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懺悔品
何名自性自度오
卽自心中에 邪見煩惱愚痴衆生을 將正見度니
旣有正見이라 使般若智로 打破愚痴迷妄衆生하야
各各自度하되 邪來正度하고 迷來悟度하고
愚來智度하고 惡來善度니 如是度者名爲眞度니라
又煩惱無盡誓願斷은 將自性般若智하야
除却虛妄思想心이 是也니라 又法門無量誓願學은
須自見性하야 常行正法이 是名眞學이니라
又無上佛道誓願成은 旣常能下心하야 行於眞正하고
離迷離覺하야 常生般若하며 除眞除妄하야
卽見佛性하면 卽於言下에 佛道成이니
常念修行은 是願力法이니라.
00000
何名自性自度오→
무엇을 이름 하여 자성을 자도하는 것인가?
자기의 성품을 자기가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卽自心中에→ 곧 자심 중에
邪見煩惱愚痴衆生을→
사견. 번뇌. 우치중생 , 어리석고 우둔한 중생을,
將正見度니→
정견을 가져서 제도하는 것이다.
正見. 바른 소견을 가지고 제도하는 것이다.
旣有正見(기유정견)이라→
이미 正見, 바른 견해가 있음이라.
使般若智로서→ 반야지로 하여금
打破愚痴迷妄衆生하야→
우치하고 미망한 중생을 타파해가지고서,
各各自度하되→ 각각 스스로 제도하되,
邪來면 正度하고→
삿된 것이 오면 바른 것으로서 제도하고,
迷來면 悟度라→
미혹한 것이 오면 깨달음으로서 제도하고,
愚來면 智度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서 제도하고,
惡來면 善度니→
악이 오면 선으로서 제도하는 것이니,
如是度者가→
이와 같이 제도하는 것이
名爲眞度니라→
참으로 제도하는 진정한 제도다.
이것은 반야지로 하여금 愚痴迷妄衆生을 타파한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아니면, 邪가 와도 邪가 왔는지,
또 무엇이 正인지, 邪와 正을 분간을 첫째 못하지요.
迷와 悟를 분간을 못합니다.
그래 근본은 눈이 밝아져야 된다는 것이지요.
눈이 밝아지고서야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又煩惱無盡誓願斷은→
번뇌가 다함이 없다 하더라도 맹세코 끊는다. 하는 것은,
將自性般若智하야→
자성의 반야지. 반야도 智이고, 智도 지혜예요.
그러나 般若智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라고 하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般若智’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우리마음에서 생기는 것이지,
어디 뭐 나무에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산속에 꼭꼭 숨어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우리마음에서 어떤 깨달음의 눈이 열렸을 때,
그것이 그대로 般若智입니다.그런 自性般若智를 가져서,
除却虛妄思想心이→
除却. 제해버린다. 이 말입니다. 무엇을?
허망. 사상심. 허망한 생각들.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생각들을 除却해버리는 것.
제해버리는 것. 是也(시야)니라→ 이것이 바로 그거다.
허망한 마음 제거하는 것이 바로
煩惱無盡誓願斷이다. 제거하는 데는 결국은
自性의 般若智가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慧日破暗(혜일파암). 지혜의 태양으로서 어둠을, 어둠의
無明(무명)을 이것이
虛妄思想心이지요. 어둠의 무명을 깨뜨려버린다는
그런 경전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又法門無量誓願學은→
법문이 한량없다고 하지만 맹세코 배운다고 하는 것은
須自見性하야→ 모름지기 스스로 見性. 성품을 봐서,
육조스님이
견성이라는 말을 잘 쓰셔요.
임제스님하고
연관을 시켜서 생각을 하면,
임제스님은 “사람”이라는 말을 잘 써요.
무슨 사람이냐? 우리가 말하는 그 사람!
법문 듣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地(지) · 水(수) · 火(화) · 風(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육신이 법문 듣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말을 하고 말을 듣느냐?
허공도,
不解說法聽法이라.
텅 빈 허공도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말을 들을 줄을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형상도 아니고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는,
그러면서도 歷歷孤明(역력고명)한
너무나도 뚜렷하고 분명한 그 사람이
말을 할 줄 알고 말을 듣는다.
“바로 그 사람을 잘 주목하라.” 그랬어요.
“그 사람을 잘 주목하라.”
참 아주 명쾌해요. 무슨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왜 없다고 했나?’ 이런 식이 아니고,
“지금 말 듣는 그 사람을 잘 주목하라.”
그랬어요. 말 듣는 그 사람을 놓지지 마라. 그래 버렸어요.
여기는
견성. “성품을 보라. 자기성품을 발견하라.”
그런 이야기를 하고,
거기는
그냥 ‘주목하라.’ ‘識知(식지)하라.’ 그랬어요.
잘 알라. 참 뛰어난 근기들이 남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피나는 수행을. 그것도 수행을 바르게 했을 때,
제대로 어떤 깨달음을 성취하고, 그런 깨달은 사람도
수 없이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아주 우뚝 솟은
그런 선지식의 법문이라고 하는,
이
육조단경이나 또
임제록이나
기타 몇몇 법문들은 참 명쾌하고,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이 무궁무진하고 그렇지요.
須自見性해서→ 모름지기 스스로 見性해서
常行正法이→
항상 正法. 바른 법을 행하는 것이,
是名眞學이다→
이것이 이름이 참으로 배우는 것이다.
又無上佛道誓願成은 旣常能下心하야→
이미 항상 능히 下心해서
行於眞正하고→
下心. 불교의 낱말 중에 이 말이 참 좋은 말이지요.
下心한다. 세속적으로는 “겸손 한다.” “겸양한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불교에서는 下心이라고 그래요.
下心. 자기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내 마음을 저 밑에다
두는 것이지요. 이 표현이 참 좋아요.
下心한다. “하심을 못하는구만.” 이런 말을 해요.
旣常能下心해서 行於眞正하고→
眞正. 참답고 바른 것을 늘 행해요.
우리가 “진리” 그러지요? 바른 이치! 참다운 이치!
그러는데, 그런 것을 행하고,
離迷離覺하야→
迷도 떠나고 覺도 떠나서, 迷이니 覺이니 하는 것은
서로 상대적인 거예요. “깨달음, 깨달음”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때는 “깨달음”이라는 말을 편의상 쓰지요.
그것마저 안 쓰면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離迷離覺입니다.→ 迷도 떠나고 覺도 떠났다.
우리가 설명하려면 편의상 미혹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을 설정해놓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미혹이다 깨달음이다하는 것이 진짜
있는 것으로 알면 안 됩니다. 그래서,
常生般若하며→
항상 般若를 내며. 지혜만 내며, 그래서
除眞除妄하야→ 眞도 제거하고 妄도 제거해서
卽見佛性하면→ 곧 불성을 볼 것 같으면,
絶學無爲閑道人은
不除妄想不求眞이라.
그런 말이 영가 증도가에 있어요.
육조스님의
제자 중에 아주 뛰어난 제자!
영가 현각스님이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 스님은 육조스님에게 가서 인가를 탁 받고는
자신의 깨달음의 소회를 노래로서 표현했는데요.
그건 禪詩(선시)중에서 아주 알아주는 선시입니다.
선시의 白眉(백미)라고 할 정도인데 상당히
긴 깨달음의 노래지요.
과거 선사들이 아주 참, 다 좋아한 글인데요.
거기에 첫 마디가 그래요. ‘배울 것도 다 끝나 버리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부제망상불구진이라.’ 망상도 제하지 않고,
여기는
除眞除妄, 眞도 제하고 妄도 제한다 그랬는데,
不除妄想不求眞. 망도 제하지 아니하고 진도 구하지 않는다.
무슨 진이니 망이니. 진리니 망상이니 하는
그런 단계를 넘어섰다 이겁니다. 그랬으니까
진리를 구한다든지 망상을 제거한다든지 하는 것이
도대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 했듯이,
眞이있고 妄이있는 그런 구름층을 뚫고 올라간
높은 산봉우리라니까요.
卽見佛性할 것 같으면, 불성을 볼 것 같으면,
卽於言下에→ 한 마디 딱 떨어지자마자,
佛道成이다→ 불도가 이루어진다.
‘言下에 大悟다.’그래요.
선가에서 아주 잘 쓰는 말입니다. ‘언하에 대오다.’
또 ‘언하에 豁然(활연) 대오다.’
임제스님 같은 이는,
대우스님한테 가서 대우스님이
“네가 황벽스님한테서 어떤 공부를 했느냐?”
그러니까
“내가 세 번이나 불법을 물으러 갔는데,
세 번 물으러 갔을 때마다 실컷 얻어맞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이 대우스님이 있다가,
“아이고 그렇게 친절하게 너에게 대해주더냐?
그 황벽스님이
그렇게도 친절하게 너에게 대해주더냐?”
이 말 한마디에 임제스님이 깨달았거든요.
자기는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심하게 얻어맞았는가?
그 세 번. 한 번에 스무 방망이씩 얻어맞았어요.
조사스님들이 사람 때릴 때는 인정사정 안 보고,
머리가 깨지든지 팔이 부러지든지, 그런 것 전혀
개의치 않고 사정없이 후려쳐버리거든요.
스무 번씩 그것도...
그런데 그걸 무려 세 번이니까
60방망이를 얻어맞은 겁니다. 그래서
거의 다 죽어가는 목숨을 건지다시피 했는데,
엉뚱하게 다른 스님한테 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하~!
그 스님이 그렇게도 너에게 친절하게 하더냐?
네가 뭘 이쁘게 잘 보여서 그렇게 친절하게
지도를 받았느냐?”
이 말 한 마디에 그냥 세계가 확 달라져버려요.
완전히 깨달아버렸어요.
언하에 대오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 만큼 말하자면 사실은 부풀어 있었지요
자기 그 공부가 내면에, 하~~
갈등을 했든지 고민을 했든지, 아무튼 그런 세월이
상당히 경과해서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는데
그 때렸을 때, 그 아픔을 견디면서 그 때 공부가
사실은 많이 되었겠지요.
아주 짧은 시간에 공부가 많이 되었을 겁니다.
워낙 순수한 스님이니까요. 그런 경우가 많지요.
조사스님들보면요. 또 말을 듣고 깨닫는 경우도 있고요.
부처님 같이 좌선하시다가
새벽별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문득...
그건 매일아침 보는 건데,
그것은 공부가 부풀어서, 부풀대로 부푼
그 순간이니까 보자마자 척.
거기서 어떤 성도를 하게 되고
깨달음을 하게 되는 그런 겁니다.
言下에 佛道成이니. 불도가 이루어지나니
常念修行은→ 항상 수행을 생각하는 것은
是願力法이니라.→ 요는관심입니다.
常念修行은 是願力法이다. 이것 좋은 말입니다.
常念修行.
항상 수행을 생각한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어떤 일에 쫓기더라도. 어떤 바쁜 일에 쫓기든 간에
계속 앉아서 “이뭣꼬” “이뭣꼬”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라도 늘 생각하는 것. 늘 관심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좋은 정진이고 그것이 원력의 도리라고요.
그 만치 내가 관심이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원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임제스님의
隨處作主!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곳을 따라서 주인을 지으라.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런데 어디 곳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공부하는 정신을 잃지 말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고,
또 공부가 어느 정도 된 사람에게는 자기 주인공을 놓지지 말라!
늘 주인공으로서 살라! 저것의 해석이 아주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장에
“공원이라 하더라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라.”
“공장의 주인으로 살아라.”
수처작주를 그렇게 해석해도 좋아요.
자기소임이 사장이든 사원이든 수위든 관계없이,
어떤 책임을 맡았든지 간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라.”
그렇게 해석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隨處作主!
處를 따라서 자기 직함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늘 “주인의식으로 살아라.” 그렇게 해석해도 참 좋은 말이에요.
일본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해석을 잘 합니다. 저것은 제대로
임제스님의 정신대로라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일터에서 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가 빼앗기지 말라.
내가 내 자신을 그 어떤 상황에 빼앗기지 말라.
자신을 지키고 있어야 됩니다.
자신을 지키고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고,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일을 해야 그 일이 바르게 되는 것이지,
자기를 잃어버리고 그 일에만 매달려 버리면,
그것은 완전히 허수아비노릇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허수아비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보면 잘 씁니다.
常念修行!
우리가 항상 수행을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원력법이다.
懺悔品
善知識아
今發四弘誓願了하니 更與善知識으로
授無上三歸依戒하리라
善知識아
歸依覺兩足尊하며
歸依正離欲尊하며
依淨衆中尊하야 從今日去로 稱覺爲師하고
更不歸依邪魔外道를 以自性三寶로
常自證明하라
勸善知識하야 歸依自性三寶케하노니
佛者는 覺也요
法者는 正也요
僧者는 淨也라
自心이 歸依覺하야 邪迷不生하고
小欲知足하야 能離財色함이 名兩足尊이요
自心이 歸依正하야 念念無邪見하고
以無邪見故로 卽無人我貢高와
貪愛執着이 名離欲尊이요
自心이 歸依淨하야 一切塵勞愛慾境界에
自性이 皆不染着함이 名衆中尊이니라
若修此行하면 是自歸依어늘
凡夫不會하고 終日, 至夜토록 受三歸戒하나니
若言歸依佛인댄 佛在何處오
若不見佛인댄 憑何所歸리오 言却成妄이로다
善知識아
各自觀察하야 莫錯用心이니
經文에 分明言,
自歸依佛하라하시고 不言歸依他佛이시니
自佛에 不歸면 無所依處니라 今旣自悟인댄
各須歸依自心三寶하야 內調心性하고 外敬他人하라
是自歸依니라
00000
三歸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四弘誓願도
참 투철하신 깨달음의 육조스님이니까
그 해석이 참 아주 특이하고 명쾌하고,
부처가 온다하더라도 여기서 어떻게 달리
이의를 달수 없는 그런 설명이에요.
사홍서원 설명 한편에 그냥 우리불교의
근본 공부가 다 들어 있어요.
善知識아
今發四弘誓願了하니→지금 사홍서원을 발해 마쳤으니,
更與善知識으로→다시 선지식으로 더불어,
授無上三歸依戒하리라→無上三歸依戒를 주리라.
戒중에선 최고의 계다 이 말입니다.
“최상의 계다.” 無上= 최상이라 해도 좋아요.
“최상의 삼귀의 계를 줄 것이다.”
계가 여러 가지가 있지요. 삼귀의 계가 있고,
5계가 있고, 10계가 있고,10중 대계가 있고,
48계가 있고, 팔경계가 있고, 250계가 있고,
비구니 348계가 있고, 그 경계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근본은 三歸依戒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부처님 당시 때는 처음으로 무슨 계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삼귀의 계]하나 뿐이었어요.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계입니다.
佛 · 法 · 僧. 三寶잖아요?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나도 그 단체에 일원이 되겠습니다.”
거기에 귀의하는 것이지요. 귀의라고 하니까
특별히 다른 서약을 한다기 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의 일원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귀의하는 것이지요. 초기에는 이것이었어요.
돌아가신 분을 천도하는데 있어서 불교적으로
천도하려면 무조건 삼귀의 계는 받고나야 된다고요.
불자가 되어야 법문을 해주든지 말든지 하지요.
이것은 불자가 되는 아주 기초의 첫 단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삼귀의 계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돌아가신 분을 천도하는데도
三歸依戒!
보살계를 줄 때도 맨 처음에 삼귀의 계부터 일러주고
그 다음에, 十重大戒(십중대계) 48계를 일러주고
그래 여기서 삼귀의를 말하면서, 삼귀의 계라.
이렇게 반드시 불자로서 가져야할 사항.
이런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지켜야할
사항은 세상에서 최고 존귀한 것이다. 그래서
無上三歸依戒예요. 無上. 최고 높은.
善知識아
歸依覺兩足尊하며→
귀의불인데 佛이나 覺이나 같지요.
불을 번역하면 각이 되니까요.
선지식아
兩足尊,
두 가지가 만족한 그런 어른께 귀의하며,
歸依正離欲尊하며→ 바른법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歸依法離慾尊하는데,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이치지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바른 이치지,
바른 이치 말고 다른 것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요즘 식으로 말하면 되게 튀는 설명 같고,
유별난 설명 같으면서도 또 아주 너무 딱 맞는
말이에요.
歸依正離欲尊이라→
바른 가르침은 욕심을 떠난 존귀한 분,
존귀한 것. 거기에 귀의한다. 또
歸依僧衆中尊인데
歸依淨衆中尊→ 僧團(승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청정한 단체다 이거에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청정한
무리들이다. 그래서
淨衆中尊이라→ 청정한 대중 가운데 존귀함에 귀의한다.
이렇게 해놓고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지요.
從今日去(종금일거)로→ 오늘부터
稱覺爲師(칭각위사)하고→
각을 일컬어서 스승을 삼아라.
각은 부처님이지요. 부처님을 일컬어서
스승을 삼아라. 각을 일컬어서 스승을 삼아라.
그리고
更不歸依邪魔外道를→다시는
邪魔外道에 귀의하지 아니한 것을,
以自性三寶로서→자기마음의三寶로서
常自證明하라→항상 스스로 證明하라. 그러니까
邪魔外道. 삿된 소견가진이.
魔群(마군) ·
外道(외도).
이런 데는 절대 귀의하지 말라.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自性三寶.
三寶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내 마음에 있는 것.
내가 깨달을 때 그것은 부처예요. 내가 바를 때 법이다 .
내가 청정할 때 그것은 僧家(승가)다 이것이지요.
이것이 自性三寶 거든요. "그것으로서 항상 증명을 해라."
깨달아야 되고 발라야 되고 청정해야 된다.이것을 가지고
邪魔外道를 가려낸다는 것이지요.
勸善知識하야→ 선지식에게 권해서,
歸依自性三寶케하노니→自性三寶에 귀의한다.
그러니까 삼보라는 개념도 우리는 부처님 ·
부처님의 가르침 ·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육조스님은 自性三寶 예요.
앞서 사홍서원 이야기처럼 아무리 불법승 아니라
어떤 불법승이라 하더라도 결국 내 마음밖에
달리 불법승이 있느냐? 이것이지요.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自性三寶에 귀의하라.
우리 마음의 三寶에게 귀의하라.
佛者는 覺也요
法者는 正也라→불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우리 마음이 깨달으면 그것이 그대로
自性三寶예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우리 마음이 반듯할 때. 그것이 법이다 이것니지요.
僧者(승자)는 淨也(정야)라→승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僧家(승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은 청정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自心이 歸依覺해서→
覺에 귀의해서. 우리 마음이 각에 귀의해서,
邪迷不生하고→
삿되고 미혹한 것을이 생하지 아니하고
小欲知足해서→
작은 욕심으로서 만족함을 알고 또
能離財色함이→
능히 재와 색을 떠나는 것이
名兩足尊이요→
이름이 兩足尊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다 이것이지요.
깨달음이 있으면
邪迷. 삿되고 미혹한 것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럼
小欲知足이 가능하다고요. 뭔가 자기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여기는 그런 작은 깨달음이 아니라
큰 깨달음. 완전한 마음을 깨닫는 것을 뜻하지만,
어느 정도라도 인생에 대한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
小欲知足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知足이 제일 富다.
만족함을 아는 것이 제일 부자다.
小欲知足.
뭐 세속에서 잘 쓰는 말이지요.
能離財色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처님께 兩足尊. 진정한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뭐 별거겠나?
邪迷不生하고
小欲知足해서
能離財色하는 것.
이것이 부처지, 이런 이야기입니다.
自心이 歸依正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마음이 바른 것에 귀의를 해서,
念念無邪見하고→
염념에 邪見이없고, 삿된 소견이 없고,
以無邪見故로→
삿된 소견이 없기 때문에,
卽無人我貢高(즉무인아공고)와
貪愛執着이→
인 · 아 · 공고와 탐 · 애 · 집착이 없는 것이,
名離欲尊(명이욕존)이요→
이름이 이욕존이다. 이것 참 중요한 말이예요.
人我貢高. 인상 · 아상. 나다 남이다 하는,
남이다 나다 하는 그런 의식.
自我意識. 그것은 여기선 我에 해당 됩니다.
그냥 人은 이럴 때는 남입니다.
차별의식. 남이라고 하는 그런 差別意識.
그런 차별의식과 자아의식을 우리는
너무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貢高(공고)입니다.
높이 속바친다. 높이 받든다 그래요.
자기를 내 세우는 것.
그리고 남이라고 하는 것이 대한
차별심을 너무 뚜렷하게 갖는 것.
그리고
貪愛執着. 너무 탐욕하고 애착하고,
그래서 집착하는 것. 이런 것이 없는 그것이
離欲尊이다. 욕심을 떠난 가르침!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다 이겁니다.
부처님 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욕존이다. 이겁니다.
離欲尊! 욕심 떠난 것이다. 딴거 없다 이겁니다.
自心이 歸依淨하야, 자기 마음이 청정한데 귀의해서,
一切塵勞愛慾境界에 自性이 皆不染着함이
名衆中尊이니라→
一切塵勞. 번뇌지요. 愛慾, 그런 경계에
우리마음이 染着하지 않아요. 歸依淨이니까요.
자신이 청정한데 귀의 했으니까요.
청정한 단체에 귀의하나 청정
그 자체에 귀의하나 뜻은 같지요.
一切塵勞愛慾境界에 自性이 染着하지 않는.
물들지 않는 이것이
名衆中尊이다→
衆中에 가장 높은 대중이다.
그것이 이러고 저러고 해도 그래도
불교단체가 어떤 단체보다도 제일 나은 것이지요.
어쨌든 목표가 불교를 공부하고 부처님
닮아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니까요.
불교단체의 목적이니까요.
그래도 낫다고요. 그래 衆中尊이지요.
무리들 가운데. 단체가 가운데 제일 높은 단체.
제일 괜찮은 단체다 이 말이지요.
衆中尊!
若修此行하면→
만약 이러한 행을 닦을 것 같으면,
是自歸依어늘→
이것은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거늘,
凡夫不會하고→
범부들은 알지를 못하고,
終日至夜토록→
낮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受三歸戒하나니→
三歸戒를 받나니, “뭘 해라.” “뭘 해라.”
그거 전부 자기마음에서 해결될 문제인데,
바깥으로 그렇게 三歸戒를 받나니,
若言歸依佛인댄→
중국에 또 수계의식이라는 것이 아주 복잡해요.
그리고 며칠씩 걸려요. 삼귀의 계 받는 것만도
며칠씩 걸리는데,
보살계하면 뭐...
지금도 대만 같은데 가보면 스님 될 때
사미계를 받는다던지, 또 비구계를 받는다던지,
아니면 신도들이 보살계를 받는다던지 할 때,
여러 날 걸려요. 보통 열흘씩 보름씩 걸려요.
대부분 다 그래요.
비구계는 한 달씩 걸린다던가?
어쩐다던가? 삼귀의 계도 며칠씩 걸린다는데...
아마 하루 걸리는 모양이예요. 낮부터 밤에
이르도록 한 걸로 봐서는...
삼귀의 계 받는데 그렇게 걸린다 이것이지요.
終日至夜토록 했지 않습니까?→
낮부터 밤에 이르도록 三歸戒를 받나니,
자기마음속에 있는 건데...
若言歸依佛하면→
만약 歸依佛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佛在何處오→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는데 그럼 한번 따져보자.
부처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若不見佛인댄→
만약에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憑何所歸(빙하소귀)리오→
어디에 의지해서, 어디에 의지해서 돌아가겠는가?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했으니, 부처가 어느 곳에 있느냐?
만약에 부처를 어느 곳에 있는지 찾지 못한다면
그러면 歸依가 안 되지 않느냐?
歸依佛이 안 되지 않느냐? 이것이지요.
아~~! 참 뭐 어떻게 숨 쉴 틈이 없지요.
귀의불이 안 되잖아요. 뭐 불상에 귀의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은 설마 아니겠지요? 그러니
귀의불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마음 빼버리고
도대체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겁니다.
설명할 길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참~~ 맞는 말이지요.
만약에
歸依佛兩足尊.
우리가 그러는데 부처가 어디 있느냐?
만약에 부처가 어디 있는 줄 모른다면,
부처를 못찾는다면 귀의불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지 않느냐?
憑何所歸리오→
어디에 의지해서 귀의할 바리오? 돌아가리오?
言却成妄(언각성망)이로다→
言이. 말이 도리어 거짓말이 돼버렸다.
“귀의불”
한다는 말이 돼도 않는 엉터리가 돼버렸다.
善知識아 各自觀察하야→
각각 스스로 관찰해서
莫錯用心이니→
잘 살펴서 잘못 마음쓰지 마라.
“제발 마음 좀 제대로 쓰라.” 이것이지요.
莫錯用心.
그릇 用心하지 말라. 그거 잘 관찰해야 돼요.
누가 뭐 말한다고,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
어떤 권위 있는 단체가. 어디 법당에서.
법상에서 말한다고 그냥 그대로 아무 비판 없이,
그 나름대로의 아무 점검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곤란하지요. 그 말입니다. 각자 관찰해서,
스스로 잘 관찰해서 “잘못 마음 쓰지 마라.”
經文에 分明言하되
自歸依佛이라→
경문에 분명히 말하기를 스스로 부처에게 귀의한다.
自歸依佛.
이것은 화엄경 정행품에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不言歸依他佛이라→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처에게 귀의하지,
스스로의 부처에게 귀의하지,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아니 하겠다.
自佛에 不歸→
자기 부처에게 귀의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無所依處라→
의지할 곳이 없다. 정말 그렇지요.
부처님당시가 되었든,
부처님이 생존하지 않는 때가 되었든 간에,
그 허망한 육신의 부처를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닐 테니까요. 자불에 귀의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歸依佛이라고 하는 말이 아예 성립이 안 된다
無所依處니라.
今旣自悟인댄→
지금에 이미 스스로 깨달았을진댄,
各須歸依自心三寶하야→
각각 모름지기 自心三寶에 자기마음,
우리들 마음의 三寶에 귀의를 해서,
內調心性하고→
안으로 心性을 잘 다듬고, 外敬他人하라→
다른 사람도 다 自心三寶가 있는데, 뭐 혼자만
自心三寶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外敬他人 해야지요. 밖으로 다른 사람도
공경해야지요. 다 걸어가는 三寶 인데요. 그것이
是自歸依니라→
이것이 스스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自心三寶에 귀의하는 것이다.
사홍서원하고 삼귀의인데 우리 그동안
四弘誓願 · 三歸依.
그저 입만 벌리면 하는 말이지만, 정말
根本에 입각해서.
宗旨에 입각해서,
그 어떤 깨달음의 근본정신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이것이 불교의 ABC나 마찬가지인
삼귀의 · 사홍서원을 이렇게 거론을 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런데서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