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람> 2023 가을호 <유적> 오승철 시인
승철 형 때문이었겠지요… 울컥 목이 메입디다
김우영(시인)
“우영 형, 훌쩍 먼 곳으로 가버린 승철 형 때문이었겠지요. 평택역 광장에서 손 흔들고 있던 백발의 형을 보니 울컥 목이 메입디다.”
지난 2일 평택에 다녀왔다. 안동 출신으로 대학교수를 하다가 얼마 전 정년퇴직한 김승종 시인이 “두말 말고 평택으로 와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그날 나를 비롯, 김승종 시인과 광주에서 올라와 평택에 거주하는 김미구 시인, 고양에 사는 문창갑 시인이 만났다. 우리들은 1970년대 옛 <시림(詩林)> 동인활동을 함께 했던 오랜 벗들이다.
최근 제주도 오승철 시인이 세상을 떠났기에 분위기는 유쾌하지 않았다. 술도 별로 당기지 않았다. 그와의 생전 추억을 이야기 하다가 부산에 사는 최영철 시인과도 돌아가며 통화를 했다.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면서 자주 만나자는 초로(初老)의 동인들... 다음엔 수원에서 만나자며 헤어졌다.
그리고 위와 같은 문창갑 시인의 문자를 받았다.
풋풋했던 문청시절 시림(詩林)동인으로 만난 우리들
오승철 시인의 부음을 받고 수원일보에 칼럼을 썼다.
“19일 아침 8시쯤, 전날의 과음으로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는데 전화가 왔다. 내 오랜 친구 정수자 시인이다. 물기가 그득한 목소리였다. “오승철이 떠났어...” 말을 잘 잇지 못한다. 그날 아침 6시30분에 영면에 들었다는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친구여, 가고 말았구나. 지난 몇 달 동안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옛 시림(詩林) 동인들에게 연락해 제주도에서 모임을 갖자고 했었다. 그런데 우리가 방문하기 전 부음을 먼저 듣게 된 것이다. 안타깝고 슬프다. 1957년생, 만나이로 이제 겨우 66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와 만난 것은 1976년이다. 우리는 갓 스물의 풋풋한 문청이었고 시림(詩林)동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원이란 잡지의 문예란에서 명성을 날렸던 오승철(제주), 최영철·조성래(부산), 김승종(안동), 김미구(광주), 문창갑(서울), 김우영(수원) 등과 대구의 이정환·박기섭, 대전의 최봉섭은 시림(詩林)동인회에서 함께 활동했다. 노동자시인인 순천의 김해화·김기홍 등도 한때 동인이었다.
그후 동인들은 신문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추천 등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중 시조를 쓰는 동인이 세 명 있었는데 현재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정환을 비롯, 박기섭과 오승철은 시조문단의 중추이자 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림은 한동안 휴면기를 거쳐 지난 1989년 당시 열음사에서 일하고 있던 최영철의 노력으로 10년 만에 다섯 번째 동인지 ‘70년대 학생문단의 주역들, 詩林 그 후 10년 그들의 현주소!’라는 부제의 그대 걸어갈 광야는 멀다라는 동인지를 엮었다.
“오승철이 있는 제주도와 그가 없는 제주도는 느낌이 크게 다를 것”
그리고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2019년 수원에서 다시 만났다. 제주에서 오승철이, 부산에서 최영철과 그의 부인 소설가 조명숙이, 서울에서 문창갑과 김승종이, 평택에서 김미구가 참석했다. 동인은 아니지만 오승철이 온다는 소식에 수원에 사는 정수자 시인도 나왔다.
이날 제주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동인지 6집을 내기로 했으나 태풍으로 제주모임은 성사되지 못했다. 몇 달 후 ‘2019년 문화의 달 행사-전국 문학인 제주포럼’ 때 늦은 밤 제주 문인들과 함께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는데 그날 본 오승철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한 사람만 물질해도 온 식구 살렸는데
어머니 숨비소리
대물림 끊긴 바다
숭고한 제주 바당에 거수경례하고 싶다.
- 「다 떠난 바다에 경례」 일부
하늘은 하늘대로 우릴 내려 보나 보다
하늘나라 입학을 축하하는 것인지
가끔은 마을 밖으로 별똥별도 쏘아댄다
- 「축하하듯」 일부
‘숭고한 제주 바당에 거수경례하고’ ‘하늘나라 입학’하는 자신의 삶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인가. 허허. 승철 이사람.
늦은 밤 취중에 제주 문순자 시인에게 전화했다.
“오승철이 있는 제주도와 그가 없는 제주도는 느낌이 크게 다를 것 같아요.”
김우영
1957년 경기 화성 출생. 1976년부터 <시림> 동인.
1978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 등단. 시집 부석사 가는 길 외 2권.
수원시문화상, 한하운문학상 대상, 한국시학상 대상 등 수상.
고별사 - 제주도문인협회 故오승철 회장 제주문협장(葬) 영결식
강중훈(시인)
이보시게 오승철 회장!
그대, 이른 새벽부터 어쩌자고 여기에 와 계신 거요.
여긴 그대가 꿈을 먹고 자라던 서귀포 칠십리도 아니고 미깡낭밭 품을 팔며 세 아이를 키우노라 목숨 달아매던 그대 아내의 뙤미집도 아니라오. 높은음 자리로 울움 우는 섶섬, 문섬, 범섬 또는 지귀섬은 더더욱 아니라오.
멀뚱멀뚱 바라만 보지 말고 어디 한번 말 좀 해 보시오.
하! 그래요. 말하지 않아도 조금은 알 것 같소.
오늘 이 아침 저 한라산 들녘에 푸르게 푸르게 익어가는 청보리가 혼절해서 무너진 이유도, 그대 고향 뙤미마을 뒷동산 가시낭밭 산꿩마저 돌아앉아 울음 우는 슬픈 사연도 하! 더러는 알 것 같소.
들여다보고, 일러두고, 기록해 둬야할 수많은 언어들과 그대의 철학들이 여기 제주문학관 책꽂이에 꽂혀있어 그걸 찾아내고 밝혀두려 이곳을 찾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소.
하! 그래서 깨달은 진리를 그 누구보다 먼저 천상에 알리고파 예까지 와 있다는 것도, 그래서 마지막 펴낸 시집에서까지 ‘다 떠난 바다에 경례’라는 이름으로 상재했다는 것까지도 알 것 같소.
그렇지만 이보시게 오승철 회장!
이곳까지 오기에 앞서 했어야 할 일이 하나가 더 있었오. 대나무 질구덕 같은 생전에 못 다한 사랑의 표현을 그대의 아내에게 바치고 떠나오는 일 말이오. 거기에 또 하나 더 보탠다면 끔찍이도 자네를 따르던 아들 한솔이와 큰년 새미 말잿년 새별이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손자들까지도 따뜻이 품어주고 돌아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일 말이오.
물론 그대는 그대의 품성대로 남몰래 그 모든 걸 다 하셨을 걸로 나는 믿고 있소. 그러기에 더 진한 인연으로 지워지지 않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었던 기억 또한 새로워짐은 숨길 수가 없소.
춥고 춥던 겨울밤들이었지요. 그대와 내가 함께 했던 제주도청, 남들은 모두가 퇴근해서 없는 텅 빈 사무실 한쪽에 머리 맞대고 앉아서 도지사 연설문을 작성하다 잠이 들거나, 그러지도 못한 밤이면 헐어터진 자동차를 위험스레 끌며 함박눈 쏟아지는 한라산 산길을 넘고 넘었지요. 그때 뙤미마을 그대의 집에선 귤밭에서 돌아온 몸빼바지 차림의 그대 아내가 천사처럼 우릴 맞아 주기도 하였었지요. 그 많고 많은 시간들은 그대와 나에게는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날 것의 추억이라오. 그때부터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언어들은 그것이 시였으며 살아있는 영혼의 울림이었소. 어디 그뿐이던가요.
박봉을 이겨내려 제주시로 이사한 후 어렵게 마련한 구멍가게에서 깨진 수박 한 조각마저도 아끼고 아껴먹던 검질긴 그대 가족의 모습들은 진정으로 인간 오승철을 바라보게 했던 순간들이었소. 그러므로 그대는 신이 내린 청렴한 시인이었다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아픈 추억들로 눈물이 나오.
어디 그뿐이겠소. 깊은 병을 스스로 실감하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이겨내려던 그대의 삶의 의지는 차라리 인간 승리자였소. 그 못지않게 문학과 문학동지들을 그대는 끔찍이 사랑하였소. 그러기에 문학인의 지도자로서 제주문인협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던 그대의 의지 또한 진실이었다오. 그 진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의 정열을 응원하였소.
여기 그대와 함께하던 전국의 많은 문우들이 그걸 인정하며 자리를 같이 하였다오. 제주특별자치도 오영훈 도지사도, 그대를 사랑하는 지인들도 한결같이 그러하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떠난 것이 아니오. 그래서 우리는 그대를 영원히 기억하고 그리워 할 것이요. 진심으로 사랑하오. 부디 영면하시길 빕니다.
강중훈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제주대학교경영대학원 졸업.
1993년 한겨레문학 등단.
시집 가장 눈부시고도 아름다운 자유의지의 실천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