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왕가도(王可道)는 큰딸을 현종(顯宗)에게 출가시키고, 작은딸은 현종의 아들인 덕종과 혼인시켜 친자매간이 고부간(姑婦間)으로 되었다. * 현종과 덕종 사이는 부자간이되 또한 동서간(同壻間)이다. 0 덕종과 제1비 경성왕후(敬成王后)의 혼인은 이복남매간의 근친혼이다. 0 덕종과 제3비 효사왕후(孝思王后)의 혼인은 이복남매간의 근친혼이다. 0 덕종의 후궁 부여(扶餘) 출신 이씨(李氏)는 아우 정종(靖宗) 비 용목왕후(容穆王后)와 자매간이다. * 덕종과 정종이 친형제간이므로 후궁이씨와 용목왕후는 친자매간이 친형제간의 부인이 되어 서로 동서간(同棲間, 娣姒)으로 되었다. 0 덕종의 딸 이름 미상 공주와 검교태사 왕충의 혼인은 이복 숙부와 질녀 사이의 근친혼이었다. 0 덕종 제4비 용절덕비(容節德妃) 경주김씨는 문종(文宗)의 제5비 인목덕비(仁穆德妃)와 자매간이다. * 정종과 문종이 이복형제간이므로 용절덕비와 인목덕비는 서로 친자매간이면서 시가(媤家)로 동서간(同棲間, 娣姒)이다.
|
고려 9대 덕종(德宗, 1016~ 1034), (재위, 1031~1034년)의 휘는 왕흠(王欽), 자는 원량(元良),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경강대왕(敬康大王), 능호는 숙릉(肅陵)이다. 현종(顯宗)과 원성왕후(元成王后) 안산김씨(安山金氏) 사이의 맏아들이다. 왕후의 아버지는 중추사(中樞使) 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김은부(金殷傅), 어머니는 안산군대부인(安山郡大夫人) 경원이씨(慶源李氏)이다.
1018년 만 2세로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지고, 1022년 만 6세로 태자(太子)에 책봉되었다. 1031년 6월 현종 사후 16세로 등극하였는데 총명하여 즉위 후 곧바로 친정(親政)에 임(臨)하였다.
덕종은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압록강에 설치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없앨 것, 잡혀 있는 고려인의 송환 등을 요구하였으나, 요(遼) 흥종(興宗)의 거부로 곧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시켰다. 변경인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를 시켜 압록강에서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어지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빈발(頻發)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王可道, 李子琳)를 감수국사(監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修國史)로 임명하여 현종 때 시작한 국사 편찬 사업을 완성시켰다.
1034년 병석에 들었으나 후사가 없어 아우 평양군(平壤君, 靖宗)에게 양위하고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덕종에게는 3명의 왕후 2명의 후궁이 있었다. 제1비 경성왕후(敬成王后)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현종과 제8왕비 원순숙비(元順淑妃) 사이의 딸이다. 외조부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주국(柱國) 경조현개국남(京兆縣開國男) 김인위(金因渭)였다. 덕종과 경성왕후의 혼인은 이복남매간의 근친혼인데,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제2비는 경목현비(敬穆賢妃) 개성왕씨(開城王氏)인데, 중서령(中書令) 왕가도와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 김씨(金氏) 사이의 딸로 현종비 원질귀비(元質貴妃)의 동생이었다. 곧 왕가도는 큰딸을 현종에게 출가시키고, 작은딸은 현종의 아들인 덕종과 혼인시킴으로써 친자매간이 고부간(姑婦間)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현종과 덕종 사이는 부자간이되 또한 동서간(同壻間)이 되는 기이한 친속(親屬) 관계였다. 덕종과의 사이에 상회공주(殤懷公主)가 났으나 일찍 죽었다.
제3비는 효사왕후(孝思王后) 안산김씨로 현종과 원혜왕후(元惠王后) 김씨(金氏) 사이의 딸이었다. 이미 보았던 대로 11대 문종과 평양공 왕기(王基)의 여동생이었고, 남편 덕종과는 이복남매간이었다.
그밖에 후궁인 부여(扶餘) 출신 이씨(李氏)는 본관(本貫)이 미상인데 공부시랑(工部侍郎) 이품언(李禀焉)의 딸이었고 정종비 용목왕후(容穆王后)와 자매간이었다. 덕종과 정종이 친형제간이므로 후궁이씨와 용목왕후는 친자매간이 친형제간의 부인이 되어 서로 동서간(同棲間, 娣姒)으로 되었다. 또 궁인 충주유씨(忠州劉氏)가 있었는데 검교소감(檢校少監) 유총거(劉寵居)의 딸이며 기타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아니한다. 덕종과의 사이에 이름이 미상인 공주가 있었는데, 현종과 궁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난 검교태사(檢校太師) 왕충(王忠)과 혼인하였다. 이미 본 바처럼 왕충에게 덕종은 이복형이자 장인이었다. 덕종의 딸 이름 미상 공주와 검교태사 왕충의 혼인은 이복 숙부와 질녀 사이의 근친혼이었다.
고려 10대 정종(靖宗, 1018~1046), (재위:1034~1046)의 휘는 왕형(王亨), 자는 신조(申照) 또는 신소(申炤), 묘호는 정종(靖宗), 시호는 용혜대왕(容惠大王), 능호는 주릉(周陵)이다. 현종과 원성태후(元成太后) 안산김씨(安山金氏)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德宗)의 친동생이며 문종(文宗), 정간왕(靖簡王)의 이복형이다.
1022년(현종 13년) 내사령(內史令)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고, 1027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 겸 내사령(內史令)으로 벼슬에 올랐다. 1034년에 동복형 덕종이 죽자 그 유언으로 왕위를 이었다.
서경(西京)과 개경(開京)에 팔관회(八關會)를 열어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黃周亮), 최제안(崔齊顔), 최충(崔沖), 유지성(劉志誠) 등을 각각 예부(禮部), 이부(吏部), 형부(刑部),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임명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1035년 서북로(西北路) 함경도 송령(松嶺, 함흥 부근)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였고, 지금의 평안도 창성(昌城)에 성을 쌓아 창주(昌州)라 하고 백성을 이주하여 살게 하였다. 1036년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더 지급하여 변경의 방비를 맡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037년 압록강 일대에서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게 되자, 강화 회담을 체결하여 한동안 단절되었던 조공(朝貢)을 다시 바치기로 하여 거란과 화친을 맺었으며, 1038년부터는 거란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1039년 거란의 요(遼)나라 황제로부터 책봉교서(冊封敎書)를 받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몰래 백성들을 시켜 정변진(靜邊鎭)·숙주(肅州)·영원(寧遠)·평로(平虜)·장주(長州)·정주(定州)·원흥진(元興鎭) 등에 줄곧 성을 쌓게 하였는데, 1044년에 이르러서야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완공되었다. 문치(文治)의 면에서도 예학(禮學) 관련 서적을 간행토록 하여 그해에 〈예기정의禮記正義〉·〈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반포하였다. 또한 5역(五逆)·5천(五賤)·불충(不忠)·불효(不孝)한 자와 향(鄕)·부곡인(部曲人)·악공(樂工)·잡류(雜類)의 자손들의 과거(科擧) 응시를 금지, 박탈했다.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을 제정했다.
정종은 병이 위독해지자 이복동생 왕휘(王徽, 文宗)에게 국정을 맡겼다가, 이후 그에게 선위(禪位)하고 죽었다.
정종에게는 부인으로 4명의 왕후와 1명의 후궁이 있었다. 제1비 용신왕후(容信王后) 단주한씨(湍州韓氏)는 목종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한언공(韓彦恭)의 손녀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된 한조(韓祚)의 딸이었다. 1035년(정종 1)에 왕자 왕형(王詗)을 낳고 혜비(惠妃)가 되고, 이어 정신왕후(定信王后), 1048년(문종 2)에 용신왕후의 시호를 내렸다. 정종과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제2비 용의왕후(容懿王后)는 용신왕후와 자매간이다. 언니인 용신왕후가 죽은뒤인 1038년(정종 4)에 여비(麗妃)로 책봉되고 창성궁주(昌盛宮主)라 하다가 현덕궁주(玄德宮主)라 하였고, 1040년에 왕후로 봉하여졌다. 귀족 가문의 자매가 함께 한 임금의 비가 되는 사례는 고려에서 흔하였는데, 정종의 부왕인 현종 역시 김은부(金殷傅)의 세 자매를 비로 들였던 바를 앞에서 보았다. 정종과의 사이에 애상군(哀殤君) 왕방(王昉)·낙랑후(樂浪侯) 왕경(王璥)·개성후(開城侯) 왕개(王暟) 등 세 왕자를 두었으나 모두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고, 혼인 관계의 기록도 전하지 아니한다.
제3비 용목왕후(容穆王后)는 부여(夫餘) 출신으로 본관 미상 공부시랑(工部侍郎) 이품언(李禀焉)의 딸이었다. 정종과의 사이에 딸 도애공주(悼哀公主)를 두었으나 요사(夭死)하였다.
제4비 용절덕비(容節德妃) 경주김씨는 문하시중 김원충(金元冲)의 딸로 문종의 제5비 인목덕비(仁穆德妃)와 자매간이다. 정종과 문종이 이복형제간이므로 용절덕비와 인목덕비는 서로 친자매간이면서 시가(媤家)로 동서간(同棲間, 娣姒)으로 되었다. 이 김원충은 혹은 김인위의 아들인 것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신라(新羅) 원성왕(元聖王) 계통인 경주김씨 김인위는 딸 1명을 현종왕비로, 또 손녀 1명을 정종비로, 또 1명을 문종비로 들여 양대(兩代) 걸쳐 후비 3명을 배출환 세도가였던 셈이 된다. 후궁으로 연창궁주(延昌宮主) 노씨(盧氏)가 있었으나 본관과 가계 등이 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