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지, 평정, 휴식, 치유
불교의 명상, 즉 선정에는 두가 측면 그러니까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있다. 위빠사나는 지혜를 낳고 고통과 번뇌를 여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마타의 수행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중지할 수 없다면 지혜를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선종에는 말을 탄 사람의 우화가 전해진다.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기에 말에 탄 사람은 어딘가 중요한 곳에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길가에 서 있던 사람이 소리쳐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오?” 그러자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말에게 물어보시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말을 타고 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을 멈출 수도 없다. 말은 우리를 끌고 가는 습관의 힘으로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힘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늘 달리고 있는데, 이제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항상 심지어는 자고 있는 동안에도 고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늘 자기 자신과 다투고 있기 때문에 쉽게 남과 다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지의 기술, 즉 생각과 습관의 힘, 부주의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는 격한 감정을 멎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폭풍과도 같은 감정이 일어나면 마음의 평화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우리는 TV를 켰다, 껐다 한다. 그리고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어수선한 상태를 멎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공포, 절망, 분노 그리고 탐욕을 멎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자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 걷기, 미소 짓기 그리고 내관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음을 집중하고 현재의 순간에 깊게 접할 때, 그 결과 언제나 이해와 수용, 사랑 그리고 고통을 덜고 기쁨을 얻고자 하는 바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습관의 힘이 우리의 의지보다 강한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말과 행동을 하고는 나중에 후회한다. 그리고 자기와 남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는 적지 않은 해를 입힌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기도 하지만, 다시 그런 짓을 하게 된다. 왜 그럴까? 습관의 힘이 우리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과정을 멎게 하려면 습관의 힘을 인지하고 맞설 전념의 힘이 필요하다. 전념할 수 있다면, 습관의 힘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안녕, 나의 습관적 힘이여, 나는 네가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가지고 있는 힘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될 것이다. 전념은 습관의 힘을 인지하고 그것의 지배를 막아주는 힘이다.
부주의는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는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아 있지만, 그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는다. 걷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습관의 힘이라는 말이 우리를 실어 나르고 우리는 그곳의 포로가 되어있다. 이제 말을 멈추게 하고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전념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부주의라고 하는 어둠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명상, 즉 사마타의 첫 번째 기능은 바로 멎게 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두 번째 기능은 평정이다. 격한 감정이 일어날 때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참지 못한다. 우리는 조식법(調息法), 즉 행동을 멈추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떡갈나무처럼 굳세고 단단해져야 한다. 그래야 폭풍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부처님은 심신을 평정에 이르게 하고 그것을 내관하는데 도움을 주는 수많은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단계로 요약해볼 수 있다.
1) 인지- 화가 나면, “나는 화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2) 수용- 화가 날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받아들인다.
3) 포용-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를 안는 것처럼 화를 두 팔로 감싸 안는다. 전념으로 감정을 포용한다면 그것만으로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4) 내관- 충분한 평정을 얻게 되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인지, 말하자면 우리 아이를 아프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내관을 한다.
5) 지혜- 내관의 결과 화가 나게 된 갖가지 주요한 원인과 부수적인 조건, 다시 말해 아이를 울게 만들었던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다. 아이는 배가 고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저귀의 핀이 살갗을 찌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친구가 욕을 해대는 바람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곧이어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친구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과도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야기하게 된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때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혜를 얻게 되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알게 된다.
평정 다음으로 사마타가 가지고 있는 세 번째 기능은 휴식이다. 어떤 이가 강변에 서서 강을 향해 조약돌을 던진다고 해보자. 조약돌은 천천히 가라앉아 별다른 노력 없이도 강바닥에 닿게 될 것이다. 조약돌은 일단 바닥에 가라앉으면 물이 흘러가도록 놔두고는 계속해서 휴식을 취한다. 좌선을 할 때면 바로 그 조약돌처럼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앉아서 휴식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휴식의 기술, 즉 심신을 쉬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심신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휴식을 취해야 심신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정을 통해 휴식을 얻게 되고 휴식은 치유의 필수조건이 된다. 숲속에 사는 동물들은 상처를 입으면 누울 장소를 찾아서는 여러 날 동안 완벽한 휴식을 취한다. 먹이나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은 없다. 그들은 그저 쉴 따름이고 그렇게 해서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들은 몸이 아프면, 걱정만 하고 있다. 의사와 약을 구하려들 뿐 가만있지 못한다. 심지어는 휴가 때 해변이나 산에 가서도 쉬는 법이 없다. 그래서 전보다 더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누워있는 것만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아니다. 좌선이나 행선(行禪)을 하면서도 아주 잘 쉴 수 있다. 명상은 고된 노동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숲속에 사는 동물들이 하는 것처럼 그저 심신을 쉬게 하라. 그렇게 하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는 없다. 그 무엇도 얻고자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책을 쓰고 있다 해도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휴식을 취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즐겁게 더 나아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란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가르친 법은, 별도의 수행이 없는 수행이다.”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일 없이 심신에 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식으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 심신을 쉬게 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중지, 평정 그리고 휴식은 치유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중지하지 않는다면, 파괴 과정이 계속될 따름이다. 이 세상은 치유를 요한다. 개인과 공동체와 국가도 치유를 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