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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 중 일부 발췌
시란 언어는 적으면서 사상은 큰 것
*(개인 메모)메시지,이미지, 리듬
시는 미술처럼 시각적 형태로써 어감으로써 입체미와 색채미를 표현할 수 있으면서 한편 청각에 의하여 시간적으로 연속하는 움직이는 예술이기 때문에 정지한 것까지도 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편으로.시는 음악과 같이 청각적 율동으로써 리듬과 멜로디를 어감으로 살리면서 시각에 의하여 공간적으로 병존하는 정지태의 예술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까지도 정지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조각과 고착된 음악이 있습니까. 그러나 시는 음악과 미술이 못하
는 두 기능을 가짐으로써 찰나의 움직임을 영원화하고 무한의 고요함을 찰나의 움직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 본질적 형식으로 단순미의 구성이기 때문에 '심포니같은 거대한 것은 서사시와 통하고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시 곧 '마이너 포엠'은 한폭 그 규모에 있어서 그림에다 비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형식적 본질인 단순성은 그 내용에다 단면의 전체성이라는 특질을 제약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란 장황하게 서술하는 전체가 아니라 특수한 구성으로 단순하게 결정시켜 나타내는 전체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단순미의 설계 속에서 비약하면서 연락되고 평범하면서 비범해지는 것입니다. 언어는 적으면서 사상은 더 큰 것! 이것이 시의 본도요 자랑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 모든 특질이 주관적인 것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음악에 더 가깝습니다.
시에는 모름지기 '눈'이 있어야
시 작품엔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시의 눈이 있어야 한다. 초점이라고하는 것 말이다.
돋보기를 가진 아이가 태양광선을 돋보기의 초점에 집중하여 종이를 태우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일을 시에 비긴다면, 그 돋보기의 초점에 모여 종이를 태울 만한 힘을 가진 부분은 시의 눈이고, 그 타는 종이는 말하자면 한 편의 잘된 시의 독자다. '포에지'는 그럼 늘 뜨겁게 태우는 것뿐이냐는 질문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건 그 말이 아니다. 얼음을 얼리는 빙점, 혹은 최심의 정적이 깃들인 해저와 같은 것-이런 것도 모두 포에지의 초점이다. 요컨대, 시 정신의 클라이맥스, 그것을 나는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시의 눈은 보통 그 시의 첫 부분에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인체에 있어서는 그 맨 첫 부분인 바로 머리 밑에 두 개 놓여 있지만, 한 편의 시 작품 속에서는 이렇게 되면 용두사미의 기형이 되기가 일쑤이다. 흔히는 마지막 절이거나, 아니면 마지막 절에서 가까운 전절들 속에 있게 된다.
언외의 암시력을 살려라
이미지의 정선과 아울러 또 하나 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이 언외의 묘미를 제공하는 시의 암시력의 부여다. 시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고 있는 말을 기초로 해서 구성해 내는 암시의 신기루에 아무래도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낱말사
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빈 공간이 아니라, 말보다 훨씬 더 큰 감칠맛을.갖는 암시의 매력들이라야 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시가 먼저 '주옥'이라야 한다고 해오는 것은 형식으로 잘 정리된 것이라는 뜻도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시가 이미지의 전형을 고르고, 그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언외의 암시력을 풍부히 함유해야 하는 점을 강조해 한 말로 안다.
뼈를 울리는 언어의 음색에 주목하라
아닌 게 아니라, 이 ㄴ치모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 구성이 벌써 인체 내의 골격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비모음 같은 것은 비육과 연결된 육질의 부분을 많이 울리지만, ㄴ치모음을 한번 연습 삼아 소리내보라. 이빨에서 뼈로 직결되는, 그건 마치 금은金銀의 줄을 단 현악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와 같이 우리의 골질을 두루 울리고 있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한 개의 음에 대한 친분 때문에 옛집과 옛터와 고향과 조국을 못 잊고서 되찾아 들기도 한다. "갔다가 오시오인이……” 우리가 어디로 떠날 때 우리의 골수를 울리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당부의 말들 끝에 매달린 그 '인이' 의 힘은 그렇게 큰 것이표현이다
기교체험의 창조적 표현이다
흔히 수주(변영로 시인-편자)를 기교파니 기교주의니 한다. 하지만 이 기교를 무시해선 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 기교 그 자체가 내부 세계와 유리되어도 좋은 시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내부 세계와의 완전한 결합에서 비로소 기교가 살아올 뿐 아니라 시 자체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시가 생명을 가지게 하는 것은 정신이거니와 그것을 표면으로 유도하는 것은 기교인 것이다. 하나 '기교' - 이렇게 적출하여 놓고 보면 기교 자체의 의의가 달라지는 것 같거니와 그것은 체험에서 오는 창조 작용이다.
해서 남이 이미 창조해 놓은 기교를 모방하기란 극히 쉬운 것이나, 하나 그때는 벌써 생명을 잃은 것이다. 시의 어려운 것이 이곳에 있다
은유는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시는 한 열 줄 정도 쓰는데 직유로 '하늘 같은' '바다처럼' '꽃마냥'식의 이러한 표현이 자꾸 되풀이되면 그것이 유치하고 지루하니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은유가 생겨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처럼' 이나 '마냥' 등의 이러한 표현을 안 쓰고도 될 수 있는 길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유라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상징은 시상의 깊이와 넓이에 기여한다.
상징이라는 것도 어떠한 주체를 무엇에다가 비교해서 표현하는 점에서는 비유와 공통되지만, 그러나 비유가 시각적인 색채나 형태상의 일치점을 띰으로써만 성립하는 데 반해서 상징이라는 것은 그러한 시각적인 일치점을 띠지 않아도 된다고 그(몰턴-편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는 몰턴은 「솔로몬의 아가」 5장 11절의 마지막 부분 "순금이로다"라는 구절을 제시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머리털은 까마귀의 깃이요.순금이로다" 하는 데에서 "순금이로다" 그것을 제시했어요. 몰턴은 말하기를 "까마귀의 깃이요" 하는 것은 그것이 비유로 통한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 여자는 원래 동양인이니까 머리털이 까맣고 또한 윤기가 번질번질해서 그 머리털의 아름다움이 까마귀의 날개털의 검고 빛나는 에 비유해도 서로 그 빛이나 모양이 잘 일치하니까 비유로서 통하지만."순금이로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노란빛이니 첫째, 자기 애인의 머리털의 검은 색채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될 수는 없다. 이
것은 상징이다.
그럼 상징이란 뭐냐? 상징이라는 것은 통념상의 일치점만을 띠면 성립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을 막론하고 다.그렇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누구나 순금을 귀중한 물건으로 아는
통념에 있어서는 공통되었기 때문에 그 통념을 바탕으로 해서 이 상징적 표현은 성립한다. 자기 애인의 머리털이 귀중한 것을 느끼고 생각하다가 순금의 귀중함에다가 비교했으니까.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순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애인의 머리털도 귀중한 것으로 여긴 통념에 그 일치함으로써, 상징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몰턴은 생각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머리털은 순금이로다" 한다면, 머리털 빛과 금빛이 서로 달라서 비유로서는 안 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의 일치된 통념을 따라간다면 상징으로서는 그 두 가지가 다 그렇게 귀중하다니다는 통념의 일치가 있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몰턴이 식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비유나 상징에 대한 생각을 귀납해서 쓴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참고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이 부분의 성찰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상적 이미지가 감동을 준다
비유가 구상적인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어 그 사랑의 본질을 우리에게 상상시켜 주니까 망정이지, 만일 구상적인 이미지를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는 재주도 감동하는 재주도 가질 길이 없을 것이다. 구상적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추상만으로 이 비유가 시종하고 말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점이다.
*(해설)시의 최대의 적은 관념적인 진술이다. 정서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생각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시는 생경한 관념어를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어느 시인이 이야기하였듯이 시는 철학에서 장미의 향기가 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가 정서
속에 충분히 삭혀졌을 때 구체적인 모습을 띤 구상적인 이미지가 나타나게 된다. 이때부터 그 주제는 관념적인 상태를 벗어나면서 서서히 시의 경지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시각적 이미지는 시의 밑그림
선녀를 본 초동이 무엇보다도 먼저 역시 '달 같고' '꿀 같고' '강 같고' 또 무엇무엇 같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영상 비교의 영 안 끝나는 여로 속을 헤맬밖에 없다. 구슬을 바다 속에 빠뜨린 아이가 닷곱짜리 됫박을 들고
와 바닷물을 푸고 앉아서 그 밑바닥에 가라앉은 구슬의 정체를 다시 붙잡으려는 것과 같은 갈증 상태에 놓이는 것이 맨 먼저의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한시漢詩에 가장 많은 것이 '화용' (花容,꽃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나 월태( (月態,달처럼 아름답고 고요한 태도나 모습)임은 무리가 아니다. 하도 너무 많이 써먹어 놓아서 사고이지, '참 이뻐! 참 이뻐! 참 기막히게 이뻐! 어쩌고 하는 따위에야 비교도 안 될 만한 실감인 것이다.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라
그래, 우리는 우리 마음속의 이미지의 곳간에서 늘 무엇을 시의 것으로 선택해 낼 필요가 생긴다.
우리는 많은 매니큐어 손톱들의 유형들의 이미지까지도 풍부하게 이미지로 마음속에 수확은 해가지고 있지만, 진미의 전형이 될 만한 손톱을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거의 거기 해당하지 못할 것 같아 매니큐어 사용 이전의 손톱
들과 고대 미술품 속의 손톱들까지 두루 돌아보고 다니는 일이 많다.
어느 때 어디 누구한테 내놓아도 기막히게 예쁘다 안 할 수 없는 전형의 손톱을 골라 그 미에 감동하고 살려는 최대의 욕심 때문인 것이다.
음성 이미지에 귀를 기울일 것
R, L, M, N, NG 등의 유음에서는 누구나 생명의 유동감의 암시를 받는다. 이와 반대로 B, P 등의 폐쇄음에서는 상당한 답답증을 느낀다.
ル(루)ルルルルルルルルルルルルルルル······
이상과 같은 음의 계속적 나열을 해놓고, 제목을 개구리의 생식이라 붙인 일본의 어떤 시인의 시를 본 것이 여기서 기억나거니와, 이 R음의 긴 계속에서 우리는 '쪼르르르 흐르는 물 속에서 R음이 늘 많은 상황으로 매끄럽게 굴며 교미하고 생식하는 개구리의 생식의 감각을 암시받을 수 있다.
여기 가령 붉은 당명왕비의 꽃 붉은 목단꽃이 어느 음사월 말의 하염없는 오후 네 시쯤 기침 소리를 문득 내는 것이라 상상해 보는 경우, 그것은 음조와 색채와의 조화로 느끼어서 아무래도 '흠! 흠! 하는 음이 어울리지, '음! 음!' 한다면 그 붉은 빛에 조화가 되지 않는 것만 같이 느끼어진다. '음! 음! 하면 그 소리에서는 우리는 색채로는 백색 아니면 은빛 같은 계통의 빛을 느끼기 때문이다.
시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시야가 좁으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해설) 미당은 "특별한 정서나 또는 지적 이해"만이 시가 되는 걸로 여기는 협소한 시야와 안전한 시적 기류에 영합하는 우리 시의 '협심증'을 경멸하고 있다. 시의 매너리즘이 "주인은 우리 외에 외국에 따로 있다"고 정함으로 해서 생긴 협심증적 시감정이나 협심증적 시의 지성, 즉 "일본인의 유산" 에서 비롯된다는 미당의 지적은 우리의 문화적인 감수성을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소심증에 대한 통렬한 공박으로 보인다.
언어의 기성복을 벗어라
시인의 시상이라 할 것이 마음속에서 일렁이면 그 불성실한 나태와 간편만을 위주로 하여 시상의 가복장밖에 안 되는 기성 개념어군의 권위와 유행만을 따라서 성급한 처리를 해치우지 말고, 언어의 최미.최적한 새 질서를 탐구하기에 애써야 하며, 시인의 언어 탐구의 부
절한 노력 속에서만이 언제나 새로이 탄생하는 운명에 있는 상들의 창생을 기해야 할 것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이 사정은 저 오랜 바다의 파도의 끊임없는 파동의 염원 속에 한 점씩 한 점씩 살과 골절이 불어 마침내 비너스로 해상에 솟아, 그 뒤집어썼던 조개껍데기를 가르고 탄생하는 것이라는 비너스 탄생의 신화와도 같은 것이다. 시인이라면 그의 시상의 간절성 때문에 어떠한 언어의 기성복도 걸치기를 거부하고 영원히 맞닿을 곳 없는 파도처럼 서성거리며 부절히 소원하고 모색함으로써만 시의 이미지들이 비로소 아는 체를 하고 가까이 오던 기억을 얼마든지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마디의 직유의 형용어를 찾기 위해서 밥 먹을 때도, 뒷간에 가서도, 길 걸을 때도 그 많은 언어들을 골랐다간 버리고 골랐다간 버리고 하는 짓을 언제까지나 되풀이하고 사는 자 아닌가.
시의 체험과 현실이란 무엇인가
지식보다 체험을 우선하라
R. M. 릴케는 그의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어떤 어린애도 시를 쓸 것이 아니냐는 뜻의 말을 했다. 그는 감정 아닌 체험이 시라고 하였고, 이 시 체험이란 것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 시적 체득이라는 것을 요량해 보면 그것은 울음이나 환희의 마지막 것인 동시에 그뿐만이 아니라 또 제일로 잠 잘 깬 밝은 눈의 이해임에 틀림없다. 백 퍼센트의 감동과 백 퍼센트의 앎 합해진 상태-이것이 시의 체득임엔 틀림없다.
종래의 철학들 같으면 플라톤이 이미 예시한 바와 같이 이성의 밝은 눈으로의 이해만으로 되었다. 그러나, 시는 철학보다도 한술 더 떠야 하는 제물이어서 이것은 기막히게 울거나 기막히게 환희하는 감동의 불 숟갈을 하나 더 가진다. 이 두 숟갈을 한 숟갈처럼 놀리는 일을 말로 하면 뭐라 해야 할까? 이것은 철학의 인식과는 다르고, ………
*(해설) 그러므로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획득되는 깨달음이란 단순한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해나가는 실체로서의 주체의 육체와 영혼이 합일된 깨달음, 즉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경힘이 선사하는 선적인 깨침이다.
이러한 깨침을 지식의 획득과 구별 짓고 그것보다 높은 차원에 놓이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바로 시의 세계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적인 조작을 위주로 하는 지식인들의 시가 시의 왕국에서 거의 언제나 높은 서열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시적 현실은 실제와는 다른 것
시의 감각은 실제의 사실과 맞지 않는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한 마리의 말이 달려가는 것을 보는 경우, 실제의 말의 다리는 네 개지만, 이 달리는 말에게서는 네 개의 제한된 사실의 수효 이상의 것을 감각하기가 상례인 것이다. 뛰는 말을 볼 때, 우리의 시각은 마치 그 발이 여덟 개같기도 하고 또 그 이상 같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감각은 이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 꼭 사실의 숫자로써 말의 발을 네 개라고 표현 안 해도 좋은 것이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중에서
할 때, 이 시에서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다고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의 사정은 이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즉 바람이 불때, 바람에 몰려서 까마귀 떼가 몰려간다면 몰려가는 것이지, 까마귀 떼
가 바람을 데리고 가는 일은 사실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판 위에서 수천 수만 마리의 까마귀 떼가 떼지어 오고갈 때, 아닌 게 아니라 우리의 감각도 그 많은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간 것같이 느낀다. 시의 감각도 이와 같이, 실제의 사실 그것에 의존하기보다는 실제에 어긋나는 그대로의 감각의 실제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현대 시인들이 이 시의 감각을 발랄 왕성히 하여, 그 표현에 성공하고 있는 것을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여 신화적 감각의 영역에까지 우리의 감각을 순화 향상해야 되겠기 때문이다.
동양적 세계를 탐구하라
나는 위에서 꽤 많이 지껄이었는데, 그것은 불교의 신앙을 위한 설교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선 단순히 우리의 현재의 미학 대상의 영역이 협소하다는 실감에서 불교의 삼세인연관 속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전술한 바와 같은 것들(불가사의한 인과성 - 편자)의 요소를 받아들여 그 영역을 좀 넓혔으면 어떨까 하는 시도에서였다.
말하자면, 가시적 한계만을 주로 미의 대상으로 삼아, 따분하고 별수도 없이 된 우리 미학에 불교의 삼세인연관에서 오는 불가시적 영역의 인과관계의 미를 이끌어들여 한번 홍성거려 봤으면 어떻겠느냐는 속셈
에서였다.
내 포플린의 와이샤쓰는
무교동의 왕대포집 여자가
날 좀 보소 남좀 보소
밀양아리랑을 먹여서 길러냈다 하는 것.
어쩌고저쩌고 한다든지
아들아 내 아들아
열달 전에 이웃집 거지 경조네서 죽어서
열달 만에 우리 집으로 이사해 태어난 내 아들아
너의 그 전 엄마 경조네를 데려오마
하늘하고 같이 가서 경조네를 데려오마.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이런 영상들의 배합이나 그 효과라는 것은 불교의 삼세인연관 아니고서야 무엇으로 어디 꾸밀 수나 있는가? 영문학자 시인인 김종길 씨가 내가 근년에 쓴 시의 어떤 것들을 두고 거기 시의 이로
理路가 없다고 말해 주었는데, 그것도 결국은 서양시의 미학에 전연 이런 유의 시의 이로가 보이지 않는 데에 길든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불교의 삼세인연관을 주로 하는 미의 시도는 서유럽에서 쉬르레알리즘이 한 것보다도 훨씬 훨씬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많은 미의 영역의 확대와 미의 비약과 그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안다. 석가 자신이 좋은 인식이라고 한 것을 한 사상으로밖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대든다 하더라도 말이다.
*삼세인연관: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연계되어 복잡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불교의 이론 현재의 '나'가 죽으면 나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적 영적 요소들이 다른 것의 일부분으로 연계되어 나의 연속성이 보장되는데, 이것이 서정주 시인이 말하는 바 영원상이다. 이성적인 눈으로 볼 때 두 존재의 연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서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의) 이미지 병치 기법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해설)미당은 시인이라면 가시성의 세계를 넘어선 특별한 시적 직관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불교의 삼세인연의 예를 들어 강조하고있다.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은 자주 현실의 영역을 넘어서는 공간까지 상상적 통찰을 한다. 현상적인 세계를 너머 세계와 우주적 비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눈이 필요한데, 이러한 눈은 문자적으로 볼 때 '시'가 아닌 '견'으로서 구별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랭보는 이러한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을 '견자'라 하였다.
불교의 '삼세인연관'은 현실의 질서를 넘어선 우주적 법리로서의 관계성을 인생의 질서로 인식하는 불교의 특별한 세계관이다. 이러한 삼세인연은 불교적 용어로 '관자재 할 때 인식될 수 있다. 즉 보이는 것만이 현실 이라는 자유로운 직관과 통찰력을 통해 진실은 포착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만이 삶이 아니며, 우리가 보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언뜻 보면 무연해 보이는 사물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와 연관성을 발견하는 이러한 직관의 눈………이렇듯 세계에 숨겨진 비의를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은 가시적인 영역과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무
나는 술도 좋아하고 시도 좋아하고 또 미라는 것도 남달리 좋아하던 내 어떤 선비 친구 하나가 어느 6월이던가 붉은 목단이 그의 뜰에서 피기 시작하던 날 문득 손에 들어 입에 대고 있던 냉수 사발의 물을 모조리 땅에 엎질러버리고 빈 그릇만 휑하게 해 앞에 놓으며 "이게 좋군." 하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모란의 빛, 모란의 향기를 좀 더 넓게 또 깊
이 받아들이려던 짓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와서
"영 아무것도 없는 것을 어떻게 그릇에 담는가? 땅에서라면 아무래도 공기만을 담기지 않는가?"
의문을 표시한다면 그건 지당하다.
물론 이 '아무것도 없는 것 이라는 것은 공자가 『중용』에서 한 말씀을 빌자면 "보아도 안 보이고 들어도 안 들리는 것"을 말한 것으로, 요샛말 공기라는 것은 그때에는 없어서 그걸 따로 지시는 안 해놓았지만, 그건 그 '무' 속에 포함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동양의 이 '무'는 '니힐리티 nihility' 그것이 아니라 대단히 영적인 것이었다.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리는 이유로 '무' 라고는 했지만, 이것은 모든 있는 것의 영적인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골짜기의 신이 죽지 않는 걸 심오한 어머니라 하고, 심오한 어머니의 문 이걸 하늘 땅의 뿌리라 한다."
노자의 이 말을 들어보면 그 빈 그릇 속의 '무' 라는 게 대단히 영적인걸 알 수가 있다. 산골의 골짜기라는 것은 여러 가지 나무와 풀과 꽃과 사람과 동물들을 생성시키지만 역시 그 생성은 곧 골짜기의 텅 빈 데를 통해서다. 그러나 이 텅 빈 데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들어 있는 신의 영기가 늘 죽지 않고 있어 이것이 이 천지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노자의 이 말들은 한 골짜기의 빈 데를 상징적으로 들어서 말한 것이지만, 이걸 아주 적게 한 개의 빈 그릇에 적용하건, 훨씬 크게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에 적용하건 의미하는 것은 서로 통한다. 공기만이 담길뿐 그것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대단히 영
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천지에 비어 있는 '무'는 한 큰 어머니의 한정 없는 마음의 아량처럼…….
그러므로, 이렇게쯤 생각해 살기에 길든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최후의 지적이나 정서적인 만족을 위해선 '무' 이외의 딴 것을 전혀 담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런 사람들은 빈 그릇에 공기만을 담아두거나 또 그 빈 그릇에 공기만을 담아 지니고 다녔다.
무의 의미 / 서정주
이것은 꽃나무를 잊어버린 일이다.
그 제각 앞의 꽃나무는 꽃이 진 뒤에도 둥치만은 남어
그 우에 꽃이 있던 터전을 가지고 있더니
인제는 아조 고갈해 문드러져 버렸는지
혹은 누가 가져갔는지,
아조 뿌리채 잊어버린 일이다.
어떻게 헐까.
이 꽃나무는 시방 어데 가서 있는가
그러고 그 씨들은 또 누구 누구가 받어다가 심었는가.
그래 어디 어디 몇집에서 피어 있는가?
지난번 비오는 날에도
나는 그 씨들 간 데를 물어 떠나려 했으나 뒤로 미루고 말었다.
낱낱이 그 씨들 간 데를 하나투 빼지 않고 물어 가려던 것을 미루고 말았다.
그러기에 이것은 또 미루는 일이다.
그 꽃씨들이 간 곳을 사람들은 또 낱낱이 다 외고나 있을가?
아마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외고 있지도 못하는 일.
이것은 이렇게 꽃나무를 잊어버린 일이다.
*(해설)
미당의 시론은 동양적인 우주관, 생명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에 관한 성찰이다. 미당의 말에 따르면 무는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무로부터 생성되어 나온 유는 그 근원이 무에 있느니만큼 있다고 해서 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뜻에서 미당은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들리는 이유로 '무'라고는 했지만, 이것은 모든 있는 것의 영적인 근본이 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체를 가지고 빛깔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이 그 외면적 상태는 유라고 하지만 근원에서는 무다. 또 형체도 빛깔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텅 빈 무라고 할 것도 기실 만유를 산출하는 근원이라고 보면 유로 통하는 무다.
미당의 시 가운데 「무의 의미」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시가 있음에 유의해 보자. 이것은 필시 동양적인 존재론, 인식론으로 통하는 미당의 시론이 어떤 형태로든 응집되어 있으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이런 시 앞에서는 마치 불교의 화두를 해석할 때처럼 비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이것은 꽃나무를 잊어버린 일이다"라고 느닷없는 규정을 내린다. 여기서 "이것"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필시 이 시의 제목인 "무의 의미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 의미는 꽃나무를 잊어버린 일"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꽃나무" 란 무엇일까. 이런 문제는 선례나 전거를 따져야 하지만 짧은 지면 안에서 여유가 없다. "꽃나무"는 미당의 시론의 핵심에 해당하는 "'미'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 보자.
그렇다면 "무의 의미"를 따지는 일은 '미'를 잊어버린 일과 관련이 있게 된다. 여기서 다시 잊어버린다는 것은 기실 잃어버린다는 것을 함께 갖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무의 의미"를 캐는 일은 '미'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나아가그 미의 행방을 잊고 잃어버리고 그것을 캐는 일마저 잊어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곳에서 베어져도 어딘지 모르는 저곳에서 피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무란 흘러다니는 "미"사라져도 사라진 것이 아니
고 있다 해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닌 '미'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미당의 시론에서 미란 알파이자 오메가다. '미'의 근원은 이렇게 흘러다니면서 형체와 빛깔을 보였다가 감추었다가 하는 무에서 찾아야 한다.
https://m.blog.naver.com/uramy123/222281309575
시(詩)란?
시는 감각(感覺)이어서는 안된다.
시는 감정(感情)이어야 한다.
감각은 우리 피부에 와닿는 모든 사물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고
감정은 우리 마음 속에 스며드는 현실과 꿈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감각은 사유(思由)를 통하여 온갖 기교(技巧)를 동원하여 표현하려함에
글이 길어지고 난해(難解)하여 사람들이 읽지 아니 한다.
감정은 시인의 영혼에서 우러 나오는 짧은 몇 마디라도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글은 소설, 수필, 시, 세 가지로 나눈다
소설은 책 한 권으로 부족할 때가 있고
수필은 여러 장의 공책이 있으면 되고
시는 짧을수록 좋다.
시인들이여!!!
글의 명예를 구하지 마라
시의 당선에 집착하지 마라
마음의 진실을 나타내는 하나의 시어만 쓸 수 있어도
그대의 영혼은 스스로 빛나니......
어렵고 길게 쓰면 쓸수록
그대의 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 읽지 아니 하니......
시인들이여!
우린 오로지
시를 쓰는 사람들이다.
시를 세월에 맞추지 마라.
< 작자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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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게 즐거울까요? 쓰는 게 즐거울까요? 읽거나 쓰는 건 동류상종이라 봅니다.
혹자는 한편의 글을 쓰기 위해 수 십 편의 다른 글을 읽으라 권하기도 한다지요.
한 편의 시나 에세이를 쓰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읽습니까?
읽지 않고 쓰기만 할 수 없으며, 읽기만 하고 전혀 쓰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보물단지처럼 여기 저기서 모아온 책 10여 권 중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좋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젊은 시와 함께하는 서정주 시작법-<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
-교보문고에서 옮김-
미당 서정주의 생생한 시 특강
<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는 근현대 시사에서 가장 한국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작법을 전해주는 책이다. 미당이 가장 왕성한 시작활동을 펼치던 시절에 펴낸 시론서들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들을 간추린 것으로, 현대시 100여 편이 각 항목마다 수록되어 있다. 현재 국문학 교수이며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세 명의 교수가 기획하고 해설을 붙임으로써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은 단순히 논리적인 이론이 아닌 실천적인 시작법을 제시하고 있다. 생생한 미당의 육성을 바탕으로, 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할 것이며, 시의 유형ㆍ형식ㆍ언어ㆍ리듬ㆍ수사ㆍ이미지, 깊고 새로운 시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당의 쉽고 간결한 글을 읽고 난 다음 주제에 맞는 현대시를 감상하는 즐거움, 그리고 주제와 작품을 종합 정리한 편자들의 명쾌한 해설이 이어진다. 미당 고유의 뚜렷한 시 철학이 각 항목마다 오롯이 새겨져 있다.
목차
[ 1부 시를 알아야 시를 쓴다 ]
-시란 무엇인가
시란 언어는 적으면서 사상은 큰 것 -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조오현 '벌레'
언어를 벗어난 사상은 없다 - 백무산 '호미', 이재무 '위대한 식사'
시의 공리는 예술성에 있는 것 - 신대철 '알스트로메리아', 신해욱 '섀도복싱'
시를 써야 시가 되느니라 - 서림 '오존주의보가 내려도', 김영승 '반성16'
작품을 통해 배워라 - 서정주 '격포우중', 문태준 '맨발'
-시에 어떻게 다가갈까
자기가 먼저 감동하는 시를 써야 - 최영미 '선운사에서', 송재학 '철아쟁'
새로운 세기일수록 강렬한 감동으 시를 - 방민호 '죽음의 나날', 배용제 '홀로코스트'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기를 - 도종환 '접시꽃 당신', 이상국 '가난하다는 것은'
시심(詩心)이면 족하다 - 김기택 '사무원', 황학주 '루시'
향토정서를 존중하라 - 안상학 '아배 생각', 정기복 '단양 마늘'
-시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시에는 모름지기 '눈'이 있어야 - 유홍준 '상가에 모인 구두들', 지인 '호랑이의 곡'
감동이 주는 침묵을 기호화하라 - 이근화 '고베의 지진', 염명순 '꿈'
덜 익은 시상이 시를 망친다 - 박정대 '사곶 해안', 고두현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인생의 모든 것이 시의 재료다 - 박원 '겨울방학', 송경동 '용접꽃'
언외의 암시력을 살려라 - 박형준 '저 곳', 이기인 '솜털'
시인이 사는 법 : 허연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나의 시작 과정 : '국화 옆에서'
[ 2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시의 언어
생명 그대로의 최초 발성을 - 김혜순 '벼랑에서', 박진성 '목숨'
모국어의 묘미를 알아야 - 허수경 '대구 저녁국', 김선우 '나생이'
이디엄을 얕보지 말라 - 박철 '너희들 잠든 사이', 여태천 '저녁의 외출'
뼈를 울리는 언어의 음색에 주목하라 - 이대흠 '동그라미', 안도현 '봄똥'
시어는 표어가 아니다 - 안명옥 '붉은 수수밭', 한명희 '힘내라, 네팔'
-형식과 리듬
시 정신이 형식을 결정한다 - 오태환 '사랑', 김용희 '옛사람'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수립하라 - 이병률 '견인', 손택수 '화살나무'
행갈이와 연나눔의 기술을 알아야 - 장석남 '저녁 햇빛에 망믕르 내어 말리다', 신용목 '갈대 등본'
리듬에 주목하라ㅡ시의 운율 - 김왕노 '실밥', 박상순 '스모그'
정형률의 가치에 새로운 시선을 - 정이용 '고향', 홍성란 '애기메꽃'
산문시도 산문의 서술은 아니다 - 박용하 '지구', 차창룡 '죽지 않는 나무'
-시적 수사
기교란 체험의 창조적 표현이다 - 정끝별 '흰 책', 정남식 '빛도 어둠도 아닌 사랑'
직유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 박주택 '가로등', 김경주 '저녁의 염전'
은유는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 송찬호 '구두', 권혁웅 '방광에 고인 그리움'
상징은 시상의 깊이와 넓이에 기여한다 - 이은림 '태양중독자', 김혜영 '현무2'
-이미지
구상적 이미지가 감동을 준다 - 김상미 '사랑', 엄원태 '표충사 가는 길'
시각적 이미지는 시의 밑그림 - 이세기 '먹염바다', 박찬일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이미지를 포식하지 말라 - 박판식 '밤의 피치카토', 이윤림 '삭발'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라 - 김충규 '석양', 길상호 '감자의 몸'
음성 이미지에 귀를 기울일 것 - 이선영 '하루', 김영남 '푸른 밤의 여로'
-시의 유형
정조의 시 - 오세영 '고죽도', 전동균 '험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
예지의 시 - 조기조 '새의 나라', 이종수 '자작나무 눈처럼'
의지의 시 - 장정일 '<중앙>과 나', 오봉옥 '꽃'
지.정의 제합의 시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박현수 '세한도'
탈고의 자세 : 박서원 '문으로 가는 길'
시는 이렇게 고쳐라 : 실제 창작지도의 예
[ 3부 시는 어떻게 깊어지는가 ]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야가 좁으면 매너리즘에 빠지나니 - 정일근 '선암사 뒷간에서 뉘우치다', 허수경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
언어의 기성복을 벗어라 - 이윤학 '사다리', 유지소 '노인'
제목을 다시 보라 - 안현미 '곰곰', 유수연 '오목렌즈'
-시의 체험과 현실이란 무엇인가
지식보다 체험을 우선하라 - 김신용 '환상통', 양문규 '화정을 떠나며'
내면의 괴로움이 깊을수록 절제하라 - 이승하 '짐승은 자고 난 흔적을 남긴다', 허혜정 '밤의 스탠드'
시적 현실은 실제와는 다른 것 - 함기석 '국어선생은 달팽이', 김형술 '유리침대'
-시와 사상은 어떤 관계인가
자기 숨을 쉬기에 가장 적합한 세계를 - 최승자 '악순환', 장철문 '내 복통에 문병가다'
인식의 벽에 도전하라 - 최동호 '수염 없는 달마의 수염', 함민복 '죄'
동양적 세계를 탐구하라 - 조용미 '불멸', 유강희 '여승'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무(無) - 서정주 '무의 의미', 강신애 '지옥의 환인'
시에서 독자의 의미 : 박영근 '빙벽'
앞선 시인을 이해하고 배우는 법 : 김소월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