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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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묵상글. 1차(00:50), 2차(05:10), 3차(08:25)
6월 25일 묵상글 00시 5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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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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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7,21–29 오늘 복음의 중심에는 ‘말’과 ‘함’의 차이가 놓여 있습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입술, 예언과 기적의 화려한 이력조차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헛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멋진 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바로 이 ‘실행’을 평생 설교한 교부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과 같다고. 아무리 오래 들어도, 아무리 잘 말해도, 행함이 없으면 그 집은 첫 폭풍에 무너집니다. 크리소스토모에게 신앙은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돕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손길이었습니다. 반석과 모래의 차이는 집의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맑은 날에는 두 집이 똑같아 보입니다. 차이는 폭풍이 닥칠 때 드러납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 폭풍을 삶의 시련과 유혹, 그리고 마지막 심판으로 읽습니다. 평소에 말씀을 ‘행하며’ 다져 둔 사람만이 그 폭풍을 견뎌 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짓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순종이 쌓여 가는 더딘 공사입니다. 때로 우리는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선 사람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같은 말씀을 또 한 번 행합니다. 이 끈질긴 다시 일어섬이 곧 인내이며, 인내가 그 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 평화!’ 하고 외치는 말만으로는 평화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용서와 정의를 ‘실행하는’ 반석 위에서만 평화는 폭풍을 견디는 집이 됩니다. 오늘 한반도의 화해를 비는 우리도 말의 평화를 넘어 행함의 평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주님, 주님!’ 하는 말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나는 들은 말씀을 오늘 한 가지라도 실행하고 있는가? 내 삶의 집은 반석 위에 있는가, 모래 위에 있는가?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행하고 있는가?
주님, ‘주님, 주님!’ 하는 입술의 기도를 넘어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제 삶의 집을 반석이신 당신 말씀 위에 짓게 하시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행하는 인내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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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우리는 한 민족이지만 오랜 세월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조상을 기억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멀어졌습니다. 분단은 단순히 국토의 분단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분단이고, 기억의 분단이며, 용서하지 못한 역사와 상처의 분단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으로 왔을 때 유럽에는 이미 ‘네안데르탈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에는 아프리카에는 없던 질병이 있었기에 현생인류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그런 피해를 극복하는 방법은 네안데르탈인과 결합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적인 강점이 현생 인류에게 전해졌고, 지금의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정도 있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산소가 부족한 고지대에서 적응하는 방법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고지대에는 ‘데니소바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는 데니소바인과 결합하여 고지대에서 적응하는 유전적인 강점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는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생 인류는 혼자만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웃한 인종과 결합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주한인사제 협의회’ 총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가 함께 모여서 총회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들은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로부터 새로운 사목의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로부터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사목 프로그램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레지오 수첩과 교본, 매일 미사와 본당 달력’과 같이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소개하였고, 교우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사목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영상으로 제공되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 교우들을 위해서 영상에 한국어로 자막을 만들어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니 총회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내년에는 달라스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남과 북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경계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갈라진 담을 허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계산이 아닙니다. 화해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 때 듣는 기도문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먼저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통일은 정치와 경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과 편견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상대를 악으로만 바라보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통일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장벽도 무너졌습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도 끝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런 희망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저주하는 기도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정치적 승리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민족의 치유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전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해의 논리를 선택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화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시작됩니다. 부부 사이의 용서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품어 주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화해가 모여 큰 화해가 됩니다. 작은 용서가 모여 민족의 치유가 됩니다.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모두가 먼저 화해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 땅에도 미움과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사랑의 새 길이 열리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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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제1독서>의 말씀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이는 축복과 저주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게도 달려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이처럼,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을 요청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화해와 평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29)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 등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서로가 고무하고 찬양해야 될 터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은총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 축복의 말로 신의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에페 4,30)고 하십니다. 곧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의”는 성령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의 몸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셋째>로,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에페 4,32)고 하십니다. 사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을 마땅히 이웃에게 거주 주어야 할 일입니다. 남과 북이 한 형제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넷째>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에페 5,1)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 자신을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내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는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는 두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로,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라.”(마태 18,19 참조)고 하십니다.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일치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 20)
<둘째>로,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태 18, 22)고 하십니다. 용서하는데 있어서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만, 혹은 용서를 청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완고하고 고집부리더라도 혹은 계속해서 똑같은 죄를 반복하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용서하셨듯이, 바로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남북통일기원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일치’와 ‘사랑’을 위한 ‘헌신’과 ‘투신’을 실현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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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는 절차,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 그리고 기도로 이루어지는 분별. 그러나 이 모든 규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지요. 누군가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그 상처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 마음을 모아 …… 청하면”(마태 18,19). 이는 단순한 합의의 기술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저마다 분노와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함께 서 있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 확신 대신 서로를 향한 두려움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누군가의 생각과 삶을 더 무너뜨리지는 않을지, 그 조심스러운 두려움을 안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청은, 먼저 서로의 아픔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용서를 서로 간의 계산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을 무너뜨리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18,22). 이 말씀은 형제에게 받은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풀이되는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용서는 상처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지치면서도, 다시! 분노가 식지 않았는데도, 다시! 그 ‘다시’가 용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공동체가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상처 속에서도 서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 배움의 자리 한가운데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배우기 참 힘들지요. 배우기 싫기도 합니다. 그런 상처받은 마음 또한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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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참여적인 희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먼저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후에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고난의 때의 희망 참여적인 희망! 2026년 6월 24일 수요일 리처드 신부님은 1970년대 후반, 그가 처음으로 세운 공동체 안에 살아 있던 희망을 회상합니다: 저는 오하이오 신시내티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젊은이들과 함께했던 초기 시절을 언제나 소중히 간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이 있었고, 신뢰가 있었으며, 희망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곧바로 비판하거나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즉시 의심하거나 문제 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큼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의 첫 반응은 대개 이분법적이고 부정적이며,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처음에 "저건 믿을 수 없어. 마음에 들지 않아. 원하지 않아."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아니오"보다 앞선 "예"라는 응답은 열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en-theos에서 온 단어인데, 이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을 지닙니다. 저는 지성과 지혜, 그리고 희망이라는 위대한 은총에 기초한 열정을 권하고 싶습니다. 희망은 하느님의 생명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이나 사건이 잘 풀리는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더욱 번창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희망과 사랑을 포함하며, 본래적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 근본적인 "예"가 자아와 두려움에 기초한 계획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요소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두고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2코린 1,19-20)라고 기록한 것처럼 말입니다. 해체(Deconstruction)는 우리 대부분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재건(reconstruction)과 긍정적인 비전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잘못된 것과 잘못된 사람을 지적하며 우월감의 자리에 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긍정적인 일을 하지 않거나, 스스로 긍정적인 응답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판하고 해체한 뒤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좌파 활동가들과 우파 반동가들은 긍정적인 비전이 없고, 믿는 바도 없으며, 사랑하는 이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잘못된 것들에 압도되어, 이른바 "오염된 요소"를 제거하면 세상이 정의롭고 평화롭고 올바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잠언은 "예언(긍정적인 비전)이 없으면 백성은 문란해진다."(29,18)고 말합니다. 복음과 참된 종교, 그리고 참된 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영혼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우주적이고 긍정적인 비전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만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전, 즉 누구를 배척하거나 몰아내지 않는 완전히 긍정적인 비전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사도행전의 장면을 묵상하노라 저는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사랑을 친밀한 공동체의 중심에서 드러내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모습이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랍고 또 지극히 바람직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의 분위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결핍과 풍요, 평화·희망·사랑과 군비 증강 사이의 대비 말입니다. 행동과 관상은 모두 제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배우고 체험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Sean K.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Wisdom Pattern: Order/Disorder/Reorder (Franciscan Media, 2020), 62–63, 6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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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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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5 05:02
- 기도 의지
솔직히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저의 기도 의지가 점차 줄고 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국가라고 북한이 헌법 개정까지 하며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것 때문에 저의 기대와 희망이 꺾인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그런다고 저의 기대와 희망이 꺾이고 기도 의지마저 꺾인다면 제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간적 오기로라도 통일 의지랄까 화해와 일치 의지가 꺾으면 안 되지요. 옛날의 저는 너 때문에 내 희망이 꺾일 수 없다는 자존심과 자주 의지 때문에 통일 의지와 화해와 일치 의지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분발했지요.
그랬던 제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분명 나이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힘이 없어지자 의지도 꺾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이 없으니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고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그래서 안 되지요.
내가 못하고 우리 인간이 못하니 하느님께서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힘이 없으니 주님의 힘으로 이루어 주십사고 오히려 기도해야겠지요,
이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이고 나이 먹은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원하는가? 나는 하느님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가?
우리는 남북이 완전히 두 국가가 되고 통일이 불가능해질라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만이라도 이루어지길 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힘으론 안 돼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리라 믿는다면 그리고 같이하는 기도를 주님께서 꼭 들어주신다고 믿는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같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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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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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 남분 분단의 고착화!
오늘 625, 즉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남북분단이 점점 고착화되고, 기정사실화 되며 이제는 더 이상 되돌이킬 수 없는 과제로 여겨지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봅니다.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북통일이 얼마나 간절한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으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가 주요 부서로 통일부를 만들고 장관까지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통일은 물 건너 간 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만일 통일이 된다면 남쪽이 안게 될 부담, 통일로 인한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그냥 이대로 가는게 좋다고 외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남북 분단은 국제정치패권세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이기 때문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외치던 수많은 민족인사들이 속속 제거되었습니다. 당시 국제정치패권세력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에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815 해방 이후 유럽 쪽 전범 국가인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 쪽 전범 국가인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승전국가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분단 고착화 세력은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는 강대국들에 빌붙어 제 한 목숨, 제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독재자들을 거듭 배출시켰으며, 기회주의의 명수인 친일파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들은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정당 안에서, 여러 매체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선량한 국민들을 호도시키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은 남북 사이의 가뭄에 콩 나듯이 조성되는 해빙 무드라든지, 남북 간의 소통과 만남의 분위기 앞에, 별의별 꼬투리를 잡고 훼방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날, 안타깝게도 분단 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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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19ㄴ-22)> 1) 여기서 ‘두 사람’이라는 말은 ‘공동체’를 뜻하고, ‘마음을 모아’는 ‘일치’를 뜻합니다. 이 ‘두 사람’은 ‘상처를 준 이’와 ‘상처를 받은 이’가 아니라, 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모인 공동체입니다. 물론 상처를 준 이가 먼저 사과하고 화해를 청한다면(마태 5,23-24), 상처를 준 이와 받은 이가 한자리에 모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은 쪽에서 화해하기를 거부한다면, 몸이 한 공간에 있더라도, 그것은 한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몸이 함께 있어도 마음이 갈라져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상처를 받은 쪽에서 화해하자는 청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겠지만, 일치와 화해를 청하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2) ‘마음을 모아’ 라는 말에 대해서,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사도들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13,22-25).” 사도들은 유다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유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유다 한 명만 혼자서 겉돌고 열한 제자는 일치되어 있었던 것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또 유다가 기가 막히게 연기를 잘해서 다른 사도들을 모두 속였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떻든 사도단의 그런 모습은, 사도들이 함께 있었어도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즉 그들의 마음이 제각각 흩어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입으로 ‘같은 기도’를 바친다고 해도, 같은 기도가 아닌 것이 되고,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수난 당시에는 그랬지만, 예수님 승천 후에는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사도 1,14). 그렇게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는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내렸습니다. 따라서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것은, 성령을(또는 성령의 은사를, 또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하는 일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입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와 저쪽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다들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그 방식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주장을 하고, 통일 자체를 별로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마음속으로 화해와 일치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 다른 마음으로,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자리에 모여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한다면, 물론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냥 위선자들의 ‘빈말’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바쳐야 할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이고, 또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마음부터 하나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실상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 더욱더 간절하게 하느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누가 보아도 ‘악’인 것을 ‘악’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선’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4)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미사’의 ‘감사송’에 “이 나라가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져 쓰라린 시련을 겪고 있으나, 주님께서는 불가능을 모르시며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시니, 주님의 오묘한 섭리로...” 라는 기도문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사람이 할 일마저 다 주님께 떠넘기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테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지만 포기하면 안 되고, 절망해도 안 됩니다. 믿음과 희망 속에서, 끈질기게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이미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기도하신 일입니다(요한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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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돌아온 탕자"와 같은 마음으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의 후기 걸작 돌아온 탕자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그의 아내와 자녀 대부분을 잃고, 재정적으로도 몰락한 상황에서이기에, 이 작품은 단순한 성경 이야기의 재현을 넘어, 인간의 상실과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를 깊이 담아낸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두 손은 하나는 보호하는 힘을, 다른 하나는 돌보는 온기를 드러내며, 용서와 화해의 순간을 상징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렘브란트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고, 자신의 이 경험을 "돌아온 작은 아들의 비유"라는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한을 품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산술법으로는 용서가 곧 치유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원한은 관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원한을 품은 사람 자신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원한을 오랫동안 품게 되면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 심지어 신체적 질환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원한을 내려놓고, 회복과 화해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치유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비를 이웃에게 흘려보낼 때, 슬프고 외로운 사회가 구원의 빛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철저한 상실과 깨어짐의 깊은 자리에서, 렘브란트는 반항하던 아들을 그려낸 것입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하며, 머리카락은 거의 빠지고, 완전히 꺾여 버린 모습입니다. 참으로 불쌍하고 외로운 인생의 잔해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따뜻한 환대 속에는 인내와 이타심, 그리고 오래 참음의 기운이 스며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노인의 두 손은 서로 다른 성격을 드러냅니다. 다 아시겠지만... 한 손은 남성적이고 보호하는 힘을, 다른 손은 여성적이고 돌보는 온기를 나타냅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복음의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충실히 묘사하지만, 사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놀라운 치유의 현실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감정의 균열과 구원의 순간을 목격하게 합니다. 늙은 화가는 자신의 모든 상실이 회복되고 모든 빚이 갚아진 장면을 상상하며 그려낸 것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합니다. 곧, 가장 깊은 갈망—용서, 안전, 화해, 집, 복된 안도와 휴식—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맛보게 하는 겁니다. 오늘은 6.25전쟁을 기억하며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사실 지금의 풍요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아픔과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공감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모상으로 창주해 주시면서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 심어 주신 당신 자비의 자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측은지심이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단서(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중 하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이들의 상처는 곧 나의 상처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단순히 남북의 단절된 상황만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단절을 더 깊게 만들어가는 셈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더욱 불행해지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자비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게 된 작은 아들처럼 우리가 우리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비의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돌아갈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깊이 의식하고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치유와 다시 이어짐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매일 우리는 이런 치유와 화해의 은총을 주님께 청해야 하겠지만, 오늘 특히 우리 민족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단절된 현실을 깊이 의식하며 주님께 특별한 도움을 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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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12:05 까지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묵상글 아직 안 올라왔습니다
---------------------------------------------------- 26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2:05 추가 마태 18,19ㄴ-22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한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며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분단된 우리나라는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슬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서로를 향한 오해와 미움이 적대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모릅니다. ‘네가 지구상에서 없어져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극단적 태도로 인해 서로 간에 얼마나 깊은 오해와 불신, 증오의 골이 파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불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이해와 존중, 용서와 자비를 통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만이, 그렇게 하여 참된 일치를 이루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용서와 화해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는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 두 가지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용서를 상대가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걸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라 생각한 점이고, 둘째는 용서를 나에게 잘못한 이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 내가 상대방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여긴 점입니다. 그러나 둘 다 잘못된 생각이지요. 첫째, 상대방의 잘못을 그저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참든 열 번을 참든 언젠가는 결국 분노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상대방에게 ‘복수’라는 칼날을 휘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용서는 내가 상대방에게 베풀어도 그만 안베풀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상대방 모두가 살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횟수를 정해놓고 참는 건 참된 용서가 아니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큰 자비와 사랑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남이 나에게 상처 입히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두고두고 원망하면서, 내가 남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가볍게 여긴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하십니다. 용서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마음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그릇이 큰 사람은 내가 형제에게 행한 용서보다 훨씬 더 큰 용서와 자비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미루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셔도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죄책감과 자괴감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기 어렵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그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음이 많이 힘들고 괴롭지만 당신이 이미 그를 용서하셨기에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모르게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부족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용서로 마음을 모은다면 우리가 바라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비로소 실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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