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집 별집 제1권 / 시(詩) / 구고사 등서루 시운에 삼가 차운하다〔謹次九臯社登西樓韻〕
등서로 이 누를 이름한 것이 좋으니 / 好把登西號此樓
고사리를 캐 먹은 높은 절의 천추토록 함께하네 / 採薇高節幷千秋
두견새 우는 창밖에 달은 밝은데 원통함은 영원하고 / 鵑窻月白冤終古
은행나무에 봄이 돌아오니 이치가 어두움을 밝혔네 / 鴨樹春回理闡幽
숙종이 능을 축조하니 참으로 성대한 덕이요 / 肅考封陵眞盛德
충신이 능지를 읽으니 오히려 남은 근심 있었네 / 忠臣讀誌尙餘愁
물줄기에 백 자의 누각이 선 것은 무슨 까닭인가 / 臨流百尺緣何起
다만 선생이 옛날 노닐던 곳이기 때문일세 / 只爲先生此舊遊
[주-D001] 구고사(九臯社) :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도인봉 아래에 소재했던 사당으로, 서한정(徐翰廷, 1407~1490)의 위패를 모셨다. 영조 29년(1753) 창건 당시에는 구고서당이라 하였는데, 정조 10년(1786)에 구고사로 고쳤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7)에 훼철되었다. 서한정의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돈암(遯菴)이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달성에서 가족을 이끌고 소백산(小白山)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였다. 저서로는 《돈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주-D002] 등서로 …… 함께하네 : 원문 등서(登西)는 서산, 즉 수양산(首陽山)에 오른다는 뜻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는 것을 반대해서 간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노래하기를, “저 서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도다.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 그른 줄을 모르도다.[登彼西山兮, 采其薇兮. 以暴易暴兮, 不知其非兮.]” 하였다. 《史記 伯夷列傳》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위해 서한정이 절의를 바쳐 은둔한 것이 백이ㆍ숙제에 비견됨을 표현한 것이다.[주-D003] 두견새 …… 영원하고 : 두견새는 일명 자규(子規)라고도 한다. 세조(世祖)가 단종을 몰아내어 영월(寧越)로 연금(軟禁)시키면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降等)하였다. 단종은 영월의 자규루(子規樓)에서 두견새가 구슬피 울자 “달 밝은 밤 자규새는 구슬피 우는데 시름겨워 자규루에 기대노라. 네 울음 슬퍼 내 마음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이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사람에게 말하노니 부디 춘삼월에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月白夜蜀魄啾, 含愁情依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幕登春三月子規樓.]”라고 하였다. 즉 이곳에서 울던 두견새를 가리킨 것이다.[주-D004] 은행나무에 …… 밝혔네 : 원문의 ‘압수(鴨樹)’는 압각수(鴨脚樹)의 준말로, 은행나무의 별칭이다. 은행잎이 오리발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는 순흥의 읍내 중앙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말하는데,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던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죽고 고을이 폐해지자, 그 은행나무도 뒤따라 말라 죽어 온 고을 사람들이 비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興州) 고을이 폐해져서 은행나무가 죽었으니 은행나무가 살아나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하매, 고을 백성들이 그 말에 감개(感慨)하여 오랫동안 그 말을 전송(傳誦)해 왔는데, 1681년(숙종7) 봄에 비로소 은행나무에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계해년(1683)에 과연 흥주부(興州府)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梓鄕誌 順興誌 古蹟 鴨脚樹》[주-D005] 숙종이 능을 축조하니 : 1698년(숙종24)에 노산군(魯山君)의 위호(位號)를 회복하여 묘호(廟號)를 단종으로,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으로 한 것을 말한다. 《端宗實錄 附錄》[주-D006] 충신이 …… 있었네 :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 무인 10월 4일 조에,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신이 영월(寧越)에 있을 때 우연히 《장릉지(莊陵誌)》를 읽어 보았더니, 본릉(本陵)을 복위(復位)한 것은 지난 무인년 10월 28일이었는데, 신규(申奎)의 소(疏)로 인하여 그리하였습니다. 장릉의 화소(火巢) 안에 사육신(死六臣)의 창절사(彰節祠)가 있는데, 고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이천 부사(伊川府使) 박태보(朴泰輔)가 힘을 합쳐서 개수(改修)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소 안에 있는 사당을 옮겨서 건립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조가 승지들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지금 예조 판서가 아뢰는 것을 들어 보니, 단종[端廟]께서 복위(復位)하신 간지(干支)가 금년 이달 28일과 같다고 하므로 서글픈 심회(心懷)를 억누르기가 어려워, 마땅히 제문(祭文)을 친히 짓고, 대신(大臣)을 보내서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한다. 듣건대,
사육신의 창절서원(彰節書院)이 능침(陵寢) 동구(洞口)에 있다고 하는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수리 보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이미진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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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溪先生集卷之三 / 附錄 / 彰節祠請享疏略 祠在寧越○進士柳膺睦
伏以人臣盡節。死生雖殊。而其心則同。國家褒賢。前後或間。而其典則一。此殷之三仁。或死或生。而孔子幷稱之。宋之祀賢。有前有後。而理宗幷擧之。洪惟我國家列聖朝。褒忠奬節。靡不用極。而獨於寧越府彰節祠躋享之禮。猶有所未遑之典。此臣等所以始焉而疑之。終焉而慨之。繼之而有今日陳請之擧者也。奧在端廟遜位之時。伏節秉義之臣。有所稱死六臣生六臣者。皆足爲卓越千古之節。而臣等竊伏見魯陵事實。有曰。誓死同志。期會子規樓者。趙旋也。向日面壁。日拜朝暾者。李孟專也。坐臥必東。傾心越中天者。元昊也。游神越海。夢與白鷗飛者。成聃壽也。於乎。四臣之貞忠大節。其心則死六臣之心。而事之難處。反有甚焉。其跡則金時習,南孝溫之跡。而考之載籍。明如日星。宜其褒揚之典。腏享之禮。似無異同。而彰節祠死六臣列享之席。金時習,南孝溫。旣蒙陞配之典。而趙旅,李孟專,成聃壽,元昊四臣。則尙未有躋享之擧。玆豈非朝家數百年未遑之事乎。是以。正廟辛亥。以錦城,和義兩宗臣追配於本祠事。有敎若曰。錦城,和義外。亦多有不下於死六臣者。今於追配之時。一體施行。實合朝家褒奬之典。卽令內閣,弘文館。傳考公私文蹟以進。又命立生六臣傳。別下傳敎略曰。生六臣五宗英。危忠大節。咸推伯仲。有不可容易取舍於或配或否之際。則別求無於禮而合於禮之禮而行之。不亦可乎。又敎曰。禮緣於情。神人無間。不惟彼烈烈精靈之壹鬱不昩者永有依歸。恭惟莊陵陟降。亦必悅豫於苾芬焄蒿之時。是擧也。孰曰無稽乎。又於錦城賜祭文曰。讀魯陵志。不涕非人。死六生六。爲臣盡臣。純廟甲午。禮曹因幼學臣徐相說等上言回啓。略曰。生六臣趙旅,李孟專,元昊,成聃壽等追配於彰節祠事。四人之貞忠大節。與死六臣幷爲伯仲。而或生或死。雖有時勢之差異。其褒其奬。宜無彼此之各殊。況其同志六人中金時習,南孝溫。旣蒙陞配之典。而止四臣之不得幷享。非特有欠於朝家一視之澤。無怪齎鬱於多士公共之論云云。況四臣之一生心神。只在越中山川。則不昩精靈。亦必上下於蒼梧珠邱之鄕。而於彰節祠一體君臣之席。旣不與同志死六而幷享。又不與同節二臣而共配。則此非特志士之齎恨。抑亦爲朝家之欠典也。臣等。每伏讀正宗大王追配之敎。至於烈烈精靈。永有依歸。莊陵陟降。亦必悅豫等句。未嘗不三復感涕。而獨惜乎同節四臣之靈。徘徊於密邇之雲鄕。而不得依歸之所也。方今聖明在上。幽鬱畢闡。臣等裹足千里。相率呼籲於黈纊之下。伏乞聖明。特命有司之臣。生六臣中四臣。卽令追配於彰節祠。上以遂朝家未遑之典。下以循百世公共之論。批。省疏具悉。齊論容或其然。而追腏亦繫難愼。爾等諒此退去。