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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서천꽃밭, 꽃감관 외 2편
박현솔
먼 데 외진 길들이 모이는 곳인가
그곳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서네
칠흑의 어둠과 발등에 차오르는 물
급류를 헤치며 길을 가고 있네
가슴으로 듣는 잎사귀들의 속삭임
발길을 이끄는 낯선 풍경을 지나
먼 곳에서 불어오는 향기의 군무
물굽이를 돌아 물길이 한곳에 모이듯
생의 굽이마다 피어나는 꽃들
수레멜망악심꽃, 웃음웃을꽃, 환생꽃
감춰진 도량이 너무 넓고 커서
인간의 꽃밭엔 필 수가 없는 꽃
햇살을 향해 꽃잎을 열어젖히듯
눈앞을 가린 어둠을 한 장씩 벗겨내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밀려오네
滅의 시간과 吉의 순간들이
꽃 피는 주기처럼 돌아오기도 하니
죽어가는 영혼을 일깨워 살아나게 하고
불멸의 기운을 말아 꽃 속에 스미게 하네
만개한 고요가 익어가는 들판에서
천상의 향기를 흘려주는 밭지기가 되리
꽃에서 꽃으로 이어진 길,
길을 잘못 든 벌 한 마리 적막을 열고 있네
*서천꽃밭 : 이공본풀이, 제주도 무가의 하나로, 못된 장자(長者)에게서 벗어난 고아가 서천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서천꽃밭을 맡아 다스리게 됨.
우주의 시간
국수를 삶으며 직선의 행적을 따라간다 직선은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가 흐물흐물 곡선이 된다 물의 결이 뭉치지 않고 돌개바람을 만든다 이제 회오리는 뜨겁고 짜다 면발들의 탄성을 가늠할 때 혀는 정직해지고 오래된 탐욕만이 위장 속으로 흘러든다
인류가 먹었던 가장 오래된 국수의 흔적을 황하강 유역에서 발견했을 때 당시 오래 살기를 꿈꾸었던 사람들은 죽고 없다 면발의 실크로드를 따라 장수의 염원만이 이어져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생명의 길, 욕망의 길, 유혹의 길
그 실크로드의 기억을 입 안에 밀어 넣으며 내 몸이 가늠하는 삶과 죽음의 교차 지점을 건넌다 권력자들은 더 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생각한다 줄에 매달려 늘어진 목각인형의 핏기 없는 팔과 다리……굶주린 회오리바람이 그림자를 잽싸게 낚아채간다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결코 오래 살 수 없었던 사람들과 삶의 매순간을 미련 없이 버린 사람들이 별똥별로 사그라지는 시간……정성껏 끓인 한 그릇의 국수를 앞에 두고 몇 가닥은 과거로 또 몇 가닥은 미래로 흘려보내는 순간, 어디선가 밀알 한 톨씩 물고 새떼들이 북반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계절을 건너가는 것
눈덩이를 굴리고 있는 나를 보는 너의 두 눈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곳이 바로 야생이구나
빗소리가 사방에서 조여 오면 금세 비에 갇히고
눈 오는 소리가 멀리 피어날 때 눈에 갇히고
바람이 꼬리를 잘라내고 사라지면 바람에 갇히고
햇빛 퍼지는 소리가 느긋하면 햇빛에 갇히고
우박 소리가 심장에서 들릴 때 우박에 갇히고
창을 칭칭 동여맨 저녁 때문에 안개에 갇히고
갇히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는 이치
갇히다 보면 자유로워지기도 하는 순리
세상의 도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우치는 날들
눈사람의 두 눈과 코와 입이 슬쩍 들러붙는 날들
<신작시>
너의 지저귐으로부터 외 2편
박현솔
너는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거야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쉴새 없이 조잘거리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상상하는 모든 것들
호기심으로 가득한 수다의 주제이지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실 너는 내내 불안에 짓눌려 있었지
하지만 그 덤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
대체 무슨 일로 수다쟁이가 된 거야
그건 마치 남극이나 북극에서 살다가
갑자기 적도로 순간 이동한 것과 같다구
내가 봤을 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네 수다는 먹구름도 없이 쏟아지는 비
예고도 없이 불시에 젖게 되지
너무 감정 기복이 심한 것 같아
기쁘고 흥분되고 불안하고 절망적인 것들
모두 끄집어내어 한데 섞어서 혼돈을 만들지
하지만 그게 가끔이라서 참을만해
어떻게 매 순간 느끼는 것들을
감각으로 바꿔서 수다로 변하게 하는지
머뭇거리지 않고 따지지 않고
속사포로 쏟아낼 수 있는지 불가사의야
이상한 건 네 수다를 듣고 있으면
다른 세상 속을 여행하는 것 같아
작업복 속에 수영복을 입은 것 같고
선글라스를 끼고 우산을 든 느낌이야
휴가를 가서 무작정 어느 정류장에 내렸는데
거기가 어디든 별로 상관없는 기분이야
뱉어진 말들은 차가운 공중을 떠돌다가
나에게로 수북이 쏟아져 내리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이에 맞지도 않고
지위나, 성별에 맞지도 않은 수다들
재단하지 않고 원단 그대로 만드는 재주
뜨거운 태양이 구름을 만들어내는 내내
넌 끊임없이 폭포수를 쏟아내지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수다쟁이
저세상의 수다를 끌고 오는 유일한 사람
세상의 모든 감춰진 것들도 입맛대로 요리해서
나를 배불리 먹이고 포근하게 재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말해줘
수다의 끝에서 무얼 느끼는지 말이야
이 위험하고 끝없는 미로에서 벗어나
돌무더기를 허물고 나올 수 있도록
추종자
달님!
당신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에요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어가는 모습을
날마다 보면서 세상의 만물은 조금씩 변해가요
저도 달님처럼 변해가는 성격을 갖게 되었어요
달님이 완벽하게 둥글었을 때
저도 생동하는 에너지로 생글거리고
달님이 초췌하게 야위었을 때
저도 까칠하게 무의식의 벽을 긁어요
그렇게 당신을 추종한 덕분에 이젠 변덕쟁이가 되었어요
오죽하면 여자는 달의 주기를 따른다고 하겠어요
그렇게 당신 따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했어요
이제 몸과 영혼이 당신과 하나가 됐어요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힘들어해요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내 변덕스런 성격이 싫대요
어떻게 맞춰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대요
이런 성격으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요
도와줘요 제발, 만약에 도와줄 수 없다면
나에게 이거 하나만 약속해줘요
이제부터 보름달일 때에만 내 창가를 비추겠다고
모나지 않고 둥근 사람들 속에서 살래요
둥근 사랑을 하고 둥근 세상을 살아갈래요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그땐 모른척해 줘요
당신은 이제 어쩌다 보는 보름달인 거예요
하지만 부디 슬퍼하지 말아요
내가 떠나도 다른 추종자가 올 테니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바다여, 잘 있는가
뜨거운 햇볕의 기세가 누그러진 지금
나무들이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있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다른 존재에게 기대어서만 살아갈 수 있어
신이 인간에게 두 개의 손과 발, 머리를 주신 것은
세상 만물 속에서 굳건히 생존하길 바라신 거지
그런데 너는 인간의 편인가 아닌가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으니 알 수 없어
넌 인간에게 생선을 주고 살아갈 방편이 되어주었지
만약 네가 내일부터 파업을 한다면
아마도 굶어 죽을 인간들이 수두룩할 거야
그럼에도 인간은 감사함보다 허세를 부리고
자연을 모두 정복한 것처럼 떠벌리지
그런데도 어쩜 너는 그럴 수 있어
인간이 값싼 플라스틱을 만들어서
쓰레기 산을 만들고 바다를 오염시킬 때에도
너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어
너의 친구들 고래와 생선, 해초와 거북이가
플라스틱 줄에 칭칭 감겨있을 때에도
너는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지
그것들은 곧 내장 깊이 쌓여갔고
네 친구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어
인간의 이기심은 끝이 없어서
바다로 미사일을 수없이 쏘아올리고
대량 살상 무기와 핵 개발에 몰두했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키워나갔어
그뿐만이 아니야 드러난 것 외에도
공장들은 몰래 폐수를 흘려보내고
오염수가 지구의 구석구석을 돌고 있어
어떡하면 좋아 인간의 이기심이 끝이 없잖아
언제까지 네가 참아줄 거라 생각하는지
날마다 먹을 것을 내어준 은혜를 이렇게 갚는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인간들을 부디 용서해줘
그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한낱 신의 창조물일 뿐이니까
수많은 그물을 품은 네가 이해해줘
<시인의 에스프리>
시를 쓰는 날들 속에서
박현솔
존재에 대해 알기 위해서 내가 시작한 것이 시쓰기였고 그것은 공간과 역사로 펼쳐지면서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해 주었다. 제주라는 공간에서 제주인의 시간을 살면서 체득한 인식과 사고는 독특하고 개성적이었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제주 신화와 제주의 역사를 시 속으로 끌고 들어오게 되었다. 제주 신화에다 서정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내게 부담이면서도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신화들에 뒤처지지 않는 제주 신화의 독창성에 입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저 신기하고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한 것이 제주 신화였다.
어느 시기에 먹방이 유행하고 음식기행이나 음식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면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 때가 있었다. 그때 나에게도 운명처럼 다가온 음식이 있었는데 국수였다. 어릴 적에는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과 함께 즐겨 먹던 새참이 수제비였다. 된장과 멸치 육수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넣고 감자나 호박을 넣어서 먹던 수제비가 별미였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국수를 끓이기 시작했는데 남편이 국수를 너무 좋아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국수를 먹게 되었다. 나의 식생활에 변화가 생기면서 국수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고 있었다. 그때 국수의 기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현대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국수의 변신은 생명성과 연결되면서 더 큰 의미의 아우라를 형성해 주었다.
내게는 사계절 중에서 가장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봄에서 가을까지 여러 큰일들과 잡다한 일들이 뒤섞여서 돌아가고 바쁘게 지내다가 겨울에 접어들면서 바쁜 일도 거의 끝나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시기를 맞게 된다. 그때 엑스트라처럼 출현하는 눈은 풍경과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그리고 동시에 황량함과 쓸쓸함을 느끼게 하면서 인생의 한 부분으로 확장된다. 인생의 일정한 마디가 되어주는 계절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던 때에 내게 찾아온 시가 바로 「계절을 건너가는 것」이다.
딸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다 여자라서 날마다 시끌벅적한 상황이 지속되곤 하였다. 셋째딸인 나는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말이 많은 언니들의 수다와 동생의 수다까지 들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역할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저절로 가족 내의 작은 말싸움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들의 수다가 식을 만도 한데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는 것을 보면서 수다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수다스럽다는 것은 열정이 넘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열정이 넘치는 가족을 두었으니 내 안에도 열정이 포진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낮과 밤 중에 나를 편안하게 하고 생각에 잠기게 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시간은 밤인 것 같다. 특히 어두운 밤중에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은 나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다 보니 별과 달, 우주에 대한 시를 많이 쓰게 되고 그것과 연관된 인생사를 연결시켜서 한 편의 시를 쓰기도 한다. 특히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해서 달과 연관된 상상력이 많이 떠오르는데 그렇게 해서 쓴 시를 묶은 것이 첫 시집 달의 영토였고 가장 최근에 쓴 시가 「추종자」이다. 둥근달을 보면서 둥근 성격과 둥근 사람들과 둥근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담은 시라고 할 수 있다.
바닷가 태생이라서 그런지 내 무의식 속에는 바다가 출렁인다. 어린 시절에 만나고 놀던 바다와 청소년기의 바다, 어른이 되었을 때의 바다에 대한 느낌은 모두 다르다. 아침 바다와 저녁 바다가 다르고 밤바다의 느낌도 모두 다르다. 날씨가 좋을 때의 바다, 날씨가 궂을 때의 바다, 사람이 많을 때의 바다와 나 혼자일 때의 바다 역시 모두 다 다르다. 그리고 시골에서 바다를 보러 갈 때와 도시에 살면서 바다를 보러 갈 때에도 아주 다른 느낌이다. 바다에서 나는 해물들과 해초, 물고기 등도 바다와 함께 연관되어서 생각난다. 어쩌면 내 무의식 전부가 바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수없이 보고 거닐고 만났던 바다의 상태를 나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의 바다가 지금의 바다와 많이 달라졌을 테고 오염도 많이 되었을 텐데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이 되었다. 그래서 감성을 거의 빼고 팩트에 근거한 시를 쓰게 된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다를 사랑하면서도 인간이 바다를 오염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내 시의 근원을 이루는 것들을 이번에 살펴보니 삶 자체가 바로 내 시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을 벗어난 시는 나에겐 존재할 수 없고 삶으로부터 온 영감은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진정성은 바로 거기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생의 나머지 시간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손을 이끄는 대로 가볼 작정이다.
박현솔
제주 성산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와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가 있음.
2005년과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