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대당천축사출명(大唐天竺使出铭)》의 발견 13
어떤 역사적 가설을 공인된 역사 자체로 만드는 결정적 증거는 우선 공인된 역사적 기록이 있어야하고 그 다음으로는 고고학적 물증이 이를 뒷받침하여야 한다. <니번고도>가 “히말라야의 공당라모 고개를 넘어 키롱마을을 경유하였다” 라는 명제는, 물론 현재까지는 가설의 범주에 머물러 있으나, 필자가 제시하는 증거를 보강하면 역사적 기정사실로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주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단지 기록으로만 보면 <니번고도>를 기록한 역사적 사서는 없지만, 필자는 대신 확실하고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오늘 공개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1990년 6월에 발견된 이른바《대당천축사출명》이란 7세기에 새겨진 마애금석명문이다.
이 석각은 키룽현에서 4km거리에 있는 아와자잉산[阿瓦呷英山]입구, 해발 4,130m 지점이다. 이 명문은 서북에서 동남향으로 벋어 있는 절벽 중간에 8m정도의 자연적인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양각전서체(陽刻篆書體)로 <대당천축사출명(大唐天竺使出铭)>이라 새겨 있고 또한 그 아래 조금 작은 해서체(楷書體)로 24행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아쉽게도 상, 하단의 일부는 현대에 이르러 수로공사로 인해 손궤 되어 현재 311자가 판독가능하다.
그중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보인다. 바로 필자가 그리고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대목이 아닌가?
바로 <현경(玄京)3년 6월 대당좌효위 장사 왕현책…(하결)>이다. 현경은 태종의 유지를 이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그 당나라 제3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연호이고 연경 3년이면 658년이다. 이 년대는 비록 왕현책의 생몰연대가 /밝혀진 게 없다하나, 공인된 당시대의 역사일지와도 엇비슷하게 맞아 떨어지기에 더욱 무게감이 실린다. 네팔공주와 당나라공주가 토번으로 시집온 해[639년, 641년]와 송쩬감뽀의 사망[649년], 문성공주의 사망[679년], 고종의 사망[683년] 그리고 현장의 순례기간[629-645의 17년간] 등이 바로 그런 주변 연대기이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한 마디로 <키롱을 통과하는 왕현책로(路)>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단지 생몰연대가 없다고 해서 그 동안 존재 자체가 부정되던 대 여행가 왕현책이 복권되면서 이로써 네팔 부리쿠티공주의 신행길 루트가 확정되고, 따라서 왕현책 사절단 일원인 현조법사(玄照法師)와 혜륜(慧輪)을 비롯한 여러 명의 해동의 순례승들이 기존의 실크로드가 아닌 티베트와 히말라야를 넘는 직행로를 통해 천축제국을 들락거렸다는 사실도 공인되고, 또한 인도 딴트라밀교를 티베트에 전파한 빠드마삼바바[蓮花生大師]의 수많은 전설도 생명력을 얻지 않겠는가?
종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이 비석은 중국당국에 의해 오랜 고증과 연구 끝에, 당나라 사절 왕현책 등이 태종의 교지를 받들어 천축으로 왕래할 때 들락거렸던, <번니고도> 상의 마지막 국경 마을에 국가 전략적 용도로 세운 기념비적인 석각명문으로 판명하여, 2001년에는 우리나라 국보급에 해당되는 <전국중점문물보호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니번고도 > 개괄도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토번(吐蕃)시대 송쩬감뽀(松贊干布)왕이 네팔의 부리쿠티(赤尊公主)를 신부로 맞이할 때 케룽(吉隆)마을의 한 사원을 숙소로 사용한데서 유래되었다.
역사상으로는 이 석비가 있는 키롱마을[吉隆縣, 鎭]은 티베트 중부의 중점도시인 시가쩨[日喀则]애서 490Km거리에 있는 국경마을로, 히말라야의 남쪽변경에 위치하며 7세기 중반 송짼감뽀가 전국의 군사조직을 ‘오여(五茹)’로 개편할 때 ‘여랍(茹拉)’의 한 지부로 편입되었고 789년부터 티베트와 네팔의 교통과 통상의 소통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티베트를 공산화한 중국은 1961년 개방절차를 밟았으나 장무-코다리 국경이 활발하게 이용된 것에 비해 키롱국경은 거의 막혀 있었다가 1987년 국무원에서 러쒀공로[热索公路]란 이름으로 일급 개방구로 승격시켰다.
그러다가 앞부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년 지진으로 인해 기존의 <중니공로>가 통행이 불가능해지면서 대신 개통되면서 현재는 싸구려 중국산 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대열이 거대한 중국측 세관 앞에서 통관을 기다리며 늘어서 있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을 지나 중국 네팔간의 걸쳐 있는 다리[热索桥]만 건너면 티베트 아니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키룽 근처에는 8천m급 14좌 중 마지막봉인 시샤팡마(8,012m:Goshaintan)이 솟아있고 신비한 전설이 서려 있는 페이쿠(Paiku)호수를 비롯한 여러 개의 설산호수가 보석처럼 박혀있고 드넓은 원시삼림지대가 퍼져있다. 또한 자연 상태의 온도가 무려 60-70도나 되는 노천온천이 10여개 솟아 나오고 200m나 되는 거대한 폭포도 여러 개 떨어져 내리는 파라다이스 같은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휴양과 관광의 미답지이다. 티베트불교의 소의경전인「시륜경(時輪經:Kala Cakra)」에 나오는 신비의 왕국 이며 이상향인‘샴발라(Shambala)’의 무대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래서 이 지방을 통과하여 라싸로 향하던 빠드마삼바바는 그 경관에 탄복하여 마을 이름을 ‘환락촌’이란 뜻의 키롱이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유명한 밀교 주술사였던 그가 어떻게 주위 사람들과 토착 귀신들을 굴복시키고 쌈애의 건설을 진행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정사의 기록은 아니지만 지금도 설역에 수많은 설화가 생생히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그가 뵌뽀교 사제와 벌인 싸움은 거의 ‘마법의 시합’같이 보일 정도로 현란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어찌 보면 그는 뵈 민족에게는 불교의 본존인 석가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고 더 사랑받는 살아 있는 전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불교사적으로도 그는 티베트 불교 종파 중에서 고파(古派)에 속하는 ‘붉은 모자파’, 즉 ‘닝마파’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첫댓글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근데 사진이 안 붙었네요?
이제 사진이 잘 보입니다. 정말 장대한 대하 다큐감이군여~~
사진 포스팅을 계속하고 있으니 좀~
가보고 싶다.
저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