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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점정리(重點整理) 1. 몽고의 건국과 대륙의 형세 : 13세기 초 테무진이 몽고 세움. 2.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침입 : 몽고에 쫓기어 침입→ 조충, 김취려 등이 격파→ 글안장 만듬. 3. 몽고의 침입 : 6차 침입하여 옴.→ 40 여년 항전하다 항복함. |
가. 몽고의 건국과 대륙의 형세
(1) 몽고의 건국 :
13세게 초에 몽고의 테무진(鐵木眞 : Temujin)이라는 영웅이 몽고 제 부족을 통합하더니
스스로 왕이 되어 징기스칸(成吉思汗)이라 호(號)하여(1206) 그 세력이 멀리 러시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2) 동진국(東眞國)의 성립 :
금(金)의 반장(叛將) 포선만노(浦鮮萬奴)는 몽고의 압박으로 간도(間島)지방에 밀려와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3) 대요국(大遼國)의 건국 :
몽고의 압박으로 금에서 분열과 파탄이 생기매
이에 속하였던 글안족의 일부는 금을 배반하고 요동지방에 대요국을 세웠다.
나. 대요수국(大遼收國 : 글안)의 침입<강동(江東)의 역 : 1217∼ 1219>
(1) 대요는 몽고에 쫓기어 고려 서북 제현을 침략하고
고종 4년(1217)에는 남침하여 개경, 철원, 원주 등지를 약탈 침략하였다.
(2) 이에 여장(麗將) 김취려(金就礪), 조충(趙庶)등이 이를 격파하매
대요(글안)의 잔존은 평양 동쪽 강동성(江東城)으로 도주하여 반항하였다.
(3) 이때 몽고는 동진국 군사와 더불어 고려를 돕는다는 구실로 국경을 넘으매
고려는 결국 몽고와 연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글안족 6만 여명을 포로로 하였다.
이것이 고려가 몽고와 관계를 맺은 시초이었다.
(4) 글안장(契丹場) :
이 싸움에서 얻은 글안의 포로를 조충(趙庶)은 사람이 적게 사는 제주군현(諸州郡縣)에 분송하여
전토(田土)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이를 글안장이라 한다.
다. 몽고의 침입<1231∼ 1259>
(1) 몽고의 1차 침입< 고종 18년 : 1231>
(가) 침입원인
1) 몽고는 본시 세계제국건설의 야망을 가지었다.
2) 몽사(蒙使) 살해문제 :
몽고는 대요수국(글안)을 친 것을 미끼로
고려와 화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물자를 요구하며
그 사신이 오만하여 고려를 괴롭히더니
고종 12년(1225)에 몽사 저고여(著古與)가 귀로에 도적(여진족)에게 암살되자
이 책임을 고려에 돌려 쳐들어온 것이다.
(나) 경과
1) 고종 18년 몽장 살례탑(撒禮塔)이 대거 침입하였다.
2) 고려는 김경손(金慶孫), 박서(朴犀)등으로 하여금 이를 막았다.
3) 살례탑은 철주를 거쳐 구주에 침입하매 박서 등은 분전하였다.
4) 몽고군은 구주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개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다) 결과 :
고려는 무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으므로
몽고의 권항사(勸降使)를 인견하고
예물을 갖추어 왕제 회안공(淮安公)을 보내어 강화케 하였다.
▶이에 몽고는 고려에 다루가치(達魯花赤)란 행정 감독기관(72명)을 두기로 한 후 다음해에 회군하였다.(1232)
(2) 강화천도(江華遷都)와 몽고의 2차 침입
(가) 강화천도 :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다루가치의 압박이 심하고 또 그들에 대한 반항심이 강하여
고종 19년 수전(水戰)에 대한 몽병의 약전을 이용하여 강화도에 천도하고 장기항전의 태세를 취하였다.
(나) 몽고의 2차 침입
1) 원인 :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여 계속 항몽정책(抗蒙政策)을 변경하지 안으매 재차 침입하였다.
2) 경과 :
고종 19년(1232) 8월에 몽장 살례탑이 재차 침입하여 개경과 남경(서울)을 함락하였다.
▶그후 살례탑은 처인성(處仁城 : 용인)에서 중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射殺)되매
몽고군은 사기(士氣)를 잃고 그의 부하 철가(鐵哥)에 인솔되어 되돌아갔다.
(3) 제 3차 침입
(가) 몽고는 고종 20년에 동진을 평정하고
왕 21년에 금국을 멸망시킨 후 이듬해(1235) 별장 당올태(唐兀台)를 시키어 고려에 3차로 침입하였다.
(나) 몽고군은 전주(全州), 경주(慶州)등 전국 각지를 분탕 노략질을 함부로 하매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몽병의 철수를 요구하자
몽고군은 고조의 입조(入朝)를 약속 받고 회군하였다.(고종 25년)
(다) 몽병 침입의 피해 :
1) 국민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고
2) 대구 부인사 대장경판과
3) 황룡사의 목조 9층탑 등의 소실등 많은 문화재를 잃었다.
(4) 제 4차 침입 :
고종 33년(1246) 몽고에 정종(定宗)이 서매
다시 출록친조(出陸親朝)를 구실로 아모간(阿母侃)등이 고려의 북계를 침범하였으나
정종이 죽으매 곧 철수하고 말았다.(1248)
(5) 제 5차 침입 :
고종 38년(1251) 몽고에 헌종(憲宗)이 서자
이듬해 몽장 야고(也古 : 也窟), 차라대(車羅大 : 札刺帶)등을 보내어 내침 하였다.
(6) 제 6차 침입 :
이후 몽고는 고종 42년(1255)에 여왕(麗王)의 출육입조(出陸入朝)를 요구하면서 또 침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