어 갔다. 그래서 왕께서 이 글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는데, 편목(篇目)은 모두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대로 하되 개괄(槪括)을 조금 더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의거하여 살피는 데에 이 글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하4월(夏四月)에 측우기(測雨器)를 나누어 내리셨다. 왕께서 세종(世宗) 때의 측우기의 제도를 얻어 탁지(度支)에 명하여 만들어서 두 대궐과 운관(雲觀)에 두고 또 양도(兩都)·팔도(八道)에 나누어 보내어 비가 내릴 때마다 치수를 보고하게 하셨는데, 《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6월에 주부군(州府郡)의 학교에 문묘(文廟)의 위차(位次)대로 육현(六賢)을 같이 배향(配享)하게 하셨는데, 학교고(學校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포청(捕廳)의 난장형(亂杖刑)을 영구히 없애게 하셨는데, 형고(刑考)를 편찬함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세손과 함께 홍문관(弘文館)에 거둥하여 강학(講學)하고 선찬(宣饌)하셨다.
47년 신묘(辛卯) 동10월(冬十月)에 전주(全州)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웠다. 처음에 일곱 도(道)의 선비 이득리(李得履) 등이 상소하여 국조(國朝)의 시조인 신라 사공(司空)의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왕께서 종백(宗伯)에게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는데, 의논이 같지 않았다. 다시 정신(廷臣)을 불러 물으셨는데, 정신이 다 대답하지 못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禮)는 인정에서 말미암거니와, 이제 조선은 사대부도 오히려 시조를 존경하여 그 예를 차리는데, 더구나 나라의 시조이겠는가? 고구려·신라도 다 시조묘(始祖廟)가 있거니와, 예에는 본디 풍속과 의리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 있다.’ 하셨다. 그래서 유사(有司)를 보내어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세손에게 명하여 사판(祠版)을 쓰게 하고 선공(先公)이라 칭하였다. 자정전(資政殿)에 봉안하는 날 곤면(袞冕)을 갖추고서 전배(展拜)하고 대신·종백에게 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고서 사당에 이르러 봉안하게 하셨다. 호남(湖南) 열 한 고을의 결전(結錢)·선무포(選武布)와 구포(舊逋)를 감면하고 경기·호서(湖西)의 연(輦)이 지나는 고을도 이와 같이 하였다.
48년 임진(壬辰)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편전(便殿)에서 국자생을 소견하고 선찬(宣饌)하였다.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고 경외(京外)의 백성 가운데 가난하여 혼인을 못하거나 매장을 못한 사람들은 관아에서 혼인 비용과 장례 비용을 주게 하셨다.
3월(三月)에 왕께서 명나라 사람의 후손과 선조 임진년에 사절(死節)한 사람의 후손을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 옛터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셨는데, 재조(再造)의 갑자(甲子)를 거듭 만났기 때문이다.
동10월(冬十月)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존호(尊號)를 소휴 연경 돈덕 수성(昭休衍慶敦德綏成) 이라 가상(加上)하고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의 존호를 희인(禧仁) 이라 가상하였는데, 공덕(功德)이 세실(世室)에 들어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곧 왕의 존호를 대성 광운 개태 기영(大成廣運開泰基永) 이라 가상하고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존호를 공익(恭翼) 이라 가상하고 왕비 김씨의 존호를 예순(睿順) 이라 올렸는데, 뭇 신하가 청한 것이다.
49년 계사(癸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세손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는데, 성수(聖壽)가 80이고 즉위하신 지 50년이 되기 때문이다. 신문고(申聞鼓)를 건명문(建明門)에 걸고 원통한 마음을 품은 백성이 북을 쳐서 아뢰게 하셨다.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셨다.
2월에 양로연(養老宴)을 행하였는데, 세손이 청한 것이다.
하6월(夏六月)에 개천(開川)을 돌로 쌓았다. 이에 앞서 개천 바닥을 쳐 낼 때에 양 언덕이 장마에 무너져 개천을 막을 것을 염려하여 버드나무를 심어서 막았으나 그래도 아주 튼튼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명하여 돌로 둑을 쌓게 하시니, 튼튼하고 정밀하여 엄연히 왕거(王居)의 체세(體勢)를 이루었다. 공역이 끝나고서 왕께서 세손과 함께 광통교(廣通橋)에 나아가셨는데, 세손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뜻이 있는 자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무릇 유위(有爲)하려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하니 이를 힘쓰라.’ 하셨다.
50년 갑오(甲午)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근정전(勤政殿) 터에 나아가 등준시(登俊試)170) 를 행하셨는데, 국초(國初)의 고사(故事)를 행한 것이다. 3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노비법(奴婢法)은 기성(箕聖)에게서 비롯하였으나, 기성은 이것을 설치하여 절도(竊盜)를 막았을 뿐이다. 어찌 대대로 자손이 길이 노비가 되게 하였겠는가? 또 더구나 공물·부역·조세의 법은 남자에게는 역(役)이 있으나 여자에게는 역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노비를 아울러 역을 매기니, 매우 부당하다. 이 뒤로는 비공(婢貢)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죄다 폐지하라. 그 경상(經常) 비용으로 가져다 주는 것은 비국(備局)·혜국(惠局)이 상의하여 아뢰라.’ 하셨다. 이에 앞서 31년에 왕께서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노비가 혼취(婚娶)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명색을 죄다 폐지하려 하셨으나 경상 비용을 충당할 길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다만 노공(奴貢)을 한 필 줄이고 비공을 반 필 줄이라고 명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 비공(公私婢貢)을 죄다 폐지하고 그 경상 비용은 적곡(糴穀)으로 대충하게 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에 거둥하여 친히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講讀)하셨는데, 세손이 시강(侍講)하였고 옥당과 춘방에 선찬(宣饌)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가물었는데, 관원을 보내어 기우(祈雨)하고 열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고 구언(求言)하고 옥을 열어 죄수를 석방하시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숭정전(崇政殿)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그해 전조(田租)의 반을 감면하고 아홉 곳의 영선(營繕)을 철폐하고 공시(貢市) 백성이 바치는 것을 감면하고 나이 여든 이상인 사서(士庶)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셨다. 곧 세손과 함께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하여 기사(耆社)의 신하와 나이 여든 이상인 동민(洞民)에게 차등을 두어 비단을 내리셨다.
51년 을미(乙未)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조강(朝講)·조참(朝參)을 행하셨는데,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시사(視事)·강학(講學)은 임금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하루 이틀에 만 가지 일을 보살핀다 하였다. 내가 계사년171) 조강·조참의 일을 생각하면 억지로 일어나 연석(筵席)에 나아가도 강서(講書)할 때가 되면 이미 말소리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일을 다시 하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병환이 있어 편찮으셨다.
12월에 왕세손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청(代聽)하게 하셨다. 이때 왕께서 앉아 있지 못하시고 앉으면 반드시 세손을 시켜 부축하게 하고 보아도 사물을 가리지 못하시므로 세손이 늘 옆에서 고하였다. 이 때문에 태의(太醫)가 밤낮으로 떠나지 않고 약원 제조(藥院提調)가 새벽에 들어와 세 번 탕제(湯劑)를 바치고 저녁이 되어야 돌아가는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겨울이 되면 숨이 더욱 막히고 담(痰)이 오르내려 마지않았다. 일찍이 상참을 행할 것을 명하여 이미 갖추게 하였는데, 세손이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내 잠꼬대 같은 말이나, 이미 명하였으니 그 말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좌우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고 나가시어 자리에 오르려 하시다가 기(氣)가 어지러워 대내(大內)로 돌아가셨는데,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너에게 대청시키려 한 지 오래 되었다. 사전(祀典)을 대행해야 할 조짐이다.’ 하고, 또 이제부터 잠꼬대 같은 말은 네가 선포하지 말도록 하라고 경계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교하기를, ‘오늘 진하(陳賀) 때에는 백관이 집경당(集慶堂)에 들어와 예를 행하라.’ 하셨다. 이때 이미 밤 5고(五鼓)이었는데, 중관(中官)이 정원(政院)에 전하였다.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좌의정(左議政)이었는데 반드시 임금의 분부를 선포하려 하므로, 세손께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홍인한에게 말하기를, ‘날이 밝아 담(痰)이 내리기를 기다려서 이 분부를 반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나, 홍인한이 끝내 듣지 않고 마침내 밤에 백관을 재촉하여 모이게 하였으므로 서울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좌우가 이 일을 고하니, 왕께서 탄식하고 말씀하기를, ‘백성이 다들 나를 늙어서 정신이 어지러운 임금으로 여길 것이다.’ 하셨다. 그래서 세손에게 품신(稟申)하지 않았다 하여 중관을 죄주고 이어서 명하여 예를 행하고 백관을 파하여 보내게 하셨다. 이때부터 왕께서 더욱 대청시킬 뜻을 결정하여 세손의 손을 잡고 말씀하기를, ‘내가 너에게 선위(禪位)하려 하는데, 나는 자의(紫衣)를 입고 너에게 임하고 너는 홍의(紅衣)를 입고서 나를 섬기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네 마음을 상하게 할세라 염려하여 차선을 생각하여 너에게 대청시키려 하는데, 대청하면 반드시 대조(大朝)께 여쭈어야 하므로 도리어 더욱 번거로울 것이니, 나는 대청에 따라 나라의 일을 너에게 죄다 맡기려 한다.’ 하셨다.
이때에 적신 정후겸(鄭厚謙)이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후사가 된 양자로서 그 어머니와 함께 용사(用事)하여 매우 세력을 부렸는데,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서 바라는 것이 적지 않았으나, 그러나 세손께서 늘 그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지식이 없는 것을 더럽게 여겨 낯빛이나 말씀을 너그럽게 하신 적이 없으므로 홍인한이 불만하고 원망하여, 드디어 정후겸 모자에게 붙어서 꾀하여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고 돌아와서는 또 후원을 받아서 입상(入相)하였다. 이 세 사람은 세손께서 영명(英明)하시어 뒷날 헤아릴 수 없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홍지해(洪趾海)·윤양후(尹養厚) 등과 맺어 사우(死友)가 되어 밤낮으로 비어(蜚語)를 만들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고, 또 홍지해를 끌어들여 함께 힘을 합하려고 하였다. 왕께서 환후가 심한 때를 타서 여러 번 홍지해를 정승으로 천거하였으나, 왕께서 그때마다 답하지 않으시고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좌상(左相)은 반드시 홍지해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고 윤태연(尹泰淵)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아야 마음에 쾌할 것이다.’ 하고, 곧 또 말씀하기를, ‘세상에 어찌 정승이 청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셨다. 홍인한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윤양후 및 정후겸 모자와 함께 꾀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고 세손의 궁료(宮僚)인 홍국영(洪國榮)이 목숨 걸고 지키고 떠나지 않으며 정민시(鄭民始)와 함께 늘 보좌하는 것을 꺼려서 여러 번 홍국영 등을 세손께 참소(讒訴)하여 그 세력을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세손께서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을 불러 대청시킬 뜻을 이르셨는데, 홍인한이 앞장서서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조(我朝)에서 대청이 전후에 잇달아 있었던 것은 노고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 아니라 저이(儲貳)가 나라의 일을 밝게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노론(老論)·소론(少論)도 알아야 할 것이고 이판(吏判)·병판(兵判)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셨는데, 홍인한이 분노를 낯빛에 나타내며 말하기를, ‘동궁(東宮)께서 이판·병판을 아실 것 없고 노론·소론을 아실 것 없고 또 나라의 일을 아실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 왕께서 답답하여 스스로 떨치지 못하고 다만 한숨쉬고 문지방을 두드리며 말씀하기를, ‘경들은 물러가라.’ 하시매, 대신들이 물러가려 하였다. 그런데 왕께서 오히려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여 다시 불러들여 말씀하기를, ‘내 병이 이렇거니와, 그 중에서도 담이 오르고 헛소리가 나는 것이 급한데 혹 한밤에 촌지(寸紙)를 내어 경들을 부르더라도 내가 영상(領相)·좌상(左相)이 어느 사람인지 가리지 못한다면 나라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경들과 이 일을 논할 만하지 못하니, 차라리 내 심법(心法)을 동궁에게 전하겠다.’ 하고, 이어서 동궁에게 명하여 《자성편(自省編)》·《경세문답(警世問答)》을 강독하게 하셨다. 대신이 물러가니, 왕께서 또 문지방을 두드리며 말씀하기를, ‘대신이 이러하니 조정의 일이 될 수 없다. 종사(宗社)와 백성을 어찌하는가?’ 하셨다.
열흘 뒤에 왕께서 명하여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세손에게 기대어 앉았다가 조금 뒤에 병환이 발작하여 도로 누우셨다. 대신을 불러 큰 소리로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을 꾸짖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대청하라는 분부를 써서 내리게 하셨는데, 홍인한이 몸으로 승지를 가려 왕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는 또 말하기를, ‘신하로서 누가 감히 이 분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께서 노하여 꾸짖고 말씀하기를, ‘경들은 빨리 물러가라.’ 하셨다. 물러가니, 왕께서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순감군(巡監軍)은 동궁에 들어가 점하(點下)하고 이비(吏批)172) ·병비(兵批)173) 는 여쭌 뒤에 동궁에 들어가 점하하라.’ 하셨다. 그래서 홍인한이 다시 대신들에 앞장서서 구대(求對)하여 성명(成命)을 거두시기를 청하니, 왕께서 경묘(景廟)께서 ‘좌우가 가하겠는가 세제(世弟)가 가하겠는가?’ 하신 비답(批答)을 외고 말씀하기를, ‘내가 근자에 눈이 어두워 정망(政望)에 낙점(落點)하지 못하므로 중관(中官)이 대신하여 부표(付標)하는데, 만일 중관이 내 명을 전도(顚倒)시키더라도 내가 어떻게 깨닫겠는가? 차라리 내 손자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겠다.’ 하셨다. 영의정(領議政)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니 지금의 중관에게는 틀림없이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다시 한숨쉬며 말씀하기를, ‘장차 내 손자에게 대내(大內)에서 대로(代勞)시키겠다.’ 하셨는데, 홍인한이 다시 말을 늦추어 ‘대내의 일은 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왕께서 중관에게 명하여 계보(啓寶)를 동궁에게 보내게 하셨는데, 세손께서 눈물을 흘리며 굳이 사양하기를, ‘계보가 어찌 조정의 신하와 나라 사람이 모르게 주고받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 기운은 네가 아는 바이다. 저 대신과 다투기 어려우므로 이런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니, 내가 너에게 내밀히 주더라도 후세에 어찌 그르게 여길 자가 있겠는가? 시상(時相)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내가 네 뜻을 밝히겠다.’ 하고, 드디어 승전색(承傳色)에게 명하여 정원에 전하기를, ‘충자(沖子)가 상소하면 두 자의 분부를 내리겠다.’ 하셨는데, 두 자는 ‘선위(禪位)’를 가리킨 것이다. 이 때문에 세손께서 감히 상소하지 못하셨으나, 성후(聖候)가 이때부터 더욱 심해지고 대청하는 일은 바야흐로 미결된 가운데에 있는데, 홍인한과 정후겸 모자가 안팎으로 방해하여 온갖 계책을 써서 종사의 위망(危亡)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닥쳐 있었다. 그러므로 홍국영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정민시와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여 토죄(討罪)를 청하려 하였으나 세손께서 옳지 않게 여겨 힘써 말리셨다.
전 참판(參判)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 기무(機務)가 번거로운 것은 요양에 방해되므로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오늘의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20일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말하기를, 「동궁께서 알 것 없습니다.」 하였으니, 대저 저군(儲君)이 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까?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지극합니다. 상참(常參) 때에는 전 영상 한익모가 또 말하기를, 「좌우는 근심할 것이 못된다.」 하였으니, 대저 자신이 수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내시에게 질언(質言)한 일이 옛 대신에게도 있었습니까? 홍인한이 「대내에서 하시는 일이므로 신은 쟁집(爭執)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뢴 것으로 말하면 놀랍고 해괴하기가 더욱 막심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대사를 위하여 어떠한 것이기에 궁위(宮衛) 안에서 비밀히 하고 심엄(深嚴)한 가운데에서 행하여 만백성이 알 수 없고 팔방에서 듣지 못하게 합니까? 전하의 오늘의 거조(擧措)는 밝고 바르며 뜻이 커서 천고에 뛰어난 것인데, 모두가 쳐다보는 직위에 있는 자가 겉치레로 여기고 오로지 미봉을 일삼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명명(明命)을 내려 대신의 죄를 빨리 바루게 하소서.’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니, 왕께서 서명선을 불러 온 몸이 혈성(血誠)으로 찼다고 칭찬하고 두 자급(資級)을 올리셨다. 이 일은 《명의록(明義錄)》에 실려 있다.
그래서 왕께서 세손에게 명하여 서정(庶政)을 대청(代聽)하게 하고 조참(朝參) 때에 법가(法駕)를 쓰고 의장(儀仗)에 수정장(水晶仗)·금부월(金斧鉞)을 설치하고 수하(受賀) 때에는 백관이 조복(朝服)으로 예를 행하고 헌가(軒架)를 아울러 연주하였다.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할 때에는 전정(殿庭)에서부터 여(輿)를 타고 거가(車駕)가 성밖으로 나갈 때에는 훈련(訓鍊)·금위(禁衛)·어영(御營)의 군사가 수여(隨輿)하고 무릇 찬배(竄配) 이하는 여쭙지 않고 결단하게 하셨는데, 다 특교(特敎)이었다. 세손께서 세 번 상소하여 사양하셨는데, 왕께서 누누이 위유(慰諭)하셨다. 여드레가 지나서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였다. 왕께서 부축받아 경현당(景賢堂)에 이르러 세손과 함께 진하(陳賀)를 받으셨는데 매우 즐거워하셨다. 공시인(貢市人)의 요역(徭役)을 감면하고 사민(四民)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내리셨다.
얼마 안가서 적신(賊臣) 심상운(沈翔雲)이 소조(小朝)에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를 명목 삼아 교묘히 계략을 펴서 궁료(宮僚)를 배척하였는데, 온실수(溫室樹)174) 라는 말이 있었다. 서명선(徐命善)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에 ‘궁료한테서 들으니 세손께서 세 가지를 알 것 없다는 말 때문에 상소하여 인의(引義)하려 하신다 합니다.’ 한 것이 있으므로 심상운이 궁위(宮衛)의 말과 글을 누설한 것으로 홍국영(洪國榮) 등의 죄를 만들어 일망 타진할 계책을 부리려 한 것이다. 심상운은 본디 심사순(沈師淳)의 후사로 들어간 양자인 심일진(沈一鎭)의 아들인데, 심사순은 또 심익창(沈益昌)의 손자로서 심정보(沈廷輔)의 후사로 들어간 자이다. 심익창은 일찍이 역환(逆宦) 박상검(朴尙儉)의 숙사(塾師)이었고 신축년175) ·임인년176) 에는 김일경(金一鏡)·윤취상(尹就商)과 밤낮으로 박상검의 집에 모여 궁금(宮禁)과 교통하는 일을 참여하여 들었는데, 박상검이 역모(逆謀)하다가 일이 발각되고 옥사(獄詞)가 심익창에게 관련되니, 여러 번 고문받고 석방되어 금고(禁錮)되어 있다가 죽었다. 심상운의 아우 심익운(沈翼雲)은 등제(登第)하였으나 심익창에 연좌되어 오래 등용되지 못하였다. 심상운이 이것을 근심하여 이미 죽은 아비 심일진을 심사순에게서 파양(罷養)하고 또 이미 죽은 할아비 심사순을 심정보에게서 파양하여 곧바로 심일진의 아비를 심정보에게 이으니, 무릇 두 세대가 두 번 그 아비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청의(淸議)가 더욱 침뱉고 더럽게 여기니, 심상운이 드디어 정후겸에게 아부하여 곡진히 섬기고 삼갔다. 이때에 이르러 정후겸·홍인한(洪麟漢) 등이 그 일이 드러난 것을 보고 윤 양후와 함께 심상운을 불러다가 신축년·임인년의 유봉휘(柳鳳輝)와 같은 흉악한 마음을 부려 먼저 궁료의 죄안을 꾸며 큰 옥사(獄事)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세손께서 그 정상을 살펴 알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일이 충역(忠逆)에 관계되니 흐릿하게 미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판부사(判府事) 김양택(金陽澤)이 왕께 갖추어 아뢰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역적 놈의 손자가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명하여 고문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셨다. 이윽고 명하여 심상운의 형제를 영구히 서민(庶民)으로 삼게 하셨다.
52년 병신(丙申) 춘정월(春正月)에 왕의 존호(尊號)를 요명 순철 건건 곤녕(堯明舜哲乾健坤寧) 이라 가상(加上)하고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존호를 인휘(仁徽)라 가상하고 왕비 김씨(金氏)의 존호를 성철(聖哲) 이라 가상하였다.
3월에 왕께서 병환이 위독하므로 세손께서 관원을 보내어 묘사(廟社)·산천에 두루 기도하게 하셨다. 곧 고명(顧命)하여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고 초닷샛날 묘시(卯時)에 왕께서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시니, 수는 여든셋이고 재위는 52년이다. 하인(下人)·노소(老少)가 궐하(闕下)에서 분주하여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조사(朝士)·부녀가 각각 그 집에서 곡(哭)하여 소리가 거리를 진동하고, 먼 시골에서도 상(喪)을 들은 날에 남녀 노소가 다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사모하듯 하였다. 뭇 신하가 왕의 덕행(德行)과 공업(功業)을 의논하여 익문 선무 희경 현효(翼文宣武熙敬顯孝)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 이라 하였다.
이해 7월 27일에 원릉(元陵) 해좌(亥坐)인 언덕에 장사하니, 곧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산등성이다. 이에 앞서 기해년177) 효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김수흥(金壽興) 등이 효종을 받들어 여기에 장사하였는데, 찬술(撰述)한 것이 다 장려(壯麗)하고 명수(明秀)하기가 건원릉과 같으나 도리어 더 낫다고 말하였다. 현종 계축년178) 에 물이 병석(屛石)에서 스며 나옴으로써 이의(異議)가 있어서 구릉(舊陵)을 열었는데, 조화(調和)로움을 보고는 중신(重臣) 민정중(閔鼎重)이 몸소 구릉을 봉축(封築)할 때에 일을 돕는 자에게 경계하기를, ‘잘 닦으라. 뒤에 반드시 다시 국릉(國陵)이 될 것이다.’ 하였다. 경종의 대상(大喪)에 이르러서야 왕께서 경종을 여기에 모시기를 매우 바라셨으나, 김일경(金一鏡)이 이때 산릉 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어 국조(國朝)에서는 옮긴 곳을 능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왕의 능이 되었으니, 아! 어찌 우연이겠는가?
왕께서는 영명(英明)하기가 뛰어나시어 모든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을 얻으셨으니, 효(孝)·경(敬)·근(勤)·검(儉)·공(公)·서(恕)가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이다. 왕께서는 어려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다. 바야흐로 5세 때에 손수 금원(禁苑)의 온갖 꽃을 따서 술을 만들어 후(后)께 바치시니, 후께서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효제(孝悌)는 본디 타고나는 것이거니와, 어찌 그리 숙성한가?’ 하셨다. 숙묘(肅廟)께서 편찮으신 7년 동안에 좌우에서 돕고 구원하는 일을 왕께서 친히 하고 밤에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 같으니, 숙묘께서 늘 말씀하기를, ‘기특한 아이다. 어찌 잠이 없는가?’ 하셨다.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섬기신 것은 등극(登極)하고 기사(耆社)에 들어가신 뒤일지라도 늘 왕자(王子)이었을 때와 같으셨다. 나아가 뵐 때마다 공수(拱手)하고 질추(疾趨)하며, 시좌(侍坐)하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물음이 있으면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 답하며, 물건을 갖추어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기지 않으셨다. 국구(國舅)인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집에도 매우 넉넉하게 물건을 보내어 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되 또한 조정(朝政)에는 간여하지 않게 하시니, 인원 왕후께서 늘 말씀하기를, ‘누가 주상을 내 소생이 아니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셨다. 경묘(景廟)를 섬기신 것도 숙묘를 섬기신 것과 같고 선의 왕후(宣懿王后)를 섬기신 것도 인원 왕후를 섬기신 것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형제 사이인지 수숙(嫂叔) 사이인지 알 수 없을 만하였다. 크고 작은 향사(享祀)에는 반드시 친히 나아가고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극진하여 신명이 양양(洋洋)히 위에 임하신 듯하셨다.
선원전(璿源殿)이 궁중에 있으므로 절제(節祭)·탄일제(誕日祭)·기일제(忌日祭)가 있으면 왕께서 으레 몸소 제물을 살피고 선부(膳婦)를 경계하여 정결을 극진히 하게 하셨다. 선조(先朝)에서 즐기시던 햇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전(殿)에 바치고서야 드셨는데, 찬선(饌膳)을 맡은 자가 일찍이 송이[松栮]를 바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바쳤는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때가 아직 일러서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직 바치지 않고서 내가 먹게 하는 것은 내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니, 너를 어찌 꾸짖겠는가?’ 하고 물리치고 들지 않으셨다. 춘추가 매우 높아져서도 선왕(先王)·선후(先后)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소식(素食)하고 재거(齋居)하며 탕약(湯藥)까지도 드시지 않았다. 향사는 몸소 하지 못하더라도 제삿날에는 반드시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새벽까지 중정(中庭)에서 노복(露伏)하였다가 제사가 끝난 것을 듣고서야 그치셨다. 만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겨 계셨는데, 궁의 북쪽에 있는 영취정(暎翠亭)이 육상궁(毓祥宮)과 아주 가까웠다. 왕께서 아침과 저녁마다 소여(小輿)를 타고 이르러 사당을 바라보고 노복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갈음하고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셨는데, 한추위와 한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으셨다. 일찍이 꿈에서 숙묘를 모셨는데, 숙묘께서 간지(簡紙)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으나 미처 드리기 전에 깼으므로 이때부터 다시는 간지에 글을 쓰지 않으셨다. 춘추가 높고 병환이 깊어졌을 때에도 늘 《시경(詩經)》의 육아(蓼莪)·척호(陟岵)의 시(詩)를 외시고 외고 나면 목이 메어 눈물이 줄줄 흐르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효성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일념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이에 ‘천(天)’ 자가 있으면 손으로 스스로 깨끗이 씻고 남이 밟고 무엄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다. 보통 대화 때에도 말이 하늘에 미치면 반드시 존경을 더하고 말씀하기를,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신하는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다스리니, 임금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하셨다.
재이(災異)를 당하면 정성을 다하여 경계하고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自責)하셨다. 경인년179) 봄 객성(客星)이 나타났을 때에 왕께서 밤에 편집신(編輯臣)과 운관 사력(雲觀司曆)을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고 저녁마다 월대(月臺)에서 측후(測候)하고 말씀하기를,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옮기지 말기 바란다.’ 하셨다. 이렇게 사흘 동안 하시니 객성이 사라졌다. 혹 바람이 사납거나 비가 심하면 밤이라도 반드시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으시며 때때로 혼자 말씀하기를, ‘내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하늘의 경고가 이러한가?’ 하고, 잠을 못 이루고 근심하며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리셨다. 날이 가물어 비를 빌 때에는 대행시킨 적이 없고 친히 규(圭)를 잡아 정성이 반드시 감통되게 하려 하셨다. 그러므로 임자년180) 이후로는 거의 친히 비시지 않은 해가 없었고 비시면 으레 비를 내렸으므로 큰 풍년이 들었으니, 사책(史冊)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관원을 보내어 대행시키셨으나 또한 반드시 궐정(闕庭)에서 노복(露伏)하여 비가 내린 다음이라야 비로소 연침(燕寢)으로 돌아가셨고, 혹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옷을 벗고 맹렬한 볕을 쬐며 말씀하기를, ‘어찌 내 몸을 태우지 않겠는가?’ 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경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이미 한추위와 한더위 때에 강일(講日)을 늘리고 낮에는 반드시 해질 때까지 계속하고 밤에는 문득 새벽 종이 울 때까지 계속하고 능행(陵幸)·친경(親耕)하신 뒤에도 피로하여 게을리하거나 그만두지 않으셨다. 바야흐로 춘추가 칠순이 되어서도 삼복(三伏) 날에 아침·낮·저녁 세 번의 강석(講席)을 열어 토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요양하실 때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 글자를 가리지 못하셔도 친히 《소학》·《대학》을 외어 강독하고 한 달에 여섯 번 소대(召對)하여 신하를 만나고 국사(國事)를 재결하며 크고 작은 일을 버려 두지 않으셨다. 혹 묘모(廟謨)가 적으면 조용히 민간의 고통과 궁부(宮府)의 고사(故事)를 논하시어, 소대가 파하고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도 시인(寺人)이 다시 당(堂)에 촛불을 붙이게 하셨다. 그리고 승지(承旨)가 장소(章疏)·계장(啓狀)을 가지고 들어오면 왕께 아뢰는 말을 듣고 판비(判批)를 불러 줌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으며, 물러갈 때에는 야루(夜漏)가 4고(四鼓)·5고를 알렸으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부지런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성품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온갖 완호(玩好)에 욕심이 없으셨다. 보위(寶位)에 오르셔서는 거친 베 옷을 입고 흰 베 관을 써서 풍속을 바꾸려 하셨다. 거처하시는 궁궐의 벗겨진 벽 칠과 이지러진 창영(窓楹)과 해진 보연(黼筵)·포석(鋪席)을 해가 지나도 고치지 않아서 유사(有司)가 수리하기를 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셨다. 집경당(集慶堂)에 연거(燕居)하시되 해진 병풍 두어 개로 안팎 청마루를 가려서 소박하고 좁기가 청수(淸修)한 선비의 집만도 거의 못하였다. 일찍이 선조(先朝)의 침전(寢殿) 옆에 초가 하나를 짓고 그 안에서 글을 읽고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려 하셨으나 마침내 민력(民力)을 거듭 번거롭힌다 하여 그만두셨다. 입으시는 것 중에서 오직 곤면(袞冕)·법복(法服)은 제도를 살펴서 아름답게 하고 그 나머지 중의(中衣)·철릭[貼裏]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으신 적이 없으므로, 왕을 모시는 뭇 신하도 감히 갖옷을 껴입지 못하였다. 밤에도 이부자리를 깔지 않고 때때로 목침을 베고 곤히 주무시면 궁인(宮人)이 왕의 몸에 한기(寒氣)가 닥칠세라 염려하여 작은 이불을 덮어 드렸다. 국법에는 내선부(內膳夫)가 하루에 다섯 번 왕의 찬선(饌膳)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왕께서는 하루에 세 번 찬선을 드시고 찬선도 배불리 드신 적이 없으므로 궁중에서 드디어 낮과 밤 두 번의 찬선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풍성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하고 줄이는 것을 힘쓰신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왕께서 검소하시다고 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궁위(宮闈)에서 비롯해야 한다.’ 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환관(宦官)·궁녀(宮女)와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고례(古例)로는 파조(罷朝) 뒤에 크고 작은 공사를 혹 환관을 시켜 와내(臥內)에서 읽어 아뢰게 하였으나, 왕께서 환관이 이 때문에 국사(國事)를 몰래 익혀 조정(朝政)에 간여할세라 염려하여 밤이 깊었더라도 반드시 승지를 불러서 읽어 아뢰게 하셨다. 일찍이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는 환관 10여 인도 오히려 많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1백여 인이 넘는다. 많으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는 알라.’ 하셨다. 신하를 만나면 늘 진심을 옮기고 무릇 죄가 있으면 처음에는 견책(譴責)이 매우 엄하였더라도 서용(敍用)한 뒤에는 예전처럼 신임하여 쓰시어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신축년·임인년의 화를 당하신 끝에 당론(黨論)이 살육(殺戮)의 근본이 되고 살육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아시어 붕당을 없애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을 정치를 하는 요체로 삼았다. 바야흐로 동궁에 계실 때에 교리(校理) 조문명(趙文命)이 봉사(封事)하니, 경묘께서 삼당(三黨) 뒤에 탕평(蕩平)으로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왕께서 그 말씀에 열복(悅服)하여 마음에 새기셨다. 등극하셔서는 맨 먼저 탕평론을 주장하는 두세 신하를 발탁하셨는데, 흠잡는 말이 좌우에서 갈마들었으나, 왕께서 끝내 굽히지 않고 신임하였으며 그 중에서 지론(持論)이 세찬 자가 있으면 으레 배척하여 쓰지 않으셨다. 늘 선묘(宣廟)의 어제시(御製詩)의 ‘신하들이 오늘 이후에도 어찌 다시 동인·서인을 계속하겠느냐?’는 구(句)를 외고 말씀하기를,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다. 누가 감히 방해하겠는가?’ 하셨다. 일찍이 인원 왕후의 상을 당하셨을 때에 왕께서 글을 만들어 세신을 보전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는 계책을 극진히 말씀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효소전(孝昭殿)에 고하게 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멀리 주공(周公)이 금등(金縢)에 보관한 일을 본뜨고 가까이 조변(趙抃)이 분향하고 하늘에 고한 일을 본뜨기 위한 것이다.’ 하셨다. 이 때문에 물과 불처럼 서로 나뉘어 싸움이 잇달던 때일지라도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하고 형살(刑殺)을 없애며 50년 가까이 내려오다가, 임진년181) 에 척당(戚黨)의 일이 일어나니 왕께서 김귀주(金龜柱)를 매우 엄하게 벌하셨다.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조당(朝黨)도 오히려 세도(世道)의 근심거리가 되는데, 더구나 척당이겠는가? 금하지 않으면 앞으로 하늘에 사무치게 될 것이다. 나는 늙었으니 미처 보지 못하겠으나, 네게는 뒷날의 근심거리이다.’ 하셨다. 생각이 깊고 염려함이 깊기가 이러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평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잠저(潛邸)에 오래 계시어 여염의 어려움과 백성의 괴로움과 위항(委巷)·황야(荒野)의 아주 작은 일도 모두 두루 아셨고, 저위(儲位)를 이어받게 되어서는 경전(經傳)을 널리 강구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라는 것을 환히 아셨다. 무릇 공민(貢民)·시민(市民)·경종민(耕種民)·판상민(販商民)·군보민(軍保民)에 대하여 그 굶주리고 배부르고 춥고 따뜻한 것을 모두 상세히 살피셨으므로 감면하는 정령(政令)이 내려지지 않은 해가 없었다. 혹 유사(有司)가 경비 때문에 어려워하면 왕께서 으레 ‘어찌 기부(肌膚)를 아끼랴?’ 하신 숙종의 말씀을 외고 분부를 내려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즉위하신 50년 동안에 감면하신 것이 무려 수백만이었다. 처음에 북관(北關)의 백성 중에는 교제전(交濟錢) 때문에 처자를 팔고 목매어 죽은 자가 있었다. 마침 왕께서 어사를 보내어 안렴(按廉)하게 하셨는데, 백성이 길을 막고 울며 말하기를,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아뢰어 적자(赤子)의 뜻이 부모께 전달되게 하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어사가 그 말대로 돌아와 아뢰니, 왕께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내가 일찍이 임금이 넓고 큰 집 안에서 고운 모전(毛氈)을 깔고 옥식(玉食)을 후하게 누리되 가난한 백성 집의 정상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거니와, 어찌 우리 풍패지향(豊沛之鄕)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폐단을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고묘(高廟)에 들어갈 낯이 없을 것이다.’ 하고, 당장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다. 그 밖에 고할 데 없는 자가 왕께 호소하여 그 생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병신년182) 봄에 왕의 환후가 더욱 위급하였다. 이때에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으나, 왕께서 염려를 놓지 못하여 간절하게 이르는 꿈결의 말씀이 다 제주에 관한 일이었다. 그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듯하였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어지시다 하였다.
왕께서 이미 이 여섯 가지 덕을 갖추고서 이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세우는 상도(常道)를 삼아 성헌(成憲)을 살피고 유폐(流弊)를 고치고 서옥(庶獄)을 삼가고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셨으니, 또한 모두가 여섯 가지 덕을 상법(常法)으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춘추가 높을 때까지 보위를 누리시고 나라 안이 평안하며 신하는 대대로 그 녹(祿)을 누리고 백성은 그 이(利)를 즐겼다. 무릇 조야(朝野)에 늙은이가 태반이었는데 이 가운데 또한 1백 세를 넘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닦여져 천운(天運)이 위에서 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수(壽)를 얻고 반드시 위(位)를 얻고 반드시 녹(祿)을 얻는다.’ 하였는데, 왕께서 이에 가까우실 것이다.
왕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효장 세자(孝章世子)는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빈(嬪)으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고, 장헌 세자(莊獻世子)는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빈으로 맞았는데 실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낳으셨다. 갑신년183) 에 명하여 우리 사왕 전하를 효장 세자의 후사로 삼았고, 왕께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되실 때에 효장 세자를 진종 대왕(眞宗大王)이라 추존(追尊)하고 효순 현빈(孝純賢嬪)을 효순 왕후(孝純王后)라 추존하여 태묘에 동부(同祔)하였는데, 다 왕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이제 사왕 전하께서 신(臣)을 학문이 없다 하지 않으시고 유사(遺事)에 따라 정리하여 행장(行狀)을 만들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굴러 떨어질 듯하여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르겠으나, 혼자 가만히 듣건대, 제왕(帝王)의 대절(大節)은 오직 마땅한 사람에게 종사를 부탁하는 것일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사(虞史)가 요전(堯典)을 만들되 순(舜)에게 전위(傳位)한 일을 반복하여 상세히 말한 것이 한 편(篇) 중에 반이 되는데, 세상에서 우사를 일컬어 천고(千古)의 사신(史臣)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신은 감히 경묘께서 왕에게 오로지 맡기고 왕께서 전하에게 오로지 맡기신 것을 한 편의 위아래에 실어서 요전의 단례(斷例)를 따라 들은 바를 존중한다."
하였다.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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